벨기에의 남부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북부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데 이 북부 지역을 네덜란드어로 플란데런(Vlaanderen)이라 하고 프랑스어로 플랑드르(Flandre)라 한다. 영어로는 플랜더스(Flanders)이고 <플랜더스의 개>로 널리 알려졌다. 그 강역은 시대에 따라 달라서 한때는 네덜란드 남부에서 프랑스의 북동부 일대를 통틀어 지칭하기도 했다. 중세 프랑스의 '플랑드르 백작령'에서 출발한 까닭에 역사에서는 프랑스어로 표기한다. 벨기에는 인구가 1천만 명 남짓이고 면적이 3만 528평방 km로 경상남북도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작은 나라가 세계 유수의 선진국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중세 후기 300년 이상을 유대인과 함께한 플랑드르의 역사가 있다.
벨기에
프랑스 왕국 동북부의 플랑드르 백작령 - 987년
플랑드르 백작령
플랑드르 백작령 (초록색) / 에노 백작령 (연두색) - 1200년
영불전쟁에 의한 영토 변화
적색 - 영국령 / 청색 - 프랑스 왕 직할령 / 녹회색 - 프랑스 제후령
십자군 전쟁 시기에 영국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학살이 이어졌고 많은 유대인들이 플랑드르의 브뤼헤(Brugge)로 도피했다. 북해에서 내륙으로 15km 들어와 있는 브뤼헤는 레이에(Leie) 강을 통해 선박 항행이 가능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영국산 양모를 내다팔면서 이탈리아에서 직조 기술을 들여와 모직물 제조업을 일으켰다. 플랑드르 백작령은 명목상 프랑스 왕국에 속했지만 실질적으로 독립국이었고 양모 무역으로 영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깊었다. 중세 후기에 오랫동안 계속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에서 플랑드르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싸웠다.
1290년 11월 영국은 유대인 1만 6천 명을 일시에 추방했다. 국왕과 귀족들이 유대인에게 진 채무를 무효화시키고 재산까지 몰수하려는 속셈이었다. 당시 북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은 제노바와 베네치아, 피사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브뤼헤에 정착해서 이탈리아의 유대인들과 통상을 시작했고 이후 브뤼헤의 모직물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1337년에 시작된 백년전쟁으로 정신 없는 틈에 부르군디(Burgundy)가 세력을 확장했다. 부르군디는 14세기 중반에 혼인을 통해 플랑드르 백작령을 합병하고 1380년대에 네덜란드 등 플랑드르 주변 지역을 합병했다. 부르군디는 중세 유럽의 박해 받는 유대인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1394년에 프랑스가 전국적으로 유대인을 추방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브뤼헤로 몰려왔고 이들에 의해 브뤼헤의 상권이 프랑스로 확장되었다. 브뤼헤는 한자(Hansa)동맹에 가입하였고 유럽 최대의 모직물 산업 도시로 번영하여 북방의 베네치아로 불리었다. 부르군디는 100년 동안 독립국으로 당당한 세력을 이루었으나 15세기 후엽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와 프랑스에 의해 분할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15세기 부르군디 영토
15세기에 들어와 레이에(Leie) 강 하구의 토사 퇴적으로 브뤼헤에 선박이 드나들 수 없게 되자 유대인들은 스헬데(Schelde)강 하류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앤트워프로 자리를 옮겼다. 브뤼헤는 쇠락하여 잠자는 중세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브뤼헤의 뱃길은 1907년에 다시 열렸고 지금은 중세의 면모를 간직한 관광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플랑드르에 인접한 네덜란드는 바다보다 낮은 땅에 별다른 자원이 없어 농사와 목축으로 살아왔는데 1425년부터 북해에 청어가 몰려들면서 수산업이 네덜란드의 주력 산업으로 성장했다. 네덜란드는 무진장으로 잡히는 청어를 손질한 뒤 소금에 절여 수출하느라 대량의 소금을 구입했다. 북유럽에서는 독일과 폴란드의 암염광산에서 채굴된 소금이 한자동맹 도시들을 거쳐 공급되고 있었다.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은 일조량이 풍부한 이베리아에서 천일염을 들여와 네덜란드에 공급했다. 천일염은 암염보다 품질이 우수하고 가격도 저렴해서 소금 시장에서 경쟁력이 우월했다. 유대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굵고 거친 천일염을 가공해서 입자가 잘고 때깔이 고운 신상품을 개발했다. 처음 보는 새로운 소금은 음식조리용과 식품첨가용으로 소비자를 사로잡았다. 유대인들은 천일염의 수입에서 가공과 유통까지 전 과정을 장악하여 북유럽의 소금시장을 제패했고 한자동맹은 서서히 쇠락해 갔다.
한자(Hansa)동맹의 도시들
북해 ~ 브뤼헤 운하
부뤼헤 도심의 운하
1492년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온 곳은 앤트워프였다. 이들은 숨겨가지고 온 보석으로 보석 장사를 시작했고 앤트워프는 국제 보석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다. 보석 중에 다이아몬드의 이익이 가장 많았다.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은 인도의 유대인 공동체와 협력하여 인도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수입해 가공했다. 인도는 기원전부터 세계 유일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이었다. 앤트워프에서 가공한 다이아몬드는 해외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를 통해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은 세계 다이아몬드의 채굴 - 수입 – 가공 – 수출 – 유통의 전 과정을 장악하고 있으며 앤트워프와 뉴욕이 그 중심지이다. 미국의 도시 중에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은 뉴욕이다.
1498년에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해서 향료를 싣고 1499년 9월 리스본에 돌아왔다. 가난한 포르투갈은 동양의 산물을 구입할 금이나 은이 별로 없었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동양에 수출할만한 상품도 없었다. 포르투갈이 우월한 것은 대포를 장비한 함선뿐이었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은 무역보다 약탈에 주력했다. 포르투갈은 유대인 추방으로 국내 상업과 국제 무역이 무너져 동양에서 싣고 온 향신료를 판매할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앤트워프로 찾아가서 유대인들에게 향신료를 넘겨주었고 유대인들은 험난한 대서양과 인도양을 항해하지 않고도 향신료 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스페인도 앤트워프의 유대인을 찾아왔다. 1516년 베네치아가 유대인 집단 거주 구역인 게토를 설치하고 해가 지면 출입을 금지했다. 이에 베네치아의 유대인들이 앤트워프로 몰려왔다. 1490년 앤트워프 인구는 2만 명이었는데 1500년에는 5만 명, 1560년에는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스페인과 베네치아에서 유대인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16세기 앤트워프는 유럽 최대의 무역과 금융 중심지였고 세계 교역의 절반이 앤트워프를 거쳐 갔다. 브뤼헤에서 시작하여 앤트워프에서 만개한 플랑드르 유대인의 번영은 1585년 스페인군이 앤트워프를 점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앤트워프(안트베르펜)
바스코 다가마의 인도 항해 1497~1498
리스본의 제로니모 수도원 - 바스코 다가마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포르투갈 식민지 -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식민지 - 16세기
향료제도 - 육두구와 정향의 유일한 자생지
육두구
향신료 - 두바이 시장
첫댓글 이광헌동기의 해박한 역사인식과 풍부한 자료로 고맙게 잘 배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