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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수기는 공부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일상, 공부 패턴 등을 다룹니다. 공부법은 앞으로 연재할 '언론고시 합격자의 공부법', '7급 공무원 합격자의 공부법'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본 글은 반말체, 공부법 글들은 존댓말체로 연재하겠습니다.
*언론고시 필기 공부 기간: 2017년 1월 1일~2017년 11월 6일
언론고시 면접 공부 기간: 공무원 준비하면서 언론사 최종 전형 올라갈 때마다 틈틈이. 2019년 2월에 경인일보 최종 합격.
*강원일보, 아시아경제, 이데일리, 아주경제, 이투데이, 한국일보,MBN, 농민신문, 뉴스핌, MBC, 머니투데이방송, TV조선, 이데일리2, 경인일보 필기 합격
*공무원 필기 공부 기간: 2017년 11월 16일~2019년 02월 22일 (언론사 최종 전형 올라갈 때마다 일주일 정도 면접 스터디하느라 필기 공부 중단. 또 기자가 된 뒤에도 필기 공부 중단. 그 기간을 빼면 순수하게 약 1년 정도 공무원 필기에 시간 할애)
공무원 면접 공부 기간: 2019년 4월 12일~4월 24일
*2018 국가직 9급, 2018 수원시 9급 필기 탈락. 2018 서울시 9급 면접 탈락. 2018 경기도 7급 필기 탈락. 2019 서울시 7급 최종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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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의 열매는 달다. 그 과정은 쓰다. 열매를 따기 위해 가시밭을 구른다. 이러한 지상 명제에 있어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도중에 포복하고 엄폐하며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글을 쓰는 지금도 단맛이 내 지친 오감을 어루만진다. 이 기분을 공유하기 위해 합격수기를 쓴다.
학창시절 난 축구에 미쳐있었다. 축구 없인 살 수 없었다. 경기를 보고 느낀 감정을 남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좋은 건 나눠먹자는 게 내 신조였으니까. 블로그를 운영한 까닭이다. 그러다 내가 글을 어느 정돈 잘 쓰는 편임을 자각했다. 분석력도 나쁘진 않았다. 축구 기자를 꿈꿀 수 있었다. 이후 각종 전술 책들을 탐독했다. 조나단 윌슨, 장 방스보, 이형석. 그렇게 지적 영역을 넓혀나갔다. 내가 잘난 줄 알았다. 한 스포츠 편집장님을 만나기 전까진.
지인 소개로 편집장님을 찾아뵀다. 내 글은 못쓴 글이라고 했다. 복문 투성이에 어려운 용어는 남발이요, 현학적인 문체까지. 당시엔 그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에도 열심히 블로그를 운영했다. 내 구독자들은 꾸준히 나를 칭찬했다. 자아도취감에 빠져 정신을 못차릴 때쯤 문득 내 글을 뒤돌아봤다. 참, 못썼다. 편집장님 말이 맞았다. 도대체 내가 뭐가 잘났다고.
그 언론사 사무실에 찾아간 게 2015년 여름쯤이니 1년 정도 지났을 게다. 정신을 차렸다. 피드백을 수용해 글을 개선해 나갔다. 친구 부탁으로 광운대학교 축구부 기자단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다. 설기현 감독도 만났다. 난 이제 축구 기자가 되기 위한 탄탄대로를 걷나 싶었다.
근데 이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가지 조건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축구 언론 시장이 좁다. 원체 파이가 작기에 원치 않는 기사들을 써야 한다. 뿐만 아니라 페이가 매우 적다. 둘째, 내 야망. 축구 기자가 돼 축구인들에게 긍정적인 임팩트를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축구 기자가 아닌 일반 기자가 된다면 더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셈법이 날 감돌았다. 계산 끝. 언론고시를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
언론고시. 실제로 고시는 아니지만 언론사 들어가는 게 고시급으로 어렵다고 해 붙여진 말이다. 좀 지나친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대형 언론사를 들어가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고시 패스급 재원이 산재함을 실감한다. 언론고시도 시험이다. 언론사마다 다르지만 2차 필기전형에선 보통 논술과 작문, 그리고 상식 시험을 본다. 2차에서 많이들 떨어진다. 다들 갑갑해한다. 지름길로 가고 싶은 마음에, 갑갑한 마음 털기 위해 많이들 학원을 택한다. 나도 그랬다. 한겨레 문화센터의 김창석 논작반.
2017년 1월부터 2달간 창석 쌤 수업을 들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언론고시를 준비한 셈이다. 물론 언론사 준비하기 전부터 시험을 보러다니긴 했다. 초심자의 운이었던 걸까. 아시아경제와 이데일리 필기 시험을 통과했다. 아경은 3차 실무, 이데일리는 3차 최종까지 갔다. 이렇게 나름 자부심 뽕을 맞은 상태로 창석 쌤 수업을 들었다. '나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 잘하는 편이겠지?'
역시 오산이었다. 두 번째 착각이었다. 물론 예전의 나쁜 버릇이었던 복문 쓰기는 많이 나아졌다. 늘 쉽게 글을 쓰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주는 과제에 대한 나의 답은 늘 낙제 수준이었다. 글의 일관성이 없다, 구체적이지 않다, 참신하지 않다... 또 충격을 먹었다. 다른 친구들은 종종 칭찬을 받곤 했다. 이럴 순 없었다. 여기서 밀려선 안 된다!
모든 자존심을 내려놨다. 늘 내가 꼴지라고 생각했다. 모든 아집을 버렸다. 스폰지처럼 선생님의 충고를 수용했다. 일전에 편집장님의 피드백을 받아들였을 때보다 더 처절하게,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밖으로 내어보였다. 친구들의 잘쓴 글도 눈여겨봤다. 아, 이렇게 써야 하는 구나. 그렇게 2주 정도 지났을까. 내 글이 좋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선생님께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 아싸...!
2017년 2월 말. 김창석 쌤 수업이 완전히 끝났다. 많은 걸 배웠다. 논술과 작문은 이렇게 써야 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창의성, 구체성에서 많이 떨어졌다. 한터에서 만난 친구들과 스터디를 결성했다. 참 죽이 잘 맞았다. 공과 사를 잘 구분했다. 사석에선 친했지만 스터디할 땐 매서웠다. 내 치부가 다 드러나는 느낌이기도 했지만 난 그게 좋았다. 내 성격이 바로 그거니까. 지적을 당할 때마다, 비판을 당할 때마다 난 기분이 좋다.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글은 조금씩 성장해나갔다. 그러다 먼저 합격하는 인원이 생겼다. 다들 진심으로 축하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새 인원을 아랑 카페에서 충원했다. 근데 이런 게 계속 반복됐다. 합격해서 나가고,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고, 다시 충원되고 또 나가고.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했다. 먼저 합격한 친구가 스터디장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내가 스터디장을 맡았다. 기강을 다잡아야 했다.
당시 나는 내 맡은 바 역할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기존 스터디원들은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우울증에 걸려 스터디를 종종 빠졌다. 과제도 잘 안 해왔다. 스터디 기강이 흔들렸다. 8월까지 안정적이었던 스터디가 9월부터 급격하게 흔들렸다. 좌시할 순 없었다. 스터디원들을 다그쳤다. 제때 과제해야 한다, 참석 좀 잘하자. 잔소리의 연속이었다. 내로남불일 순 없어 나는 스터디장을 맡은 이후로 단 한번도 과제를 빼먹은 적이 없다. 결석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11월 7일. 문제가 터졌다. 스터디가 해체됐다. 나간 팀원과 남아있는 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내게 얘기했다. 스터디 분위기가 답답하다고. 나야 말로 답답했다. "너네들이 과제 안 해오고 그래서 기강 해이해진 거 아니냐. 왜 나한테 그러냐"고 다그쳤다. 소용없었다. 이들의 마음은 떠났다. 이렇게만 보면 나 혼자 착한 놈이고 그 친구들은 나쁜 놈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어찌보면 독재자였다. 난 욕 먹는 거 좋아하고, 또 감정 기복이 없는 편이다. 모든 사람이 나같을 수 없다. 시련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난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주저앉은 사람에게 손을 내민 대신 채찍을 들고 또 들었다. 그 친구들의 잘못도 없잖아 있지만 내 탓이 컸다. 물론 이걸 깨달은 건 기자를 관두고 한참 뒤였다. 그땐 계속 원망했던 걸로 기억한다.
스터디가 해체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스터디 막바지에 들어온 친구랑 썸을 탔다. 처음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스터디장으로서 그 친구의 고충을 들어주다가 그렇게 관계가 발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말이 좋지 못했다. 그 스터디원도 나갔다. 11월 7일 하루 아침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 엎어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난 참 충동적인 성격이다. 냉혈한 기질, 뭐든 한번 집중하면 불이 붙어버리는 기질 말고도 이 '충동적'이라는 단어가 날 잘 설명하는 듯하다. 그 날 이후로 난 기자 준비를 그만뒀다. 사실 전부터도 조금씩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글 쓰는 실력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필기를 족족 붙었다. 하지만 계속 면접에서 떨어졌다. 내가 기자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 하루아침에 벌어진 두 사건을 계기로 난 충동적인 결정을 내렸다. '아, 기자 안 해.'
감정 기복이 없던 나도 결국 인간이었다. 며칠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개인적인 이유와 능력상의 한계로 기자로 향하는 길이 난맥상임을 깨달았다. 뭔가를 해야만 했다. 가만히 있으면 돌아버릴 거 같았다. 아빠에게 내 심정을 털어놨다. '공무원 준비해보는 게 어떻냐'는 답이 돌아왔다. 공무원? 그 전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직업이다. 기자와 공무원. 공익 실현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직업임을 제외하면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공무원을 준비해야 하나? 처음엔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난 뭔가를 해야만 했다.
기자 준비하면서 쌓아왔던 번뇌를 잊기 위해, 결국 방향을 전환했다. 공무원 공부 시작! 물론 기자의 꿈을 완전히 접은 건 아니다. 기자 '준비'를 관뒀을 뿐이다. 필기 실력은 궤도에 올랐다는 자신감과 한 가지에 올인하면 위험하다는 위기감, 내 가슴 안의 답답함. 이 복합적인 셈법들을 가동하다 보니 공무원이라는 길이 순간 나타났다. 아빠의 조언이라는 윤활유는 덤. 또 나는 뭔가에 집중하면 이전의 고통을 잊는 타입이지 않나.
처음엔 9급을 준비했다. 7급은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빨리 취업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영어를 제외한 4과목의 진도를 빼는 데 장장 1개월 반이 걸렸다. 그리고 기출을 풀었다. 2013년부터 2017년. 국가직과 지방직, 그리고 서울시. 합격권에 가까운 점수들이 나왔다. 또 여기서 방심하는 내 성격이 나와버렸다. "남들 아무리 못해도 9급 패스하는 데 1년이 걸린다는데 난 1개월 반 만에 이 정도까지 갔네? 조만간 합격하겠지."
또 오산이었다. 3번째 오산. 준비한 지 5개월 만에 국가직 9급을 보러갔다. 공무원 시험 역사상 가장 어려웠다. 내가 공부한 것에서 많이 비껴갔다. 합격컷은 369.99. 나는 330점. 광탈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내 자신을 되돌아봤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선 나 자신을 과신했던 게 컸다. 집에서 푸는 것과 실전을 다르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남들 12시간 공부할 때 난 6~8시간 정도 만을 투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 시험삼아 MBC 방송 기자 필기 시험을 쳤다. 패스할 것이라곤 생각도 안 했다. 공무원에 올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은 여전했다 한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마음이 붕떴다. MBC에 갈 생각만 했다. 빨리 마음을 다 잡아야 했다.
지방직 시험이라도 잘 봐야만 했다. 그러나 MBC도 포기할 순 없었다. 결국 난 MBC를 택했다. 공무원 공부를 잠깐 그만뒀다. 물론 그전에도 뉴스핌, 농민신문 최종에 올라가 잠깐 공무원 공부를 그만뒀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다르다. 'MBC'다. 게다가 지방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all or nothing. 베팅했다. 그래, 난 기자가 되고 싶었던 거야. MBC 가즈아.
결과는 실패였다. 운이 좋았던 걸까. 카메라 테스트에 통과했다.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4차에서 떨어졌다. 지방직도 1점 차이로 필기 문턱에서 넘어졌다.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벌어져 혼란스러웠다. 이게 올인한 결과인가. 난 도대체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가.
서울시는 나랑 시험이 좀 맞았던 모양이다. 필기는 합격했지만 최종 합격할 성적은 아니었다. 국어 영어 한국사를 285점으로 마무리했지만 사회에서 60점을 맞았기 때문이다. 채점한 순간 탈락을 직감했고 그 예감은 5개월 뒤 적중했다. 공무원 공부 시작 후 7개월을 달렸다. MBC를 포함해 여러 언론사 최종 문턱도 두드렸다. 난 쉬어야만 했다.
2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게임만 했다. 게임이 지겨워질 때쯤, 내 족적을 성찰해봤다. 지금까지 난 열심히 살아왔나. 내 공부 방식이 맞았나. 지금 걷는 이 노선이 맞나. 치열하게 고민했다. 고민 끝에 7급 준비라는 결론을 내렸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9급도 3번 연속으로 떨어진 와중에 7급이라니? 당시에도 그렇게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스스로도 이에 대해 의구심은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옳은 결정이었다. 우선 난 선택과목 중 사회를 못하는 편이었다. 7급을 준비하면 사회 대신 법과목을 공부해야 한다. 법은 나랑 잘 맞을 것 같았다. 또 내년(당시 기준으로) 9급 시험을 기약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남은 기회가 있다면 잡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게 바로 10월 지방직 7급이다. 2과목을 더 공부하는 것 빼곤 난이도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도 나왔다. 국가직 9급의 악몽에 기인한 셈법인 게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9급, 네가 뭔데 나를 거부해? 그럼 7급에 도전해주지.
그렇게 7급을 향한 가시밭길에 내 한 몸을 던졌다. 행정법과 헌법, 그리고 지방자치론을 새로 공부해야 돼서 힘이 들긴 했다. 실제로 지방직 7급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재미는 있었다. 진작에 법과목을 공부 안 한 것을 후회했다. 그렇게 시험날이 다가왔다. 결과는 컷보다 4~5문제를 못 맞췄다. 광탈. 씁쓸했지만 예상한 결과였다. 이렇게 7급을 쉽게 붙을 순 없을 테다. 얻은 수확이라면 행정법과 헌법을 85점 맞은 것.
그 후 서울시 9급과 지방직 7급 최종 탈락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얻었다. 언론사 시험도 여전히 보러다녔다. 머니투데이방송, TV조선 등. 결과는 역시 면접에서 광탈이었다. 이쯤되면 멘탈이 깨질 만하지 않나. 그렇지 않았다. 전술했다시피 냉혹할 정도로 감정기복이 없는 편이라는 걸 취업 준비하면서 깨닫고 있었다. 기자 준비를 관두면서 느꼈던 그 답답함 말고는 어떤 최종 탈락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그 순간은 물론 쓰디썼다. 나도 사람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루, 짧게는 1시간만에 회복했다. 그렇게 난 기계적으로 수험 생활을 해왔던 게다.
12월 중순이 내 취업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지방직 7급까지 떨어지니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내 삶을 변화시켜야만 했다. 그래, 어떤 외부적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력, 부정적인 소리 따윈 가뿐히 씹어버리는 개썅마이웨이 정신. 다 좋단 말이다. 무엇을 바꿔야만 했을까. 바로 공부 시간이었다. 여전히 나는 머리가 좋다는 과신에 찼던 게다. 그렇게 숱하게 고배를 마셨으면서. 남들 10시간 이상 치열하게 공부하는데 나는 길어봤자 8시간이었다. 공부에 큰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도 그들처럼 돼야만 했다.
스탑워치를 산 뒤로 난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그 날 이후 못해도 10시간 이상을 공부했다. 많으면 15시간을 공부에 전념했다. 집에 가는 동안에도, 샤워할 때도 오직 그날 공부한 걸 복습했다. 그전엔 전혀 그러지 않았다. 28년 인생 살면서 안 해본 공부를 한달 여간 몰아서 했다. 그러다보니 내 스스로도 실력이 올라갔음을 직감했다. 7급 합격이 눈 앞에 다가왔음을 전신이 느꼈다.
2월 23일 서울시 7급 추가 채용을 향해 분골쇄신하던 참이었다. 2월 8일 전화가 걸려왔다. "oo 씬가요? 경인일보 인사부장입니다. 일전에 경인일보 면접에서 탈락하셨잖아요. 결원이 생겨서 oo 씨를 모실까 하는데 괜찮겠어요?" 숨이 막혔다. 취업에 성공했다. 단박에 알겠다고 했다. 꿈은 이뤄진다더니. 기자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1월 달에 경인일보에 이어 이데일리까지 최종에서 물은 먹은 터라 완전히 기자에 대한 꿈을 접었던 터였다. 그렇게 기자 생활이 시작됐다.
2월 10일 출근. 대타라 그런지 신입이고 뭐고 없었다. 난 그날부터 취재 현장에 투입됐다. 저녁엔 마와리. 새벽 1시에 경찰서 막보고. 정신 없었다. 설마 첫날부터 굴리겠어 했는데 설마가 그 설마였다. 그래도 기분이 정말 좋았다. 난 기자니까.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일인데. 게다가 걸어서 15분 거리인 신문사. 좋은 선배들. 금상첨화였다. 그렇게 날마다 나를 채찍질해가며 기자 생활을 해나갔다.
일주일 쯤 지났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기자가 되고 싶었던 게 맞나? 기자가 되고 싶었다 해도 정말 기자 아니면 못할 정도로 글밥을 열망했나. 아니었다. 좋은 거 있으면 남에게 나눠주고, 어려운 사람 있으면 도와주는 게 나였다. 글쓰기도 좋아했다. 그럼 기자가 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기자는 타인을 괴롭혀가며 공익을 실현하는 직업이다. 내 사수가 그런 말을 했다. "우리는 글이라는 수단으로 남을 공격해. 너무 예리하면 다쳐. 둔한 부분으로 내려쳐야 돼. 그래야 사회가 바뀌거든." 맞는 말이었다.
19시간 근무, 뭐 괜찮았다. 버틸 만했다. 힘들긴 했지만 수습이야 3월 말에 끝나니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이 내게 맞는 일일까? 찬찬히 고민했다. 미래를 그려봤으나 그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었다. 선배들께 늘 혼나고 아이템을 킬 당해도 난 좋았다. 내 자신이 성장하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 소위 선배가 말한 '둔기'를 들 자격이 될까? 잘 휘두를 수 있을까. 또 그걸 즐기면서 할 수 있을까. 차라리 공무원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속대발광욕대규. 더위에 의관을 차려 입으려니 내 안의 목소리가 진동했다.
2월 20일이었다. 서7 시험 3일 전이었다. 근무 끝나고 아는 기자 형에게 전화했다. 내가 지금 관두는 게 맞는지. 형은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말이 기폭제가 됐다. 차장 선배께 그만둔다고 했다. 그렇게 짧은 기자 생활이 끝났다. 모두가 미쳤다고 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공무원 시험 보고 관두는 게 낫지 않냐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19시간 근무하면서 내 자유 시간은 없었다.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게다. 이미 10일 동안 근무하면서 그동안 쌓아왔던 일부분이 무너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그 전에 관두는 게 그나마 합격의 문을 두드릴 방도였다.
남은 2일 동안 미친 듯이 잃어버린 기억을 복구해냈다. 그래도 뇌는 건재했던 걸까. 기본서 발췌독을 하며 감을 서서히 찾았다. 시험 전날 공부를 마치며 든 생각. "아, 느낌 좋다." 말 그대로다. 시험장을 드러서는데 뭔가 공기가 날 반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펜의 그립감도 좋았다. 그렇게 시험이 끝났다. 역 안의 카페로 들어가 채점을 했다. 590점. (후에 정답 변경으로 585점) 1배수 안 점수를 받았다. 인생을 건 도박이 성공한 순간이다.
이후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복귀하고 나서 2주간 짧게 면접 준비를 했다. 그리고 합격증을 오늘 받았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내가 공무원이라니. 내가 재취업을 했다니...! 겹경사였다. 경인일보 합격 통지를 받기 전에는 그저 도서관을 배회하는 유령이었다. 기계인듯 기계아닌 기계 같은 나였다. 희노애락 모든 감정을 통제하고 외부 요인을 배척했던 나였다. 3개월이 안되는 그 짧은 시간에 나는 2번의 합격증을 받았다. 유령 혹은 기계가 된 보람이 있었다.
감정 없는 기계가 됐다고 자조해도 난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이 느낌, 공유하고 싶다. 공유, 헌신, 발전의 가치는 날 성장시킨 동력이었다. 누군가가 나로 인해 더 좋게 변한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그래서 축구 기자가 되고 싶었고, 기자를 준비했고, 기자가 됐고, 공무원이 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글이 누군가에겐 빛이 되기를. 그렇게 기계의 탈을 벗고 난 지금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왔다. 달디 단 열매의 씨앗을 나누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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