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친구 / 수필울 제 2 집 수록
권 덕 봉
나의 첫 하숙 생활은 충주시 교현동 언덕 위에 있는 양옥집에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친 바로 다음 날 부임한 곳은 충주지점이었다. 상고머리에 처음 입는 양복을 어색해하며 이불 보따리를 들고 들어서는 신입사원이 어설퍼 보였던지, 나이 지긋한 대리가 이것저것 물었다. 숙소를 정하지 못했음을 듣고는 총무 담당 행원에게 하숙집을 소개하라 하였고, 그에게 이끌리어 간 곳이 바로 그 집이다. 군에 가기 전 두 해를 그 집에서 살았는데 절친한 친구 둘과 함께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우연히 행복의 기준으로 ‘살아 있다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했음’을 언급한 글을 읽었다. 글을 읽으면서 위의 두 친구가 생각났다. 한 명은 타고난 복으로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 해보고 오십 초반에 세상을 떠난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영수다. 다른 친구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내고 아직도 건재한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철구다.
철구는 다른 은행에 들어갔는데 신입 행원 연수를 마치고 나보다 두 달 뒤에 충주로 왔다. 그는 무주 출신으로 이발관을 하던 형의 신혼집에 얹혀살며 학교에 다녔다. 그 이발관은 나의 등굣길에 있었다. 삼 년을 그와 함께 걸어서 등교했었는데 더부살이의 불편함을 내비치기도 했었다. 그를 내 하숙집에 소개했다. 처음에는 방을 같이 썼으나 이내 각자 따로 방을 쓰기로 했다. 퇴근 시간과 잠버릇이 서로 달라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주말마다 붙어 다녔다.
산행 경험도 없으면서 해낼 수 있다는 치기만으로 뭉친 둘이 치악산 등반을 감행했다. 온갖 봄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는 사월 초순이었다. 주말 근무가 끝난 토요일 오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시간을 아끼려고 다른 사람들이 자주 가지 않는 코스를 선택했다. 지금은 폐역이 된 치악역에서 내려 금대계곡 영원산성을 지나 상원사 앞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 잔 후 남대봉 향로봉을 거쳐 치악산 정상에 이른다는 계획을 세웠다. 치악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는데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렸다. 금대계곡 입구에 들어서자 계곡물 소리가 졸졸거렸다. 등산로를 따라 걸었는데 몇 번인가 계곡을 가로 건너야 했다. 등산로가 자주 끊겼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이 깊어져 손전등을 들고 길을 찾아 헤매는데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계곡물 소리가 커졌다.
상원사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비에 젖은 몸이 춥고 떨렸다. 어둠 속에서 헤매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등산로에서 조금 넓은 곳을 택해 A 텐트를 치고 자기로 했다. 좁은 텐트 안에 쪼그리고 앉아 석유 버너로 물을 끓여 마시며 추위에 움츠러든 몸을 녹였다. 텐트를 때리는 빗소리에도 불구하고 졸다 깨기를 반복하니 어느덧 날이 밝아왔다. 비는 그쳤다. 계획대로 산행하기에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불어난 계곡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길을 모르니 돌아서 갈 수도 없다. 어찌 되든 건너야만 한다. 무모한 산행을 감행한 자들이 충분한 사전 준비를 했을 리 없다. 계곡물을 건널 장비가 없는 것이다. 마른 칡덩굴을 걷어 그것을 잡고 건너보자 했다. 여러 가닥을 한 줄로 만들어 한쪽 끝을 잡고 서 있고 다른 한쪽을 잡은 사람이 계곡을 건넜다. 그리고 나면 건너편에 서 있던 사람이 건널 예정이었다.
아슬아슬하게나마 두 번은 무사히 건넜다. 계곡의 물살은 아래로 갈수록 더욱 거세어져 건너기가 두려웠다. 세 번째는 망설이는 그를 제치고 내가 먼저 건넜다. 헤어진 칡덩굴을 새것으로 바꾸었어야 했다. 철구가 잡고 건너오는데 덩굴이 끊어졌다. 물살에 휩쓸려 그가 떠내려갔다. 너무 놀라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하늘이 도왔다. 계곡 한가운데 돌출해 있던 커다란 바위에 그의 배낭이 걸렸다. 죽음에서 돌아온 그와 함께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일회용 코닥 카메라로 찍은 어둡고 칙칙한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 본다.
영수의 성씨는 은진 송이다. 그의 집은 동네에서 손꼽는 부자였다. 텔레비전 드라마 ‘여로’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나도 그중에 있었다. 중∙고등학생일 때도 그 집에 드나들었다. 재수하여 한해 늦어진 영수가 다음 해 여름에 찾아왔다. 놀랍게도 학생복을 입고 여학생을 데리고 왔다. 그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했다. 신립이 배수의 진을 쳤었다는 탄금대에 데려가고 시내 구경도 시켰다. 제법 근사한 중식당에 데려갔다. 오랫동안 그로부터 얻어먹기만 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클 수 있다. 학생복 차림의 그들을 여관에 데려갈 수 없어 나의 하숙방을 내어주고 철구의 방을 빌렸다. 그 뒤 그녀와 어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철구는 은행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하더니 세무사가 되었다. 그의 세무사무소에 자주 드나들었다. 회계사 시험에도 합격하여 세무∙회계사 사무실로 명칭을 바꾸었다. 지금은 인문계고등학교로 바뀐 모교의 학부모회장으로도 활동했었다. 영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더니 물려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조그만 건설 회사를 차려 많은 돈을 모았다. 철인삼종경기, 패러글라이딩, 골프를 즐겼다. 해외여행도 자주 다녔다. 술과 담배는 하지 않았는데 집안의 내력인 췌장암으로 오십 대 초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철구와 영수 중 누구의 삶이 더 행복할까?
부모님을 모신 공원묘지에 죽은 영수의 묘가 있어 설과 추석, 일 년에 두 번은 그를 만난다. 하지만 살아있는 철구는 만나본 지 두 해가 넘었다. 그가 자정 넘어서도 술집으로 불러내기를 자주 해서 내가 싫은 소리를 한 후 소원해졌다. 그를 불러내 소주 한잔하며 옛날을 추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