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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가,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다. 무리가 다시 예수께로 모여드니, 그는 늘 하시는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4. 그들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두고 물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면, 간음하는 것이다."(마가복음10:1-12)
1. Then Jesus left that place, went to the province of Judea, and crossed the Jordan River. Crowds came flocking to him again, and he taught them, as he always did.
2. Some Pharisees came to him and tried to trap him. “Tell us,” they asked, “does our Law allow a man to divorce his wife?”
3. Jesus answered with a question, “What law did Moses give you?”
4. Their answer was, “Moses gave permission for a man to write a divorce notice and send his wife away.”
5. Jesus said to them, “Moses wrote this law for you because you are so hard to teach. 6. But in the beginning, at the time of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as the scripture says. 7. ‘And for this reason a man wi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unite with his wife,[a] 8. and the two will become one.’ So they are no longer two, but one. 9. No human being must separate, then,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10. When they went back into the house, the disciples asked Jesus about this matter. 11. He said to them, “A man who divorces his wife and marries another woman commits adultery against his wife. 12. In the same way, a woman who divorces her husband and marries another man commits adultery.”
1.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가,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다. 무리가 다시 예수께로 모여드니, 그는 늘 하시는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1. Then Jesus left that place, went to the province of Judea, and crossed the Jordan River. Crowds came flocking to him again, and he taught them, as he always did.
마천의 친구를 찾아가다가 오도재로 잘못 오른 적이 있습니다.
길이 가팔라서 꼬불꼬불 차가 힘겹게 올라갔습니다.
차가 앵앵 소리를 내면서 가게 된 것입니다.
이 길을 택한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주님은 지금 유대 지방으로 가시더니 요단을 건너 동편으로 가셨습니다.
또다시 강을 건너서 유대 지방으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주님은 빠른 길을 놔두고 왜 이런 길을 택하셨을까요?
유대 나라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한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 으르렁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주전 721년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을 빼앗은 앗수르의 식민지 정책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24. 이스라엘 자손을 사마리아에서 쫓아낸 앗시리아왕은 바빌론과 구다와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에 살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사마리아를 자기들의 소유로 삼았으며, 이스라엘 성읍들 안에 정착하여 살았다.(왕하17:24)
강대국 앗수르는 민족을 뒤섞어놓는 것을 식민 통치 방식으로 삼았습니다.
특별히 이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유난히 선민의식이 강한 그들은 앗수르에 지배당한 이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민족과 피를 섞었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적개심은 여러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 지역으로 갈 일이 생기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피하기 위해 강을 건넜다가 또다시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들의 강한 종교심이 그런 수고를 경건 행위로 여기게 했을 것입니다.
또 사마리아 사람들도 가만 안 있었습니다.
자신의 땅을 밟는 유대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52. 그는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는데, 그들이 가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53.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눅9:52,53)
형제가 적이 되면 화해를 모릅니다.
하나님은 믿는 마음이 강을 건너갔다가 돌아왔다가 쓸데없는 고생을 더 하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행위의 빌미로 내세우는 경우 더 무서운 결과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죽이고도 그 행위가 성결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63.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
64.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예수는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정죄하였다.(막14:63,64)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거룩한 이유를 대면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법이 사람 손에 들렸을 때 선하게 작동하지만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악행의 방식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므로 그들의 악한 의도를 충족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거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제가 싫으니 끊어버리고 모세의 법을 통해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제 의를 성취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교묘한 나머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그런 악을 범하면서도 자신이 의로운 줄로 착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자기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내 병 고쳐 주시고 귀신 쫓아주시는.......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비중을 두셨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1. 그는 늘 하시는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1. he taught them, as he always did.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가르치셨는지 봅시다.
예수님은 강을 건넜다가 다시 강을 건너오게 한 사마리아 사람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심하게 상처를 내고 그 사람을 버려두고 가버렸습니다.
그대로 놔두면 그 사람은 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신음하는 그 사람 앞을 두 사람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제사장 두 번째 레위 사람입니다.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서,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눅10:31,32)
이들은 둘 다 종교인이었는데 이 현장에서 종교는 과연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두 사람 다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피를 묻혀 불경한 채 거룩한 하나님께 종교적 제의를 드릴 수 없다는 거룩한 이유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만 지나갔더라면 그 사람을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실은 그 자리가 무섭지 않습니까?
그 놈들이 숲속에 몸을 숨기고 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거기서 지체했다가는.......
그런 자리는 얼른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 때 종교인들이 들먹인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종교인들은 그런 식으로 범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종교적으로 보자면 열등한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 사람이든 사마리아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생명부터 구하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저기 숲속에 강도가 숨어있는 것을 모르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이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죄인들의 손에서 악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경건을 빌미로 요단 강을 건넜다가 다시 건너오는 바보짓을 하느냐?
강 건너는 수고 정도가 아닙니다.
600만의 유대인을 죽이면서 너희가 예수님 죽였으니 나도 너희를 죽이겠다고 히틀러가 거룩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신학자들이 힛틀러의 행위를 정당화해준 것입니다.
이런 사탄이 시키는 거룩한 신앙 고백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선한 법이 죄인 손에 들리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 죄인들의 경건이 사람들의 문화에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제 마음대로 이혼하고 모세의 법을 들먹이며 간단히 자신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북한 우리의 동포도 강도에 맞아 죽어가는 그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놔두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 무지한 교회가 이데올로기 편을 들어주면서 경건 어쩌고 합니까!
특별히 극좌파의 우두머리로 북한에서 특권을 누리더니 이력을 이용해서 남한에 와서도 극우파로 특권을 누리는 탈북민들 잘 들으세요.
혹은 극좌파에 시달리다가 밥 먹으려고 남한에 와서는 극우파가 된 탈북민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데올로기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좌파라고 부르는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여기도 독재 국가였을 것입니다.
특별히 거짓을 일삼으며 생명을 역행하는 종교 이데올로기의 편을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형제자매 300만 명이 예루살렘을 내려오는 그 길에서 신음하다가 죽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골짜기에는 계속 죽어가는 사람이 누워있는데 아무 말 말고 당신의 말에 죽어가는 사람을 싣고 여관으로 옮기는 일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이웃이 되는 길입니다.
북한의 독재자가 남한에 쌀 도와준다고 한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남한의 악질 독재자가 그것을 대뜸 받은 통에 300만 명이 죽고 말았다고 어느 탈북자가 웃으며 그 말을 했습니다.
남의 독재자 북의 독재자가 정치적 장난질을 하는 통에 300만의 양민들이 죽은 것입니다.
그들을 고립시키자는 미국의 정책도 일조한 것인데 그 일에 박수치며 동조하는 정신 나간 짓을 그만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은 타민족이고 그들이야 제 국익을 위해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살릴 길은 우리가 그 바보 같은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제 죽을 일을 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한 형제입니다.
폭탄 정책이 아니라 햇볕 정책을 펴야 합니다.
햇볕 정책이 왜 좌파적입니까?
그런 이데올로기를 벗어버리고 생명을 존중하자는 기독교적인 사고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인 모양인데 6.25 전쟁 중에 형은 국군으로 동생은 인민군으로 전장에서 총을 들고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이데올로기 만세를 외치면서 형이 동생을 쏴 죽이고 최고 훈장을 타야겠습니까?
그 더러운 훈장이 여러분의 목표입니까?
경건?
무슨 경건?
똥폼을 잡지 말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의 몸에 죽어가는 사람의 피를 묻힙시다.
우리들의 말에 그 사람을 싣고
폭탄 만들 돈으로 여관비를 내고 그 사람을 여관에 맡깁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웃이 됩시다.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통해서 이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경건한 사람이 될 것이냐 혹은 예수님의 이웃이 될 것이냐?
주님은 엄청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2.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2. Some Pharisees came to him and tried to trap him. “Tell us,” they asked, “does our Law allow a man to divorce his wife?”
요즈음 이혼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은 모양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문제가 있으면 주님께 들고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안이 없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대안이 아닌 것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발걸음이 복 됩니다.
다른 것 다 빼고 주일을 맞아서 여기 교회 장의자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중요한 특징을 말하자면 무슨 일이든지 일단 그 문제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과거에 교회를 다녔는데 지금은 교회를 쉬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부인해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그 말이 참 이상했습니다.
저는 학교를 다니면서 미적분을 재미있게 풀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40, 50년이 지난 지금 그 문제를 저에게 가져다주면 몇 시간을 끙끙대다가 간신히 한 문제나 제대로 풀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 하나님을 믿는 일은 미적분보다 더 어렵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믿는다는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신앙은 하나님이라는 차원이 다른 인격을 전제하는 일입니다.
몇십 년을 함께 살았지만 저는 같은 사람인 내 마누라라는 인격을 감당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지금 차원을 달리하시는 하나님의 인격과 동행하는 중입니다.
즉 감당 못 할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12.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3:12)
그래서 우리도 도통 알 수 없는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 교회를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목표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사막을 걷는 중입니다.
잘못하면 방향을 잃을 것이며 그러면 죽습니다.
제대로 길을 간다고 해도 이곳은 메마른 사막입니다.
그런데 이혼 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자신의 이혼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당사자는 아니었습니다.
그 일로 지난밤 잠도 못 자고 고민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이혼이라는 주제를 두고 토론하기 위해 온 잘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유념해 두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주제들은 사돈네 팔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남자와 여자의 두 성을 만드시고 그들로 한 가정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태초에 두 성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만드셨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 지났더라.
하나님은 이 가정에 엄청난 비중을 두셨습니다.
그를 충분히 확인해 볼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심으로 사람을 포함해서 숨 쉬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수장시켜버리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결혼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1.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창6:1,2)
결혼이 문제가 되어서 일어난 일이 노아의 홍수의 사건입니다.
물론 이 일뿐 아닙니다.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또 다른 징벌이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사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 구성 요소를 갖추었습니다.
7.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2:7)
원래적 사람은 흙이라는 육적 요소와 또 하나님의 생기라는 영적인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결혼을 보시고 진노하셔서 모든 사람을 결정적인 장애인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3. 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창6:3)
사람들이 이제 육의 껍데기만 꿈틀거리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에스겔의 죽음의 골짜기가 된 것입니다.
뼈다귀들만 즐비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텔레비전 뉴스를 보시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저 짓을 하나?
청문회를 들어 보시면 거짓말 밥 먹듯 하는 고위 관리들을 보실 것입니다.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결혼이야 내가 좋아서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결혼에서 그 무엇이 하나님을 그처럼 분노하게 했을까?
그들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과 이 땅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하늘과 땅의 명확한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 사는 사람들은 제 마음에 끌리는대로 했습니다.
자석처럼 끌리면 가서 붙어버린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보존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존재들은 이 땅에 또 하늘의 아들들은 하늘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것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성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학이 신념이 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화되어서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이 믿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우상적 존재가 되다 보니 여지없이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 폐수가 세상을 덮게 되어있습니다.
과학과 신앙이 상존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실험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이 입증되지 못하면 과학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은 우리가 입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731부대를 아실 것입니다.
그 놈들이 생사람을 잡아보고 그 많은 실험을 통해 데이터를 얻어 의료 과학을 발전시켜 놓은 것입니다.
일본놈들에 의해 또다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원전 사고수를 방류하고 나서 몇십 년이 지나 장애인 수와 죽은 사람 수를 헤아려서 과학 잡지에 데이터를 게재할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존중하라는 계명을 믿고 실천하는 믿음으로 삽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온 질문은 이제 결혼이 아니라 이혼입니다.
제 좋다고 했던 결혼인데 이제 그 사람을 버리고 제 싫다고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결혼 문제가 심각했다면 이혼을 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당시에 사회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혼에 대한 두 입장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식사 준비를 하다가 밥을 태워도 그것이 이혼 사유가 될 수 있다는 힐렐파였습니다.
둘째 샴마이파는 간음 이외에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도대체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없는 이 문제를 들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타난 것입니다.
이 심각한 주제가 그들에게 심심풀이 토론 주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기로 한 것입니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3. Jesus answered with a question, “What law did Moses give you?”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가 영생의 길을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16. 그런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고자 하거든, 계명들을 지켜라."(마19:16,17)
먼저 계명에서 그 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로 그 계명에서 길을 찾기 위해 주일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있어서 베뢰아 사람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설교의 말씀조차 진정한 말씀인 성경을 통해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라는 학자는 설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의했는데 그것은 성경에 일치되는 경우입니다.
역사적인 예수님과 일치되는 경우입니다.
저라면 강대상의 설교는 빼버리고 역사적인 예수님과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실은 강대상의 설교란 성경 말씀을 죄인들이 알아먹도록 통역해주는 역할에 불과합니다.
11.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행17:11)
그래서 그들이 접하게 된 모세의 말씀은 명료했는데 이혼을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에 대한 설명조차 없었습니다.
다만 이혼장만 써주라는 것입니다.
4. 그들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Their answer was, “Moses gave permission for a man to write a divorce notice and send his wife away.”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모세의 법을 기계적으로 따랐습니다.
이혼장 한 장을 써주면 복잡한 문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제 양심의 문제
가족의 문제
종교적인 문제.......
이렇게 모세의 법을 지키면 자신들은 하나님의 법을 잘 따르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그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합법적인 방식으로 법이 요구하는 것을 위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대기업들이 일류대를 졸업한 법대생을 고용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법망을 피해 가면서 제 회사의 이득을 챙기는 일입니다.
가장 불법적인 자들은 법을 가장 많이 인용하는 자들입니다.
실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불법한 자들은 성경을 능수능란하게 인용할 것입니다.
5. 그 때에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마4:5,6)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때 악마가 나타나더니 성경을 인용했습니다.
김학* 별장 성접대 사건을 인터넷에 쳐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법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알게 될 것입니다.
검판사들은 법을 동원해서 불법 행위를 덮어주는 선봉들입니다.
법문을 가지고 제 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법조문은 검판사들 손 안에서 불법 행위를 위한 결정적으로 도구가 됩니다.
5.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5. Jesus said to them, “Moses wrote this law for you because you are so hard to teach.
주님께 그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모세의 법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세의 법은 그들 생각과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말씀을 아주 간단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의 법은 하나님의 태초의 말씀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보장하는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법이 사람들의 죄악을 미리 고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 중독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술중독이 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혼을 말씀하실 때에 그런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모세를 순종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은 지금 자신들이 술중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시인 행위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더 큰 일도 저지를 사람을 두고 더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한 방식으로 그 법조문에 이혼을 허락한 것입니다.
실은 저에게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의처증에 걸린 남편이 부인을 죽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 남편도 우리 교인이었습니다.
밤 12시에 전화를 받고 교회 차를 몰아 한라산 원동 깊은 숲속으로 갔습니다.
집사님은 신발도 못 신고 그 어두운 숲속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한 사람은 칼을 들고 있었을 것이고.......
저는 그 때 집사님께 남편 놔두고 서울로 올라가시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때 저는 목사로써 제 영적인 바닥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더러운 의처증 귀신아 나가라!
그 일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니 하나님 죄송합니다.
감히 모세를 들먹이니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모세가 하신 말씀은 그냥 남편 놔두고 서울로 가거라.
모세가 이런 계명을 쓰신 이유를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5.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5. Moses wrote this law for you because you are so hard to teach.
사람들이 완악한 마음 때문입니다.(because you are so hard to teach.)
영어를 따르자면 가르치기가 그렇게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제 고집만 부리면서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단순한 가르침을 통해서도 가르칠 수 없는 존재임을 모세가 아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일정 포기하신 것입니다.
주님도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존재를 바꾸지 않은 이상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나라의 한 쪽 그림자라도 보여야지 사람을 가르치지.......
똥이 밥이 아니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똥이 떨어지면 냉큼 가서 받아먹는 것들이 똥돼지입니다.
그 똥돼지에게 똥을 구별하게 하는 격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무덤에 묻혔다가 그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와야 합니다.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2:20)
그래서 선지자들이 종말에 일어날 가장 중요한 사건을 예언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6.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27.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겔36:26,27)
그렇게 종말에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사람을 개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르침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복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말씀에 아멘 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기적 중 하나입니다.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방금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뇌인지 입인지 그 알량한 과학 상식이 작동하지 못하게 막으셨던 것입니다.
내가 왜 그 말씀에 아멘을 외쳤을까?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향해서 이런 방언을 했습니다.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행7:59,60)
돌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축복하며 죽음을 수용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스데반의 입을 완전히 주장해버리신 것입니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6. But in the beginning, at the time of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as the scripture says.
예수님께서 이혼의 문제를 설명하신 것은 모세의 법조차 아닙니다.
태초의 원래적인 창조의 때로 근거를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을 때 인간의 죄로 인해 그 원형이 망가지지 않았을 그 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이 태초의 그 말씀이십니다.
모세도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예수님께서 태초의 그 말씀이신 것입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1:14)
모세조차 죄인들의 죄가 고려 된 미흡한 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완성이신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13.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 번째 언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 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히8:13)
모세의 법도 그 첫 번째의 언약으로 낡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을 때 그 때 완전했습니다.
그 태초의 하나님의 뜻이 순전하게 드러난 그 상황으로 되돌아갑시다.
즉 예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원래의 상황을 회복하는 일이 구원입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에덴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제 3의 성이란 성경에 없습니다.
제 3의 성의 방식은 없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본래는 이 둘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로부터 여인을 만드셨고 또다시 그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이 둘을 하나로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둘이 서로서로 존경하면 싸우지 말고 살라는 윤리적 요구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최선의 윤리로 영원히 둘로 남으라는 요구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본래 하나였으니 다시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7.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7. ‘And for this reason a man wi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unite with his wife,[a]
갈비 하나가 떨어져 나와서 내가 된 경험을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했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의 살이 떨어져 나와서 우리가 된 것입니다.
어머니의 살로 우리가 만들어졌으니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람을 어디에서 찾는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더 큰 사랑이 있습니다.
아내와 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혼의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합니다.
그것이 이제 더 고귀할 것입니다.
제 부모를 떠나 약속을 따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성의 차이를 극복하고
또한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수 없는 차이를 극복하고 약속으로 인해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신비가 결혼입니다.
8.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8. and the two will become one.’ So they are no longer two, but one.
결혼은 내가 좋아서 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랬다가 모세의 법을 따라서 이혼 증명서를 써주면 다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창조의 경계를 넘었다가 노아의 홍수가 난 것입니다.
우리는 두 성 즉 남성과 여성으로 하나가 되어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9. No human being must separate, then,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제 원하는대로 이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일을 모세의 법을 통해 정당화하다니 언어도단입니다.
모세의 법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법은 죄인들의 죄를 전제하면서 주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완전한 법이십니다.
모세는 예수님께 이르는 과도기적 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에게 모세의 법을 잘 지켰는지 물으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그 법을 잘 지켰던 것입니다.
주님은 법을 지켰다는 부자를 일단 사랑스럽게 여기신 것입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 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막10:21)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법을 능가하는 다른 법을 제시하셨습니다.
21.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런데 부자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더니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주님이 주신 법은 모세의 법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27.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5:27,28)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모세의 차원입니다.
하지만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인 것은 예수님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차원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을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두고 물었다.
10. When they went back into the house, the disciples asked Jesus about this matter.
이제 예수님께서 강의실을 옮기셨습니다.
집으로 가셨습니다.
12명만을 대상으로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먹고 수용한다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요구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실천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직 셩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이성이 마비된 상황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받았다니 이성의 눈 감고 있어야 제대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원고 없이 설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집에 돌아오셨는데 또다시 칠판을 가져오시더니 분필 가루를 마시시며 그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밖에서도 가르치시더니 집에 오셔서도 다시 칠판을 찾으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이성적인 가르침이 배제되었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해 못 하는 그들을 다시 과외시키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지를 거꾸로 입는다든지
손에 왕자를 쓴다든지
산 소 껍데기를 벗겨서 점을 친다든지
도대체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모지리 귀신이 거꾸로 입은 바지에 속아 넘어가!
그런 모지리를 신으로 믿어?
주님의 말씀은 이성을 동원해서 설명할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를 사람의 이성을 다 동원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비이성적인 행동을 난발하는 한국 교회는 심각한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빤스 내리라는 소리를 경건한 소리로 알아듣는 한국 교회가 정신이상에 걸려 있습니다.
그것이 나름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방언 예언이라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랑과 정의 실천의 윤리적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면 천국의 입장권이 될 수 없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2,23)
신앙에 있어서 비이성적 태도는 반신앙적입니다.
그들은 집에 돌아오자 다시 그 말씀을 질문하고 주님은 또 그들에게 성실하게 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공개적인 설교와 개인 과외가 교회의 중요한 구성 요소입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요,
11. He said to them, “A man who divorces his wife and marries another woman commits adultery against his wife.
주님은 그들이 간과했던 중요한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누가 크냐를 가지고 다투었습니다.
주님은 그 때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막9:42)
네가 커야 한다는 자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작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의해 내 영혼의 죽고 사는 일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결혼 전 연애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이혼을 한다는 것은 이 사람 아니면 죽고 못 산다고 고백했던 아내에 대한 중대 범죄 행위라는 것입니다.
시각을 최소한 네 마누라에게 돌려서 이혼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고 못 산다고 고백했던 제 마누라에게 감정에 사고 잡혀서 가장 무책임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면, 간음하는 것이다."
12. In the same way, a woman who divorces her husband and marries another man commits adultery.”
이혼을 통해서 아내로 간음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에서 여성이 이혼 결정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헤롯의 아내가 그 일을 처음 했던 모양입니다.
이제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남편으로 간음하게 하는 범죄 행위를 한 격입니다.
그 이혼에 관한 일은 내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아내가 한 그 일은 남편의 일이었으며 모세의 법이 동원되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