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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5:1-29절) 부흥의 걸림 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심령부흥은 가장 놀라운 축복인데, 우리가 이것을 소홀히 하면,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심령부흥의 역사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순수한 복음을 조금도 가감(加減)없이 담대하게 전하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고,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성공리에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갔을 때, 이 부흥의 불길을 완전히 꺼버리려는 강한 사탄(詐誕)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할례도 받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 사도에 의해 직접 파송된 자라면서 바울의 복음을 형편없고, 가치도 없는 것으로 폄하(貶下)하며, 교인들의 신앙을 흔들었습니다.
그로써, 바울의 1차 복음을 전했던 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믿는 자들의 신앙이 크게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할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의 멍에를 다시 메는 것이요, 부흥의 불길을 꺼트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음 안에 어떤 인간적인 생각과 사상(思想)을 첨가(添加)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순순한 복음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력과 신앙이 병(病)들기 시작하면서 부흥의 불이 꺼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안디옥에서 유대교를 믿는 자들과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즉 유대교를 믿는 자들 중, 강경한 자들은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바울과 바나바는 오직 예수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필요가 없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최초로 종교 회의로까지 가게 되었고, 이 회의에서 사도들은 예수 믿는데, 다른 어떤 조건도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선교와 부흥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를 수 있었습니다.
Ⅰ.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15:1-2절)어떤 사람들이 유대교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 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 하니라.”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유대교도 믿으면서 또한 예수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이미 할례를 받은 상태에서 예수를 믿으면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도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도 지키고. 예수도 믿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할례 받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전했는데, 이방인들은 그것을 믿고, 성령을 받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기준은 사도 바울이 개종시킨 사람들은 이방인 그대로였습니다.
즉 예수를 믿긴 믿되 할례도 받지 않고, 모세의 율법도 지키지 않는 이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한 편 갈라디아 지방과 안디옥에 전통적인 유대교식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출현하게 시작합니다. 이들은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우선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킨 후에 예수를 믿어야 이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갈라디아서를 보면, 이 문제가 매우 심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람들은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갈1:7절)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면서 1:8절)...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또 이것이 안디옥 교회에서는 베드로까지 문제의 대상이 됨으로서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해서 이방인 교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교제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강경파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베드로를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은 야고보 사도가 파송하여 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야고보 사도가 보낸 것이 아니라, 그들 임의대로 야고보 사도의 이름을 도용(盜用)해서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 사람들의 공격이 두려워서 더 이상 이방인 신자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베드로의 이런 행위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복음에 따라서 바르게 행동하지 않느냐? 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를 성공리에 끝내고 돌아왔을 때,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가 크게 불거지자, 결국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 판결을 위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 것은 성경 진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 진리에 오류가 생기면, 아무리 부흥이 일어난다 해도, 사탄(詐誕)의 공격 한 방이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전3:12-15절)사람들이 집을 짓는데, 어떤 사람은 금(金)이나 은(銀)이나 보석(寶石)으로 짖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었습니다. 불이 났을 때,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모든 것이 다 타버려 남는 것이 없지만, 금(金)이나 은(銀)이나 보석(寶石)으로 지은 집은 그대로 남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眞理)입니다. 오직 아무것도 가미(加味)되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진리(眞理)만이 이 무서운 사탄(詐誕)의 불 시험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Ⅱ.기독교의 갈림길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을 때, 무조건 예수만 믿으면 되느냐? 아니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는 문제는 사람들끼리 해결 할 수 있는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마 모세 같으면, 이런 문제가 나왔을 때,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이런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옳습니까?* 라고 묻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답을 사람들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도들은 함께 모여 서로 의견(意見)을 나누는 중,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구약 방법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사도들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지 않고, 자신들의 의사(意思)로 결정했을까? 이것은 이미 우리 믿는 자들 중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해결하기 어려운 어떤 문제나 고통에 직면했을 때,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대화(對話)하는 중에 성령님께서 무엇이 올바른 하나님의 뜻인지? 지혜를 주셔서 분별하게 하십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吟聲)을 직접 들어야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중요한 일에 있어서 우리를 제외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외인(外人)이 아니요, 그의 자녀(子女)요, 주인공(主人公)이기 때문입니다.
15:4-5절)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지금까지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은 모두 유대교 안에 있었 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자기 멋대로 복음을 해석해서 값비싼 엉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내었고, 이방인들이 믿기 쉽도록 이상한 신앙을 전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연구(硏究)했고, 그 결과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얼마나 값치고, 엄청난 것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은 몽땅 지불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죄를 다 용서 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은 사도 바울이 구원을 너무나 값 싸게 만들었다고 비난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의 가치(價値)를 우리가 제대로 믿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유대교를 믿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신자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려면, 우선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된 후에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것은 완전힌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15:10절)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여기‘종의 멍에’란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상태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 합니다. 즉 구원 받지 못할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곧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구원 받은 자로서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기도하고,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노예적인 순종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거나 혹 심판 받는 것이 두려워서 신앙생활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해서 무언가 하나님을 위해 자진(自進)해서 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이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었던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느냐? 아니면 새로운 신앙 세계를 향하여 출발하느냐? 는 선택의 귀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오던 현실의 끈을 끊어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찬송가 46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우리는 이 배(船)의 사공 되신 살아 계신 주님만 믿고, 저 미지의 세계(天國)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큰 풍랑을 이 배(船)를 위협하고, 저 깊은 파도가 입 벌리고 달려드나, 우리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 유대교는 가장 확실해 보였지만, 실패(失敗)했습니다. 결국 로마와의 전쟁(戰爭)으로 멸망(滅亡)하고 말았지만, 기독교는 부흥의 부흥을 더 하여 전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Ⅲ.예루살렘의 결정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아니면 받지 말아야 하느냐? 는 문제는 예루살렘 회의에서도 상당한 논란과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형제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회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진통 끝에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때 전체적인 의논 방향을 제시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15:6-11절)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말합니다. 우선 할례를 받지 못했던 고넬료와 그 집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할례 받지 못한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하나님은 할례 자와 무 할례 자를 전혀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과연 우리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켰지만, 그것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아니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할례가 유익하고, 모세의 율법이 중요해도 우리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더 중요한 증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의 마음을 깨끗케 하시고, 은혜로 구원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보기에 잘 믿는 것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철저하게 성경대로 믿을 때,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난 후, 사도들은 갈라디아 지방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에 대한 이야기들을 예(例)로 들었습니다.
즉 구브로의 바보 에서 박수(무당) 엘루마가 복음을 훼방하다가 눈이 멀게 된 것이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부흥과 유대인들의 훼방, 그리고 이고니온 부흥과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 그리고 바울 이 돌에 맞아죽었다가 살아난 것 등입니다. 그 모든 것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일으킴으로 큰 부흥을 일으켰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의장(議長)격인 야고보 사도가 성경 말씀을 가지고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15:14-18절)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라.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5:14절)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아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라고 했는데, 이‘시므온’은 베드로를 말합니다. 즉 시몬의 발음을 히브리 식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을 주신 것을 시몬(베드로)이 이미 보고(報告)한 바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15:11-12절)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구약 암9:11-12절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에 이방인이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구약 아모스를 인용한 것입니다.
드디어 결정적인 판결(判決)이 내려집니다.
15:19-20절)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즉 이제 이방인 형제가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서 어떤 불필요한 장애물을 두지 않기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이 판결을 보면, 최소한 금해야 할 4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상(偶像)의 제물, 둘째 음행(淫行), 셋째 목매어 죽인 것, 넷째 피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즉 우상(偶像)의 제물은 이것을 먹음으로 다시 우상숭배에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후에 이 문제는 사도 바울에 의해 좀 다른 견해로 발전하게 됩니다.
음행(淫行)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음란(淫亂)한 문화를 따르고, 혹은 이방 신전(神殿)의 창녀(娼女)들과 옳지 못한 관계를 하는 경우를 금지시킨 것입니다. 또 목매어 죽인 고기와 피를 마시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크리스천들에게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교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네 가지를 예(例)로 들어 누가 보아도 상식적으로 덕(德)을 세우는데, 어울리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 버린 것입니다. 즉 율법(律法)의 모든 굴레와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들의 눈치나 모세의 많은 규정에 얽매일 필요 없이 오직 예수만 믿고 성경과 신앙 양심에 따라서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 믿는 사람이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길이나, 이방인의 길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이것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세상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네 가지는 풀지 않고, 금지(禁止)를 시켰을까? 그 이유가 다음절에 나옵니다.
15:21절)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아마 이 당시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던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도 이 정도는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는 아마 전혀 신앙 생활하는데 어렵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도 어느 나라는 일부다처(一夫多妻)제도 있고, 조상숭배(祖上崇拜)와 제사(祭祀)제도가 있습니다. 또 술과 담배, 노름과 도박 등 신앙생활에 걸림 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 믿고 변화 받은 사람은 비록 그것이 세상에서는 용납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라면, 자신의 신앙 양심을 위해 단호하게 끊어 버려야 합니다.
즉 교회 안에서 계속적인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걸림돌을 스스로 제거(除去)해야 합니다. 또 게으름 때문에 성경을 읽는 일에 등한히 하다 보면, 결국 교회에 다른 이물(異物)질들이 들어오고, 그 결과 성령의 역사가 끊어져, 부흥의 불이 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 부흥의 불을 꺼트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시 종의 멍에를 메어서도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린 사도 바울과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노예(奴隷)의 멍에를 끊어버리고, 세상의 더러운 줄이 있으면 끊어버려서 이제는 완전히 성령의 손길에 붙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찬송가 422장 *거룩하게 하소서*
오늘의 묵상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여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1)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오늘의 기도제목
▣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주님! 셀(cell)공동체, 예배공동체, 선교공동체로 부흥.성장케 하옵소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하신 주님! 내게 맡겨주신 재물과 나의 생명 주님께 드려 도구로 사용되길 원합니다. 주님! 동탄에 교갱원을 설립할 창립멤바, 동역자를 보내주소서. 주님! 신실하고 충성된 추수의 일꾼들을 속히 보내주셔서 주신사명 감당케 하소서. 아-멘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교갱원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 낙오자 없이 모두 성숙한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을 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자립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정착완료. 양식보존. 새벽기도. 교갱원설립후원. 춘추심방. 실명으로 소통)
교갱원카페. 카톡.천국백성이 은혜받고 감사하며, 기도로 화답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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