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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
1. 인간 뇌에 대한 개략적 이해
우주에서 알려진 가장 복잡한 구조가 인간의 뇌라고 한다. 잘 알려졌듯 뇌는 수천억 개의 뉴런(신경세포)들이 유전형에 따라 정확히 배치되어 있다. 뇌 전체는 860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신경세포는 5천~1만 개의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어 있어, 공간적으로는 여러 차원으로 연결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많은 뇌신경세포의 조합 결과, 작동 여부에 대한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보면 10의 100만 제곱이다. 우리가 결코 이를 의식하진 못하겠지만, 우리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상태의 수를 추정해 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다. 이런 잠재성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우리의 뇌는 우주의 크기만큼 광대하다고 볼 수 있다.
뇌과학 일반에서는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면서, 많은 중앙처리장치가 서로 긴밀히 연결된 슈퍼컴퓨터로 보고 있다. 뇌는 어느 순간에도 수천억 개의 시냅스(신경연접부위)가 활동하고 있다. 신체의 내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감각 정보는 시냅스의 말단으로부터 수 밀리초 내에 거의 동시적으로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연결된 다음, 신경세포에 전기 폭격을 가해 전기적 전달, 곧 하나의 활동전위를 발생시킨다. 뇌는 이런 식으로 즉 시냅스를 통해 전기적-화학적-전기적 신호를 보내면서 서로 간의 영역 간 의사소통을 한다. 시냅스에 관여하는 화학물질(신경전달물질)은 그 종류가 수십 가지에 이르고, 뇌의 영역별로 다르게 분포되어 있다. 어느 화학물질은 신경계에서 억제 작용을 하고, 어느 것은 흥분 작용을 한다.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들은 이런 원리/메커니즘을 바탕에서 연구되고 개발된 것이다.
마음/정신이란 것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연구자는 뇌 신경회로에 활동전위가 흐르면서 마음이란 것은 창발적으로 생성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신경세포는 서로 연결이 더해지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기능이 발휘된다. 수많은 신경세포 간 연결이 복잡한 회로를 맺으며 활동하게 되면, 이전에 세포 하나가 갖지 못했던 다른 차원의 새로운 기능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두고 창발(創發, emergence)이라 부르는데, 이렇듯 뇌 신경회로의 활성화로 마음이란 것이 창조적으로 발생된다는 것이다.
2. 뇌과학의 기본 입장
그간 눈부신 뇌과학의 발전은 뇌의 건강, 특히 뇌질환 관련 새로운 병리적 인과의 발견과 치료 방법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불교 수행(修行)이 인지기능이나 정신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해 주기도 했다. 이제 명상이나 수행 관련 뇌과학 영역에서의 논문은 여러 방면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뇌과학의 발전은 인공지능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 크나큰 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뇌과학은 아직 풀어내지 못한 숙제가 많다.
사실 뇌과학은 주로 인지/인식 관련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뇌 연구에서, 불교적 관점의 이해나 검토를 한 것은 인지/인식 영역에 제한된 편일 수밖에 없다. 뇌과학은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성의 문제라든가, ‘내’가 뇌의 어느 곳에 있느냐 등의 문제와 같은, 사변적/주관적 성격의 문제는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다. 뇌 신경학적 상관물(neurological correlates)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뇌과학은 일반적으로 이해가 되는 인간의 심리적 양상이나 행동 특성에 대해, 그것의 뇌 신경학적인 상관성을 밝히려는 게 주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뇌과학과 불교적 이해와의 관련성을 찾는다면, 가령 전오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이 구조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뇌의 어느 회로를 거쳐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밝히는 범위 정도의 일이 된다. 물론 감정이나 장단기 기억 등의 신경회로를 밝힌 것도 뇌과학의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거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의식/마음/정신이란 것의 연구에 대해선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최근에 와서 의식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규명해 보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뇌 신경학적 상관물의 근거를 찾아냈다고 보기 어렵다. 아직 의식에 대한 연구 결과는 대개가 가설에 불과할 뿐, ‘검증’이 되지 않은 추론에 불과한 실정이다. 뇌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뛰어든 일군의 신경철학자들이 있지만, 이들도 뇌 연구 결과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견해가 분분하다. 신경과학 철학자들 가운데는 마음/정신이란 것의 실재를 믿지 않는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마음/의식의 확실한 뇌 신경학적 상관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주된 배경이다. 뇌과학자 가운데, 특히 행동주의 신봉자들은 그런 의식/마음은 검증이나 실험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것은 있다고 해도 하나의 환상이라는 주장을 한다. 다른 경우라 해도 실험적으로 반복하여 입증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뭐라 결론을 내놓을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자유의지나 의식 수준 또는 가치 같은 문제는 뇌과학 영역에서는 논외의 주제다.
3. 본다는 것에 대한 뇌과학적 소견
뇌과학 연구 성과의 일부를 간단히 소개한다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간략히 언급한다 해도 그 주제의 범위나 내용은 어마어마하다. 여기선 뇌과학의 대표적 연구라 볼 수 있는 본다는 것[見]을 중심으로 뇌과학적 지견을 대략적으로 가늠해 보려 한다. 그런 연후에 본다는 것의 전통 불교적 입장(불교인식론)과 그 맥락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간단한 비교 검토를 했다. 그리고 본다는 것[見]의 함의를 넓혀, 다시 말해 대승불교/선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觀]의 의미를 함께 검토해 봤다.
본다는 것을 중심 주제로 삼은 이유는 이런 배경도 있다. 과거 불교인식론에서는 다섯 감관 가운데 시각을 흔한 예로 삼아 논증을 편 전통이 있다. 그리고 예부터 시각 관련 인식 논증을 통해 나머지 다섯 감관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는 주장을 펴 왔다. 사실 본다는 것, 본다는 마음은 불교 이해의 핵심이다. 불교 전통에서 본다는 말에는 단지 눈으로 본다는 것[見],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이해를 한다는 것[解]. 헤아린다는 것[思]을 포함하는 함의도 있었고, 심지어 느낌[受]이나 인식[識]도 본다는 의미에서 풀이가 되기도 했다. 그뿐인가. 불교에서는 마음으로 본다는 것[觀]을 제일로 중요한 지혜로 여겼다. 뇌과학에서도 시각에 대한 연구가 가장 많았고 활발했다. 시각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감각이라는 이유도 있어, 뇌 연구의 중요 핵심 과제였다.
먼저 본다는 것에 대한 최근 뇌과학 연구의 결과를―일반에서 이해를 하기에는 매우 어렵고 복잡하게 보이나―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본다는 것[眼識]은 사물에서 발산되는 빛 에너지를 눈[眼根]이 활동전위라는 전기로 변환하면서 시작된다. 사물에 대한 시각정보처리는 맨 먼저 망막에 상이 잡힘으로써 시작된다. 망막의 세포에서는 빛이 광색소 분자를 때리면 광 에너지가 흡수되고, 분자는 전기전류를 변화시킨다. 망막에서 변화된 활동전위는 시각로(optic tract)를 따라 외슬핵(lateral geniculate nucleus)으로 보내진다. 외슬핵이란 망막과 피질의 중간에 있는 핵이다. 이는 망막 정보를 받아들여 이 정보를 뇌 후두부에 있는 일차시각피질(약자로, V1)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 외슬핵에 있는 신경섬유는 상구(superior colliculus)를 향한 커다란 투사를 하고, 여기서 수많은 비주류 신경절세포들은 시각적 정보를 여러 작은 핵들의 잡다한 집합에 중계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곧 눈 깜빡임, 응시, 동공 조절, 일상의 리듬 등을 조절하는 기능들을 매개한다.
다시 말해 눈에서는 50가지가 넘는 망막의 세포들이 시각정보를 받아들인다. 이 세포의 축삭들은 여러 개의 나란한 통로를 따라, 일련의 일시적인 전기 펄스들로 부호화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허술한 비유를 들자면, 이들은 흑/백, 적/녹, 청/황 대립 정보를 전송하는 사진기 한 대씩, 시간에 따라 명암이 변화되고 위치를 강조하는 통로 등, 십여 대의 사진기로 구성된 한 세트라 할 수 있다. 이 모두는 외슬핵으로 보내지면서 의식적 시각 경험의 토대를 이룬다. 여기서 한 묶음의 소수 신경절세포는 뇌간의 외진 곳으로 투사 되어 주시, 동공의 직경 등 기본적 기능들을 조절하게 한다.
시각정보처리 과정에서, 외슬핵의 신경세포들은 그들의 신호를 일차시각피질(V1)로 보내는데, 이곳은 피질 시각영역의 첫 번째 장소로, 다시 말해 시신경의 신호들은 외슬핵, 시상 등을 거쳐 V1에서 안정되고 균질하고 그럴듯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말할 것도 없이 만일 시각피질이 없거나 손상을 입게 되면, 시각적 인식은 불가능해진다. 만일 눈이 없거나 눈 기능을 상실했다 해도, 컴퓨터 칩을 통해 시각피질에 시각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면 보는 일은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안식(眼識)의 중요 관문은 일차시각피질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부연 설명을 하면, 좌측 외슬핵은 좌반구의 V1에 투사하고, 우측 외슬핵은 우반구 V1에 투사한다. 시야의 중심과 부분은 후두엽(뇌의 뒤쪽 피질)의 맨 뒤쪽으로 표상되고, 시야의 주변 부분들은 후두엽의 맨 뒤보다 좀 더 앞쪽으로 표상된다. 따라서 좌측 V1은 전체 우측 시야에 대한 망막형 지도를 가지며, 우측 V1은 전체 좌측 시야의 지도를 갖게 된다. 이처럼 시각피질에 시각정보들이 온전히 투사가 되어야, 비로소 시각 지도가 만들어진다. 망막에서 시작된 세포의 발생전위를 통해, 여러 경로를 거쳐 결국 시각피질에 시각 지도가 만들어져야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V1 신경세포들은 사물의 윤곽과 모습을 구성하는 시각 특징의 방향에 대한 신경 표상을 담당하지만, 이곳 신경세포들은 다른 여러 고위 시각영역들 쪽으로도 신호를 보내는데, 예컨대 색채지각에 특히 중요한 피질 쪽으로 보내기도 하고, (그 정보를) 다시 물체 재인(recognition)과 관련된 복측(腹側) 시각경로라 부르는 고위 시각영역으로 보내지기도 한다. 아울러 중측두(中側頭) 영역이라 불리는 영역으로도 보내지는데, 이 영역은 움직임 지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쪽 일부 신경세포들은 다른 많은 움직임 방향을 통합하여, 물체의 전체적인 움직임 방향을 계산한다. 다시 말해, V1에서 더 높은 영역으로 가는 투사 경로에서, 복측 시각경로란 V1에서 측두엽으로 가는 경로로서 물체가 ‘무엇’이냐를 표상하는데, 배측(背側) 경로란 V1에서 두정엽으로 가는 것으로, 물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표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V1에서 온 신호는 배측(동쪽) 경로를 거쳐, 중측두 영역이나 배측 외선조 영역으로 가고, 그곳에서 다시 두정엽의 많은 영역으로 전파된다. 배측 경로는 시각계가 사물들에 대해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사물의 위치를 표상하는 데 중요하다. 중측두 영역이나 배측 외선조 영역은 시각적 움직임과 입체 길이를 처리하는 데 중요한 반면, 두정엽의 특정한 영역들은 안구의 움직임이나 시각 공간에서의 특정한 위치로서 손의 움직임을 안내하는 데 특수화되어 있다. 후두엽의 외측 표면에 놓여 있고 중측두 영역 바로 뒤쪽에 외축후두 복합체(lateral occipital complex)라는 곳이 있는데, 이 영역은 물체 재인에 강력하게 관여돼 있다. 이 근처엔 방추얼굴 영역이라 불리는 영역도 있는데, 이곳은 사물의 다른 범주에 대한 반응보다는 얼굴에 대한 반응에 훨씬 강하다. 이 영역은 얼굴의 의식적 지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해마 위치 영역은 또 다른 강력한 범주의 선택적 영역으로서 집, 지형물, 집 안 풍경, 집 밖 풍경에 반응을 제일 잘한다.
요약하면, 뇌의 일차시각피질(V1)은 의식적으로 사물을 시각적으로 지각하는 우리의 능력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피질 시각영역들은 의식적 시각 경험에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데 곧 방향성, 움직임, 얼굴, 사물들의 특정 시각적 자극들을 처리하는 데 관여하는 많은 뇌 영역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른 많은 신경세포들도, 의식적 자각 활동에서 역시 똑같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각적 인식/의식에서는 혼자 감당하는 단일한 영역이 따로 있지 않다. 대신 많은 뇌 영역이 같이 일하며 의식적 자각/인식을 해내고 있다는 게 일반적으로 일치된 의견이다. 또 주의집중에 관여하는 뇌 영역들도, 시각이나 다른 감각 입력에 반응하고 지각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본다는 것은 뇌의 일차시각피질에 시각 지형이 생긴다는 것으로, 그것으로써만 시각적 자각/인식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일차시각피질에서 시작된 감각의 분석은 고차원으로 올라가면서, 즉 정보의 분석이 깊어지면서 다른 감각 정보와 연결되고 혼합된다. 이런 뇌의 영역을 연합영역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망막에서 시작된 시각정보는 중간에 감각, 운동, 감정 등 여러 가지를 중계하는 시상이라는 곳도 거쳐 가는데, 감각을 맡는 시상 세포에서는 두 갈래로 정보가 전달되고 있다. 하나는 편도체로, 다른 하나는 대뇌의 감각 피질로 전달이 된다. 편도체는 느낌[受] 곧 감각질(qualia)을 생성하는 물질적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곳이다. 요컨대 편도체를 통해 우리는 보는 대상에 대한 느낌이라는 정신적 인식이 가능케 된다. 또 시각정보는 편도체에서 시상하부 및 뇌줄기로 퍼져 가 몸의 반응을 일으킨다. 편도체에서 감지된 느낌도, 몸의 반응을 바탕으로 한 감정도, 그 정보는 이어 전대상 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전전두엽으로 전달이 되어야, 소위 의식/인식이 가능케 된다. 다른 말로 이런 일련의 신경회로의 연합과 동시에 뇌 활성화로, 이 영역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대상을 알아보고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의식/인식은 이뿐만이 아니다. 일차시각피질에 생성된 뇌 활성은 측두엽의 아래쪽을 따라 앞쪽으로 나아가 종국에는 해마에서 그 대상에 대한 모양새가 완전히 분석된다. 즉 표상(representation, percept)이 생성된다. 전전두엽에 (정보 전달이 되어) 포섭된 이 표상에 대해, 전전두엽은 ‘기억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정보들과 대조를 하여, 이 표상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판단하여,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想]. 우리가 보고 지각하고 있다는 것은 대상을 안다는 말이고, 이 아는 과정에서 기존의 경험에 의한 기억 정보가 무의식적으로 뒤따른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므로 대상을 볼 때, 그 즉시 어떤 느낌과 함께 자신의 과거 경험(기억과 감정)을 투사함은 대상에 대한 생각이며 판단이라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신경회로에서, 우리는 거의 동시에 다음에 어떻게 무슨 행동[身口意]을 할까를 진행[行]시키기도 한다. 시각정보는 앞서 말했듯 대뇌의 운동피질로도 정보가 전달되어, 수많은 운동신경 세포가 프로그램에 따라 시간적 순서를 지키면서 그 작동을 격발시킨다.
뇌신경회로의 이 같은 측면을 생각하면, 우리는 보는 대상에 상응하여 자신의 과거 경험, 즉 기억을 불러들인다는 일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따라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보고 있는 대상에 무의식적/비의식적으로 개인의 과거 감정에 뒤얽힌 ‘기억을 투사하여 보게 되는 것’이 필연적인 뇌신경회로의 작동이기에, 우리가 흔히 어떤 사람/사물을 보고는 바로 이것이 옳다, 그르다, 어떻다고 판단하는 일이 평범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 패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식이란 인식 대상에 대한 앎을 말한다. 인식이란 대상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이름을 붙이고 개념화하는 과정을 포함시키고 있다. 대상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흔히 지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인지란 인식보다 넓은 뜻으로 안다는 의미로 통용이 된다. 뇌과학에서는 보다 깊은 의미의 앎이나 통합적 앎, 곧 지혜라는 것은 전전두엽에서 그 역할을 맡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생각/사유라는 것은 인식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떠올라야 진행이 된다. 이런 생각/사유/인식의 무더기를 불교에서는 식온(識薀)이라 부른다. 통상 우리는 이 식온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사실 육식(六識)에서 식은 대상을 감각한 의식을 염두에 두고 쓴 말이고, 오온 가운데 식온(識薀)은 수온, 상온, 행온을 거쳐서 일어나는 심(心)의식이기에, 우리는 통상 이 식온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4. 전통적 불교인식론과 뇌과학적 소견을 비교해 볼 때
먼저 유부와 관련된 견해다. 유부는 수, 상, 행, 식이 함께 자성(自性)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자성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본래 갖춰진 성품/성질이 있다는 말이다. 자성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 그러나 이런 관점은 뇌과학의 입장과 비교할 때, 그 이해에서 차이가 있다.
불교인식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과로서 연기가 되는 조건이나 여건들에 대해선 그것들이 ‘실재’하는 것으로 언급이 되어야 형식상의 언술이 가능해진다. 뇌과학에서도 마찬가지 이치로, 흔히 원자나 분자, 신경세포, 신경회로 등을 흔히 언급하는데, 이때 이런 요소요소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일관되게 기술되고 있다. 뇌과학의 기본 입장은 유물론이기에 요소요소를 마땅히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제반 감정/인지/행동은 그러한 신경세포나 신경회로들의 작용 내지 표현인 것으로 해석이 되는 바이고, 여기서 그 신경학적 상관물은 그 인과에서 중요한 매개체인 것이며,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유부에서는 수, 상, 행, 식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과 비교할 때, 뇌과학과는 그런 관점에서 방향의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유부와 달리 뇌과학에서는 (주관적으로 보이는) 상, 행, 식을 실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연기적 그물망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다시 말해 경(境)과 근(根)과 식(識)이 하나가 됨에 일어나는 것으로, 요컨대 수, 상, 행, 식은 뇌 안에서의 연기의 산물인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예시했듯 안식도 그런 양상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뇌과학에서는 수, 상, 행, 식에 각자 따로 자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요소의 실재를 인정하는 뇌과학이나 불교인식론의 입장에 대해, 대승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요약/정리될 수 있을 법하다.
길장(吉藏)은 《성실론》 202품을 살펴보면서, 불교인식론(소승불교)의 특징에 대해 “(그들은) 단지 실(實)로서 가(假)를 분석하여, 공(空)만 작용하고 (있다고 보면서) 실(實)을 간과할 뿐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색(色)이 소멸하여 공(空)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니 (그들 논증/해석에 따르면) 색의 자성이 그대로 공인 것에 대해서는 해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거기(소승불교)에는 불이(不二)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실(實)이란 요소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봄이요, 가(假)라 함은 주/객 등을 말함이고, 그런 논증을 하는 가운데 공(空)의 작용을 말함, 다시 말해 요소들이 실재한다는 가정의 실로서 가, 즉 주/객이 실체가 없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니, 그게 바로 색이 소멸하여 공이 된다는 논증을 편 꼴이 되는 셈이다. 즉 색이 곧 공이라는 불이(不二)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다시 돌아가,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의 차이가 있다. 유부의 인식은 마음, 마음 작용이 동시상응(同時相應)한다는 주장을 한다. 다른 말로 이것은 감각여건인 색경(色境), 안근과 인식의 결과인 안식이 시간적으로 동시적으로 발생, 즉 동시적 인과관계에서 생긴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경량부의 주장은 다르다. 마음과 마음 작용은 차례로 계기할 뿐, 서로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모든 마음 작용은 차례로 생기하는 것이지 동시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인과는 동시적인 영역 속에 있는 두 사건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이시적(異時的)인, 즉 시간을 달리하는 두 사건에 대한 관계다. 그리고 경량부에서는 본다는 것에는 안근과 색경 등의 객체적 여건 그리고 빛과 같은 간접적 조건 등이 모여서 본다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인데, 이런 직접적 경험에는 보는 주체도 없거니와 보이는 대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법의 인과뿐이다. 여기서 ‘본다’는 사실은 결과[眼識], 여건으로서의 안근과 색경은 원인, 그리고 이 둘은 시간을 달리(異時的으로)하여 인과를 맺는다는 것, 그리하여 주체나 대상은 단지 ‘본다’라는 사실의 두 측면의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즉, 경량부에선 이처럼 이시적 인과관계를 근, 경-안식 관계에서는 물론 촉-수의 관계에까지 확장하여 적용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뇌에서 시각정보처리는 각 단계마다 전기적 신호가 한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의식하기 불가능한 정도인 수 밀리초의 시간이 소요된다. 코흐는 빛으로 유발된 활동의 물결파는 망막을 떠나 35밀리초 안에 V1의 거대세포 입력 층에 도달한다고 했다. 각 상으로부터 한 비트의 정보를 추출해야 하는 하측 피질과 그 너머의 주변에 있는 그물망을 자극하기 까지는 100밀리초가 약간 더 되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이럴진대 뇌과학은 색경과 보는 과정과 안식의 결과인 ‘봄’에는, 이시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안식이 성립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유부의 동시상응설에 대한 주장이 틀린 것이라 볼 수도 없다. 최근 뇌과학에선 시각정보는 그런 이시적 인과관계의 맥락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 뇌의 전두부는 비상하게 확장된 의식의 광활한 작업 공간이다. 이곳은 의식하는 대상을 둘러싼, 정신적 감각을 보완하는 신경계이다. 이는 뇌의 넓은 영역들 사이를 가로질러 수십억 개의 신경세포들이 초당 30~80번 맥동하는, 안정되고 멀리 뻗어가는 감마파로 동기화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지금 무엇을 ‘본다’고 할 때, 뇌는 여러 부분들이 동시에, 함께 초당 30~80번 맥동하며 동조화(진동 개념임)/동시상응이 일어난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동조화 현상은 깊은 수행이나 명상을 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임을 과학적으로 밝힌 바도 있다.
유부나 경량부의 이런 관점의 차이에 대해 우리 현대인들은 사변적으로 다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뇌의 동조화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이해를 한다면 인과의 동시성이요, 봄의 과정을 신경회로 측면에서 구성적으로 분석해보자면 이시적인 인과관계도 성립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5. 누가 보는가 vs 무엇이 보는가의 문제
무엇을 본다고 할 때,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전통적인 불교인식론에선 보는 주체도, 객관의 대상도 ‘봄’에 관여되는 연기적 조건일 뿐인 것이며, 결과는 ‘봄’을 의식하는 앎만 있을 뿐, 주체와 대상을 별도의 실재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뇌과학 역시 보고 있는 ‘내’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나’라고 하는 것의 뇌 신경학적 상관물을 입증할 수 없어서다. 다만 가아(假我)로서의 신경망, 즉 이야기하는 가상으로서의 주체, 이야기로 꾸며진 ‘나’가 이러저러한 신경회로에 잠복해 있을 거라는 추정은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시각정보처리 과정의 신경회로에서, 우리는 보는 대상에 상응하여 자신의 과거 경험, 즉 기억을 불러들인다는 일이 동시에 (신경회로에서) 격발이 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봄에 있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봄’에 내가 본다는 수, 상, 행, 식이 (자연스럽게) 동시에 끼어드는 신경망 활성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렇듯 보고 있는 대상에 대해, 무의식적/비의식적으로 개인의 과거 감정에 뒤얽힌 기억을 투사하여 보게 된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주객(主客)의 분리/의식이 자연스레 생기게 되어 있다.
또 하나,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개체는 생명 유지와 종족보존이라는 욕망이 최우선이기에, 생존을 위해 오랜 세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의 위협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뇌의 구조나 기능적 측면에서) 여러 층위에서의 진화를 거듭해 왔을 터이고, 인간 역시 그런 두려움이 개체의식 형성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더욱이 인간에게 ‘나’라고 하는 개체의식은 특히 언어를 통해 발달되고 더욱 공고화됐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관습에 젖어 우리는 흔히 무엇을 볼 때, ‘내가 그것을 본다’는 앎에 자연스레 체질화가 된 것이리라. 무아를 강조하는 불교에서도 이런 자아의식/개체의식을 부정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통상의 우리의 자아의식을 참나[眞我]가 아닌 가아(假我)로서 수긍하고 있다. 천태지의 대사는 이를 ‘가립(假立)의 나’라고 수긍했다.
시각인식에 관한 뇌과학의 소견은 본다는 과정에 대한 신경회로/신경학적 상관물에 대한 발견이었다. 그러나 ‘시각에 대한 의식’이 정작 어디에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뇌과학은 아직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의식이 없다면 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일련의 시각신경회로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만 작동되는 것이고, 의식/마음이 깔려 있기에 시각정보에 대한 자각/인식도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시각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본다는 것이 가능하고 본다는 말도 성립된다. 보고 있다는 것은 이 의식/마음의 바탕으로, 이 마음을 씀으로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직관적/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뇌과학은 이런 직관적 앎/의식을 과학의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아 왔다. 그러므로 뇌과학은 ‘봄[見]’에서, 더 나아가 보는 것, 다시 말해 그 너머를 본다는 것[觀[에 대해선 어떻게 표현할지 그 과학적 단서마저 찾지 못하고 있다.
물론 뇌과학에서 의식/마음 관련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의식/마음 자체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한 수준이다. 뇌과학 일반에서 말하는 의식(consciousness)이란 말에는 주로 깨어 있음/주의 집중하는 힘이란 의미가 다분하다. 반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의식/마음의 개념은 그것의 광대무변함이나 그것의 본질적 성품이 어떻다는 등과 같은 이해를 갖고 있다.
사실 대승불교/선불교에서는 시각으로 본다[見]는 것에 ‘진실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대상을 시각적으로 본다는 일상적인/일차적인 봄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적 봄보다는 오히려 의식/마음으로 봄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런 각찰(覺察)의 봄, 깊이 잘 살펴본다는 뜻에서 봄[觀]이 그것이다. 즉 시각이라는 시각적 관점을 빌리지만, 실은 직심(直心)으로 사물/법을 본다는 말이다. 뇌과학에선 없는 표현/말이다.
선(禪)에선 ’본다[見]’는 말을 빌려, 이와 같이 말한다. 진심/본래 마음을 본다는 것[觀]은 결국 본래의 우리 마음이 진공(眞空)이라는 것을 본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엔 동시에 묘유(妙有)로서, 온갖 공덕들이 원래부터 원만히 갖춰져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누구나 알 수 있는 이것을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하면, 초월/자비/사랑의 마음이 우리 안에 능히 갖춰져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만다.
관(觀)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는 바로 관심/관법을 줄인 말이다. 관법이란, 가령 의식의 대상 경계[六境]로 들리는 소리(예를 들어 ‘관세음보살’이라고 칭명(稱名)하는 염불수행을 포함하여)를 진여본성이 듣고 자각하는 것, 다시 말해 중생심의 소리를 자각하여, 듣고 있음 그 자체의 주인공이 바로 진공/불성/불심임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고도 한다. 또 시각적 봄을 관한다는 것은, 봄 자체를 자각하는 순수 의식이 활달하게 살아 있음을 알아채 ‘이놈’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앎에 이른다는 말인데, 그럼으로써 바야흐로 대상 경계가 사라지는(사물이 눈앞에 있어도 그것은 幻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철저히 깨달아), 진여일심의 지혜를 터득도 하게 된다는 도리를 두고, 관 혹은 관심/관법이라 부른다.
“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당연히 그것은 보지 않는 상태[不見相]가 아니다.” 즉, 본다고 하는 시각적인 작용이 객관적인 사물에 속하지 않는다면, 사물을 대상으로 본다[見]는 그 자체를 대상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도[不見]도 볼 수가 없다. 만약 대상 경계로 보지 못하는 곳[不見處]을 본다면, 그것은 보지 않는 상태[不見相]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더듬듯 다시 살펴보자. 즉, 보지 못하는 곳(眞空, 진여본심)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見]와 못 본다[不見] 하는 일을 모두 초월하는 일로, 보지 못하는 곳을 보게 되면, 바야흐로 (그 직접적 체험으로 말미암아) 자아(개체)의식/통상의 지각작용/중생심으로 대상경계를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마치 환화(幻化)와 같아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설법한 한 어구이다.
잘 알려졌듯 중생심/뇌의 지각작용으로 보고서 판단하는 일은 근본적인 인식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지(無智)다.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보지 않거나 하는 시각적 앎이란, 물론 안다와 모른다고 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바른 앎이 아닌 것이다. 뇌 신경회로에서 보듯, 시각적 인지의 과정에서 부해마 영역에서 비롯된 개인적 감정이나 왜곡된 기억의 투사로, 대상 경계/사물에 대한 바른 인지/인식을 어렵게 한다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이는 마치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오인한다는 옛 비유를 연상시키는데, 우리의 시각 신경 체계로는 늘 세계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이런 시각정보[見]에 대한 무지는 뇌과학 연구에서 보듯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을 드러낸 것이며, 대승불교에서는 이미 그런 봄(사적인 투사가 된 봄)에 편견/무지가 있음을 오래전부터 많은 비유를 통해 드러내 왔다.
경전에 “만약 내가 대상 경계로 보지 않는 곳을 그대도 대상 경계로 보지 않는다면, 당연히 보지 않는 것은 대상 경계의 사물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그대의 본성이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이미 보지 않는 곳을 대상 경계로 볼 수 없다고 한다면, 보는 주체인 본성은 객관적인 대상 경계의 사물에 속한다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존은 아난에게 진여본성은 객관적인 대상 경계의 사물이 아니고, 사물을 보는 시각 인식의 주체가 “바로 그대의 진여본성이다.”라고 설했다. 자아의식(주, 객이 분리된 개체의식)의 견해로 대상 경계를 볼 때, 자신의 견해로 보는 것은 진정한 정법안목의 견해가 아니다. 진정한 정법안목의 견해는 마치 자아의식의 삿된 견해를 여의고, 삿된 견해가 미치지 못하는 경지인데, 어찌 다시 인연(因緣)이다, 자연(自然)이다, 화합(和合)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겠는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는 ‘봄’에 대해 이런 중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인과를 중요 법으로 여기는 소승불교(전통 인식론)와 인과를 무시하진 않지만 인과를 초월한 대승불교의 차이를 이와 같이 드러내고 있다.
진심/(순수)의식만이 실재한다는 게 대승/선의 입장이다. 일체는 실재하지 않고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대승/선에서는 ‘봄’의 주인은, 개체의식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진심/의식이라는 것이다. 관[觀]을 통한 체험으로 진실성/믿음은 보다 확고해진다. 관자재보살도 오온이 공한 것을 관한 즉, 오온에 일체 자성이 없음을 확실히 깨닫고 나서 온갖 고(苦)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봄’의 주인을 불성이라 부르기도 하고, 다른 경우 현존 혹은 전체성이라 부르기도 할 것이다. 어떤 말로 ‘이것’을 부르든 ‘거기’에는 물론 그런 용어/의미/흔적도 없을 터다.
《대승기신론》에서 진여법신의 지혜는 일체의 언어(言說相), 명칭(名字相), 중생심의 반연(心緣相)을 초월한 경지라고 설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식(眞空, 진여법신)을 두고, 선종(禪宗)에서는 신령스러운 거울로 비유한다. 거울은 자아의식과 대상 경계에 대한 망심(妄心)을 텅 비운 무심의 경지에서, 보는 작용[見]과 보지 않는 작용[不見], 비추는 작용[照]과 비추지 않는 작용[不照], 즉 지(知)와 무지(無知), 긍정과 부정, 사량(思量)과 불사량(不思量)을 모두 초월하여,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경지에서, 자기 본분사의 묘용으로 일체의 사물을 여실하게 비춘다는 것이다.
공(空)의 마음/순수 의식은 단멸/허무의 공이 아닌 것이다. 직심은 봄[見]과 각찰하여 봄[觀] 둘 다를 포함하여 봄이다. 보는 마음의 주체는 견문각지로 일상의 지혜로 늘 활동한다는 것을 앎이다. 일체를 포섭하면서 이를 초월하되 항시 이 자리에 뚜렷하게 현전하여 항상 성성적적(星星寂寂)하게 깨어 있는 하나인 ‘그것’뿐임을 스스로 앎이다. 마땅히 이런 관[觀]에 관하는 자가 있을 리 없다.
6. 맺는말
뇌과학에서 본다는 일은 비유컨대 우리의 눈은 10여 대의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사진기들이 계속 ‘풍경’을 찍어대는 것이다. 사진기들은 시간 차이를 두고 정보를 여러 경로를 통해 상위단계로 전송한다. 영화는 1초에 20여 장의 정지된 화면을 연속으로 돌리게 되어, 하나의 동영상으로 보이게 한다. 우리의 뇌는 영화의 동영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각기 ‘풍경’을 찍어낸다. 우리 역시 그 연속된 정지화면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떤 일정한 지각이나 ‘풍경’을 계속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
요컨대 실은 밖의 사물이 연속해서 바뀐 게 아니고, 우리 마음 안의 인지/인식이 찰나로 나타났다가 찰나로 사라짐을 의식하지 못한 채, 대상 경계가 마치 지속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어진 어떤 시점에서 보는 것은 정적인 것이다. 밖의 세계가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마음 안에 표상되는 바를 통해, ‘나름 세계를 알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봄[見]의 실상이다. 뇌를 통해 우리는 마음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된 세계, 대개가 그런 ‘허상’을 보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시각적 봄을 실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시각적 봄에 대한 자각을 촉구한다. 시각적 봄이라는 가능한 봄을 통해 그 봄 자체를 보는 것, 다시 말해 시각 인식의 주체를 주의 깊게 각찰(覺察)/관(觀)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 삶의 주인공은 ‘누구’가 아니며,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시각적 봄에는 진정 내가 보는 아니라 가아(假我)인, 이야기하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도 동시에 알아채게 됨이다. 들음에서도, 느낌에서도, 생각함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야기하는 ‘나’ 너머에서 보고, 듣고 있는 자가 무엇인지를 자각/관(觀)해야 한다는 것이 대승의 진정한 가르침이다. ■
신승철 igu1848@hanmail.net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미국 텍사스의대 정신보건 연구교수, 연세대 의대 정신과 교수 등 역임. 정신건강 전문의, 신경과 전문의이며 시인. 주요 논문으로 〈한국인의 자살〉 등과 저서로 《연변조선족 사회정신의학 연구》 역서로 《아직도 가야 할 길》 등 다수와 시집 《기적 수업》 수필집 《나를 감상하다》 등이 있음. 현재 블레스병원 원장이며 연세대 의대 외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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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佛敎와 科學 - 腦科學과 佛敎, 본다(見)는 것을 중심으로 (신승철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