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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가신 예수님-밀양> (김영봉 목사)
"밀양으로 가라 (마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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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을 보기 전까지, 경상남도 밀양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것은 ‘밀양 아리랑’과 유서깊은 사찰 표충사 정도였습니다. 저에게뿐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밀양이라는 도시는 광주나 여수 혹은 마산 같은 상징성 높은 도시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뭔가가 느껴지는 그런 지명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뿐 아니라, 밀양의 역사나 전통이나 지역 정서가 이 영화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밀양이 고향인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좀 실망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제목을 보고, ‘한 두 가지라도 우리 고향의 자랑거리가 소개 되었으면……’하는 기대감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 영화의 제목을 <밀양>이라고 붙였을까요? 그 이유는 밀양이라는 도시의 ‘평범성’과 밀양이라는 지명의 의미 때문입니다. 밀양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신애와 종찬이 나눈 대화와, 영화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종찬과 신애의 남동생이 나눈 대화는, 감독이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두 장면을 연속해서 보시겠습니다.
첫 장면 5:30-6:54
두 번째 장면 2:09:16-2:10:00
밀양 토박이인 종찬에 의하면, 밀양은 다른 곳과 별로 다를 것 없는 곳입니다. “밀양이 어떤 곳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별스럽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신애는 ‘밀양’이라는 지명이 심상치 않다고 느낍니다. ‘비밀 밀’(密) 자와 ‘햇볕 양’(陽) 자를 합쳐 만든 이 지명은 ‘비밀 햇볕’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지역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곳, 그렇지만 비밀스러운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을 주는 곳, 그곳이 밀양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밀양’이라는 지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좀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어느 향토 학자에 의하면, ‘밀양’이라는 지명은 ‘밋양’에서 진화된 것이고, ‘밋양’은 ‘미의 양’이라는 말에서 진화되었다고 합니다. ‘미의 양’에서 ‘미’는 물을 뜻하고, ‘양’은 북쪽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밀양이라는 지명은 ‘물의 북쪽’이라는 뜻입니다. 밀양에는 ‘밀양강’이라는 강이 흐르는데, 옛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이 강을 ‘남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양은 ‘강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이 추론이 맞는다면, 감독은 확실히 ‘밀양’이라는 지명의 원래 의미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음에 분명합니다. 밀양의 역사, 유래, 전통, 정서 등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밀양이 다른 여늬 도시와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과, 감독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밀양’이라는 이름의 뜻만을 붙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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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햇볕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자동차 안에서 보이는 하늘의 모습을 15초 동안 비추어 줌으로써 시작합니다. 영화에서 15초면 매우 긴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햇볕은 환한 햇볕, 드러난 햇볕,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햇볕입니다. 신애는 바로 그 강렬한 햇볕을 찾아서 밀양으로 온 것인지 모릅니다. 구차한 자신의 삶에 햇볕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장 햇볕이 강한 도시로 찾아 왔는지 모릅니다. 오래된 유행가 가사처럼, ‘쨍 하고 해 뜰 날’이 오기를 열망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신애의 이 기대감은 처참하게 깨어집니다. 자신의 삶에 햇볕이 깃들기를 바라고 밀양으로 찾아왔는데, 오히려 어둠만이 더 깊어졌습니다. 아들 준을 잃고 살아가는 신애의 삶은 말 그대로 짙은 어둠입니다. 아들을 잃은 뒤에 집에 홀로 있는 신애는 언제나 짙은 어둠에 둘려 있습니다. 햇볕이 특별히 밝은 밀양이기에 신애의 어둠은 더욱 짙어 보입니다. 신애는 그 어둠을 벗어나고 싶어서 교회를 찾습니다. 교회에 첫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는 그 햇볕을 잡았다 싶었습니다. 밀양으로 찾아들면서 막연히 기대했던 그 햇볕을, 믿음을 통해서 잡았다 싶었습니다. 그 햇볕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금 역전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햇볕이 자신에게 깃들었다고, 행복한 표정으로 간증하고 다닙니다. 사실은 어둠 속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짐짓 햇볕을 받고 밝은 대낮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연극을 합니다. 그렇게 연극을 하다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어둠을 견디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신애는 아들을 죽인 범인 박도섭과을 면회하고 나서, 자신이 잡았다고 생각했던 그 햇볕에게 배신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신애가 자초한 일입니다만, 신애는 그것을 햇볕의 배신 즉 하나님의 배신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로부터 신애는 하늘과의 투쟁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과의 싸움에 몰입합니다. 어차피 자신의 어둠을 벗어날 수 없다면, 어둠의 세력과 합하여 싸워 보겠다는 심산입니다. 어둠으로써 빛을 이겨 보겠다고 몸부림을 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점점 거세지더니, 신애는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끊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합니다. 팔목의 혈관을 끊고 터질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보여, 보이냐구!”라고 울부짖는 신애의 몸부림은 하나님께 대한 최후의 결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싸움에서 신애는 제풀에 지쳐 항복하고 맙니다. 고통을 참다 못해 밖으로 뛰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살려 주세요”라고 사정하는 신애의 절규는, 마치 하나님께 대한 호소처럼 들립니다. “하나님, 제가 졌습니다. 이제 싸움을 포기합니다. 그러니 저를 한 번만 도와 주세요. 이제는 모른체 할께요”라고 말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신애는 정신병원을 다녀 오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립니다. 그 동안 연출하고 연기해 오던 연극을 끝내고, 현실로 내려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아들의 사진이 붙어있는 거울을 앞에 놓고도 담담히 자신의 얼굴을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가 주는 여운을 곱씹다 보니, 아무런 행운도 보장하지 않는 밀양을 신애가 이제는 진실로 사랑할 것처럼 보이고, 속물처럼 보이기만 했던 종찬을 결국 받아들이고 사랑할 것처럼 보입니다. 연극 무대에서 내려 오니, 이렇게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이 영화의 제목을 ‘밀양’이라고 붙인 이유를 잘 보여 줍니다. 그 장면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2:17:00-2:19:13
거울을 앞에 두고 앉은 신애의 모습은 서정주 시인의 그 유명한 시, ‘국화 옆에서’라는 시의 한 구절, 즉 “머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신애는 남편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 사망 후에 알게 된 남편의 외도로 인해 받은 배신감과 절망감, 밀양에서의 가슴 부푼 새출발, 그 꿈을 산산히 깨뜨려 버린 아들의 유괴와 살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했던 하나님과의 행복한 만남 그리고 그 희망을 짓밟아버린 하나님으로부터의 배신, 그리고 하나님과의 긴장감 어린 투쟁을 거쳐, 많이 지친 모습으로, 하지만 삶의 우여곡절에서 어느 정도 초연한 사람처럼, 거울 앞에 앉아 가을 국화처럼 하늘거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거울 앞에 앉은 신애의 등 뒤에서 내려쪼이는 햇볕은 신애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어 줍니다. 그 빛은 ‘비밀 햇볕’입니다. 영화가 시작될 때 차창 안에서 보던 그 밝고 눈부시고 강렬한 햇볕이 아닙니다. 하늘 가득히, 눈이 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볕이 아니라, 비스듬히 비추는 엷은 햇볕입니다. 신애가 밀양으로 이사할 때 마음 속으로 갈망했던 그 ‘비밀 햇볕’이 이제야 신애에게 깃듭니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신애가 ‘비밀 햇볕’을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여정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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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햇볕’, 빗물에 밀려온 오물과 찌그러진 약품 통이 버려져 있는, 낮고 추하고 더러운 곳을 은밀하게 비추는 햇볕?바로 이것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려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우리 인생에 “쨍 하고 해 뜰 날”을 기다리지만, 그 햇볕은 어쩌다가 우연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깃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늘 비추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햇볕은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곳, 오히려 낮고 추하고 더러운 곳을 더 빽빽히 비춘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햇볕은 우리를 꿈 같은 세상에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태롭고 초라하고 힘겨운 현실을 끌어 안도록 해 준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햇볕은 우리가 열렬히 추구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머물러 기다릴 때, 우리에게 깃든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참된 구원을 찾는다면, 비밀 햇볕을 찾아 밀양으로 내려가라.” 참된 구원을 주시는 비밀 햇볕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밀양, 썰렁하고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은 신애의 집,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본, 햇볕이 내려 쪼이는 하수구는 우리의 현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초라한 현실을 대면하고 끌어안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어깨에 내려 앉아 따뜻하게 덥혀 주는 비밀 햇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해 주시는 세 가지 말씀 중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영적 생활의 방법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이 세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이 구제하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했고,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싶어 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 비판하시면서, 예수님은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혹은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혁명적인 신관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숨어계시다니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숨박꼭질을 하고 계시다는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일부러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그분은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육적인 존재로서 물질에만 익숙해 있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그분은 숨어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숨어계시는 분’ 혹은 ‘은밀하게 계시는 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숨어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이 바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비밀 햇볕’의 상징입니다. 예수께서 드러내신 하나님은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햇볕처럼 일하시기보다는 신애의 등 뒤에서 비추는 비밀 햇볕 같이 일하시는 분입니다. 조용히 머물러 있을 때, 등 뒤로 와서 우리의 어깨를 따뜻하게 비추시며 감싸시는 분입니다. 격렬하게, 뜨겁게, 극적으로, 찬란하게, 눈부시게, 화려하게, 결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온화하게, 따뜻하게, 드러나지 않게, 차분하게, 눈에 뜨이지 않게,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활동하시는 분입니다.예수께서 드러내신 하나님은 현실을 탈피하여 꿈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만의 별세계를 지어놓고 그곳으로 도피하려는 잘못을 범하곤 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행동은 그들이 섬기는 신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과 다른 존재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신 하나님은 천국만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에서 도피하거나, 이 땅에 우리들만의 천국을 지어놓고 살아가거나, 환각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 현실에 임하는 비밀 햇볕의 힘을 발견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초라하고 권태롭고 절망적인 현실을 역전시키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요 17:15).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현실로 들어가 그 현실을 천국으로 바꾸는 데 있지, 현실을 떠나 천국으로 도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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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신애가 하나님과 투쟁하는 중에 어느 공원에서 열리고 있던 부흥 집회를 방해하는 장면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보면 아주 고소해 할 장면이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보면 아주 쓰디쓴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1:45:26-1:48:30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노래가 들립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이 노래는 마치, 하나님도 거짓말, 성경도 거짓말, 구원도 거짓말, 사랑도 거짓말, 교회도 거짓말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기도 중에 이 노래가 들리자,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제각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소음이려니 생각하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기도를 계속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노래 소리에 귀가 솔깃하여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이 다 거짓말이라는 뜻인가?”라는 표정을 짓습니다.어떤 사람은 사탄의 유혹이다 싶은지, 목소리를 크게 높여 기도 함으로 노래 소리를 제압하려고 합니다. 이 장면이 제게는, 믿는 사람들이 끊임 없이 듣게 되는 내면의 소리를 상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숨어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믿는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분명한,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있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고후 5:7). 그런데 우리는 육신을 입고 물질 세계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만져지는 것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또한 그 본질이 ‘미혹하는 자’인 악한 영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기회를 노립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 마음에서는 늘 김추자씨의 이 노래가 들립니다.
믿음이 좋아 보이는 목사에게도, 헌신과 희생으로 단련된 장로님에게도, 기도를 많이 하시는 권사님에게도, 최근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가슴이 따뜻한 집사님에게도, 얼마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초신자에게도, 그리고 이제 막 하나님을 믿어볼까 저울질하고 있는 구도자에게도, 이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그냥 소음이겠거니 하고 무시하고 지날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그 노래 소리에 솔깃해지기도 합니다. “거짓말이 아닐까?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짜일까?” 신애가 말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조차도 다 믿지 않는” 우리이기에 이 노래 소리에 때로 솔깃해 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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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두 사람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은, 얼마 전 사적인 편지들이 공개되어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입니다. 그의 편지를 묶은 책 <Come Be My Light>을 보면, 숨어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강렬한 믿음을 읽을 수 있는 한 편,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번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신부님, 49세 혹은 50세쯤부터 이 고통스러운 상실감, 말할 수 없는 이 어둠, 이 고독감, 하나님께 대한 이 지속적인 갈망, 이것이 제 마음 깊은 곳에 아픔을 주어 왔습니다. 어둠이란 제가 진실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으로도, 제 이성으로도. 제 영혼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제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갈망으로 인한 고통은 그렇게도 깊은데, 저는 그저 바라고 또 바랄뿐, 그것이 제가 느끼는 전부이고, 그분은 저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저는 자주, 제 마음이 ‘내 하나님’하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습니다만, 아무 응답도 오지 않습니다. 제가 말로 묘사할 수 없는 고문과 고통만이......”
또 한 사람은 20세기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라고 불리는 C. S. Lewis입니다. 그는 오래도록 신봉하고 있던 무신론을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고전 외에, 심오한 글을 많이 남겼습니다. 독신으로 살던 Lewis는 늦은 나이에 조이(Joy)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Lewis를 만나기 전부터 조이는 암과 투병하고 있었는데, Lewis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감행하고 몇 년간 행복하게 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었던 Lewis는 아내를 치료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으로서는 손을 써 볼 수도 없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보내고 난 후, 그는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Lewis는 한 동안 자신을 짓눌러 온 하나님께 대한 의문에 대해 이렇게 술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꽝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러고 나서는, 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빈집인지도 모른다. 누가 살고 있기나 했던가? 한 때는 그렇게 보였다. 그 때는 꼭 누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정말로 빈집 같다. 지금 그분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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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성자라고 추앙받던 캘커타의 테레사도,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꼽히는 C. S. Lewis도, 때때로 내면에서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혹은 믿기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항상 이 노래가 들리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조건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는 ‘숨어계시는 분’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밀 햇볕’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정하자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는 것이 비밀 햇볕이요, 숨어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과연 비밀스럽다고 하여 햇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숨어계시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 마지막으로 한 장면을 더 보고 싶습니다. 신애가 약국 김집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1:01:50-1:04:05
김집사가 햇빛이 은밀히 깃드는 곳을 가리키며, “저 빛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있어예”라고 말하자, 신애가 그곳으로 걸어가서 대답합니다. “여기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그냥 햇빛이에요, 햇빛. 뭐가 있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곳에 비밀 햇볕이 깃들어 내려 쪼이고 있는데, 신애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그 동안 그토록 갈망해 왔던 비밀 햇볕이 그곳에 있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비밀 햇볕은 이렇듯 알아차리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비밀 햇볕을 온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할 때, 그 사람을 설득시킬 방도가 마땅치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비를 주신다”(마 5:45). 비밀 햇볕과 같은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아니,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들을 감싸고 계시며, 비추어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빛을 온 몸으로 받고 살아가면서도,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하느냐?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믿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마땅한 방도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도 신애처럼 거울 앞에 머물러 앉아 따사로운 하나님의 햇볕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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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예수께서 드러내신 그 하나님, 숨어계신 하나님, 낮은 데로 임하시는 하나님,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나 조용히 머물러 있으면 우리의 존재를 감싸시는 하나님, 우리를 환각과 환상 속으로 도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 안으로 들어가 대면하고 끌어안아 그 현실을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때로 의문도 생기고 의심도 생기지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으로 살아가기 위해 힘쓰십시다. 숨어계신 것처럼 보이는 그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햇볕이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 쪼이고 있습니다. 그분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우리의 현실을 끌어 안고 살아가십시다. 분명, 그 비밀 햇볕은 우리의 삶을, 밑으로부터, 속에서부터, 표시나지 않게, 조금씩 그러나 틀림없이, 바꾸어 줄 것입니다.
혹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이 하나님을 믿기에 주저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신애처럼,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은총을 힘입어 오늘까지 살아 왔으면서도, “아무 것도 없다. 신(神)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 거짓말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보실 때는 하나님을 믿는 저같은 사람이 속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만, 정말 누가 속고 있는 것인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햇빛처럼 너무나도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에 없는 것처럼 보이고,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뿐입니다. 신애처럼, 거울 앞에 물러 앉아, 문득 은밀하게 어깨 위를 내려 쪼이는 햇볕의 온기를 느끼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려 태양의 존재에 눈을 뜨는 것같은 은총의 순간이 여러분에게 속히 찾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
낮은 곳에 임하시는 하나님,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존재를 내려 쪼이고 계신 하나님,
저희 존재를 주님 앞에 엽니다.
저희도 조용히 거울 앞에 서게 도와 주소서.
저희도 조용히 머물러 앉아 주님을 기다리게 도와 주소서.
거짓말 같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감으로
거짓말 같은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거짓말처럼 들리는 믿음의 길에서 완주하여
진짜같아 보였던 모든 것이 소멸할 때
거짓말 같아 보였던 영원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3) "거울을 들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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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은 어느 모로 보든 남녀간의 러브 스토리라고 보기 힘들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포스터는 마치 러브 스토리인양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화 포스터에 “동그라미처럼, 그가 그녀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는 문구(카피)도 보이고, “이런 사랑도 있다……”라는 문구도 보입니다. 신애의 남동생이 밀양 역전에서 “사장님은 누나의 타입이 아니예요”라는 말을 종찬에게 던지고 가는데, 관객인 우리가 보아도, 시골 노총각 종찬은 세련된 서울 색시 신애에게는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종찬은 늘 신애 옆을 맴돕니다. 신애를 향한 종찬의 사랑이 이야기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남녀간의 러브 스토리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사람의 애정보다는 신애의 아픔과 치유 과정이 더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종찬이 신애에게 주고 있는 사랑의 성격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애에 대한 종찬의 사랑은 왠지 연애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그런 사랑과 달라 보입니다. 물론, 종찬은 신애를 이성으로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사랑은 이성을 향한 정염을 훨씬 초월하는, 뭔가 더 순수하고 더 온전하며 더 차원 높은 감정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물어 봅니다. “왜 감독은 이 영화를 ‘러브 스토리’로 부각시키려는 했을까?” 열 사람이면 아홉은 “이건 러브 스토리가 아니잖아?”라고 반문할 것이 뻔해 보이는데, 감독은 왜 굳이 러브 스토리로 선전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이성 간의 사랑보다 더 근원적인, 참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혹시, 남녀간의 사랑이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든, 친구 사이의 사랑이든, 그 모든 사랑이 지향해야 할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진실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영화 포스터에 내세운 문구(카피) 즉 “이런 사랑도 있다”는 문구는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고 살아가고 있는 당신, 혹시 이런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는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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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찬이라는 사람은 참 신기한 인물입니다. 그는 신애가 말하듯 ‘속물’입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해 아무 개념이 없습니다. 카센터 사무실에 다방 여종업을 불러 희롱하는 일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신애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피아노 콩쿨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가짜 상패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손수 피아노 학원 벽에 걸어 줍니다. 신애가 “이게 뭐예요?”라고 묻자, 종찬은 “이런 것쯤 하나 걸려 있어야 소문이 쫙 나 가지고, 아이들이 많이 찾아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신애를 따라 교회에 나간 다음에 종찬이 하는 행동은 더 재미있습니다. 교회에 나가자 마자, 종찬은 주차 안내를 자원합니다. 원래 교회 봉사는 이렇게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 잘 하는 법입니다. 어느 날, 엉터리로 주차해 놓은 차를 보고는 쩔쩔 매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깔은 터져 나오고, 교회 앞이니 그 성깔 대로 하지는 못하고……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실까요?
1:14:36 to 1:15:24
자기도 모르게 쌍 시옷이 터져 나옵니다. 다른 데 같았으면 차를 몇 번 걷어 찼을 텐데, 지나가는 교인들 눈을 의식하고는 몸만 비비 꼽니다. 그러다가 아는 선배가 와서 차를 몰고 사라지자, “언제, 소주 한 잔 사 주실랍니까?”라고 인삿말을 던집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애가 밀양 역전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전도하는 전도대에 참여하자, 종찬도 거기에 가세합니다. 술친구들이 찾아와 그 모습을 보고 조롱을 하는데, 종찬은 아무 개념없이 친구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며, “담배, 이기, 왜 이리 맛있나? 오늘따라 억수로 맛있네!”라고 말합니다.
신애가 하나님께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동안에도 종찬은 꾸준히 교회에 다닙니다. 잠시 누나를 보러 내려왔던 신애의 남동생이 차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보고, “아직도 교회에 나가세요?”라고 묻습니다. 그 때, 종찬이 하는 말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그 장면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2:09:16 to 2:10:20
이렇듯, 종찬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특별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도덕적 관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밀양으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신애가 “’밀양’이라는 말의 뜻이 뭔지 아세요?”라고 묻자, 종찬은 “뜻예? 어디 우리가 뜻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기지예!”라고 답하는데, 그것이 종찬의 인생관처럼 느껴집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뜻’이니, ‘구원의 확신’이니, ‘제자도’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거의 습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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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쁘게 보려 해도, 종찬이 미워 보이질 않는 겁니다. 종찬이 걸어 준 가짜 상패를 모른척 그대로 걸어 두고 있는 신애의 내숭은 얄미워 보이는데, 가짜 상패를 걸어주고 있는 종찬은 미워 보이지 않습니다. 남의 아픔에 함부로 끼어들며 “신애씨같은 불행한 사람은……”이라고 말하는 약국 김집사의 행동은 우리를 낯 뜨겁게 만들고, 신애의 유혹에 부질없이 넘어가는 약국의 강장로도 우리를 고발하는 것 같은데, 종찬의 행동은 가식이라거나 허위라거나 위선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여워 보일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에게 더 좋은 대답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종찬의 정직함과 순진함과 진실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종찬은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믿는 것, 자신이 느끼는 것,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진실했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볼 꿈도 꾸지 않습니다. 신애가 자신을 향해 ‘속물’이라고 쏘아 붙여도, 저항하거나 화내지 않습니다. 속물이면 어떠냐는 식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입니다. 남들 앞에서 “하나님 믿는 것이 꼭 연애하는 기분이예요”라고 달뜬 표정으로 전도하는 신애의 가식과는 달리, 종찬은 교회에 나가는 이유에 대해서도 솔직합니다.
이같은 투명성(transparency), 정직성, 순진성 그리고 진실성이 종찬을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종찬의 모습이 이상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보아도, 종찬에게는 좀 더 많은 발전이 필요합니다. 도덕 관념도 좀 생겼으면 좋겠고, 교회에 나가는 이유도 점점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신앙 생활이 깊어져 가면서, 다방 아가씨에게 희롱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도 느꼈으면 좋겠고, 쌍 시옷 언어들을 점점 어색하게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종찬은 이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럽습니다. 도무지 연극할 줄을 모르는 사람, 꾸밈과 가식이 없는 사람, 자신의 무식과 교양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생긴 모습대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화 속에서 종찬은 항상 신애 옆에 혹은 뒷 자리에 서 있는데, 그것이 마치, 연극에 빠져 살고 있는 신애와 현실에서 살고 있는 종찬을 대비해 주려는 의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또 하나, 종찬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그의 일관된 헌신과 사랑 때문입니다. 신애를 향한 종찬의 일관된 사랑에는 어떤 불순한 의도가 없습니다. 계산도 없습니다. 사실, 종찬이 신애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연애 기술에 있어서 낙제생에 속하는 제가 보더라도 참 딱해 보입니다. 40줄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노총각으로 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뻔히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 없이, 아무런 전략도 없이, 그냥 무조건 주변에서 맴도는 것만으로 한 여인의 마음을 사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종찬은, 아무리 밀어내고 외면해도, 배알도 없는 사람처럼 또 다시 헤헤 거리며 신애 앞에 나타납니다.
이 영화가 러브 스토리를 표방하는데, 결코 러브 스토리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싶습니다. 종찬의 사랑은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바치는 이성적 사랑 치고는 특별합니다. 그의 사랑의 목적은 신애를 품에 안는 것을 넘어 서 있습니다. 신애가 행복해지는 것, 오직 그것에만 있습니다. 만일, 신애가 다른 남자를 만나 좋아지게 되면, 그리고 종찬이 보더라도 그 남자가 자신보다 더 나은 남자인 것처럼 보이면, 그는 아쉽지만 물러서서 “행복하게 사시지예!”라고 말할 사람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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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참된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교회 목사도 아니고, 전도의 열심으로 충만한 약국 김집사도 아닙니다. 도덕 관념도 희박하고, 제 앞 가름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 종찬, 바로 그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그 한 모델을 보여 줍니다. 종찬이 보여주는 사랑은 아무 조건 없이, 그 어떤 일에도 굴함이 없이, 일관되게, 계산 없이, 오직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나를 내어 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동시에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의지와 감정을 존중하며, 그가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사랑입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종찬은 신애와 늘 어느 정도의 공간을 두고 떨어져 있습니다. 종찬은 신애에게 무엇도 강제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그대로 하게 내버려 둡니다. 그 모습을 두고 지켜 보다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가까이 다가갑니다. 마음 같아서는 신애의 영역으로 넘어가 모든 것을? 대신해 주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줄을 압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돕는 것도 아님을 압니다. 그 거리를 유지하고 기다리는 것으로 인해 애간장이 탑니다만, 언제나 그 거리를 유지하며 신애 곁을 맴돕니다.
종찬의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종찬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는 동안, 제게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기 보다는 ‘어리석은 아버지의 비유’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정서를 감안해 보면,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나에게는 아버지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설득하다가 지쳤는지, 둘째 아들 몫의 유산을 떼어 줍니다. 그 아들은 유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멀리 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거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 때 이 아들은 제 정신이 들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 아버지께 돌아가서 사죄라도 하고 죽자”라는 심정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탕자가 생각했던 worst senario는 아버지에게 맞아 죽는 것이고, best senario는 아버지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오고 있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반겨 맞아 줍니다.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 주고, 신발을 신겨 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도대체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아는 옛날 아버지들 같았으면, 유산을 나눠 주지도 않고 내쫓았을 것이며,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는 작대기를 들고 달려가 쫓아 버렸을 것입니다. 아들을 쫓아 보내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면사무소로 가서 아들을 호적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아버지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주 이상한, 매우 어리석은 아버지상을 이 비유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일관되어 변함이 없고, 기다릴 줄 알며, 간섭하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행하도록 버텨주는 사랑입니다. 심지어, 타락하고 실패하는 것까지도 참아가면서 지켜 보고, 그 모든 것을 통해 성숙하고 자라고 회복되기까지 버텨주는 사랑입니다. 때로, 받은 상처로 인해 고통 당하는 것을 보면서 함께 아파하며 그 고통의 기간을 버텨 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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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은 종찬을 이상적인 인물로 제시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를 통해 암시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닮았는지요!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을 어쩌면 그렇게도 빼어 닮았는지요! 이감독에게는 특별한 종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런 사랑만이 신애가 당한 것과 같은 깊은 상처를 치유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신애는, 남편을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잃은 깊은 상처를 어떻게든 빨리 치유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신애로서는 그 아픔이 너무 커서 그대로 안고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치유 집회에도 찾아갔고, 그래서 잠시 잠깐 찾아온 정서의 변화를 하나님의 치유로 성급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상처의 치유에 대해 신애가 알았어야 할,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상처의 치유에는 그만한 시간과 아픔이 따른다는 진리입니다. 그 시간을 줄일 방도가 별로 없고, 그 고통을 줄여줄 방도가 별로 없습니다. 그 고통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나밖에는 아픔을 당할 사람이 없고, 그 고통을 줄일 다른 방도가 없으며, 그 고통은 충분한 시간을 지나야만 치유됩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옛날 유행가의 가사는 참으로 통속적으로 보이지만, 정신과 의사들이 하나같이 이 진리에 동의합니다.
최근에 베스트셀러로 많이 읽힌 <인생수업>이라는 책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처입은 사람들과 함께 지낸 경험을 토대로 하여, 저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시간이 그 모든 것[상처]을 치유하리라는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치유의 과정이 언제나 직선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프의 상승선처럼 빠르고 분명하게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치유의 과정은 롤로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히 자신을 회복해 가다가도 갑자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역행하는 것 같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치유의 과정입니다. 결국 당신은 치유될 것이며, 온전한 자신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그 상처를 치유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의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당신이 잃어버렸다고 슬퍼한 사람이나 사물이 결코 당신에게 소유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88쪽)
따라서 상처 입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은 그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함께 견뎌주는 것입니다. 종찬이 신애에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사람의 고통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아픔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약국의 김집사는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상처받은 사람을 돕는 일에 아주 서툰 사람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자주 그런 잘못을 범합니다. 안타깝지만, 그 사람이 아파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 버텨 주는 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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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상처의 치유에 있어서 믿음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생활은 마음의 치유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영적 생활이 자신의 상처를 잊기 위한 노력이 되며, 당해야 하는 아픔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 되면, 그것은 오히려 치유를 늦출 뿐입니다. 영적 생활은 우리에게 그 반대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영적 생활은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도록 도와 주며, 상처로부터 오는 아픔을 끌어 안고 견딜 영적 힘을 제공해 줍니다. 또한, 영적 생활을 통해 우리는 지금 당한 상실과 상처로 인해 우리의 생애가 끝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상실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실과 상처에 붙들려 과거의 포로가 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해 갈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치유의 기간을 뛰어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아픔을 면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은 신앙은 상처를 당했을 때 무심하게 견뎌내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지요! 그것은 마치 칼에 손을 베이고는, 기도로써 그 상처가 빨리 아물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이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치유하십니다.
진리는 때로 잔인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다 당하는 상실과 상처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순식간에 상처를 치유받고 아픔을 면제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랬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겠습니까? 하지만 진리는 또한 자비롭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과 하루 하루 동행해 나가면, 우리는 상처가 치유되는 동안 그 아픔에 짓눌리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대면하고 아픔을 끌어 안을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받은 상처 이상의 것을 보며, 우리가 당하는 아픔 이상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시편 저자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119:71)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의미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 많은 것을 압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여운 치고는 너무 모호한 여운을 남겨 주는 것 같습니다. 그 장면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2:16:50 to 2:18:30
이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신애의 앞날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신애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생에 대해 홀로 그리고 스스로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여자가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새로운 마음으로 뭔가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머리를 자르는 신애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될 것처럼 보입니다. 셋째, 거울을 본다는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애가 보고 있는 거울의 왼쪽 아래 구석에 작은 사진이 꽂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죽은 아들 준의 사진입니다. 그런데 신애는 더 이상 그 사진에 붙들리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보고 머리 손질을 합니다. 그만큼 치유되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때 종찬이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넉살 좋은 웃음을 웃으며, “내가 들어 줘도 되겠지예?”라고 말하고는, 거울을 들고 신애의 얼굴을 비추어 줍니다. 신애는 자세를 고쳐 앉아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종찬의 사랑, 종찬의 도움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와 감정을 100% 존중하면서, 늘 옆에 서서 도울 것이 없는지를 찾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신애가 강 장로를 유혹하다가 실패하고는 종찬의 집으로 찾아와 망가지려고 할 때, 종찬은 딱 한 번,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역정을 냅니다. 하지만 종찬은 신애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자신을 스스로 볼 수 있도록 앞에서 거울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사랑이 있기에 신애는 아직까지 생을 붙들고 있었고, 앞으로 회복될 희망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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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입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회복할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지금 마음의 깊은 상처로 인해 고통받고 계십니까? 혹시, 과거에 받은 상처 때문에 아직도 아픔을 겪고 계십니까? 이미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문득 문득 시뻘건 상처가 그 모습을 드러내어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까?
영적 생활로써 얻는 믿음의 능력을 통해 여러분의 상실과 상처를 인정하고 대면할 힘을 얻기 바랍니다. 믿음의 능력으로써 그 아픔을 적극적으로 끌어 안고 견딜만한 영적 힘을 얻기 바랍니다. 믿음의 능력으로써 인간적인 상실 이상의 세계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포로가 아니라 미래의 전사로서 전진해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리석은 아버지’같은 하나님께서, 마치 고통을 겪고 있는 신애를 저만치에서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며 견뎌주는 종찬처럼, 여러분이 고통을 겪는 과정을 아픈 가슴으로 지켜 보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또한 상처입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부모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고, 자식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배우자를 사랑하는 법에 대해서도 우리는 무지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감정적이고, 변덕이 심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 조급하여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내 뜻대로 상대방을 주조하는 것을 사랑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라는 허울을 쓴 욕심이요 폭행입니다.
사랑하되,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행하는 사랑! 사랑하되 내 욕심이나 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 행하는 사랑! 상대방에게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해로와 보여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알아서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거리를 지키고 지켜 보는 사랑!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시행착오를 함께 견디며 기다리는 사랑! 상처를 당하여 아픔을 겪을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곁에서 버텨주는 사랑!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설 때, 그 사람이 스스로를 잘 볼 수 있도록 앞에서 거울을 들어주는 사랑! 이 사랑을, 우리는 얼마나 압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는 우리는 과연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압니까? 이 영화는 종찬을 통해 믿음이 좋다고 자부했던 우리 모두에게, “당신들은 이런 사랑이 있음을 알고나 있습니까? 당신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랑으로 상처 입은 영혼을 한 사람인들 버텨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버텨 준 일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가 정직하게 응답하고 깨어나지 않으면, 우리도, 양 손을 앞으로 내밀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낯 간지러운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예배당 밖에서 홀로 고통스러운 씨름을 하게 내버려 두는 잘못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왠지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배당 밖에서 종찬과 함께 계신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사랑의 주님,
저희가 사랑을 모릅니다.
저희가 사랑에 무능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행하게 하소서.
오 주님,
저희로 진짜가 되도독
도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