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
1. 한국 고성장 1등 공신은 스키타이와 몽골 유전자
가난했던 한국, 반세기 만에 세계사의 중심무대에 등장
지난 50년간 세계 GDP는 약 7배 증가했고 한국 GDP는 약 35배 증가했다.
그래서 한국은 가장 가난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던 나라에서 반세기만에 세계사의 중심무대에 등장했다.
중상주의시대 이후 「16세기 스페인」이 1940만㎢에 달하는 大식민제국을 건설할 당시(1500~1600년)
세계 GDP가 1.3배 증가하는 동안 스페인은 1.6배 증가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해양·상업강국으로(1500~1700년) 세계 GDP가 1.5배 증가하는 동안 5.6배의 GDP
확장이 이루어졌다.
「18~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고 3670만㎢의 영토를 지배하면서(1700~
1870년) 세계 GDP가 3.0배 증가하는 사이에 9.4배 증가했다.
「19~20세기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등장하면서 1870~1940년중 세계 GDP가 4.1배 증가하는 동안
9.5배 증가했다.
20세기 1·2차 세계대전 이후 공업화와 수출주도로 경제강국을 이룩한 일본은 1913~1970년에 세계 GDP가
5.0배 증가하는 동안 14.1배 증가했다.
세계적인 고성장으로 거대국가를 건설한 사례와 비교해보더라도 대한민국이 이루어낸 것은 역사가 기억할
작품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 15번째 국가로 발돋움했다.
우리 앞에 있는 14개 국가는 「미·중·일 등 G7 국가」 그리고 우리나라 면적의 「170배인 러시아」,
「100배인 캐나다」, 「85배인 브라질」, 「77배인 호주」, 「33배인 인도」, 「20배인 멕시코」,
「5배인 스페인」이다. 1인당 국민소득을 보면 1960년에 79달러에서 70년에 243달러, 77년에 1000달러,
96년에 1만달러, 2007년에 2만달러를 돌파했다.
수출은 70년 8.4억달러, 77년에 100억달러, 95년에 1000억달러를 각각 돌파하고 2012년 5478억달러를
기록하여 세계 7위 수출국가, 9위 무역국가로 등장했다.
1950년대 이후 세계 10대 수출국가로 진입한 국가는 일본(1960년), 중국(2000년), 한국(2009년)의 3개국
뿐이다. 우리 주력수출상품을 보면 DRAM 세계1위(65.3%), 휴대폰 세계1위 (31.1%), 자동차 세계5위
(5.8%), 조선 세계1위(48.1%), 디스플레이 세계1위(53.8%), 철강 세계6위(4.1%)다.
해외건설시장에서도 초대형 프로젝트와 플랜트시장의 강자로 자리 매김하고 세계 최고층 빌딩 중 1,2,5위는
한국건설사가 건설했다.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해서 하계․동계를 막론하고 메달 순위는 5~10위 사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맹위를 떨치는 한류의 지구촌 확산 또한 국력과 무관하지 않다 하겠다.
이러한 국력을 토대로 한국은 80년대 후반 세계무대의 중심에 등장한다.
IMF 개도국 졸업, 올림픽 개최('88), GATT개도국 졸업('90), OECD 가입('96), 월드컵 개최(2002),
OECD 원조공여국(2009), G20정상회의(2010), 세계육상선수권대회(2011), 동계올림픽(2018) 등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다.
물론 우리 현대사에 수많은 주름과 명암이 있었고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한국민이 이룩한 위업을 덮어버릴 순 없다.
2500년간 유라시아 대륙 제패한 기마민족 DNA 덕택
기적을 이룬 고속성장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우선 경제성장은 인력(L), 기술(T), 자본(K)의 결합이므로 이 요소들이 결정적인 뒷받침을 해왔을 것이다.
먼저 「노동력」이 우수하고 근면한 것은 세계정상의 교육열과 교육투자, OECD 국가 최고의 근로시간 등
수많은 통계가 뒷받침한다.
「기술」은 GDP대비 R&D 투자가 세계 3위, R&D 투자 절대규모 세계 7위, 국제기능올림픽에서 부동의 1위,
기술성취도(TAI) 세계 3위, 정보통신기술지수(ICT) 세계 1위 등 그동안 기술입국이라는 기치하에 성공한
나라다.
한편 「자본」은 6․25의 폐허 속에서 내․외자 총동원체제가 가동되면서 총저축률의 급격한 상승, 대외개방을
통한 외자도입 그리고 정부주도 자본조달과 배분이라는 틀을 활용하면서 열악한 자본 환경을 극복했다.
그러나, 기적은 평범한데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L,T,K 3대 요소 외에 다른 나라가 활용하지 못했던 2가지 근본적인 에너지원이 있었다.
그 하나가 「수출지향형 확장경제」, 「신산업에 대한 도전」으로 요약되는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시장·경쟁 친화적인 문화」, 「강한 성취동기와 불굴의 의지」로 표현될 수 있는
『한국인의 DNA』다.
특히, 한국인의 DNA는 주목할 부분이다. 한국인은 과거 유라시아 대초원을 무대로 활약하던 기마유목민의
DNA를 가지고 있으며 그 DNA는 엄격한 자연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용감」하고 동시에 「유능」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인간유형에서 유래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오늘날의 조선상고사)에서 “여진·선비·몽골·흉노
등의 본래 아(我)의 동족”이라 하여 기마민족국가인 고조선에서 흉노·돌궐이 분파된 것을 갈파한 바 있다.
기마 유목민은 개개인이 강한 자부심을 가지면서 사회전체가 풍부한 자립심,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가치관
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탁월한 지도자의 등장, 집단의 위기 등의 시기에는 강력한 결속력을 유감없이 발휘
하곤 했다.
이 기마 유목민이 주축이 된 기마군단은 혁명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면서 약 2500년간 유라시아 스텝지역에서
동·서양에 걸쳐 거대국가를 끊임없이 건설해온 주역이다.
스키타이,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거란, 몽골, 티무르·무굴, 셀주크·오스만 튀르크, 금·청나라 등을
건설한 세력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바로 고대로부터 우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 역사를 재조명 하면서 한민족의 성장 DNA를 탐구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2. 한족에 패망한 흉노, 서진해 터키를 세우다
한국 고대사와 터키(上)
1. 터키는 어떤 나라인가, 역사적 배경은?
터키는 우리 고대사와 관련해서 빠뜨릴 수 없는 국가다.
터키는 국토의 3%가 유럽인 발칸반도 남단에, 그리고 97%는 아시아인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 나라로
인구 8천만명, 면적 78만㎢ (우리나라의 약 8배), 8대 자원국, 6대 관광국, 그리고 6·25 참전국가로 튀르크
족의 후예가 세운 국가다.
흉노의 후손으로 알려진 튀르크족은 최초의 스텝제국인 흉노(Hunnu Empire)가 한과의 전쟁 등으로 분열·
멸망한 후 (AD 155) 「부민카간」이란 영걸이 나타나 552년 돌궐을 건국한다.
돌궐은 기마민족국가의 전형으로 기마유목문화의 완성기에 해당하며 최초로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 면적은 1040만㎢에 달했다.
이후 동·서돌궐로 분리되고 각각 당나라와 위구르에 패망한 이후 일부세력은 아랍권과 연맹하여 이슬람
세력화하면서 당나라에 대항했고 751년 고선지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을 탈라스강에서 격파하여 중앙
아시아지역에서 이슬람세력이 뿌리 내리게된다.
이후 동돌궐부족은 유목민족의 전통을 유지하다가 불교화하고 元의 지배로 이어진다.
서돌궐부족 일부는 서진을 계속했고, 960년경 셀주크의 지휘로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사마르칸트로 이주
했고, 1037년 토그릴이 셀주크튀르크를 건국한다. 셀주크튀르크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을 격파하고 오늘날 터키 지역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지했고 「콘야」를 수도로 룸셀주크를 건국했다.
셀주크제국이 바로 십자군 전쟁의 주인공이며 후에 몽골제국에 복속하게된다.(1243년)
셀주크제국을 계승한 나라가 1299년 Osman 1세가 건국한 오스만 튀르크다.
오스만튀르크는 발칸반도, 아나톨리아, 흑해, 헝가리, 이집트는 물론 지중해를 장악하는 대제국을 건설
하였다.
발칸반도는 16세기부터 오스만 튀르크가 400년간 지배했는데 395년 동·서 로마제국이 분리 될 당시 이
지역을 경계로 하여 서부는 서로마의 카톨릭, 동부는 동로마의 정교 영향권에 있다가 오스만 튀르크 지배로
이슬람화 했다.
이후 이 지역은 종교와 민족이 복잡하게 혼재된 문명충돌의 화약고라 불리우다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지에서 1990년대까지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오스만 튀르크는 최대영토가 560만㎢(한국56배) 달했으나 에스파냐·베네치아·교황청 연합
함대와 싸운 레판토해전(1571) 패전으로 지중해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오늘날 터키지역 이외의 지역을 대부분 상실하고, 1923 케말 아타튀르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오늘날 터키로 계승하게 되었다.
2. 터키와 한국
터키는 1950년 6·25 당시 1개 여단병력을 파병했으며 UN군 가운데 네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했다.
참전 결정당시 터키 신문에서는 「우리는 형제를 위하여 피를 흘리러 간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한다.
그리고 당시 출정식 터키군 여단장은 “장병여러분, 한국은 우리와 피를 나눈 혈맹국‥”이라고 하는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즉 UN군으로 참전하여 형제국가가 된 것이 아니며, 형제국가이므로 참전한다는 선후관계를 우리는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터키군은 1만 5천명 참전하여 3번째로 많은 741명이 전사했고 UN군 중 가장 용맹했던 군대로 알려져 있다.
터키군은 6·25의 10대전투 중 2개 전투를 해낸 강군이다.
즉, 청천강변에서 중공군을 저지하고 UN군의 후퇴를 지원한 「군우리 전투」, 그리고 지금 용인시 김량
장역 인근에서 중공군이 구축한 진지를 백병전으로 돌격·분쇄하여 중공군 1900명을 섬멸한 「금양장리
전투」에서 터키군의 전투력을 유감없이 세계에 과시했다.
과거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기마민족국가는 스키타이, 흉노, 선비, 돌궐로 이어지면서 하루에 200㎞를
달리는 놀라운 기동력과 강궁으로 무장한 공포의 전투력을 과시했고 이후 거란․여진․몽골도 이를 유감없이
이어받아 중세 유라시아스텝지역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과거 레판토해전에서 기마민족세력인 오스만튀르크가 패배한 것은 아무래도 기마군단이 해전에는 취약
하다는 전통과 관계있다 하겠다.
터키 사람들은 한국과 같은 형제라는 의식이 있어서 애정이 남다르다
내가 터키 여행시에 들은 얘기다.
터키 국민들은 축구를 너무 사랑하며, 혼자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광장 같은데서 모두 모여 응원을 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이들은 유럽리그에 참가하고 있고 터키게임은 대다수 국민이 열광적으로 응원한다고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예선전인 터키-브라질전이 한국에서 개최되고 한국인이 주심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유럽리그에서 편파적인(?) 대우로 가슴앓이를 해온 터키 국민은 이 소식을 접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전반전 터키가 브라질에 리드하던 경기가 후반 동점골이 나왔고 종료직전 브라질 선수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한국주심이 터키선수를 퇴장시키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터키는 역전패하게 된다.
터키인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하며 한국에 대해 극도의 서운함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이 터키는 사상 처음 4강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전 터키국민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터키간의 3·4위전이 시작되었다.
터키국가와 함께 초대형 터키국기가 한국관중석을 덮으면서 내려왔고 한국관중은 열화와 같이 터키를
응원했다.
바로 이 순간 모든 TV앞의 터키인들이 기립하여 울었다 한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아무튼 터키 사람들은 한국민과 한국문화에 대해 가지는 심정적 태도가 애틋하고 특별하며, 이는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다고 본다. 이제 그 배경이 되는 과거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3. 그 옛날 중앙아시아에서 한국과 터키는 옆집이었다
한국 고대사와 터키(下)
터키인들의 역사인식
터키는 기마민족이 세운 국가다.
터키에서는 그들의 조상이 몽골초원에서 유래한 튀르크족이며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면서 건국한 셀주크,
오스만 제국까지 자기들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1952년 터키는 건국 1400주년 기념제를 가졌는데 그 건국기념 년도가 「부민카간」이 돌궐을 건국한
AD552년인 것이다. 터키인들은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고 자기들의 유래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터키 초등6학년 사회 교과서에서는 튀르크의 최초 국가는 흉노(Asian Hun Empire)라고 하고 그 영역을
만주․몽골․남시베리아․북중국․위구르․티벳․중앙아시아 지역까지 포괄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튀르크라는 이름으로 건국한 최초의 나라는 돌궐(the Gok Turk Empire : AD552~744)이며 위구르가
돌궐을 멸망시키고 이어 받았다 기술하고 있다.
초등 7학년 과정에서는 아나톨리아반도에 진출한 과정과 오스만제국의 건국에 대해 가르친다.
초등8학년 과정에서는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의 현대 터키건국, 2차 세계대전 및 한국동란 참전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중급9학년 역사교과서에서는 튀르크가 중앙아시아에서 동서로 확장되는 과정, 그들이 과거에 건국했다는
흉노, 돌궐, 위구르제국의 영역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중급 12학년 역사 교과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참전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터키인들의 역사인식에서 한국과 터키는 남다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라 하겠다.
우선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흉노제국을 터키의 고대역사로 보기 때문에 한민족과 혈통적으로 매우 가깝
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도 돌궐이 당나라와 대결할 당시 고구려와는 동맹국가였기 때문에 지금도 한국을
형제국가로 생각하고 「칸카르데시(피를 나눈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965년 동돌궐의 영역이었던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궁전에서 7세기경의 벽화가
발견되었고 고구려인 사신 2명의 모습이 보이는데 우리민족이 중앙아시아 지역과 활발히 교류했던 역사가
입증된 바 있다.
우리 고대사에서 본 터키
단재 신채호선생이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오늘날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조선족·흉노
족은 우랄어족으로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는데…”,
“여진·선비·몽골·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 “조선·만주·몽골·터키 네민족은 혈족”,“조선이나 만주나
몽골·터키·헝가리·핀란드가 3천년 이전에는 적확히 하나의 혈족”으로 밝히고 있다.
행촌 이암선생의 단군세기(※논란이 있는 기록임)는 단군시대 초기에 흉노·몽골이 고조선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마민족국가인 고조선에서 흉노·돌궐이 분파되었고 이들 일파가 오늘날의 터키로 이어지게 되어 우리와
오늘날 터키가 남다른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부연한다면 단군조선이 BC 2333년에 건국되었고 단군조선건국세력인 고조선족은 세월이 흐르
면서 부여·선비·몽골·오환·거란·여진 등으로 이어지고, 보다 일찍이 분파된 흉노족은 이후 훈족·돌궐·
위구르·셀주크튀르크·오스만튀르크·터키 등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흉노를 ‘호(胡)’로 칭하고 선비 등 그동쪽 민족을 ‘동호(東胡)’로 칭하고 있다.
당시 문헌에서 호와 동호의 구별이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호’는 튀르크계, ‘동호’는 몽골·퉁구스계로 보여
진다. 이들이 지내온 곳, 살고 있는 곳에서는 언어는 물론, 생활풍습, 사회체제, 전쟁양식 등에서 너무나
많은 유사점들이 나타나고 있어 고대로부터의 그들의 관계가 남다르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하겠다.
주터키 한국대사관 공관 홈페이지에는 “우리나라와 터키는 중앙아시아 부근 이웃에서 같이 활동하다가
우리나라는 동진하여 한반도에 정착하고, 터키는 서진을 거듭하여 약 8000㎞ 떨어진 아시아대륙의 서단
아나톨리아 반도와 유럽의 동남쪽 끝인 트레이스 반도에 정착하게 된 먼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고려말에는 원나라를 통하여 들어온 튀르크계 위구르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현재 3만명 가까운 후손
들이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는 6․25전쟁을 통하여 다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기마군단이 맹활약하던 유라시아 대초원(동·서 스텝지역)의 양단에 지금까지 건재한 국가가 한국과 터키가
아니겠는가?
터키인들이 민족의 기원과 자기 역사에 대해 인식하고 후손에 교육하고 있는데 반해, 오랜 고대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오히려 한민족의 활동 무대를 한반도 중심으로 축소하고 우리 역사를 고구려·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이후로 위축시키는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 박은식·김교현 선생은 금사(金史)를 한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으며, 손진태 교수가
여진사와 금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켰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겠다.
근간에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조선사와 부여사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저술활동이 계속
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역사는 왜곡되어서도 과장되어서도 안된다. 그
러나 보다 넓은 시야로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이룩한 현대사의 기적을 설명할 수 있고 한국경제의 성장 에너지원을 찾아나가면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보다 자신감있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4. 2500년전 몽골고원에서 흉노-몽고-무굴-여진-거란 민족은 우리와 함께 살았다
아시아와 동부유럽 지역에 걸쳐 광활한 초원지대가 존재한다. 유라시아 스텝 대초원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몽골 동쪽에 있는 천산·알타이 산맥과 동서 투르키스탄 가운데의 파미르고원 두 곳의 높은
고원지대가 있으며, 이들 고원 지대를 제외하고는 동서 8000㎞에 달하는 매우 평탄한 대초원과 사막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다.
이 초원지역은 만주~몽골~중앙아시아~남시베리아~우크라이나~헝가리 등지까지 이어진다.
이 지역은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동·서부 초원지대로 나누어지며, 양쪽 다 지형이 완만하고 이동이 용이
하여 일찍부터 기마유목민이 가축과 함께 가족이나 소규모 집단으로 이동하면서 유목생활을 영위했던
광활한 땅이다.
지금도 이 지역을 여행해보면 대부분의 지역이 우리 생각보다 평탄해서 이들의 유목생활과 기동성을 생명
으로 하는 기마군단의 활약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기마유목민의 진원지는 대체로 몽골 고원으로 추정되는데, 몽골고원은 서쪽에 알타이 산맥, 동쪽에 대흥
안령산맥, 남쪽에 고비사막으로 둘러싸인 면적 272만㎢, 평균해발높이 1㎞의 고원지대이다.
이곳이 바로 지난 2500년간 세계사의 주인공의 역할을 해냈던 기마군단의 발원지로 보여진다.
몽골고원은 겨울에는 영하 40℃ 이하, 여름에는 영상 40℃ 이상으로 비가 매우 적은 지역으로 굉장히
엄격한 자연조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용감하고 유능’해야 하는 독특한 인간유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은 가족을 중심으로 광활한 지역에서 유목활동을 하면서 가축을 사육할 초지가 부족하게 되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헤로도투스가 ‘역사’에서 기마유목민인 스키타이인은 ‘도시도 성채도 없이 그들의 집을 직접 끌고 다닌다’
라고 표현하고 있고, 지금도 ‘게르’라고 불리우는 이동식 주택을 몽골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들은 초원에서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 개인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사회 전체
로서도 풍부한 자립심을 갖는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세력화하거나 외부세력과 전쟁을 하게 되면 순식간에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서 기마군단을 이루어 강한 결속력을 유감없이 과시하면서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
기마군단은 대체로 BC 8세기경 출현하여 17~18세기까지 동서양에 걸친 대스텝지역과 광활한 주변지역을
지배하면서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기마군단의 전투력 비밀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동성이다. 이들은 말에 익숙하다. 유목민들은 4살 경부터 말을 타며 말을 생활의 기초로 하여 이동
하고 생활한다. 이들은 나무안장과 등자를 발명하여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전시 몽골기병의 예를 들면 병사 1인이 7~8기의 말을 보유하고 이동·전투를 하면서 놀라운 기동력을 과시
했다.
둘째, 복합곡궁이라는 강력한 활에 삼각철화살을 장착하여 전투 주무기로 활용했다.
이 활은 150m의 사정거리를 자랑하는 무기로 당시 기동력과 융합하여 강력한 병기로 등장했다.
셋째, 갑옷은 철그물로 만들어 매우 가볍고 강하게 제작되었으며 몽골 박물관에 보관된 철갑옷은 무게가
7kg 에 지나지 않아 전투력을 배가시켰다.
넷째, 소·말 등 육류는 건조시키고 마유 등은 분말로 병사 각자가 보관·운반하면서 전투식량으로 활용했다.
쉽게 말해서 전투식량을 자체적으로 보급·수송하는 병참체제였다 할 수 있다.
다섯째, 기마군단은 일찌기 10진법의 효율적인 군대조직과 엄격한 기강으로 대규모 군단을 효율적으로
통솔할 수 있었다.
여섯째, 기동성을 바탕으로 가공할 속도전과 현실적인 후퇴 전술 등 광활한 지역에서 전투력을 극대화하여
유라시아의 대초원은 물론 중국·유럽·중동지역 등 주변지역에서 공포의 존재로 인식되게 된다.
이와같이 기마군단은 총포·화기의 등장으로 전쟁의 근본을 변화시켰던 근대 이전의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한
기동군단으로서 전투력을 과시했다. 증기기관 발명 이전에는 말을 대체할 에너지 기관이 없었고 기마군단은
말의 기동력을 토대로 농업정착민 군대를 압도하고 동·서·중앙 아시아 대초원 및 유럽을 무대로 역사적 최강
국가를 건설했다.
기마유목민족들은 스키타이 이래로 만주·몽골·북중국·남시베리아·중앙아시아·아나톨리아지역·동유럽 등지
의 스텝지역에서 수많은 강국을 건설했다.
서쪽으로 진출한 나라들이 흉노·훈·돌궐·위구르·토번·서하·셀주크튀르크·오스만튀르크로 이어지고 동쪽
에서는 선비·5호16국·수-당·요(거란)·금(여진)·원(몽골)·티무르·무굴·후금(청) 등이 건국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몽골고원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튀르크계 국가의 조상 뻘이 되는 흉노가 3천년 전에는
우리와 형제동족이며 동쪽으로 진출하여 수많은 강국을 건설한 여진·선비·몽골도 아(我)의 동족이라고
밝히고 있다.
BC 8세기 무렵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이들 기마군단국가들은 지역·인종·기질·문화·정서·유물 등을
고려해 볼 때 BC 2333년 건국된 고조선의 분파과정과 연관하여 이해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한민족은 단일민족·단일국가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오히려 광활한 대륙에서 엄격한 자연조건을
이겨내면서 수많은 외부세력과 교류하고 협력하고 투쟁하면서 살아왔다.
여기에서 한민족의 DNA가 형성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 아니겠는가.
5. 2800년전 스키타이 황금문화, 신라 금관으로 이어지다
'스키타이'-최초의 기마유목군단 이야기
1.기마유목군단의 출현과 스키타이
기마유목민은 오랜 기간 세계사의 중심무대에서 활약해왔으나 의외로 기록이 취약해서 역사가 별로 남아
있지도 않고 평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광활한 대초원 지대에서 말을 기동력으로 하여 생활의 근거를 자유로이 이동했던 그들의
삶의 형태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한다.
중앙 아시아 지역에는 BC 12세기 무렵부터 유목민이 활동한 것으로 보여지고 BC 9세기말 경에는 말의
기동력을 활용한 전투 집단이 등장했다 한다.
기마군단이 최초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스키타이로 아시아 유목민이 BC 8~7세기경 볼가강에 진출하여
우크라이나·중앙아시아 지역에 강대한 부족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이들 기마군단은 기동력과 마상궁술을
무기로 드넓은 초원지역에 산개하여 바람같이 나타나 도발하고 상대를 초토화시키는 위협적인 전술을
구사하면서 공포의 대상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스키타이는 BC 674년 메데를 정복하고 BC 514년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의 70만 대군을 제압한다.
BC 4세기의 전성기를 거쳐 BC 3세기경 사르마트에 패해 쇠락한다.
이후 크림반도 등지에서 농경생활로 전환되어 부족을 유지하다 로마에 흡수된다.
2. 스키타이에 대한 역사기록
유목민의 기마군단에 대한 최초기록은 BC 424년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
Histories」에서 스키타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헤로도토스는 고대 그리스인으로 BC 485년 오늘날 터키 남동부 에게해 연안의 Bodrum에서 탄생했고
대여행가로서 들은 대로, 전해지는 대로 기록하여 「역사」라는 역작을 남겼다.
키케로는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BC 145년경 출생)보다 300년 이상 앞선 세대다.
그는 스키타이에 대해 “스키타이족은 아시아에 살던 유목민이라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
“그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쟁기질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무도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들은 도시도 성벽도 없고, 집을 수레로 싣고 다니고,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
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사람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의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키타이족의 나라는 정사각형인데 동서남북이 각각 4000스타디온(약800km)이 된다”라고 쓰고 있다.
스키타이는 성경에서도 언급된다.
BC 629~588년에 기록된 구약 예레미야 6장은 “보라 한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같이 다 항오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약 골로새서 3장에서는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
이나 종이나 자유민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라고 하고 있다. 「스구디아」가 바로 스키타이다.
사도바울이 이 서신서를 AD 64년에 썼으므로 당시 스키타이의 존재는 미미할 때이나 이방세계에 강력한
인상을 심었던 것 같다.
3.스키타이 문화 유적
스키타이 문화는 초기철기문화로 그들의 흔적은 흑해 북부에서 서부 몽골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①스키타이문화는 거대한 고분(kurgan)으로 대표된다.
땅속의 목곽 위에 돌무지와 흙으로 덮은 무덤으로 이속에서 무기·마구·동물장식 등 많은 청동유물이 발굴
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중앙아시아와 내몽골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어 스키타이 문화의
연원이나 전파를 말해준다.
②스키타이인들은 황금을 숭배 대상으로하여 카자흐스탄과 신장 위구르 북부지역에서 스키타이인들의
금동기구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들 기구는 금박을 두들겨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스키타이의 황금문화는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서울에서도 스키타이 황금 문명전이 열린 바 있다.
이후의 아시아 유목국가들도 황금문명의 전통을 이어온 것 같다.
몽골 국립박물관에서는 흉노·돌궐로 이어지는 황금장식유물을 볼 수 있다.
스키타이의 황금유물
③마지막으로 바위에 새겨진 그림, 암각화다. 유목민이 본격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알타이는
중앙아시아 고원지대로 몽골·중국·카자흐스탄·러시아 4국의 국경이 접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의 고대 도로는 수많은 민족의 이동 경로가 되었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한다.
알타이 지역에서 기념비·고대비문·쿠르간(고분)·석상 등이 오래전부터 발견된 바 있는데, 이 지역에서 다양한
양식과 기법의 암각화가 수백 군데에서 발견되고 있다. 알타이 암각화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나타나지만
청동기 시대 및 초기 철기시대에 집중되어 있고, 특히 초기 스키타이시대(BC 8~6C)의 암각화도 발견되고
있다.
4.스키타이와 이후 초원의 기마국가와의 관계
스키타이는 최초로 초원을 지배한 것으로 기록되는 기마유목민집단으로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라고 명명
되는 흔적이 유라시아 스텝지역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은 이동성·집단성과 가공할 전투력을 특징으로 하는 특유의 군사집단으로 이들의 생활풍습
이나 전술·전법은 후대에 등장하는 기마유목민들의 국가인 흉노·선비·돌궐·위구르·몽골 등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스키타이는 BC 3세기말 몽골지역을 통일한 흉노와 이후의 돌궐 등과도 문화적인 친연관계가 이어
지고 기마유목군단의 전통도 확실히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우리나라와 관련해서도
①많은 적석총(돌무덤)의 유적과 유목민속의 흔적
②신라의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황금문화
③울주군의 천전리 암각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등에서 알타이 암각화와 관계가 있다고 보여지는 다수의
암각화 등은 우리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BC 24세기경 건국한 고조선과 이후 여러분파로 갈라진 기마민족들, 몽골고원·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일찍이
서진하여 활약한 스키타이, 이어지는 흉노 그리고 몽골고원 동부에서 활약한 정통고대국가체제의 기마군단
국가인 고구려, 몽골 고원 서부지역에서 활약한 고대국가 돌궐, 그리고 이들을 계승한 많은 기마민족국가
들은 어떤 관계로 생각해야 할까.
보다 열린 시각으로 유라시아 역사와 세계사를 보면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야할 대목이라 생각
한다. ‘KBS 역사스페셜’에서도 스키타이-흉노-신라의 유전자 친연성, 가야지역인 김해 대성동 고분의 북방계
유물들을 방영한 바 있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연구가 지속되었으면 한다.
흉노의 황금유물
돌궐 황금유물과 신라의 금관
6.신채호 "2200년전 세계를 뒤흔든 유라시아 대초원의 흉노는 조선의 속민이었다"
흉노 제국 이야기(상)
1. 흉노는 어떤 나라인가
흉노는 스키타이를 잇는 기마유목민의 국가로 BC 4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BC 3세기말 몽골고원을 통일,
최초의 스텝제국을 건설하였다.
기마유목 국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흉노제국은 그들만의 기마군단의 가공할 전투력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런 흉노의 세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오늘날 국력을 말할 때 국민소득(GDP) 개념을 흔히 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2012년 GDP는 15조7천억
달러다.
중국 8조 2천억달러, 일본 6조달러, 독일 3조 4천억달러 등이다. 그리고 프랑스·영국·브라질·러시아·이탈
리아가 2조 달러대, 인도·캐나다·호주·스페인·멕시코·한국이 1조 달러대 국가다.
한국은 지난 60년간 경제개발을 통해 세계 240개 국가 중 15위의 대형 국가를 건설했다.
우리 앞의 14개국 중 우리보다 면적이 작은 나라는 없다. 우리 땅의 최소 2.4배(영국)에서 최대 170배(러시아)
까지다. 인구가 우리보다 적은 나라도 호주 정도이며 중국은 우리의 27배, 인도는 25배다.
여하튼 한마디로 말해 한국은 세계 경제의 기적을 일구었다.
역사를 보면 과거 강대국들은 우선 면적에서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땅이 넓어야 강대국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제국의 최대 영토가
600㎢ 안팎이며, 로마제국의 최대영토는 기원후 2세기 초 스페인·터키·북아프리카를 포함해 650만㎢에
달했다. 중국이 가장 융성했던 한나라 한무제 시대 최대영토는 720만㎢였다.
흉노제국의 지배면적이 620만㎢에 달했다하니 어느 정도 강대국이었는지 능히 가늠해볼 수 있다.
흉노는 면적뿐 아니라 영향력면에서도 그에 걸맞게 막강해 유라시아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겼다.
흉노는 진시황, 한고조, 한무제 등 최강의 중국 왕조와 당당히 맞섰고, 이러한 흉노의 기마군단에 대한
공포는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더 나아가 흉노의 서진은 유라시아 역사를 바꿔 놓았고, 서진 과정에서 새로이 형성된 흉노의 후예 훈족
또한 그랬다. 이처럼 흉노는 기마유목국가의 전형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국가들이 유목민에 의해 탄생하게
됐다.
터키 교과서의 흉노 세력지도
2. 흉노에 대한 역사 기록
기마유목민은 정착민들과 달리 그 삶의 특성상 역사기록이 취약하다. 흉노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들 자신이
기록한 역사기록은 거의 없다. 따라서 사마천의 ‘사기’에 의해 그들의 삶을 추측해 볼 정도다.
사기의 흉노열전(권110)이 흉노에 관한 최초의 역사기록이다.
“흉노는 하후씨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불렀고, 산융·험윤·훈육 등 여러 종족을 포함한다.
그들은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세력
범위는 경계가 분명했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목축·사냥을 직업
으로 삼고 긴급한 상황에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싸움이 유리할 때에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에는 후퇴했는데 도주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이는 스키타이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기록들을 연상시킨다.
흉노의 王은 선우라 불렸는데 최전성기는 ‘두만’과 그의 아들 ‘묵특’시대이다.
두만은 태자 묵특을 폐하고 이복동생을 태자로 세우려고 묵특을 알타이지역 동서교역로의 강국 월지에
볼모로 보낸 후 묵특을 제거하기 위해 월지를 공격하지만 묵특은 흉노를 탈출하여 만 명을 거느리는
기병장군이 된다.
묵특은 소리나는 화살(명적)을 만들어 자기가 먼저 명적을 쏘면 군사들이 그곳을 따라 쏘도록 명령했다.
묵특은 부하들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사냥터에서 자신의 명령을 따라 쏘지 않은 자를 잡아 죽였다.
다음은 자신의 애마, 그리고 애첩에게 차례로 명적을 쏘았고, 차마 따르지 못한 자는 죽였다.
그런 후 두만이 타고 있는 말에 명적을 쏘았을 때 부하들은 다 따라 쏘았고, 마지막으로 아버지 두만 선우에
명적을 날려 그의 부하들이 두만을 죽이게 하고 묵특은 흉노의 왕이 됐다(BC 209).
당시 흉노와 더불어 세력을 떨치던 동호가 묵특에게 흉노의 보배 천리마를 달라고 청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묵특은 천리마를 보냈다.
동호는 다시 선우의 연지(후비) 중 한 사람을 보내라 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묵특은 연지를 보냈다.
그러자 동호는 흉노와의 사이에 있는 이천여리의 버려진 황무지를 차지하겠다고 했다. 신하들은 주어도
좋고 안주어도 좋다는 식으로 간언했으나 묵특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그들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은 모조리 참수한 후 동호를 공격
하여 대파하고, 이어 월지·연 등을 차례로 공격하여 흉노의 빼앗겼던 땅을 모두 회복했다.
BC 202년 황제로 즉위한 한고조 유방도 바로 이 흉노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통일을 이룬 유방은 흉노를 정복하기 위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때는 겨울이라 몽골지역에는 매서운 추위와 눈이 엄습했다.
영특한 묵특은 패배를 가장해 한나라군을 계속 유인했고, 한나라 보병 32만은 전군이 모두 추격에 가담했다.
이때 묵특의 정예부대 40만 기병이 평성에서 유방을 포위했다. 보급과 구원병이 끊긴 절대절명의 순간,
유방은 몰래 묵특의 연지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 구명운동을 했다.
이에 연지가 묵특에게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해도 선우께서 가서 살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설득하여
흉노군이 포위를 풀게 되었고, 유방은 장안으로 도망쳤다.
이후 흉노와 한 사이에는 ①한 황실 여인을 선우의 연지로 바친다 ②매년 한이 비단·솜·식량 등을 바친다
③형제의 맹약을 맺고 화친한다는 내용의 한나라로서는 굴욕적인 조약이 맺어졌다.
그만큼 흉노의 세력은 막강했다.
흉노는 우리와도 연계관계가 있다. 흉노는 진나라·한나라/선비/고조선·고구려와 시차를 두고 직간접 관계를
가졌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흉노·선비·몽골은 아(我)에서 분리…여진·선비·몽고·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이었다.
흉노는 조선의 속민이었다.”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 돌궐·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다”라고 썼다.
윤치도의 「민족정사」는 “3대 가륵단군시절에 요동태수 삭정을 징계하여 약수변에 유배하였는데 그들이
후에 흉노족이 되었다”고 했다. 또 가야는 1970년대 이후 발견된 수많은 유물로 미루어 보아 흉노계가
건국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앞으로 우리 고대사의 올바른 복원을 위해 중국을 비롯한 스텝지역 일대의 고대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급하다.
무엇보다 중국 25사를 비롯한 고대문헌에 대한 전문적인 번역작업이 조속히 이루어져 한민족 고대사 연구에
하나의 의미있는 전기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비로소 세계무대에 등장해 기적을 일구어 낸 오늘날의 우리 한민족, 그 기개와 DNA는
어디서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동아시아 최강국 고조선, 이어지는 기마유목국가의 건설과 세계 제패 등과는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7. 유럽역사 바꾼 게르만족 대이동은 한민족과 뿌리가 같은 흉노족 작품
1.최초의 스텝제국 흉노,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
흉노는 BC 318년부터 역사서에 등장 한다. BC 4세기 후반 몽골고원은 흉노족, 동북지역(만주)은 동호족이
각각 통일했다. 그래서 전국시대에 흉노를 호(胡), 그 동쪽 민족을 동호(東胡)라고 불렀다.
흉노 기마군단의 등장은 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정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말의 기동력, 활의 파괴력, 고도의 금속제 무기, 광활한 초원의 정보망 등으로 무장한 전투력은 공포 그 자체
였다. 특히 기마군단의 기동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로마군은 하루 20~30km를 진군했지만, 몽골군은 60~100km 정도로 비교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군대의 힘을 역학 공식인 ‘크기×속도’(f=m×a)를 빌어 가늠해보면 기마군단의 전투력이 얼마나 위협적이었
는지를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BC 221년 진시황의 중국통일 무렵 두만의 지휘 하에 부족을 통합한 흉노는 진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
했다. 이에 놀란 진시황은 몽염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흉노에 뺏긴 땅을 되찾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은 흉노와 접한 진, 조, 연나라 등이 쌓았던 기존의 성곽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이는 기마군단에
대한 그들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장성을 사이에 두고 북방민족과의 대결이 지속되는 것이 중국역사다.
흉노는 BC 176년 월지를 정벌하고 북아시아를 완전 제패한 뒤 당시 최대강국 한나라를 침탈했다.
한무제(BC 141~BC 87)는 월지와 연합하여 흉노에 맞섰지만 기마군단의 위력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한과의 전쟁 중에 흉노는 ‘질지’의 서흉노(BC 56), ‘호한야’의 동흉노(BC 58)로 분열된다.
서흉노는 BC 36년 역사에서 사라지고, 동흉노는 다시 내몽골, 화북지역의 남흉노와 외몽골지역의 북흉노로
갈라졌다(AD 48). 그 후 남흉노는 중국으로 이주·동화하였고, 북흉노는 후한·선비의 공격으로 AD 151년
멸망하면서 잔존세력은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흉노는 3백~4백년 후인 4세기경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이번에는 공포의 존재로 로마인들에게 각인된다.
훈족의 왕 아틸라는 동로마·서로마·갈리아·이탈리아를 차례로 침공하여 거대국가를 건설했다.
이것이 동고트·서고트 등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 결국 서로마제국 멸망을 초래하는 등 세계사를
뒤흔들었다.
오늘날 유럽의 민족과 국가의 이동 및 형성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453년 게르만 여인 일디코와 결혼 첫날밤 사망했고, 이후 훈족은 급격히 등장했다가
갑자기 퇴장하는 ‘초원의 방식’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2.흉노를 보는 극과 극의 다양한 인식
중국은 사기·한서·전국책 등에서 흉노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북쪽 오랑캐로 잔인하고 두렵고 대적하기
어려운 공포의 집단으로 보았다. 진시황, 한무제 등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흉노 침공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그들은 기마군단의 전투력을 무서워했고 대응전술을 찾지 못했다.
흉노가 타는 말들을 얻는 것이 꿈이었던 한무제가 대군을 동원하여 ‘대원’을 공격하고 한혈마(붉은땀을
흘리는 말) 수십필을 얻고는 크게 만족했을 정도다. 또 만리장성이라는 대역사를 통해 이들을 막아보려
했으나 바람같은 기병의 진군을 약간 더디게 하는 효과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중국은 고대의 흉노·선비·여진·몽골·거란 등 북방민족도 중화민족의 일부라고 하면서 과거의
‘한족중심주의’를 포기하고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으로 바꿨다. 역사공정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터키는 초․중등 역사교과서에서 그들은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튀르크족이며, 튀르크의 최초 국가는 흉노이고,
그 영역은 오늘날 만주·몽골·남시베리아·북중국·위구르·티벳·중앙아시아 지역에까지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또 동쪽의 흉노는 대흉노제국, 서쪽의 훈족국가는 유럽훈제국이라 하고 있는데, 중국의 주서(周書) 돌궐
열전에도 “돌궐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고 하여 흉노와 튀르크의 친연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터키교과서의 흉노제국과 훈제국
몽골에서는 중등 교과서에서 흉노·선비·유연 뿐만 아니라 튀르크·위구르·키르키스·거란까지도 몽골 영토상의
고대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흉노는 유목민이 몽골에 세운 최초의 국가로 정치규범, 경제생활, 문화면에서 기마유목국가의 전형이
되는 강력한 대제국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흉노는 중앙아시아, 서북인도, 동유럽까지 진출했는데, 이중 유럽에 세운 나라가 훈제국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흉노의 후예 훈족의 습격을 받아서인지 흉노를 극도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역사가 A․마르켈리누스가 “훈족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야만적이다… 경장으로 말을 타고 민첩하게 산개하여
질주하면서 무시무시한 살육을 자행한다… 고정된 주거 없이 수레를 타고 피난민처럼 방랑한다…
그들은 누구도 자신이 어떤 출생인지 모른다”고 할 정도다.
유럽인들도 한(漢)대의 사가들이 흉노에게 느꼈던 공포와 경외심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훈족의 예기치 않은 유럽 침공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이에 따른 유럽사의 대변혁을 초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경우 국사 교과서에 흉노 서술이 없다. ‘한국사신론(이기백)’에는 ‘이방족속 흉노’라는 표현이 단
한군데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흉노는 옛 몽고 땅에서 목축을 하던 인종으로서 진한의 속주가 되었다가
진한(고조선)이 쇠하자 자립하여, 중국 전국시대 말에 이르러 강성해져서 자주 중국을 쳤다…
흉노는 우리에게서 분리된 동족’이라고 한다.
위서 논쟁이 있지만, ‘단군세기’나 ‘민족정사’에는 3세 가륵단군 시대에 지방장관 ‘삭정’을 유배에서 풀어
약수지방에 봉한 것이 흉노의 시조라 한다.
그리고 흉노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하여 국가를 건설했다는 일부학계의 연구도 있다. 김씨의 가야가 그 예다.
왼쪽부터 흉노의 옥기,토기, 일월 금박 장식
흉노는 유목민의 특성상 역사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기록문화에 친숙한 정주민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중국의 흉노 기록은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에서 남긴 것이므로 서술이 부정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흉노의 문자 기록은 없으나 수많은 고고학 유물과 유적이 남아있고 또 발굴됨에 따라 흉노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점차 더 많이 밝혀질 것이다.
이와 함께 유목민에 대한 기록도 튀르크어·위구르어·몽골어·만주어·티베트어 등으로 다수 발견되고 있어서,
앞으로 한민족을 포함한 기마민족의 활약상과 친연관계가 더욱더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형성에 흉노·선비 등 북방계 민족의 비중이 크다는 논의도 검증되지 않을까 한다.
8. 독일 ZDF 방송 "게르만족 대이동 시킨 훈족의 원류는 한국인일 가능성"
1. 사라진 흉노, 훈제국으로 부활해 유럽 중심부 강타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지역을 투르키스탄이라 한다.
이는 튀르크인의 땅이란 뜻이며 동·서로 나누어진다. 몽골고원에서 최초의 스텝제국을 건설한 기마군단
흉노는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하고 기원전 1세기부터 실크로드를 장악해 강대국이 되었다.
한나라와 쟁패하던 흉노는 그러나 몇차례 내분으로 약화되면서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중국에 빼앗기고
동·서 흉노로 분열된다.
그 후 ‘질지’가 이끄는 서흉노는 몽골 지역으로부터 서투르키스탄 지역으로 이동했다.
아랄해와 발하쉬 북부초원까지 진군했던 서흉노는 그러나 BC 36년 질지가 한나라의 진탕에 잡혀죽자
갑자기 역사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약 4백년이 지난 4세기말(370~375경) 흉노의 후예들이 이번에는 로마인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
냈다.
아랄해 북부 초원에 거주하던 흉노 후예들은 374년경 발라미르의 지휘 하에 유럽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세대인 그 옛날 조상들과 매우 흡사한 방식, 즉 말·나무안장·등자·복합곡궁·삼각철
화살 등으로 중무장한 기마군단의 모습으로 유럽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의 놀라운 기동성과 뛰어난 기마전술은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신의 징벌’이라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
이었다.
그들은 볼가강과 돈강을 건너 알란인을 격파하고, 동고트를 붕괴시켰으며, 드네프르를 건너 서고트를 패퇴
시켰다. 쫓긴 고트족은 훈족을 피해 다뉴브를 건너 로마영토로 들어가 마침내 서로마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데, 이것이 ‘게르만민족 대이동’의 시작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역사가들은 훈족에 대한 기록을 무엇보다 극도의 공포와 증오로 생생하게 가득 채웠다.
6세기에 건설된 베니스는 훈족의 침입에 놀란 피난민들이 말을 막기위해 물위에 건설한 수상 도시다.
이후 400년경 다시 발라미르의 아들 울딘이 동유럽 평원으로 공격해 들어가자 놀란 고트족이 헝가리,
이탈리아 반도로 이동하면서 거대한 민족이동을 촉발시켰다.
434년 아틸라가 훈족의 지배권을 확립한 후 그 세력은 더욱 막강해져 동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훈족과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로마제국도 아틸라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되었다.
436년 2만의 부르군드군이 아틸라군에 전멸당한 전쟁이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다.
그만큼 훈족은 유럽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틸라는 441년 동로마제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다뉴브강을 건너 주요 도시를 초토화하고 448년 동로마
제국을 복속시켰다.
451년에는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공격하여 메츠를 점령하고 오를레앙을 포위하는 등 공포의 진군을 계속
했다. 452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자 서로마황제는 도주하고 로마대주교 레오는 화해를 간곡히 요청해
서로마의 복속으로 보고 본거지 판노니아(헝가리)로 돌아왔다.
이듬해 453년 유럽사를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틸라가 게르만 제후의 딸 일디코와 결혼한 첫날밤
죽었다. 의문의 사망이었다.
아틸라가 죽자 훈제국은 분열을 일으켜 454년 판노니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러시아 초원으로 후퇴했다.
468년 훈은 전력을 가다듬어 동로마를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잔존세력은 흑해 북부로 밀려나 세력을 잃게
된다.
아틸라의 최대판도(434~453년)
2. 훈제국 흥망성쇠의 열쇠는?
훈제국은 면적이 370만㎢를 넘는 유럽최강 국가였으나 아틸라 사후 급격히 혼란에 빠지고 분열하면서
불과 십수년만에 붕괴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① 먼저 훈제국의 세계사적 위치를 살펴보자.
유럽인들에게 훈족은 혜성과 같이 세계사에 등장하여 질풍노도를 일으키다 바람같이 사라져버린 흉폭한
야만세력으로 여겨지고 있다.
훈족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침략 당한 쪽에서만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
러나 훈제국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배경 없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신기루와 같은 국가는 결코 아니다.
그들은 흉노의 후예(다른 학설도 있음)로 무장·편제·전술 등에서 몽골초원 기마군단의 형태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놀라운 기동력과 가공할 전투력은 과거 스키타이, 흉노에 비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 중심부에서 전쟁을 벌인 최초의 아시아 기마유목군단으로, 그들의 유럽 침입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이에 따른 유럽사의 대변혁을 초래하는 등 세계사에 엄청난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 교과서는 흉노제국을 세운 흉노인들이 유럽에서 아틸라의 훈제국(AD 434~453)을 세워 드네프르강
에서 다뉴브강까지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공납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틸라는 나아가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데 영향을 끼쳐 수많은 국가가 로마제국에서 해방되어 독립국으로
발전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② 그러면 훈제국의 급격한 성장배경은 무엇인가.
아랄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흉노 잔존세력은 발라미르·아틸라로 이어지는 걸출한 지도자를 만난다.
초원제국의 역사를 보면 흉노(두만·묵특), 돌궐(부민카간), 선비(단석괴), 유연(사륜카간), 거란(야율
아보기), 몽골(징기스칸), 티무르제국(티무르), 청(누르하치) 등에서 보듯이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날 때
거대제국을 건설했다.
아틸라는 검소하면서 공정한데다 담대함과 지략에서도 뛰어나 기마군단 최고 지도자의 하나로 꼽힌다.
다음, 훈제국은 스스로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활용했다.
유목민 기마군단으로부터 이어받은 기동성과 전투력·전술을 통해 단시간 내에 최강의 군사력을 갖추었다.
여기에 포용력도 한 몫을 했다.
훈제국은 훈족이 중심이었으나 우랄·라인강 사이의 사르마트·알란·오스트로고트·게피대 등 여러 민족도
유연하게 통합하여 세력을 급속히 키울 수 있었다.
② 그런데 훈제국은 왜 역사에서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먼저 아틸라의 영도 아래 통합되었던 민족들이 아틸라 사후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기초가 뿌리째 흔들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마디로 훈제국은 전성기와 달리 이민족과의 협력·교류·연대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훈 내부적으로도 형제들 간의 세력분열과 다툼이 겹쳐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결과 훈제국은 초원제국의 방식으로 급속하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흉노와 우리와의 관계는 흉노-훈과 연결고리를 두면 추정해 볼 수 있다. 훈족의 몽골반점, 복합곡궁, 편두·
순장 등 관습, 이동경로의 많은 유물 등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한민족과 친연관계를 밝히는 연구들이
있다.
훈족이 파괴한 이탈리아 북부 아퀼레이아시의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의 훈족 기병이 활 쏘는 모습은
고구려 무용총벽화와 그야말로 흡사하다.
독일 ZDF TV는 다큐멘터리(1994)에서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 최동단의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좀 더 시야를 넓게 열고 우리를 돌아보았으면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현대경제사에서 불과 50년 남짓 만에 세계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 대한민국.
세계 GDP가 7배 증가하는 사이 35배의 GDP 성장을 이룬 괴력의 국가 대한민국.
그런 대한민국이 대제국을 건설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과거 초원제국의 역사와 다른 역사를 써가려면
과연 어떤 에너지가 필요한 것일까?
9. 훈제국은 서양사를 바꾸고 대한민국은 현대경제사의 기적을 쓰다
[질풍노도와 같이 등장한 기마군단]
흉노 왕족, 중국 거쳐 한반도에서 신라를 건국 ,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씨는 흉노의 후예
1.세계사와 문화사를 바꾸는 홍산문화의 대발굴
중국의 황허문명과 궤를 달리하는 북방알타이 문화권은 한반도, 만주, 몽골 및 내몽골, 신장위구르,
티벳,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 및 남러시아, 터키, 동부유럽 등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기마유목민족의 활동무대였다. 역사시대에 들어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서부에서는 스키타이, 흉노, 훈, 돌궐, 위구르, 토번, 서하, 셀주크·오스만튀크르 등이,
동부에서는 선비, 유연, 수-당(선비), 요(거란), 금-후금(여진·청), 원-티무르-무굴(몽골) 등의 국가가
건설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부터 내몽골 자치구의 요령성 접경 홍산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대거 발굴되었고 최근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데,
그 유물들은 놀랍게도 BC 7000년 전까지 소급되는 고대 문명공동체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특히 1983~85년 홍산지역의 「우하량」에서 BC 3500~3000년경 초기 중앙집권국가의 흔적을
보여주는 적석총, 여신묘, 대형제단, 옥기 등 유적·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초기문명 유물들은
계급이 완전분화되고, 사회적분업이 이루어진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대발견이었다.
의문의 이 문명은 중국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그동안 중국이 자신들의 문명이나
문화라고 주장한바 없었던 지역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세계 4대 문명권
보다 적어도 1000년 이상 앞서는 고대문명으로, 세계역사와 문화사를 다시 쓸 수밖에
없게 하고 있는 「홍산문화」이다.
중국 역시 자국 영토내에서 황허문명보다 앞선 고대문명이 출현한데 대해 놀라고 있는데, 역사공정은
바로 이 토대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영토로 편입된 만주(79만㎢)와 내몽골(148만㎢), 신장
위구르(166만㎢), 티벳(127만㎢)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황허 문명과 확연히 구분되는 또다른
문명 지역이며, 현재 동북·서북·서남공정 등의 이름으로 역사공정이 전개되고 있다.
한편,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인근 하가점이란 촌락에서 발굴된 「하가점하층문화」는
BC 2400~1500년 청동기 시대에 지금의 난하-요하 사이의 요서지방에 강력한 중앙
집권국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 문화 역시 중국의 황허문명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명권이다.
따라서 이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는 한민족 고대국가인 배달국·고조선의
존재와 직결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한민족의 유래와 고대역사가 밝혀지는 무대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가 역사로 바뀌는 전율의 드라마가 우리 역사학자들의 혜안과 수고에 의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홍산문화유적 유물
2. 4세기말 혜성과 같이 서양사에 등장한 「흉노-훈」과 20세기 기적의 경제사를 쓴 「한민족」
한민족의 시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현대 한국인의 조상이 수만년 전 알타이·몽골 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왔으며 현대 한민족은 신석기시대
(BC 5000~1000)와 청동기시대(BC 1000~300)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했던 몽골계 민족의 후손으로 추정…
중앙아시아와 우랄 인근, 알타이지역이 한민족의 기원이 시작된 장소” (러시아 유가이 교수)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서 동방으로 나와서 …”
(단재 신채호 선생)
이렇듯 한민족 시원지를 바이칼호·몽골지방 또는 파미르고원·천산지역으로 보는 것이 다수 견해다.
한국 고대문명은 한반도 북부와 시베리아·만주·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북방기마민족과 연결
되며, 한민족은 흉노·선비·돌궐·거란·몽골·여진 등 북방 기마유목민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많은 연구가
있다.
한민족 기원과 관련한 주요 지형
최초의 스텝제국이며 기마군단의 전형인 흉노가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BC 4세기경이다.
그러나 흉노는 고대로부터 중국 역사와 같이 존재했었다.
몽골고원을 본거지로한 흉노제국은 중앙아시아와 서역 지방까지 방대한 영역을 장악한 거대국가였다.
그러나 AD 155년 선비·한나라군에 의해 멸망한 후 잔존세력들은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로부터 약 2세기가 지난 후 유럽에 돌풍같이 등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해 로마인들을 공포에 빠뜨린
훈 제국은 바로 이들이 세운 국가다.
훈족은 기마전술·생활관습·문화 등에서 흉노와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흉노의 후예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흉노-훈과 우리 한민족 사이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①학계에서는 북방 유목민 일부가 한반도 남부 신라에 정착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1990~92년 김해 대성동에서 많은 고분과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적석목곽묘·토기·투구·철제갑옷·마구·
동물문양장식·오르도스형 동복 등이다.
이는 흉노·선비·부여·고구려 등 북방기마유목민족의 한반도 진출을 말해준다.
흉노의 무덤은 직사각형 구덩이에 시신을 안치하고 나무덧널을 넣은 다음 돌을 쌓아 올린 적석목곽분인데
신라무덤(천마총, 황남대총 등)도 이와 매우 흡사하다.
흉노와 신라의 친연관계는 무덤은 물론, 편두풍습과 제철기법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②고대 북방유목민들에게는 금으로 치장하는 풍습이 널리 퍼져있었고, 이는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
민족의 상징이었다.
신라는 금을 세공하여 금관과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동물형 장식 등 고대 금 세공기술은 스키타이와 신라가 가장 뛰어났다.
고대 한국은 금관의 나라라고 할 만큼 우수한 기술로 금관을 제작했다.
전세계 발굴 금관의 2/3가 우리 것이다.
신라 금관을 보면 윗부분의 나무와 사슴뿔 형상, 잎새 모양 장식, 곡옥 등 북방 알타이계통의 흔적이 뚜렷
하게 남아 있다.
돌궐 황금유물과 신라의 금관
③가야·신라에서는 고구려·백제에는 없는 순장하는 풍속이 나타난다.
이는 흉노 등 북방민족의 전통이었다.
흉노는 다른 민족에 흡수되어 사라졌으나, 우리에게는 씨름·언어·습속·의복·풍습 등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한국어에는 북방알타이계 언어들과 연결된 다수의 어휘가 나타난다.
간(干)·각간(角干) 등 왕을 뜻하는 단어는 물론, 백제·신라·고구려의 관직명에서 많은 알타이계 어휘가
보이고 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혁거세」는 돌궐어로 통치자 즉 천자(天子)라는 뜻이라 한다.
④흉노가 신라·가야를 건국했다는 연구도 있다. 흉노에는 선우가 직접 다스리는 중심부와 동·서부지역을
다스리는 좌현왕·우현왕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고조선 등 한민족의 고대정권 구조와 유사하다.
BC 174년 흉노의 영걸 묵특 선우는 돈황 넘어 서역을 정벌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후, 우현왕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BC 121년 흉노의 우현왕(휴도왕) 사후 태자 김씨 형제(김일제, 김륜)가 중국으로 들어와 한 왕실에서 활약
했고, 전한 멸망 후 세운 것이 ‘신’나라다(왕망:원래 김망이라 한다).
이들 후예가 김해와 경주 일대에 들어와 신라·가야를 형성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씨는 흉노인이며, 김해 가야는 흉노인 김씨의 나라였다.
또한 신라로 진출한 김씨 왕국을 확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동인, 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
⑤논란이 있지만, ‘단군세기’에 따르면 고조선 3세 단군때 삭정을 약수지방(감숙성)에 유배시켰다가 그
땅에 봉한 것이 흉노의 시조라 하며, 30대 및 37대 단군시절에는 흉노가 고조선에 조공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여진·선비·몽고·흉노 등은 본래 我의 동족이었다. … 我에서 분리된
흉노·선비·몽고…”라고 하여 흉노가 우리에게서 분리된 점을 갈파하고 있다.
현재 몽골인들은 흉노를 자신의 조상으로 생각하고 교과서에서도 몽골 최초의 고대국가가 흉노라 한다.
또 튀르크계 국가인 터키의 교과서는 튀르크의 고대국가가 흉노라 한다.
헝가리에서는 훈족의 후예가 유럽에서 건설한 나라가 헝가리이며, 헝가리인들은 훈족의 통치자 아틸라를
자신의 위대한 선조로 생각하고 있다.
모두 국경의 역사가 아닌 민족과 흐름의 눈으로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서양 역사를 뒤바꾼 흉노-훈제국, 세계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홍산문화, 현대 세계경제사의 무대에 당당히
등장한 대한민국. 그 흐름의 역사를 보다 열린 마음과 시각으로 이해해 보았으면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10.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혼이 난 선비족의 정체
흉노에 이어 중국사의 중심에 선 선비족
1. 선비족의 기원과 화북을 제패한 화려한 등장
몽골고원을 근거로 거대국가를 이루었던 흉노에 이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기마유목민족이 선비(鮮卑)족
이다. 선비족은 몽골-퉁구스계로 추정되는 유목민족으로, 몽골 동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나 몽골
고원과 만주의 경계에 있는 대흥안령산(일명 선비산)에서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하였다.
시라무렌강은 내몽골 적봉시 북부에서 발원하며, 바로 홍산문화지역의 중심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는 ‘호(胡), 선비족은 오환과 함께 ‘동호(東胡)’로 불린다.
선비족은 1세기초부터 흉노의 지배를 받았으나 흉노가 남·북 흉노로 분열하자 후한과 연합하여 북흉노를
서쪽으로 몰아내고 몽골고원을 차지해 북아시아의 패자가 되었다.
AD 156년 ‘단석괴’란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부족을 통합하고 흉노의 옛땅을 차지하여 거대국가를 건설했다.
선비는 동호의 남쪽 일파인 오환까지 통합하여 몽골고원-바이칼호-만주-오르도스 지역 일대를 장악하면서
최대 영토가 490만㎢에 달했다.
이때 선비는 중국(후한)을 침략하는 등 힘을 과시했지만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되어 내몽골에서 할거했다.
대릉하 유역의 ‘모용부’, 시라무렌강 유역의 ‘우문부’, 그 남쪽의 ‘단부’, 내몽골 현 호화호특시 방면의 ‘탁발부’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후한 멸망 후 중국을 진이 통일했으나 ‘8왕의 난’으로 혼란을 겪는 가운데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선비·갈·저·
강’의 5개 민족이 남하하여 화북지방에 각각 정권을 세웠다.
“오호십육국” 시대(AD 304~439)로, 북방의 오호(五胡)와 한족이 세운 16개 나라가 135년 동안 흥망을 거듭
했다.
오호는 다음과 같다.
① 흉노 분열 후 내몽골 지역에 있던 ‘남흉노’는 북쪽 선비 세력의 압력으로 황허강의 오르도스 지역으로
남하하였다가 만리장성 내 중국영역에 자리 잡았다.
남흉노의 직계 후손인 ‘유연(劉淵)’은 외척이 한나라 출신이어서 한나라 후예라는 명분으로 오호족 최초
정권인 한(漢·前趙)을 건국한다(AD 304).
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은 ‛중국의 아틸라’로 불리는데, 진나라 낙양을 점령하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인구의
절반을 학살한 인물이다. 당시 북중국을 장악한 흉노세력을 피해서 양자강 이남으로 피난간 중국왕조가
동진이다.
② 전조의 유총 사후 흉노의 다른 계통으로 갈족인 석륵이 후조(後趙)를 세우고 전조를 멸망시켰으나
불과 20년만에 선비족 모용씨에게 정복당했다(AD 352).
③ ‘선비족 탁발씨 부족’은 내몽골 호화호특을 근거로 하다 만리장성 아래로 남하하여 산서북부에 자리
잡고 시조 ‘역미’의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다(AD 310).
‘선비족 모용씨 부족’은 현재의 요녕성 창려를 근거로 만주 남부 요동과 요서지역을 장악하고 ‘모용 황’이
연국(燕國 : 전연·후연·서연·남연)의 기초를 다졌다(AD 337~438).
④ ‘티베트계 저족’은 감숙 남부와 사천 북부 산지에 근거하다가 ‘부홍’이 장안을 수도로 섬서 지역에 전진을
건국했다. 그후 국가기반을 확고히 한 ‘부견’이 모용의 지배지역을 모두 제압하고 북중국을 장악했으나
후대에 모용씨에 다시 자리를 내어줬다(AD 350~394).
⑤ ‘또다른 티베트계 강족’의 ‘요장’은 감숙성을 본거지로 하다가 ‘부견’ 사후 모용씨가 장악했다가 떠난
장안을 점거하여 후진을 세웠다(AD 386~417).
이처럼 왕국의 난립이 지속되던 대혼란기는 선비족 탁발부에 의해 다시 통일됐다.
탁발부의 역사는 ‘역미’에서 출발해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고, 5대손 ‘십익건’이 부족통합과 국가
정비를 이루었는데, 십익건의 손자가 태조 도무제 ‘탁발규’이다.
AD 386년 즉위한 탁발규는 모용의 후연을 정복하고 위(북위)를 건국하였다.
탁발규는 주위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오르도스에서 몽골 남부를 세력 하에 두면서 후연과 맞섰다.
AD 439년 3대 세조 태무제(탁발도)가 화북을 통일하여 거대한 탁발왕국을 건설해 남쪽 중국왕조(송)와
남북조시대를 열었다.
탁발사-도-준-홍-굉-각으로 이어져온 선비족 탁발왕조는 그러나 북방민족의 기풍을 잃으면서 문약해졌고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마침내 550~556년 북제·북주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후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문제)은 북주의 군사귀족으로 한족과 선비족의 혼합
혈통이다. 수에 이어 당을 건국한 당고조 이연도 마찬가지로 선비족 출신의 무장이다.
선비족 국가(왼쪽). 오른쪽은 프랑스국립 동양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3~4세기 선비족의 벨트 버클
2. 기마군단 선비족이 건설한 국가들이 한민족 역사와 만난 현장
중국의 전국 7웅 중 패자인 ‘연’나라(오호 16국 시대 모용부의 ‘연국’과 다름)는 BC 300년경 ‘진개’를 앞세워
동호와 고조선을 공격했다.
중국은 전국시대를 진나라가 통일하고 한나라가 이어 받으면서 흉노정벌에 나섰으나 기마군단 흉노에 참패
하고 오히려 흉노에 조공하게 됐다.
이런 와중에서, 한나라의 변방국이 된 ‘연’에서 고조선 계열 인물로 알려진 위만이 고조선 일부(번조선)지역을
점령하여 위만조선정권을 세웠으나, (BC 194) 한과의 전쟁 끝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고구려의 영토확장 정책에 선비 모용부의 ‘연국’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고국원왕의 고구려는 연왕이 된
모용황의 침공(342년)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는 등 후연 시대까지 이들은 고구려 서북방 팽창정책에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수차례 공격을 격퇴시키고 대강국 고구려의 기틀을 공고히 했다.
광개토대왕은 5호 16국 시대로 불리는 북중국의 혼란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 국력을 최대한 신장시키는 위업
을 달성한 것이다.
북위가 통일을 이루고 군사강국으로 등장하자 장수왕은 남북조 등거리 외교로 고구려를 안정시켰다.
선비족 무덤벽화 무사도(연나라 시대, 내몽골 조양)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왼쪽부터).
고구려는 이후 선비인들이 건설한 수·당나라와도 국운을 걸고 싸웠다.
수 문제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강국부민 정책을 추진했으나, 고구려 침략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시키는 바람에
결국 실패했다.
598년 문제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자, 양제는 전왕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13만 대군으로 침공했으나
살수에서 참패하고 평양으로 진공한 4만명 수군은 몰살되었다.
613년, 614년에 양제는 2·3차 고구려 침략전쟁을 일으키나 또 다시 실패했다.
수나라는 결국 37년만에 문을 닫았다.
당태종 역시 북방산서지역 한족과 선비족 혼합혈통의 귀족집안 출신이다.
이는 당 또한 민족융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북방민족이 중원에 진출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건국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연의 아들 이세민은 당 태종으로 즉위한 후 중원을 통일하였으나 두 번에 걸친 고구려 정복에는 실패했다.
그 후 3대 고종이 신라와 연합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했으나 신라가
당을 격퇴하고 이를 차지했다.
3. 기마군단의 역사속에서 비추어 보는 한민족의 고대역사
스키타이, 흉노, 훈, 선비 등 AD 5세기 이전에 유라시아대륙에서 활약한 기마유목국가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역사가 거의 없다.
반대로 그들로부터 정복 또는 침략당한 정주민의 기록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 기록에는 왜곡이 많을 수 밖에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마군단이 건설한 국가들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만의 독특한 역동과 흐름의 흔적이 너무나 뚜렷히 남아있다.
유라시아대륙의 기마유목민족이 건설했던 나라들은 민족이나 국경 개념이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유목민족제국은 대부분 다수 민족의 부족 연맹체라 할 수 있다.
흉노제국은 알타이 부족 연맹체로 튀르크, 몽골, 만주-퉁구스, 한(韓)민족계 등이 어우러진 혼성국가였다.
흉노란 제국은 있으나 흉노민족이란 없다. 또 선비란 민족은 있으나 선비라는 통일국가는 없다.
오늘날 터키에서는 흉노제국을 그들의 초기국가라 하고, 몽골에서는 자기들의 고대국가라 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한민족과 흉노의 관계를 언급하면 민족주의 과대 발상이라 하는 한국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한(韓)민족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다. 단일민족이란 이름으로 미화할 대상이 아니며 그럴 이유도 없다.
광활한 유라시아 동·서 스텝지역에서 오랜 기간 삶을 영위했던 기마유목민족의 면면한 DNA가 오늘날
한국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도 부정할 수도 없다.
우리의 고대국가에서는 언어·관습제도 등 많은 부분에서 알타이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들이
알타이계의 부족연맹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다른 세상과 교류·협력했고 또 다른 세력과 투쟁하면서 살아왔는지, 고대 화려한
역사로부터, 어렵고 참담했던 기록으로부터 시작해 현재 우리가 묵도하는 기적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여유를 갖고 풀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흐름에는 마음을 닫아버리고, 실존했던 고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진데 대해서는
눈을 닫아버리고, 중국이 가져가는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인식을 닫아버려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출처] 김석동 전 금융통화위원장 : 김석동의한미족 성장 DNA 추적 / 조선일보 프리미엄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