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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여명, 여명의 시조
장성진(창원대 교수)
1. 왜 문제가 되는가?
시조는 잘 알려진대로 한국문학사상 양식적 특징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정형시이다. 한국어로써 표출할 수 있는 최대치의 형식적 정제를 보여주며, 사유의 기반이나 작가의 성격 등에 대해서도 대체로 그 경향성을 설명할 수 있고, 그 설명에 어지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런 요소들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거나 확대되는 과정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으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시대 구분을 할 수도 있다. 큰 범위에서 고시조, 개화기 시조, 근대시조, 현대시조 등이 그것인데, 이들 사이에는 비교적 뚜렷한 경계가 보인다. 그렇기는 하지만 고시조의 경우에는 작품과 작자를 둘러싼 정보가 상당히 불명확하거나 허술하고, 이로 인하여 시가사는 물론 문학사 전체 체계 서술까지도 영향을 받게 된다. 시조를 그 흐름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 나아가 시조사를 정리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해명해야 할 과제는 시조의 형성에 관한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실존 인물이 작가로 기명되어 있고, 작품이 기록되어 전하고, 작품의 성격이 작가의 삶과 일치하고, 한 시대의 사상적 경향으로서 공통점이 많아서 논란거리가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초기의 작품일수록 작품이나 정보가 생산된 시대와, 그것이 기록된 시대 사이의 거리가 짧게는 200년, 길게는 400년 가까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작품과 정보를 해석하면서 이 거리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 하나의 관건이다. 실제로 이 거리를 극복하기 위한 논의가 계속되어 왔지만, 수많은 가설과 주장 사이에 좀처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발생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려 중엽설에서 16세기설 사이에 몇 시기가 추가되었으며, 선행 갈래로서는 민요에서부터 속요, 한시, 무가 등 어지간한 갈래는 한번씩 언급되었다. 작자 문제도 문헌이 발굴될수록 의혹이 커져 가며, 관련 음악에 대해서도 가설만 늘어간다. 이들 중 사실에 부합하는 논의가 틀림없이 있기야 하겠지만, 다른 주장에 대하여 차별화할 만한 결정적 증거를 내보이지 못하는 한 동의를 얻기는 어렵다. 시조에 대한 수많은 작품론, 작가론, 장르론, 율격론, 음악론 등이 전개되었지만 흐름에 대하여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적은 이유 중 하나가 이 문제 때문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장 해결책을 내놓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다고 덮어두고 갈 수도 없다. 남들이 힘들여 규명한 바를 차근차근 들여다보는 데서 작업을 시작해야겠지만, 기존의 논의를 다 제시하기도 어렵거니와 일일이 비판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도 몇 가지 중요한 쟁점들을 간단히 살펴 봄으로써 문제의 소재라도 파악해야겠다.
2. 몇 가지 접근방범에 대한 검토
시조는 하나의 문학 장르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르의 요소인 형식, 양식, 사회적 수용, 음악적 실현 등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이 중 형식이나 양식은 쉽게 눈에 띄지만 사회와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며, 음악적 실현은 자취를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많은 의견이 제시되었다.
2.1. 음악적 관심
시조와 음악과의 관계는 밀접한 것이지만, 가곡창(歌曲唱)으로 불리기 이전의 단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자료가 거의 없다. 조선 전기의 만대엽(慢大葉)에까지는 근거를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이 시조를 위한 성악곡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1572년에 간행된 《금합자보(琴合字譜)》와 1610년에 간행된 《양금신보(洋琴新譜)》에 시조형의 작품이 5장과 여음으로 구분되어 실렸다는 점에서 시조가 이러한 음악에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2차적인 것이다. 만약 이런 종류의 음악에 얹히기 위해 시조가 개발되었다면 형식이나 짜임이 전혀 다른 시여야 한다. 시의 내용은 틀림없는 3장 구조인데 음악은 5장이다 보니 아주 어색하다. 따라서 시조의 형식은 만대엽 이전의 음악과 어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고려의 음악과 관련하여 폭넓은 검토를 한 권영철은 <정과정곡>을 얹어 연주하던 진작(眞勺) 계열의 악조가 근간이 되어, 후대에 분화하면서 전강‧중강‧후강은 다른 음악으로 발전해 가고, 대엽‧이엽‧삼엽‧사엽‧오엽이 다섯 장으로 발전하면서 가곡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다시 초삭대엽‧이삭대엽‧삼삭대엽의 각 오장으로 발전하여 가곡이 되고, 뒤이어 시조창이 파생되었다는 계통을 세웠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미 고려 중기에 음악으로서 시조창의 원류형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의 갈래로서 시조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오엽에 해당하는 정과정가의 노랫말은 시조의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음악적 연원에 대한 후속 논의를 열어주었다는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보다 구체적 논의는 성호경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연장체의 고려가요인 <북전(北殿)>이 조선조에 해체되어 몇몇 문헌에 분산되어 전한다고 보고 이것을 복원하여 소위 <원북전> 재구를 시도하였다. 고려 후기 충렬왕대에 지어진 <후전진작(북전)>이 조선 성종 때인 15세기 초에 개찬되고, 그 원사는 해체되어 16세기 문헌인 《금합자보》와 후대의 가집인 《병와가곡집》, 《청구영언》 등에 분산 수록되었으므로, 그것이 진행된 시기는 15세기말에서 16세기 전반으로서, 14세기의 고려시가에 이미 시조형에 접근하는 형태적 면모를 지니는 시가 양식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추론과 복원이라는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이론을 통하여 현전 작품과 원작품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성과를 보여준다. 이렇게 음악적 연원과 계승 관계를 통하여 시조의 연원이 고려 중엽이나 후기에 가 닿지만, 그 노랫말로서 시조의 원형은 결국 16세기의 《금합자보》에 모습을 보인다. 이 악보집에 실린 작품을 석 줄로 배열해 보이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다.
오리 오리나 일에 오리나 져므디도 새디도 오리 새리나 일댱샹의 오리오쇼셔 <평조 만대엽>
흐리누거 괴시어든 어누거 좃니져러 젼젼로 벋늬믜 젼로 셜면 가론 범그러 노니져 <평조 북전>
앞서 살펴본 이론들에 의해서, 만대엽과 북전이 고려의 음악을 계승하였으며, 그 음악의 노랫말이 착실하게 전해졌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보면 시조의 원형으로서 모습을 상당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시조의 원형이 고려조에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함께 그 원형은 후대의 전형과 상당히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증거이다.
2.2. 문헌적 관심
대부분의 문화사 영역 연구가 문헌 찾기와 해석 작업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문헌 기록은 신빙성과 권위를 가진다. 또 그런 만큼 기록의 진위와 행간의 의미를 찾는 일도 중요하다. 시조도 작품 자체를 포함한 많은 정보들이 이러한 기대와 비판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 많은 가집의 서발문(序跋文)과 개인 문집 속의 관련 기록에서도 시조의 형성에 관한 정보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관심의 소재 때문이다. 시조를 시이자 하나의 갈래로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노래이자 개별 작품으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장르에 대한 체계적 언급은 적고 그 전개 양상도 보여주지 않지만, 소략한 정보라도 잘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가집의 서발문은 주로 가창과 관계되는 이론 또는 가객들에 대하여 다루고 있지만, 작가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서 시조 형성의 간접적 정보를 보여준다. 잘 알려진대로 많은 가집에 고려말 이후 인물들의 작품이 실렸으며, 청구영언을 비롯하여 여러 자료에 “고려말로부터 국조 이래로 명공 석사에서부터 여항과 규수, 무명씨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수집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잘 베껴써서 책을 만들었다.”는 식의 기록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작가나 시기에 대한 고증으로서는 턱없이 소략하지만, 수집과 정리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므로 일단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기록은 개별 작품 말미에 곁들여진 소개이다. 유명인의 경우 작가에 대한 정보를 몇 줄 소개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창작 과정에 대한 사실을 기록해 두기도 하였다. 이런 기록은 대부분 18세기의 가집 편찬자가 한 것이 아니고 앞 시기의 문헌에서 끌어와서 신빙성을 높이려는 의도가 보인다. 원자료가 역사서나 공식 기록이 아니고 악부나 잡록류이기 때문에 논증의 근거로서는 의미가 약하기는 하지만, 작품의 내용과 사상에 대한 정보는 유용하다. 다만 악부 또는 가집에 기록된 모습이 원형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 요소가 더 많다. 문헌으로서의 진정한 권위를 가지는 것은 16세기 중엽 학자들이 쓴 서발문이다. 이현보, 주세붕, 이황 같은 학자들이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시조를 창작하고, 곁들여 시조론을 쓴 데서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유용한 정보가 들어있다. 그 중에는 시조의 의의를 지니는 몇 가지 언급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농암 이현보는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까지 살았던 학자 관료였다. 특히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만년에 은퇴하여 고향에 머물면서 시조를 창작도 하고 개찬도 하였는데, 그 중 <어보가발문>에서 개찬 경위를 밝혀 두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하다.
① 두 종류의 <어보가>는 그 작자를 알 수 없다. ② 만년에 고향에 은거하면서 이 노래를 얻었는데, 그 초탈한 의취에 반하여 지극히 아끼고 즐겼다. ③ 다만 말이 차례가 맞지 않기도 하고 중첩되기도 하였다. ④ 한 종류는 12장을 9장으로 줄여서 장가로 만들어 음영했다. ⑤ 한 종류는 10장을 5결로 줄여서 단가로 만들고 엽을 붙여 노래 불렀다.
여기서 시조와 관련하여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③과 ⑤이다. 조선조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날에 보아도 그 뜻이 분명하지 않은 곳이 많고 시어나 구절이 중첩되는 것은 고려가요의 중요한 특징이다. 12장 또는 10장이라는 연장체도 역시 고려가요의 일반적 구성이며, 민요를 편장하는 과정에서 맥락이 잘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5결은 두말할 것도 없이 판본과 여러 가집에 전하는 연시조인데, 단가로 만들고 엽을 붙여 노래로 불렀다는 점에서 진작 또는 북전 계열의 음악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16세기 중엽에 와서, 음악에 조예가 있는 이현보 같은 인물에 의해서, 이전의 시가 시조형으로 공고히 굳어지는 계기를 맞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같은 작가의 <어보가>보다 7년 정도 앞서 지어진 <효빈가> 등 <귀전록> 세 편에서도 이미 완전한 시조의 전형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현보 시대에 시조에 대한 문학적 음악적 틀이 상당히 견고하게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현보보다 거의 한 세대 뒷사람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시조의 또다른 전형을 마련한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 발문>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는 우리 동방의 가곡이 교화의 관점에서 보아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별(李鼈)의 <육가(六歌)>를 대략 본떠서 언지(言志)를 내용으로 한 전육곡과 언학(言學)을 내용으로 하는 후육곡의 <도산십이곡>을 지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고 들어보았으며, 춤추게 하고 바라보면서 완성해 갔다는 과정도 밝혔다. 여기서 이별의 육가를 본떴다는 것은 육가계의 구성과 형식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16세기 중엽에 시조가 다양한 음악적 모색과 함께 장르적 정체성을 계속 모색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3. 사회 사상의 관점
시조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말, 조선초, 조선 중기 등 이견이 있지만, 그 주체에 대해서는 신유학자들이라는 데 거의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이들을 부르는 이름이 신유학자, 신진 관료, 성리학자 등으로 조금씩 다르지만 관심 영역의 차이일 뿐 실제로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큰 틀에서 보면 이 세 시기 모두 유학이 사회의 주류 사상으로 확립되는 때이고, 시조의 작자로 기록된 인물들도 또한 각 시기 유학의 중심에서 활동한 학자 문인들이다. 그렇다면 시조의 형성 시기를 어떻게 설정해도 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유학의 사회 지배와 시조의 형성 사이의 관계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되어 버린다. 우선 고려말의 유학과 시조의 형성을 관련시키는 논의는 일찍부터 시작되기도 하였고, 광범위하게 동의되기도 한다. 원 지배의 후기에 이르면 정치와 학문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특히 안향이나 백이정 같은 인물들이 원에 유학하여 성리학을 도입하여 학문의 풍토를 바꾸었다. 이제현을 거쳐 이색에 이르면 유학은 하나의 학문 체계이면서 동시에 사승관계를 통하여 전승되는 제도로 발전하고, 나아가 이들이 학문적 실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문화의 경향을 쉽게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편리한 상황 설정과 설명 방식이지만 실증할 기록은 찾기 어렵다.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 16세기의 인물과 사회이다. 대표적으로 김수업은 각종 문헌을 검토하고 시조가 16세기에 와서야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에 중요한 요소로서 사회성을 들었는데, 문학은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낸다는 전제를 수용하였다. 14세기는 세상이 매우 혼란하던 시기로서, 시조처럼 균형 있고 질서 잡힌 정형의 노래가 그렇게 어수선하고 무너져 내리는 시대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사리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같은 논리로, 16세기에 들어서는 비로소 질서와 안정을 이념으로 내세워 새로운 왕조를 세웠던 사대부들의 소망이 잠시나마 이루어졌으므로, 16세기 중엽 어름에 시조가 뚜렷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물론 온전히 시조로서의 가락과 짜임을 갖추지 못한 채 있었던 기간을 생각하여 15세기에 시조가 싹텄을 것이라는 여유를 두기는 하였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현보나 이황은 동시대 사람으로서 긴밀한 교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시조의 문학과 음악 양면에 걸쳐 새로운 전형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이현보는 이전의 성악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던 중 전래의 <어보가>를 발견하고, 문학적으로 세속을 초탈한 시의를 수용하면서, 음악적으로 정리하여 엽을 붙여서 나름대로 전형을 완성하였다. 이황은 온유돈후하고 교화에 알맞은 시를 창작하고 음악은 물론 안무에까지 힘을 기울여서 또 하나의 전형을 마련하였다. 그런가 하면 동시대의 다른 유학자인 주세붕은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그곳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오륜가>를 지어서 보급하였다. 시의 형식이나 음악의 종류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고, 백성들을 상대로 하였으니 이미 잘 알려진 시형과 음악을 활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16세기 중엽의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시조를 통하여 유학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이것을 하나의 새로운 시도로 여겼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들의 기준에서 보면 이에 앞서 이루어진 시조에서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고 여겼거나, 아주 미흡하다고 여겼다는 뜻이다. 왜 그랬을까? 16세기의 유학자들이 14세기 선배들의 작품을 보지 못해서일까? 실제로 그 이전에는 시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일까? 이들의 사상이나 학문적 계통이 선배들과 달라서일까? 이러한 가정은 어느 것이나 성립될 수도 있지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시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었다면 문제가 없지만, 보지 못했다거나 사상이 달라서 못마땅하게 여겼다면 문제가 아주 커진다. 도학(道學)이니, 토통(道統)이니, 사림(士林)이니 하는 근본적 가치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가정은 14세기의 시조와 16세기의 시조가 그 구비 요건에서 차이가 있었으며, 두 시기 유학자들이 시조 작가로서 가지는 관심 영역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궁색함을 곁들이면서 논의해온 바를 통해서 시조 형성에 적용해 보면 몇 가지 상황이 보인다. 시조가 노래로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의 음악과 만난다. 그러나 특정 곡조와 불변의 대응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계열 음악의 다양한 양식과 결부되면서 시대에 따라 변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로 인해 동시대 또는 다른 시대의 시조 형식에 편차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또 이현보나 이황이 힘주어 말했듯이 시조는 성인의 경전도 아니고 악장으로서 구속력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학자인 작가들이 관심 영역에 따라 주제나 용도를 선택하였다. 이로 인해 앞 시기 선배들의 경향과 다른 주제 영역을 창출한다는 관점에서 변개가 쉽게 이루어졌다.
3. 작품 검토
3. 1. 고려시적 색깔
고려와 조선, 특히 고려 후기와 조선 건국초 사이에는 정치 사회 분야에서 신경질적 대립이 있었다. 대립이라기보다는 일방적 부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이끌려 문학도 이분법적 대립항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오래 지속되었다. 강명관이 상세히 논의한 바와 같이 고려⁄조선, 권문세족⁄사대부, 고려가요⁄시조의 대립 또는 대체로 단순화시키는 일은 고려가요의 향수 양상은 물론 시조의 형성에 대해서도 사실을 왜곡시키기 쉽다. 후대에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원형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전제를 수용하고 말하자면, 초기의 작품으로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은 우탁(禹倬)의 시조 두 편이다. 우탁은 13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중엽까지 살았으므로 중요한 활동은 주로 14세기 초에 이루어졌다. 조부 이후 향리 가계에서 과거를 통하여 사족화하였으며, 이들 계층의 일반적 경향에 합류하여 성리학을 받아들여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관료로 있을 때나 은퇴한 후에나 유학자적 면모를 잘 보여 주었다. 관직 초기에 영해사록이 되어서, 그 지역 백성들에게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던 팔령신(八鈴神)의 사당을 허물고 폐습을 고쳤으며, 감찰규정이 되었을 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 차림에 도끼를 들고 입궐하여 극간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향리인 예안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어 호를 역동(易東)이라고 할 정도로 학문에 침잠하였다. 그의 이력과 시조 창작을 곧바로 연결시킬만한 고리는 안 보인다. 관료로서 백성과 왕을 대하는 태도는 이 시기에 새로운 지식층으로 부각되는 신유학자들의 사고를 잘 보여주는 것이며, 치사 후에 후학을 가르치면서 고향에 은거하였다는 점도 유학자들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런데 이런 정치와 학문 활동에 있어서 뚜렷한 정파나 사승관계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문을 닫아 걸고 달포만에 주역을 해득하였다는 점 등으로 보아 사람과 사상에 얽매이지 않은 성향인 듯하다. 《동문선》 등에 기록된 몇 편의 시에서도 자연 풍광이나 도가적 분위기가 깔려 있다. 그의 시조는 흔히 <탄로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春山에 눈노기람 건듯불고 간업다 져근듯 비러다가 리우희 불이고져 귀밋 무근셔리를 녹여불가 노라
손에 가시를들고 손에 막들고 늙길 가시로막고 오白髮 막로치랴니 白髮이 제몬져알고 즈름길로 오더라
위의 두 작품은 다 21개 가집에 실렸는데, 앞의 작품은 12개 가집에, 뒤의 작품은 6개의 가집에 작자를 우탁으로 표기하였다. 나머지 자료집에도 다른 사람으로 작가명이 기록되지은 않았다. 가집의 성격에 따라 작가를 명기하기도 하고 않기도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작자를 우탁으로 확정한 것과 같다. 이렇게 다수의 가집에 수록되고 작가도 통일되게 명기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후대의 가객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레퍼토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인정하였듯이, 이 시기의 작품은 후대에 확립된 전형을 기준으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은 시조 작품이나 아니냐 하는 자격 여부를 따지는 근거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조의 시대적 성격을 따지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측면을 눈여겨 보아야 할까? 대체로 형식의 정제, 구조, 사상이나 표현 관습 등이 될 것이다. 먼저 형식의 정제에 대해서 보면, 이것은 가장 쉽게 손질할 수 있는 요소인데도 이 작품에서는 그다지 정교하게 변개되지 않았다. 가령 두 번째 자품 초장의 “가시를 들고”나 중장의 “가시로 막고”, “막대로 치렸더니” 같은 곳은 과음절로서 율격이 거칠다. 그것은 무리를 해서라도 자수를 맞추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하게 조절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시를 들고”는 조사를 빼고 “가시 들고”라고 해도 의미 표출에 전혀 지장이 없으며, 중장의 과음절 음보도 마찬가지이다. 초장에서 “가시”와 “막대”가 이미 제시되었기 때문에 그냥 “막는다”, “친다”는 동사만 살린 채 “막아내고”, “치렸더니” 와 같이 4음절로 조절해도 의미 표출에 지장이 없으며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형식에 비해서 구조는 당연히 지속성이 강하다. 다시 말해서 후대에 변개가 이루어지더라도 원래의 구조는 비교적 잘 유지되며, 동시대 작품들간의 공통성도 확보된다는 뜻이다. 시조의 구조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지만, 단순화시키면 초장과 중장이 1차 관계를 맺으며, 종장은 이를 종합하면서 주제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위의 작품들은 시조의 일반 구조를 잘 보여준다. 특히 두 번째 작품은 종장이 시의를 전환시키면서 종결하는 세련된 구조의 전형을 보여준다. 초장에서 양손에 가시와 막대를 들고 있는 정적인 모습이 현재의 시간과 함께 제시되었으며, 중장에서 늙음과 백발을 막고 치려는 의도가 미래의 시간과 함께 동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종장에서는 이미 백발이 와 있는 상태가 과거의 시간과 함께 인식되어 극적인 짜임새를 보여준다. 그만큼 구조가 견고하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표현의 측면을 보자. 이 작품의 묘미는 턱없는 과장과 화자의 희화적 행동에 있다. 초장에서 한 손에 가시를 들고 한 손에 막대를 든 모습은 자못 비장하다. 중장에서 그것으로 늙음과 백발을 막으려는 행위는 반대로 매우 희극적이다. 이것이 종장에서 뜻밖의 전환을 이룸으로써 극복된다. 원래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다든지, 그러니 받아들여야 한다든지 하는 열린 주제이다. 이러한 전체의 톤과 태도는 후대 유학자들의 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려의 가요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의 관습이다.
바삭거리는 세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소이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서야 有德하신 임 여의어지이다
玉으로 蓮꽃을 새기오이다 바위에 接柱하오이다 그 꽃이 삼 동이 피고 나서야 有德하신 임 여의어지이다
고려가요 중 <정석가>의 두 개 연을, 반복구를 제외하고 현대어로 옮기면 이렇다. 마른 모랫벌에 구운 밤을 심는 행위, 그 밤이 움이 돋고 싹이 나기를 기대하는 마음, 이미 정이 들어 있는 임과 이별한다는 의미 등이, 과장과 희화적 표현을 통하여 이별에 대한 거부라는 주제로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의 관습은 고려가요에서 자주 활용된다. 우탁의 탄로가도 형식과 구조만 달리하면 고려가요의 관습에 깊이 닿아 있다.
3.2. 엘리트의 인간적 고뇌
유학, 특히 성리학은 인간과 우주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어떤 측면을 극대화하여 실현하고자 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곤 한다. 한국유학사에서 고려말에 주목하는 까닭은 유학이 사회의 주도적 학문으로 확립되고, 일군의 학자들이 사승관계로 학파를 형성하며, 관계로 진출하여 새로운 체제를 만들려고 했으며 결과적으로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 않는다면 그 가운데 이색(李穡)이 있다. 이색은 고려가 기울어져 가는 때 태어나 조선왕조가 들어선 뒤 몇 년을 더 살다 간 유학자이다. 20대 초반에 원나라에 들어가 각급 과거에 합격하고 국제적 지식 사회의 중심부에 뛰어들었으며, 두 나라를 오가며 정치와 학문을 관장하는 지위에 올랐다. 교육, 학문, 정치를 연계하여 제도적 틀을 다져 한국적 아카데미를 설립하였지만 정치적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 소용돌이에 아카데미의 꿈은 무너지고, 마침내 왕위에 오른 몇 살 아래 친구 태조에게 “이 늙은이는 앉을 자리가 없구려.”라는 말을 하여 스스로 목숨을 재촉한 비운의 이상주의자였다.
白雪이 진 골에 구룸이 머흐레라 반가온 梅花 어 곳 퓌엿고 夕陽의 호을노 셔셔 갈곳 몰나 노라.
26개 가집에 수록되었으며, 그 중 21개의 가집에 작가를 이색으로 표기해 놓은 작품이다. 작자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두 겹 정도의 의미 층위를 보여주지만, 작자와 시대를 전제하면 세 겹 이상의 층위를 가진다. 그만큼 은유와 상징이 뛰어나다. 첫째, 자연에 대한 노래. 문자 그대로 매화를 찾아가는 심정이다. 이미 흰 눈이 내려쌓인 골짜기에 다시 구름이 험악하게 피어 천지가 암울하다. 그 속에 여린 매화는 이미 피었는지 아직 피지 않았는지, 피었다면 어디에 피었는지 알 수가 없다. 석양이 지는 절박한 시간에 찾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간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심경은 매우 안타깝다. 종장의 태도로 보아 자연에 대한 노래로 끝날 수는 없다. 둘째, 삶의 허무한 측면. 약간의 상징성을 떠올리는 일이다. 백설과 구름은 무생물이자 실상이 아니다. 눈은 물이거나 비가 얼어서 내리는 일시적 상태이며, 구름 또한 물방울이로되 잠시도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시시각각 변한다. 이 불안전한 것들이 사방 아래위로 뒤덮고 있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생명을 가진 꽃이다. 꽃은 생명을 가진 실체로서 씨를 낳아 영속할 수 있다. 이 꽃이 사람을 상징한다는 점이야 설명할 필요도 없다. 생명을 가진 인간, 제몫의 색깔과 향기를 가진 인간을 찾지 못하는 현실이다. 종일을 찾아 헤매었지만 방향조차 모르는 채로 해가 기운다. 참된 나를 찾는 구도의 노래일 수도 있고, 지기를 찾는 구인의 노래일 수도 있지만 다소 미완의 느낌이 든다. 셋째, 현실의 상황과 겹치는 해석. 실제로 이색이 이렇게 창작하였든, 이색의 원작을 손질했든 현실의 시공간에서 다시 보는 것이다. 이색의 삶과 겹쳐 보자는 뜻이다. 내려 쌓인 눈밭에 드리운 먹구름은 분명 세상을 뒤집으려는 불순한 무리들이다. 그것도 마냥 남이 아니라 이상 세계를 함께 꿈꾸던 이들, 이를테면 정도전을 필두로 한 자기 문하의 쿠데타 세력들이다. 그들이 무섭게 날뛰는 세상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에 비해 가녀린 매화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가 제자인 정몽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 없다.”고 평가했듯이 그 미더운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스러져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 제3의 정몽주를 찾지만 어림도 없다. 끝내는 갈 곳 없는 나 자신의 처지를 절망적으로 절규한다. 이 너른 천지에 나 혼자 헤맨다고. 이런 절망이야말로 이 작품이 보여주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것이 작품으로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개별적 의미를 보편화시키는 데 있다. 이색의 심경이 개인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세상에서도 사람은 꿈을 꾸고, 꿈을 실현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마침내 꿈이 이루어져 가다가 거대한 폭풍에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 갈림길에서 꿈꿔온 쪽에 놓인 험난한 가시밭과 위협에 공포를 느끼고 고민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지만 선택을 해야 하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이 한살이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민과 선택을 엘리트 유학자의 버전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3.3. 유학적 색채 부여
시가 본질적으로 그러하지만, 짧은 정형시인 시조는 압축미를 중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로서 문학성이 높은 작품은 흔히 초시간적인 재해석의 여지를 크게 가진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전형이 되기 쉽다는 뜻이다. 초기의 시조는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오래 전승될 소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들 엇더며 저런들 엇더리 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긔엇더리 우리도 이치 얼거저 百年지 누리이라
이몸이 죽어죽어 一百番 고쳐죽어 白骨이 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업고 임向한 一片丹心이야 가싈줄이 이시랴
초기 시조의 대표이자 시조의 전형을 구비한 작품들이다. 이방원과 정몽주가 주고받은 시조라고 알려졌으며, 그러할 개연성이 분명히 있다.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라는 이름도 붙어서 한국인에게 가장 유명한, 나아가 한국인이 모두 아는 작품이다. 여러 문헌에 소개된 창작의 정황도 상식에 속한다. 태종(당시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거사에 끌어들이고자 하여 잔치를 베풀고 <하여가>를 부르자, 정몽주가 <단심가>로 답하였다. 그 의지를 확인한 이방원이 사람을 시켜 정몽주를 살해하였다는 내용이다. 문헌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성보다는 노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야기가 곁들여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너무나 허술하지 않은가? 이 노래를 설명한 문헌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들의 생존 당시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17세기의 문인 학자인 심광세(沈光世)라는 이가 《해동악부(海東樂府)》를 엮으면서 창작 정황을 소개하고, 시조를 번역한 한시를 소개한 이후 여러 악부와 가집에 유사한 내용이 실렸다. 악부는 성격이 다소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민간의 노래를 한시로 번역하거나 역사적 사실 또는 민간의 소재를 취하여 한시로 창작한 작품들이다. 큰 갈래로는 한시이다. 이 시는 노래를 한시로 번역한 경우에 속한다. 다만 이미 널리 알려진 노래를 번역하였으니 실제로는 훨씬 이전부터 광범위하게 불렸음에는 틀림이 없다. 또 번역된 시형이 한시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시조를 축자 번역한 작품이 많은 것도 이 작품의 원형이 견고하다는 하나의 방증이 된다. 문제는 악부가 한시집이면서 문학서이므로, 역사적 소재를 취하기는 하지만 역사서처럼 사실 고증을 목표로 하지 않고 시와 관련된 내용을 흥미롭게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다는 점이다. 이 점이 작품과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한계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보여주는 시조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전형의 확보이다. 이방원과 정몽주의 원시가 이 시조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조선조 유학자들의 보편적 사고가 이방원․정몽주 버전을 견고하게 굳혀 두었다고 하겠다. 개인이 감당하기 버겁고 운명인 듯 천명인 듯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앞에서 왜소한 인간은 결연히 뜻을 정할 뿐이다. 달리 보면 이 점이 인간의 왜소함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여가>는 너무나 이방원적이고 <단심가>는 너무나 정몽주적이다. 조선조 선비들은 이 둘 중 하나를 자신의 자아로 삼을 수밖에 없다. 전형성을 이해하기 위해 작품의 주체를 바꾸어 가정을 해 보자. <하여가>가 정몽주의 속내이고, <단심가>가 이방원의 속내라고 가정하자는 말이다. 내치와 외교의 일선에서 이미 몇 차례나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든 원로 관료인 정몽주는 젊은 혁명가 이방원에게 이렇게 타이를 수 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겠는가?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다고 산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칡넝쿨에 다 덮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고려 조정에 불합리한 점이 있기도 하고,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겠지. 때로 선량하고 유능한 사람이 자리를 잃기도 하고, 무능하고 악한 사람이 거짓으로 꾸며서 한때 영화를 누리는 일도 있기는 하다네. 그렇지만 이런 것을 차츰 바로잡고 나가야지 극단적으로 피를 부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리도 저 칡넝쿨처럼 서로 얽히고 설키어 먼 앞날을 보면서 살아가세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정몽주와 뜻을 같이 했던 많은 사람들, 특히 두문동(杜門洞)에 숨어들었던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조선조에 벼슬하고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젊은 야심가이자 혁명의 중심에 선 이방원은 다른 말을 할 수 있다. “이 일은 목숨을 내건 일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다시 죽는다 해도, 백골마저 저 흙먼지 속에 바스라지고 혼백조차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새 세상을 열어갈 한 분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바꿔 세운 일도, 그러면서 이름조차 왕씨가 아닌 신우(辛禑) 신창(辛昌)으로 부른 일도 그들에게는 반역이 아니라 반정이라는 신념의 소산이고, 성공도 경험하였다. 바로나갔건 빗나갔건 소신에 찬 젊은 이방원이 이렇게 말해서 안 될 것도 없다. 이런 자리바꿈을 해보는 것은 초기 시조의 전형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 전형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교적 색채이다. 비단 조선시대의 유학자뿐 아니라 현대의 개인들일지라도 매순간 상반된 가치의 갈림길에 설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예를 든 작품들처럼 폐쇄적 상황 설정은 분명히 유학적이다. 앞의 작품에서 공간적으로 한없이 열어놓고도 시간적으로는 “백년까지”가 전부이다. 유학을 제외하고는 “백년”이 ‘시간의 전부’인 사유는 없다. 뒤의 작품에서도 몸, 백골, 넋을 가차없이 능가하는 “임”은 유학자의 임금 뿐이다. 정몽주의 시조는 어쩌면 다음 작품의 발상과 매우 닮아 있다.
구스리 바회예 디신 구스리 바회예 디신 긴힛 그치리잇가 즈믄 외오곰 녀신 즈믄 외오곰 녀신 信잇 그츠리잇가
<정석가>와 <서경별곡>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서 천년을 떨어져 살아도 불변하는 상대는 임금이 아니라 개인적 임이다. 이렇게 열린 고려가요가 유학자들의 삶 속으로 흘러들면서 시조의 전형은 굳어져간 것이다.
4. 맺는말
시조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재해석과 추정을 피할 수 없다. 음악적으로는 시조창의 전신인 가곡창 5장의 먼 조상이 고려 때 성립되었다는 설과, 고려의 연시조인 북전이 15세기 말 이후 해체되어 가집에 수록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전자는 3장 시형과의 괴리를 설명해야 하고, 후자는 복원을 실증하여야 한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야 할 점은 시조가 비악장의 전통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악”이 아닌 각 시기의 “가”에 적합한 형태로 불렸으며, 시형도 상당히 유동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문헌상으로는 16세기 초중엽의 기록에 유의해야 한다. 몇몇 유학자들의 글을 통해서 보면 이 시기에 시가의 효용론적 관점에서 시조형을 선택하고 정리하는 일에 열성을 보였다. 정황으로 보아서는 이보다 앞선 15세기 훈민정음 창제를 계기로 시조형이 견고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결국은 시조의 율격이 문제 아니라 구조가 오래 전부터 유지되었다는 뜻이다. 형식적 정제의 가능성을 다소 유보하고, 지나치게 유교 이념과의 일대일 대응을 고집하지 않고 고려말의 시조를 보면, 고려가요의 표현 장치를 유연하게 유교적 세계로 전환시켜가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선편을 잡은 우탁의 <탄로가>는 시조의 견고한 구조와 고려가요의 개방적 과장과 희화의 기법을 활용하여 삶을 해석하였다. 이색의 매화 노래는 진중한 자세를 통하여 인간의 고뇌를 형상하였으며, 작자가 유학자라는 정보는 시대적 의미를 더해준다.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는 고려가요적 표현 관습을 취하였지만, 유학적 사유를 가미하여 전형성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요소는 시조가 “악”이 아닌 “가”의 전통 속에서 시대적 흐름을 수용하여 전형을 형성해 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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