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의 세계관 4-303.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얼마 전 텔레비전 광고에서 수녀(修女)가 자기 자전거 뒤에 비구니(比丘尼)를 태우고, 서로 웃으면서 가는 멋진 장면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종교인들이 너무나 독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종교인들도 자기주장만 하거나 타종교를 비난하지 말고, 종교 간에 서로 대화도 나누고 화합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문에서는 추기경이 절에 가서 불상(佛像)을 뒤에 두고, 강의를 하거나 명동성당에서 유명한 승려(僧侶)가 와서 설법(說法)하는 것을 대단히 긍정적인 현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정신은 훌륭하고 좋다고 생각하지만, 구원에 있어서 십자가 외에는 일체 인정하지 않는 점을 지나치게 배타적(排他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타종교의 좋은 점도 인정해 주고, 종교 간에 대화도 나누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에 군사독재가 한창일 때, 우리나라 토양(土壤)에서‘민중 신학’이 태어났습니다. 이 민중 신학은 지금까지 배워 온 서양인이 생각한 교리 중심의 신학이 아니라, 고통 받는 민중(民衆)들을 그 고통에서 건지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일종의 남미(南美)의 해방신학과 유사한 것이지만,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군사독재라는 한국의 토양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징이었습니다. 이런 민중 신학에서는 고통을 받는 민중의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에 기독교냐, 불교냐, 하는 차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난한 자나 억눌린 자를 돕기 위한 운동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많은 비정부기구(NGO)들을 통하여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 몸담고, 생활하는 사회의 일원으로써, 할 수 있는 한, 사회의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는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예)세금도 내야하고, 국방의 의무도 감당해야 하며, 홍수가 나거나 큰 재난이 발생했을 때, 봉사하는 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라고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이 벌였던 삼일운동 때에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불교 지도자들 그리고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협력해서 한자리에 모여⟪독립선언문⟫을 작성했고, 또“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교와도 협력할 수 있으며, 천주교 신부와도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裡面)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영적인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는데, 사탄은 이것을 악용(惡用)해서 하나님 나라를 공격하고, 믿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시도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부분에서는 협력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측면에서는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즉 영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Ⅰ.기독교 세계관 세계관은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 즉 인생관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의 인생관을 주로 낙관적으로 보는‘낙관주의’와 비관적으로 보는‘비관주의’ 또는‘염세주의’로 나누어서 생각했습니다. 불교적 세계관에는 전생과 이생이 윤회하는‘윤회사상’이 있습니다.
☞ 세상이라는 개념 ☜ 성경에서는‘세상(世上)’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략 세 가지의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할 때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라고 말씀하실 때의‘세상’은 자연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속담에‘죄는 미워하더라도 죄인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곧 성경적인 사상(思想)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사람을 충동질해서 죄를 짓도록 하는 악(惡)한 마귀가 적이고, 원수입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세상의 빛이라(마5:13-14).고 말씀하셨을 때, 여기서‘세상’은 인간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무조건 이 세상에서 달아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즉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소금은 부패(腐敗)를 방지하고,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빛은 모든 것을 환하게 밝히는 역할을 하는데, 대개 어두움은 무지(無知)나 미신(迷信)이나 억압(抑壓)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로 성경은 이 세상의 악(惡)한 가치관(價値觀)을 세상이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1서2:15).고 했을 때의‘세상’은 세상의 부패(腐敗)한 가치관(價値觀)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는 그냥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어떤 정신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를 유지시켜 나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하여 교육을 시키고, 그 사회에서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사회 부적응아’혹은‘사회 불량자’라고 해서 무시를 하든지, 불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든 그 사회의 가치관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명예심이나 허영심, 탐욕과 같은 비성경적인 정신이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한 대단히 복잡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회에서는 열심히 살지만, 결코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배척은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 공간적인 이원론주의 ☜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성(聖).속(俗)’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이런 성과, 속을 공간적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즉 주로 신전이나, 성당 같은 곳은 거룩한 곳이며,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속(俗)되다 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천주교에서는 성당을 거룩한 곳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영향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도 스며들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을 거룩한 성전(聖殿)이며, 목사는 세상의 다른 직업과는 구별되는 성직(聖職)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며, 필요한 구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여기서 지나쳐서 마치 하나님은 교회나 성전에만 계시고, 세상에는 안 계시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원론(二元論)주의라고 말합니다.
특히 옛날에 형식적으로 오래 믿는 분들은 교회에서는 가장 거룩한 분인 것처럼 기도하고, 행세하다가 세상에 나가서는 아주 악질적(惡質的)인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서의 신앙이 세상에서도 연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지 못한 것을 교회에 나와서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과 가치관이 같은 교인들을 대하는 것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교회에서는 위로를 받고, 힘을 얻지만, 세상에서는 상처를 받고, 믿음에 실패할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믿음을 실천해 볼 수 있는‘장(tield)으로 생각하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농부들은 일할 수 있는 밭이 있어야 하고, 기술자들은 자기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공장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진리와 믿음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모세는 열두 사람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그때 열 명의 정탐꾼들은‘가나안 사람들은 거인인 데다가 자기들은 그 사람들 앞에서 메뚜기와 같더라(민13:33).고 하면서, 정복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성(城)이 견고하고, 사람들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나갈 때, 그 사람들은“우리의 (밥)먹이(민14:9).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세계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 주는 예(例)입니다.
☞ 두 왕국 이론 ☜ 루터는 중세(中世)의 폐단(弊端)이, 교권(敎權)이 너무나도 비대해져서 세속(世俗)의 영역까지 지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두 왕국을 주셨는데, 하나가 칼(劍)로 다스리는 세속의 왕국이라면, 다른 하나는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는 영적인 왕국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어떤 의미에서는 세속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모든 것을 신앙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사람의 건전한 판단이나 이성의 영역이 설 땅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인간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가 설 여지가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정경(政. 經)유착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가는 정치하는데 많은 돈이 필요하고, 기업가는 정치적인 지원이 필요하니까 자연스럽게 유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피해는 나라 전체가 부패 공화국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정치자금 문제나 정치적인 특혜 문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정경 유착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정종(政. 宗)의 유착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한통속이 되어 버리면, 정치적인 정적(政敵)을 얼마든지 이단으로 처리해 버릴 수도 있고, 죄로 정죄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즉 사탄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독일에서 히틀러 정권이 들어섰을 때, 독일 교회가 침묵하고, 오히려 지지한 것에 대하여 본회퍼 같은 사람은 바로 이런 루터식의 두 왕국 이론이 그리스도인의 정치적인 무책임을 가져오게 했다고 비판합니다.
☞ 영역 주권 사상 ☜ 칼뱅은 루터에 비하여 한 세대 후의 사람인데, 그는 오히려 그가 목회하던 제네바를 통해서 신정정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즉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사망에서 부활하심으로 온 세계의 왕이 되셨기 때문에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회복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방치하고,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나름대로 모든 영역의 전문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영역 안에 동아리를 틀고 있는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에게는 변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수5:15).고 하시면서“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수5:1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는 우상(偶像)과 음란(淫亂)이 가득하지만, 하나님께서 온 땅의 주인이 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그 땅을 거룩하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은‘거룩한 곳’이 됩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전문적인 영역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사탄이 하나님을 몰아내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예)과거에 청소년들이 즐기는 만화나 게임 같은 것은 그 내용이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 전문가들이 신앙적인 게임 프로그램이라든지, 만화를 개발함으로써 하나님 중심의 건전한 내용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또한 유전공학이나 의학 같은 학문에도 깊이 들어가 보면, 인간 복제라든지, 유전적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어린 생명을 이용하는 등의 비윤리적인 실험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영역에서도 전문인이 되어서 모든 사탄의 궤계를 몰아내고,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예)어떤 경찰서장은 자기 관할 구역 안에서, 미성년자들을 이용한 윤락행위를 끝까지 단속해서 몰아낸 바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교통경찰은 교통법규를 어긴 자들로부터 돈을 받는 관행을 없애고, 오히려 장비들을 차에 싣고 다니면서 타이어가 펑크 난 차들을 수리해 주어서 칭찬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Ⅱ.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 한 장소에서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살려고 하면, 서로 불편하지 않도록 공중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예)사람들이 다 잠을 자는 밤중에 아파트에서 크게 떠든다든지, 아무 곳에나 오물을 함부로 버린다든지 하면, 사람들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서로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개인이 사회에서 잘 지켜야 하는 도덕이 개인 윤리입니다. 또 개인이 지켜야 할 중요한 윤리로 교통질서가 있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운전을 하기 때문에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곧바로 다른 사람의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중에 하나가 음주운전이 있습니다. 음주운전을 하면, 운동신경이 느리게 반응하기 때문에 교통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음주단속을 자주 함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가 적발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다행스러운 점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음주단속 하나만큼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요즘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경제사범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 카드 정책의 실패로 많은 신용 불량자들이 양산(良産)되었습니다.
내수를 높이기 위하여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카드를 발급해 주곤 했는데, 이것으로 카드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 카드빚 때문에 연약한 여자와 아이들을 납치하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정부가 개인 윤리 문제까지 단속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장발족 단속을 하기도 하고, 미니스커트 입은 여성들을 단속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사회 기초질서를 확립한다고,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횡단보도가 아닌 곳을 횡단하는 사람들을 단속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이 질서를 잘 지켜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가 질서를 지켜야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것을 개인 윤리와 비교해서 사회 윤리라고 부릅니다. 사회 윤리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자연환경 문제입니다.
자연환경은 한번 망가지면, 회복하는데 몇 십 년이 걸릴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기 때문에 국가에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하천이나 대기(大氣)가 오염되면, 회복이 어렵고,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듭니다. 그래서 이것은 개인보다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해야 합니다. 즉 공해산업을 억제하거나, 공장폐수나 생활하수의 정화시설을 만드는 것이 환경을 지키는 일환입니다.
과거에는 기업하는 분들이 이윤만 추구하면 됐지만, 이제는 환경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기업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을 위해서 환경오염을 방치했기 때문에 이제는 환경이 이미 중병에 든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고치려고 하니까 완치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고, 더 악화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특히 환경 문제로 가장 논쟁이 많이 되는 부분이 개발과 환경 보존 사이의 갈등입니다. 그중에서 댐 건설은 이해관계가 가장 심하게 대립되는 이슈인 것 같습니다.
홍수를 막고, 수자원을 확보하려면, 댐을 건설해야 하는데, 댐을 건설하면, 많은 어류(魚類)들이 없어지고, 환경이 파괴되기 때문에 주민들이나 환경론자들이 많이 맹렬히 반대합니다.
특히 얼마 전에 있었던 핵 폐기장 건설은 온 주민과 정부가 싸우는 데까지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70% 이상이 산(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국토를 개발하려면, 산(山)을 헐고,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또 많은 자연이 파괴됩니다.
특히 최근에 자연이변 현상이 세계적인 추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엘리뇨 현상으로 어떤 지역에서는 폭설(暴雪)이 쏟아지는가 하면, 어떤 지역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서 산불이 나도 끄지 못하는 현상도 일어납니다.
한 번씩 유조선이 침몰해서 기름이 새면, 그 주위의 모든 생태계가 파괴되기도 합니다. 이제 환경문제는 한 국가가 책임질 문제를 넘어서서 온 인류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할 일입니다.
사회 윤리 가운데 전쟁의 문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전쟁보다 더 무서운 악(惡)은 없고, 전쟁보다 더 무서운 환경파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재래식 무기뿐만이 아니라, 핵무기까지 갖추고 있어서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특히 요즘 전쟁은 과거의 전통적인 전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적(敵)과 싸워야 하는 테러와의 전쟁이기 때문에 더욱더 민간인의 피해는 많아지고 있습니다. 북한과 같은 나라는 테러 진단에게 핵무기를 판매할 기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를 없애기 위하여 모든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한국 전쟁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전쟁은 가장 무서운 죄악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수단입니다. 사회 윤리 가운데 또 중요한 이슈는 사회적인 약자(弱者)에 대한 보호입니다. 과거에는 노동자라든지, 여성이라든지,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인 약자들이 무조건 꾹 참아야 하는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회적인 약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적인 약자들을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보호할 수 있는지, 협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각종 연금제도나, 의료보험 제도입니다.
요즘은 옛날처럼 내가 돈을 벌었으니까 내가 다 가져도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지양합니다. 사회 안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위한 비용을 사회 전체가 지불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유전공학의 발달로 동물 복제가 가능해지자 인간을 복제해서 사람의 병을 치료하려는 의료 윤리의 문제도 예민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태아들의 낙태 문제입니다.
즉 원치 않는 임신이나 혹은 남아 선호 사상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에도 백만 명이 넘는 태아들을 낙태하고 있고, 미혼모의 출산으로 인하여 많은 아이들을 외국으로 입양하고 있습니다.
낙태는 법률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정부는 방관(傍觀)하는 입장이고, 외국 입양도 묵인(默認)하는 형편에 있습니다. 단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이 우리나라 안에서 입양을 권장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남북 분단으로 많은 탈북자 문제도 있습니다. 특히 탈북자들 중에서 우리나라까지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다행이지만, 중국 등에 떠돌아다니고 있는 많은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신매매 범들에게 팔리거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일이 허다하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와서 일함에 따라 외국 근로자들의 인권 문제나 사회 문제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Ⅲ.사회 변혁 ☞ 보수와 진보의 견해 ☜ 사회 윤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 보수적인 입장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과 진보적인 입장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사용하는 사회윤리는 개인이 도덕을 잘 지켜야 하듯이 사회도 지켜야 할 질서나 윤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환경보호라든지, 낙태 반대라든지, 핵무기 개발이나 전쟁 반대 같은 문제를 사회가 지켜야 할 윤리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의 사회 윤리는 어떻게 하면, 사회 질서를 잘 유지하느냐? 하는‘질서의 신학’이 기초입니다.
그러나 진보적인 입장에서의 사회 윤리는 개인이 죄를 짓는 것보다는 왜곡된 사회 구조가 더 큰 죄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을 기본 개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사회 윤리의 신학은‘질서’가 아니라,‘변혁(變革)’의 논리입니다. 예)어떤 한 개인이 사기(詐欺)를 치거나, 도둑질을 할 때, 죄를 짓는 액수는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지만, 정경 유착이라든지, 잘못된 사회 구조에 의하여 부정을 때에는 적게는 수억 원에서 많게는 수천억 원에 이르는 부정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진보적인 입장의 사회 윤리는 정치적인 활동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구조적인 문제 ☜ 그동안 사회 윤리적인 측변에서 우리나라 구조를 가장 왜곡시키는 문제는 남북 분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세계가 냉전이라는 긴장 구조 하에서 우리나라는 남북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분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도 겪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이 모든 국민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남북 분단의 긴장을 장기 집권의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독재를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집권자들은 사람들의 인권(人權)을 무시하기도 하고,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기도 하고, 때로는 사형을 집행하는 일까지 자행했습니다.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교회만 잘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표시를‘샬롬’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와 신부 중에서 이런 신학을 가진 분들은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정부의 허락도 없이 북한에 넘어가서 실정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북방 외교가 결실을 맺고, 구소련이 붕괴되고, 특히 남한의 햇볕정책으로 남북 간의 긴장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화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구조적인 문제는 고도 경제성장 정책으로 인한 정경 유착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한 나라이기 때문에 정치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수출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금융기관들을 국가가 운영하는 상황에서 금융지원을 대기업의 수출 외형 위주로 함에 따라서 기업들은 외형을 늘려서 금융지원을 받으려고, 많은 부실기업을 인수했습니다. 결국 lMF가 터짐으로 부실기업들이 망하자 부실기업에 돈을 빌려준 은행들도 같이 망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마어마한 공적자금으로 일단 금융기관들을 살려놓기는 했지만, 결국 이 모든 자금을 국민의 세금으로 갚아야 할 부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금융기관들이 독자적으로 생존의 활로를 찾고 있어서 과거와 같은 금융부실의 경우는 덜 생기리라고 보지만, 아직도 세계적으로 한국 은행들의 손실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볼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정치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선거자금이나 정치자금을 기업들로부터 받아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엄연히 정치자금법이 있지만, 실제로 그 법대로 정치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 수십 배에 해당하는 정치자금을 기업들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특히 대선(大選)때가 되면, 대통령 후보나 정당 책임자들이 노골적으로 대기업들로부터 선거자금을 받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이 우리나라가 선진 민주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진통들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정치가 보다 투명해져서 이런 비리(非理)와 부패(腐敗)가 없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과 지성인들이 해야 할 책임입니다.
Ⅵ.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 그리스도인들도 이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참 정권을 가지며, 또 얼마든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믿는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할 때, 악(惡)한 자들은 나라를 자기 마음대로 더 좌지우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한 개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반대할 수 없지만, 문제가 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라에서 독재로 사람들의 인권을 탄압할 때,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느냐? 하는 저항권의 문제와,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단적으로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정치에 너무나 깊이 빠져서도 곤란하지만, 너무나 무관심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정상적인 법(法)을 어기고, 사람들에게 악(惡)을 강요 할 때에 얼마나 거기에 복종하고, 따라가야 하느냐? 가 문제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금 낼 것이 있으면 잘 내야하고, 국방의 의무도 성실히 임해야 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簒奪)하여 자기 자신을 신격화(神格化)하거나, 탐욕으로 교회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예배를 방해하며, 국민들에게 악(惡)을 강요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까지 저항할 수 있느냐? 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에 반하는 죄를 강요받을 때에 거부해야 합니다. 예)일제 시대처럼 천황숭배를 강요받거나, 북한에서처럼 통치자가 신격화(神格化)하는 일들은 거부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행위를 거부했을 때, 사회적으로 많은 박해와 보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독재정부 아래에서 열심히 일한다고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은 침략자인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통치를 받았지만, 우상(偶像)에게 절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열심히 정부에 충성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합 왕의 통치를 받을 때에 엘리야는 아합 왕의 통치에 거부하여 대결을 했지만, 오바댜는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왕에게 충성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숨도록 도와주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칼뱅 같은 경우에는 개인이 정부의 권력에 저항하기보다는 정당한 위치에 있는 자를 통해서 저항권을 행세하는 것이 일반인들의 피해가 적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일반 개개인이 왕의 명령에 대항하여 저항하면, 너무나 피해도 크고, 혼란도 장기화될 수 있기 때문에 제후(諸侯)라든지, 의회(議會)의 의원처럼, 어느 정도 공직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저항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군사독재 시절에 많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저항하면서 희생을 겪었고, 특히 광주 민주화운동 때에는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시민 쪽에 서서 계엄군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런 많은 희생의 결과로 우리나라에서도 군사정권은 무너지고, 여러 차례 평화적인 민간 정권이 교체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집단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독재가 무너지고, 선거에 의하여 대통령이 선출되니까 정치인들이 종교계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거 때가 되면, 대통령 후보들이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사진들을 신문에 싣기도 하고, 또 특정 종교에 유리한 선거공약들을 다투어서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이익집단이 되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종교는 사회의 불순한 찌꺼기들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종교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선거를 이용하는 것은 종교의 본분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정당의 설립을 주장하지만, 외국처럼 기독교의 역사가 길어서 사회자체가 기독교로 안치된 경우에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소금이라고 했는데, 소금은 녹아서 스며들 때, 제 맛을 낼 수 있는 것이지, 녹지 않은 덩어리로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노조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근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단체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 강성노조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노조활동을 어느 정도 전략적으로 할 수 있느냐? 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노조활동을 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이념적이거나, 혹은 파괴적인 노조활동은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평화의 사도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투쟁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얻으려고 하기 보다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평화의 방법으로 상호간에 협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