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원 김홍도와 조선시대 민화 1 [유홍준의 문화유산을 보는 눈](12) | |
때 있었던 우리로서는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이야기들을 쭉 공부를 했습니다. 공재 윤두서에서 시작해서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호생관 최북, 겸재 정선까지 그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전부 다 화원출신이 아니고 사대부 화가 출신들이었습니다.
동양화에 있어서 화가의 두 줄기가 선비화가와 직업 화가의 두 줄기가 쭉 뻗어 가는데 중국의 경우에도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다 선비 화가고 그 다음에는 직업 화가들이 와서 그것을 하나의 양식으로 완성을 해놓고 그것이 한 사조를 형성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회화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베껴서 그리는 데생 손놀림의 솜씨가 아니고 그 속에 있는 무엇을 담을 것인가 어떻게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은 고차원의 인문정신이 들어가 있다고 했을 때 당연히 그것을 창출하는 사람들은 선비화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회화는 고차원의 인문정신 산수화라는 장르를 양식으로 만든 곽희 같은 사람은 대학자였습니다. 그 분이 ‘임첨고치’ 같은 책을 냈고 그렇게 만든 것이 남송 때 가면 마원 같은 화가에 의해서 화풍으로 정착이 됐고요. 송나라 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원나라 때 가면 조명부 같은 대학자가 일상 속에서의 산수의 의미를 이야기 하고 원말 사대가라고 하는 원나라말기의 문인화가들이 그야말로 문인화풍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청나라·명나라 말기에 심석전이나 동기창 같은 사람들이 문인화풍을 다시 일으켜낸 것이 그 다음에 청나라 때 사왕오운이라고 하는 직업 화가들이 그것을 받아 갔던 것이었습니다. 이라고 하는 분이었습니다. 표암 강세황은 그림보다도 시와 글씨로 더 유명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이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것은 단원 김홍도라고 하는 화가를 발견 해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표암 강세황의 추천에 의해서 단원 김홍도가 궁중에 들어갔습니다. 정조 대왕이 쓴 ‘홍제전서’ 문집 속에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다른 글을 쓰면서 나는 지난 30년 동안 궁중의 회사에 대해서는 다 단원 김홍도하고 같이 상의를 했다.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화가였고 그런 믿음을 또 주었던 것이 그 분의 탁월한 회화적 역량이었습니다. 표암 강세황, 9급 공무원에서 서울시장으로 일약 승진
벽오청서도 碧梧淸暑圖]-강세황(姜世晃, 1713-1791), 호는 표암(豹庵)
강세황의 〈벽오청서도〉는 그림 위에 '방심석전(倣沈石田)'이라고 밝혀져 있듯이 중국 남종화풍의 기본적인 화보인 《개자원화전》에 실린 심주의 구도를 모방하여 그린 것이다. 한 쌍의 오동나무 밑 초가에 앉아서, 마당을 쓸고 있는 시동을 바라보며 더위를 식히는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초가의 주위는 대나무와 파초가 어울려 있는 매우 멋스러운 곳으로, 앞은 트여 있으면서도 옆에는 형식적인 울타리가 쳐져 있다.
으로 높은 격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 남종문인화풍의 한명인 심주의 구도를 자신만의 색깔로 해석하여 그려낸 작품으로화보 속의 심주를 모방한 것이지만 이를 자유롭게 해석하여 더욱더 높은 경지 위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표암 강세황이 명나라 심석전의 그림을 방작을 해서 ‘벽오청서도’ 벽오동 밑에서 여름을 식히는 더위를 식히는 이러한 그림들은 전형적인 문인화풍의 선비그림의 전형적인 것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 분은 중국에도 갔다 와서 개성 가는 길에 영통동굴을 지나가는 것을 실경산수를 그리는데 여러 분들이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런 서양화법으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이 둥근 바위에 양괴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전통동양화법에는 전혀 없었던 것을 하게 됩니다.
표암 강세황 이 분이 애시당초 출세에 뜻이 없고 처갓집이 안산에 있어서 안산에 주로 살고 있다가 서울에서는 회현동 쪽에서 쭉 살았는데 아들이 과거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어요. 합격을 했는데 영조 대왕이 아들에게 물어봅니다.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그러니까 “요즘에 서화로 소일을 하고 계시다”고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또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니까 영조 대왕이 물어봅니다. “아버님은 어떻게 지내냐”고. 그랬 더니 또 “서화로 지낸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학문에 열중하지 않고 그림 같은 것을 가지고 소일한다 해서 헐뜯는 일들이 있는데 아버님에게는 사대부 사회 속에서 그 분은 그냥 역이나 즐기는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 하는 풍조가 있으니까 좀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감격에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두 아들이 출세를 하고 국가에 공이 있어서 아들 덕에 영릉 참봉이 돼서 9급 공무원으로 환갑이 넘어서 관직을 시작을 합니다. 그랬는데 영조 때 늙은이들을 위한 과거시험을 한 번 봐서 장원급제를 해서 서울특별시장까지 일약 승진을 하시게 됩니다
그런 차에 청나라 건륭 황제가 칠순을 맞게 됩니다. 그랬더니 주변에 있는 나라에서 사절단이 오는데 사절단으로 오는 사람은 70 넘은 사람이 와라 그래서 현직에 있는 사람으로 70 넘는 사람을 고르니까 표암 강세황이 가게 됩니다. 지금같이 비행기 타고 또는 자동차 타고 가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북경까지 가는 데 한 달 걸리는 거였거든요? 그 노구에 그것을 간다고 하는 것이 나귀를 타고 가든 가마를 타고 가든 보통 일이 아닌 것인데 갔다 오게 됩니다. 남아 있습니다. 그 성당에 있는 본 벽화를 보고서 서양화법이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쓴 유명한 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연암 박지원도 그것을 보고서 쓴 것도 있듯이 이러한 그의 글이 화풍 속에서 이런 변화를 가져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이 분이 쓴 한 이야기 중에서 단원 김홍도와 연관해서 말씀을 드리면 단원이 35세 됐을 때 비로소 ‘단원’이라고 하는 호를 스스로 짓게 됩니다. 그러니까 단원이라는 호를 누가 해석하면서 단군조선의 박달나무 단(檀)자에 동산 원(園)자를 써서 이 분이 민족주의가 얼마나 강했는가!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청나라에 유명한 화가 이유방 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의 호가 단원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보고 ‘이렇게 멋있는 이름이 있는가! 나도 단원이라고 하는 호를 써야겠다.’ 그래서 단원이라는 호를 지어 가지고 선생님한테 찾아갑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정말 좋아했던 화가인데 그 분이 바로 ‘개자원 화보’에 밑그림을 그린 화가였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내가 또 진짜 좋아하는 사람 얘기했다가 신문에 날지 모르니까 내가 부시를 좋아해서 내 호를 ‘부시’라고 하겠다. 뭐 이런 식의 심정으로 얘기를 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무슨 사대주의니 민족주의니 그런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정말 세계사적 보편사적인 질서 속에서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의 그것을 자기도 본받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으로 단원 김홍도에게 아호를 갖다가 현판으로 써준다, 표암 강세황. 이렇게 현판을 써달라고 주문을 했어요. 그래서 표암이 그러겠노라고 그래놓고서 바로 쓴 것이 아니고 어떻게 글씨를 쓸까 이렇게 구상을 하는 것이죠. 되는데 정원은 커녕 집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표암 강세황이 그를 얘기를 써요. ‘단원기’라고 하는 글을 쓰면서 뭐라고 썼냐하면 ‘김홍도가 어느 날 자기에게 찾아와서 단원이라고 하는 현판 글씨를 써달라고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써 준들 그것을 갖다 놓을 집이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큰 글씨로 해서 현판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작은 글씨로 해서 단원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써주는 것이 더 좋겠다’ 해서 단원기라고 하는 단원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그 글을 써줍니다. 그리고 하나를 써놓고 보니까 좀 고치고 싶어서 ‘단원기 우일본’해서 또 한 번 그 글을 고쳐서 하나를 써줬습니다.
이 두 문장이 단원 김홍도의 40가지의 일생을 35세까지의 일생을 얘기하는 가장 정확한 정보가 들어있는 글이 됐어요. 참 아이러니죠. 만약에 그때 단원 두 글자만 딱 써줬으면 작품 하나 남았었겠죠.
정원은 커녕 집도 없는 무주택자라서… 그런데 그때 그 작품보다도 ‘단원은 어떤 사람이었다.’ 얘기를 해 놓는 것이 그 이후에 저 같은 사람이 단원에 대해서 글을 쓸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문장은 화인열전에 보면 다 인용을 했습니다. 장르를 갖다가 넣어도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인물, 신선, 화조, 산수, 풍속 모든 장르에 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그려냈으니 이러한 화가는 고금에 참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단원에 대해서 시작을 합니다.
안동 영주 쪽에서 제비원을 넘어서 바로 그곳이 안기로 단원 김홍도가 거기에서 찰방으로 근무를 한 얘기까지 그 책에서 나옵니다. 처음에 안기로 가기 전에는 사포서라고 궁중의 채마밭, 잔디밭을 관리하는 부서가 있습니다. 거기에 표암이 뒤늦게 영릉 참봉에서 올라가서 요즘으로 치면 과장을 하고 있을 때 김홍도는 거기에 과원으로 근무를 했었어요. 그래서 자기 직장의 상하관계로 있었죠.
표암 강세황이 쓴 글이 그 다음에 이렇게 됩니다. ‘나는 전후에서 김홍도를 세 번 다른 형태로 해서 만났다’ 처음에는 그가 이빨을 갈 무렵에 그러니까 7-8살 될 때 어금니 갈죠? ‘이빨을 갈 무렵에 나에게 와서 그림을 배웠으니 그와 나는 사제지간으로 만났다.
훗날 내가 뒤늦게 출사를 해서 사포서에서 책임자로 있을 때 김홍도는 왕의 초상화를 잘 그려서 내 부서에 와서 근무했으니 우리는 직장의 상하관계로 만나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니까 사람들은 김홍도의 화명이 높아져서 김홍도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서 그림을 그려서 나에게 와서 여기에 시를 써 달라 제를 써 달라 부탁을 하니 우리는 예술로서 만났다.’ 이것이 표암 강세황이 김홍도의 단원기에 썼던 아주 감동적인 명구들입니다.
소나무 강세황·호랑이 김홍도 사제간 합작품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김홍도) 비단 채색 90.4cm X 43.8cm호암미술관
유홍준교수는 소나무는 강세황이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린 합작품으로 오주석 선생은 김홍도의 작품으로 사실성을 극찬하고 표암화송이란 글은 조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한 그림 중에 이 호랑이 그림이 소나무는 선생이 그리고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린 사제지간의 합작품입니다. 그래서 위는 문인화풍으로 되어 있고 이것은 진짜 직업 화가만이 그릴 수 있는 아주 리얼한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호랑이 그림을 보면 엄청난 프로들이 갖고 있는 프로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 주는데 여기에 도판으로 봐도, 여기 제대로 보이려나 모르겠는데, 여기 호랑이 털 그린 것이 있잖아요? 털 그린 것이 채색을 한 것이 아니라 터럭을 하나씩 다 그렸습니다. 전부 다. 여기 수염만 그린 것이 아니라 여기 지금 발에 나와 있는 털도 그렇고 등허리에 있는 털들이 갈색으로 검정색 으로 전부 다 하나씩 올을 세듯이 전부 다 그린 것입니다. 이 호랑이 전체를 그렇게 그린 거예요. 영남대에 미술 대학 선생을 할 때 갑자기 한 애가 와서 ‘샘!’ 하고 ‘논문은 꼭 써야 됩니까?’ 하고서, ‘미술대학 나오는 애가 그림을 그리면 그만이지 왜 논문을 쓰냐!’ 저한테 항의를 하는 거예요.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우리 교육제도에서 미술대학생도 한번 이론을 공부한다고 해서 논문을 쓰게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졸업을 하려면 그 룰은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랬더니 ‘내가 그런 것 쓰기 싫어서 미술 대학을 다니는데 이것을 왜 내가 써야 되냐’ 이겁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쓰면 되지 않겠느냐.’ 그랬더니 그러면 논문으로 단원의 삶이 어떻고 그림이 어떻고 분석하는 것 말고 자기가 시키는 것 있으면 한다고 그래서 내가 이 그림을 보여주고 그랬어요. 김홍도가 이 호랑이 터럭을 그리는데 몇 번 그었는지 세어서 오라고. 그러면 내가 분명히 석사학위 논문 통과시킨 것으로 해 줄 테니까 그 숫자를 세어서 오라고. 그리고 그 애는 다시 논문을 써서 졸업을 했습니다.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고 얘기했던 것이 여기에도 그대로 통합니다. 어디 한 구석 터럭 하나 흐트러지게 그린 곳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타의 다른 호랑이 그림 어느 것을 놓고 봐도 김홍도의 이 그림을 능가하는 것을 볼 수가 없고 김홍도의 다른 모작을 갖다 놨을 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우리가 진위 감별하는 데 있어서도 그런 것들을 다 참고를 하는 것입니다. 23~24살 됐을 때 지금 창덕궁에 있는 규장각 그림 규장각입니다.
단원 김홍도 규장각도(奎章閣圖)' 1776 견본채색 144.4cmX 115.6cm 국립중앙박물관
여기 부용정에서 규장각 건물이고 여기가 서고였는데 나중에는 누에 고침 펼쳐 놓는 곳이 됐습니다만 창덕궁 부용정 궁궐도를 김홍도가 그리게 됩니다. 그리고 30세 됐을 때 31세에 그린 지금 보물로 지정되어 있나 국보로 지정되어 있나 아무튼 호암 미술관이 갖고 있는 신선도 중에서 앞에 두 폭인데 이때 김홍도가 처음에 이름을 날리는 것은 신선그림으로 해서 날리게 됩니다.
국보 제139호 단원 김홍도 군선도병풍 조선 1776년, 종이·수묵담채 132.8 × 575.8cm, 호암미술관 소장
단원 김홍도는 일찍이 신선도를 잘 그리는 도석인물화가(道釋人物畵家)로서 화명(畵名)을 날리기 시작하였는데, 단원이 40대 이전에 그린 그림 중에는 도석화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 가장 이른 것으로, 서왕모(西王母)의 반도회(蟠桃會)에 초대를 받고 약수(弱水)를 건너는 군선 (群仙)의 파상장면(波上場面)을, 배경을 생략한 채 그린 것이다. 꽃바구니를 맨 하선고(何仙姑)와 마고(麻姑) 등의 여선(女仙)들이 맨 앞에 있고, 이어서 하얀 나귀를 탄 장과노(張果老), 딱따기를 든 조국구(曹國舅), 어고간자(魚鼓簡子)를 든 한상자(韓湘子)의 모습이 보이며, 맨 뒤에는 외뿔소를 탄 노자(老子)와 종이를 펼쳐 들고 붓을 든 문창(文昌) 등이 따르고 있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을 활달하고 거침없이 묘사한 필치와 생동감 있는 인물 표현에서 신선도에 대한 단원의 확실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교과서에 단원 김홍도 조선 시대의 풍속화가 이렇게 나오는 것을 그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표암의 얘기대로 그는 세월이 요구하고 있는 모든 장르를 다 소화해낼 수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 신선그림 병풍이 유행을 했는데 김홍도가 그린 신선도를 보면 이제까지의 그림과 다른 김홍도 풍이 되니다. 신선도를 그리면 야들야들하게 천상에 있는 것처럼 그리는데 이 선녀의 옷 주름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거칠게 그렸는가. 난초 치는 것보다 더 거칠게 확 획 그었습니다.
이 밑에 있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김홍도의 그림 속에서는 붓에 운필이 들어가 있고 강약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박진감 있는 것이 나오고 또 천상에 있는 선녀가 아니라 지상의 현실 속에 있는 선녀 같은 그러한 느낌으로 전환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신선 그림보다 김홍도가 그린 신선그림에 훨씬 더 많은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그는 어떤 소재를 주어도 그것을 자기 식으로 소화를 하고 그 당시의 현실이 요구하고 있는 수준 보다도 더 높은 차원 속에서 제시를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김홍도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리고 정조 대왕은 또 김홍도를 그렇게 사랑하면서 여러 일을 시켰던 것입니다. 조영석으로 해서 50여 년 동안에 꾸준히 개발되어 왔던 우리들의 삶의 표정을 담아놓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것을 김홍도에 와서 정말로 드라마틱하게 당시 사람의 표현을 얘기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카메라가 없었 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재미있게 장면 하나를 찍은 것을 보면 그 사진을 보고서 우리가 웃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한 상황의 찰나를 포착을 해서 그것을 보고 같이 그 상황을 후체험하면서 즐거움을 갖는 그러한 효과가 김홍도의 그림 속에서는 있었던 것입니다.
주요 모티브로 주제를 살아나게 하다
새참이라고 하는 이 장면을 보면 사람들이 정말 치열하게 먹습니다. 그냥 있는 힘을 다해서 농사를 짓고 새참을 먹는데 보면 국물 하나 흘릴까봐 몸이 엎어지면서 마시는 사람 빈 그릇 쳐다보는 사람, 빈 독 들여다보고 있는 것, 옆에서 먹는 애들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정말로 노동을 한 이후에 마시는 먹는 새참의 그런 분위기들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앉아 있는 것도 지그재그로 해서 막 흐트러져 있게 앉아 있죠.
김홍도,‘ 새참’, 종이에 담채, 27.0X22.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김홍도의 그 화가적 솜씨, 재치 거기에 아주 극명하게 나오는 것이 이 개가 하염없이 부러워서 쳐다 보고 있잖아요. 개는 밥을 줘야지. 얼마나 먹고 싶겠어요. 그런데 바닥까지 다 핥아먹는데 자기 것이 뭐가 있겠어요. 이 개가 들어감으로 해서 그림에 효과가 완전히 살아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죠. 주요 모티브를 하나를 부여해서 모든 주제가 다 살아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예가 문학 속에서 상당히 많죠.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그 마지막 잎새를 가지고 그리니치 빌리지, 동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따뜻한 온정을 표현 하잖아요. 김홍도의 그림 속에서는 항상 그러한 것들을 빠짐없이 집어넣어 놓으니까 우리들에게 그런 감동을 주는데 여러분들 지난 시간에 관아재 조영석이 그렸던 새참 기억합니까? 그 그림은 이와 같은 시각의 그림이었습니다. 새참을 이렇게 줄지어서 앉아서 먹는 법은 없을 거예요.
이것은 둘이 굉장히 똑 같은 새참을 그렸지만 관아재 조영석의 그림은 목민관으로서 농민이 갖고 있는 삶의 모습을 애정을 갖고 그린 그림입니다. 반면에 김홍도가 그린 이 그림은 농민의 심 속으로 들어가서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민중 미술적인 시간으로 봤을 때에는 훨씬 더 민중미술이라고 평가를 할 수가 있죠.
그런데 저도 민중미술협회 대표를 지냈습니다마는 제가 갖고 있는 심정으로는 나는 내가 그리면 이렇게 그리지 김홍도처럼 못 그릴 것 같아요. 그것은 내 자신이 살아오는 과정이 지식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나의 시각에서 봐왔던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것은 이것이 한계라도 좋고 이것이 나에게 내 감성에 충실한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사람들이 경직되게 서민성 민중성을 얘기하는 것하고 그 세계 전체를 세계상을 잡아내는 것에 혼동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보적이라고 그럴까 과격한 젊은 세대의 민중미술가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여러분들이 잘 알듯이 내가 비판한다고 해서 내 생각을 뒤바꿀 의사는 전혀 없는 사람이고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지식인이 갖고 있는 한계라기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랑스러운 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시각 속에서 애정을 가지고 이 세계를 극명하게 그리고 박수근이 그 세계 속에서 자기의 삶의 체험까지 담아서 그것이 관조적 시각이든 어쨌든 애정을 듬뿍 담아준 것은 어떤 되지 못한 대중미술가가 그린 것 보다 천배 만배 민중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한계와 민중성에 대한 다른 시각 어떤 내용이 더 훨씬 과격하냐 뭐냐 하는 그런 것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성을 따질 때에는 서민이 가질 수 있는 삶의 다양성과 그것을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시각인데 기본적인 것은 그 리얼리티를 표현한다는 것 이고 거기에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고 또 이런 그림을 봄으로 해서 그들의 삶이 가지고 있는 진솔한 면과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면 예술적으로 성공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지식인에 의해서 관조적으로 봐오던 새참의 장면이 농민의 심성에 들어가서 그린 것으로 바뀐 것은 50년 동안의 세월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관아재 그림과 김홍도의 그림에 있어서 어떤 차별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추는 장면을 원형구도에서 양쪽을 터서 여기에 악센트를 준다든지 또는 빨래하는 여자를 지나가는 나그네가 훔쳐보는 것은 이것은 혜원 신윤복의 주특기로 하는 것인데 김홍도는 여기까지는 하고 있었어요.
김홍도, 씨름,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27 cm x 22.7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특히 이 작품을 보면 청샅바와 홍샅바 둘이서 들배지기로 드니까 안다리를 걸어서 들리느냐 걸리느냐를 가지고 팽팽하게 맞서 있는 그 순간을 그린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누구 힘이 꺾이느냐가 드라마틱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보면 이것이 넘어간다고 큰 걱정하는 사람, 조금 더 힘써서 꺾으라고 날리니까 이 관객의 모습을 보면 다 청샅바 편인지 홍샅바 편인지 구별이 될 수 있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확대 해보면 큰 신문지 반면만한 크기도 안 되는데 그런 크기 속에서 이 작은 인물들을 그렇게 극명하게 그린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여간한 솜씨 아니면 못합니다. 또 이런 시각은 정면으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부감법으로 그렸기 때문에 일반 화가들이 그리면 이것이 상체와 하체에 대한 비례를 맞추지 않으면 사람이 다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서양화법으로 그림 그리던 사람이 어느 날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림을 그리면 집이 다 짜부가 되고 오막살이가 되고 하는 이유가 이것은 시점에서 보고 있는 것을 변형을 해야 되는데 그것도 능숙한 솜씨 아니면 못합니다. 그러나 이 씨름판에서 제일 걱정되는 것은 씨름판이 고조될수록 엿장수는 엿이 안 팔려서 허공에 대고 엿 팔고 있는 모습이죠. ‘김홍도가 그린 속화를 보게 되면 너무나도 현실과 비슷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벌어진 턱을 다물지를 못했다. 재미있어서 깔깔 웃으면서 입이 벌어진 것을 다물지를 못했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그림들을 갖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육시랄놈 어디와서 수작이야?"
김홍도 우물가 종이에 담채, 22.7*27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 장면 한 장면 독독법이죠. 읽어보십시오. 나그네 지나가다가 물 한잔 마신다는 것. 그것으로 끝이면 끝이 에요. 그런데 내용을 보면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이 사람이 목이 말라서 왔다기보다 이 여자가 마음에 있어서 온 것이죠. 그래서 우람한 가슴을 풀어헤치고 물 한 바가지 달라고 해서 물 한 바가지를 떠 주면서 내외하느라고 고개를 살짝 돌렸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돌린 표정이 싫지는 않은 정도의 표정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아줌마가 왔다 갔다 댓거리 하는 것을 못 본 척하고 살짝 웃고 있죠. ‘잘 돼 가는 구나’ 그리고서 못 본 척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저 뒤에 오는 물 길어 오는 돼지 아줌마가 심통이 나서 그냥 째려보고 있잖아요. 뭐라고 그랬을까요? ‘육시랄놈 어디와서 수작이야?’ 그 정도 얘기 하는 거겠죠.
그림 특히 속화 속에서, 당시 사람들이 그런 것을 속화라고 했고 훗날 사람들은 그것을 풍속화라고 말을 하는 것인데 저러한 연극의 한 장면 영화 속에서 어떤 스틸 장면 같은 상황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김홍도의 속화가 어떤 사람들이 그린 것보다도 훨씬 더 감동을 주고 그 리얼리티를 위해서 김홍도의 속화에는 배경을 그리지 않고 전부 대상에 대한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것으로 나오게 됩니다. 단원 김홍도와 조선시대 민화 2 [유홍준의 문화유산을 보는 눈] (13)
따로 쓸 기회가 없습니다마는 혜원 신윤복은 김홍도 시절에 속화에서 상벽을 이루는데 그 세계는 또 완연히 다른 세계를 보여 줍니다. 들러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기생들은 다 말 타고 오고 선비들은 전부 그냥 술에 취해서 뒤에 걸어오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혜원 그림에 보면 양쪽으로 이렇게 이쪽에서 이쪽으로 가는 사람 하고 맞부딪히는 이런 장면들이 나오는데 이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부산대에 있는 강관식 교수가 쓴 ‘혜원 그림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다’라고 하는 것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단원 혜원 그림 속에 나와 있는 낱낱 장면이 그 시대 풍속에서 무엇인가 하는 것을 쓴 거예요. 화인열전을 쓰면서 왜 혜원 신윤복을 빠트렸냐고 얘기를 하는데 사실 나도 쓴다면 강관식 교수 같은 식으로 쓰고 싶었어요.
‘혜원 그림 밖으로 나오다.’ 그림의 도상을 읽어주는 것으로. 화인열전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러냐? 여태까지 어떤 문안에도 혜원 신윤복 그림, 이름 석 자, 아호 두자가 나온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어떤 문인도 혜원에 대해서 쓴 혜원의 그림을 보고 혜원 그림이 어쨌다라고 평가해 놓은 글을 단 한 줄도 나는 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성호 이익의 후손 또 표암 강세황의 후손 누가 가지고 있는 글 속에 혜원에 관해서 그림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그것은 없습니다. 모르겠어요. 필사본으로 되어 있는 것 있는지 모르지만 현재까지 그 시대 주변이나 그 후대 사람들이 혜원에 대해서 증언해 놓은 것을 한 구절도 못 찾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춘화를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난 혜원 신윤복
다만 그는 ‘신한평의 아들로서 화원이었다’라고 하는 사실만 압니다. 그런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혜원 신윤복이 춘화를 그려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대요. 포 르노 사진을 제작을 해서. 능히 그럴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양반 사회가 갖고 있는 그 풍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는데 연지에서 파티하고 있는 장면인데 이것도 우리가 봤을 때에는 그냥 이렇게 봅니다마는 저 그림을 나는 그렇게 놀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노는 사람이 이것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실컷 놀아본 사람은 이것을 보고 하는 소리가 다른 해석을 하더라고요.
국보 135호 혜원 신윤복 풍속화첩 연당야유도(連塘野遊圖) 지본담채 28.2 x 35.2cm 간송미술관
〈연당야유도〉는 신윤복 풍속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이다. 연못이 있는 뜰에서 잘 차려 입은 세 쌍의 남녀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차림새로 보아 기방(妓房)의 여인들인 듯하다. 또 한편에는 탕건은 벗어 둔 채 포옹하는 남녀의 모습과 이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모습이 표현되었다. 즐거움을 더해준다.
룸살롱이나 이런 곳에 가서 여자하고, 이것이 세 쌍이잖아요? 여자 셋 남자 셋이잖아요? 앉아서 술을 마실 때 보면 남자들의 행태가 세 가지 유형으로 나온대요. 한 사람은 꼭 껴안아야지 직정이 풀리는 사람 있고 한 사람은 멀리서 파트너를 쳐다봐야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노숙한 사람은 자기 파트너 멀리 두고 애들 어떻게 노는가 구경을 하고 있대요.
선유도(船遊圖)는 한량들의 뱃놀이 장면이다. 기녀들을 희롱하는 남자, 삿대를 젓는 사공의 동작, 그리고 배경의 박진력 있는 표현으로 멋과 풍류를 돋구고 있다. 한량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나룻배에는 모두 여덟명이 타고 있는데 세쌍의 남녀와 뱃사공과 악사 한 명이다. 한 남자는 강물에 손을 넣고 물장난을 치는 여인을 귀엽게 여기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고 또 한 남자는 여인을 끌어안고 수작을 걸고 있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서서 다른 사람들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며 나머지 한 여인은 뱃머리에 앉아서 생황을 불고 있다. 뱃놀이를 하고 있는 곳은 망망한 강 한복판이 아니라 병풍처럼 둘 러쳐져 있는 암벽 아래로 설정함으로써 그림의 주제에 맞는 아늑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화면 절반 정도의 위치에서 위아래로 이분되어 위쪽은 어두운색의 거대한 암벽이 넓은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아래쪽은 밝은 빛깔의 인물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어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화면 위쪽에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데 흰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든다. " (一笛晩風聽不得 白驅飛下浪花前)라고 화제(畵題)가 적혀 있다. 이것 말고 뱃놀이 장면도 보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이 사람을 떼어서 둘을 저쪽에 쌍쌍 파티로 해서 그리면 완전히 불란서의 와또(Watteau) 그림처럼 그렇게 돼 버리는 거죠. ‘시테른 섬의 출항’이니 뭐 그렇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는 상황을 전부 이렇게 섞으면서 연지에서의 파티이고 그 분위기에 그려 있는 터럭을 그리는 것, 풀포기를 그리는 것, 옷 주름을 그리는 것. 단원하고 혜원은 정 반대입니다.
단원의 거친 선에 대해서 여기에서는 아주 누에고치 실 뽑듯이 보드라운 선으로 되어 있고 풀 그릴 때 그냥 갈대같이 탁탁 쳐놓고 땅을 표현한 것이 여기에는 아주 보드라운 필치를 가지고 잔디곁 같은 결을 표현을 하고 있고.
‘월심신야삼경 양인심사양인지 혜원’
달밤의 데이트’라고 하는 그 유명한 작품이 초승달을 그렸는데 쓰개치마를 짓고 있고 그리고 슬라이드에서는 안 보입니다마는 간송 미술관에서 어쩌다 전시회에서 이 작품 보면 여자의 얼굴빛이 복숭아 빛으로 상기, 홍조를 살짝 띄고 있는 그 색감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신윤복 월하정인 신윤복의 〈월하정인〉은 늦은 밤 담모퉁이에서 만난 한 쌍의 남녀를 소재로 다루었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한껏 차려 입은 남자가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고 여자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얼굴을 물들이고 있다. 배경이 간략히 묘사되어 있으면서도 이들의 감정은 어스름 달빛에 녹아 있는 듯하다. 신윤복 특유의 유연한 선은 부드럽게 날리는 도포 자락이나 갓끈의 묘사에서 뿐 아니라 날렵한 가죽신에서도 볼 수 있다. 더구나 옥색으로 코와 뒤축을 댄 남자의 가죽신과 녹색 도포 끈, 여자의 자주색 꽃신과 옥색 치마에 자주색 회장을 댄 옷 등 색감의 표현이 더할 나위 없는 세련미를 보인다. 왼쪽 담에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글도 몇 자 적혀 있다.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그런데 이 글씨체도 보면 정말 기생오라비 체로 아주 한껏 멋이 들었는데 내용은 ‘월심신야삼경 양인심사양 인지 혜원’ 달은 깊고 깊어 야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인들 두 사람이 알 일이지, 혜원. 이렇게 딱 되어 있습 니다. 조금 더 진도가 나가면 키스까지 갑니다. 그리고 이 여자의 여종이 옆으로 비켜서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골목길의 풍광을 잡으려고 해서 이렇게 이쪽에 한쪽의 분위기를 이렇게 앞을 막아서 그윽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신윤복 <니부탐춘(嫠婦耽春)>
혜원 신윤복이 그렸다는 춘화가 스무폭짜리가 화첩으로 되어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한 화첩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여덟폭 짜리도 있고 또는 김홍도가 그렸다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 어느 박물관에 갖고 있는 것이 있고 이후에 김득신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것이 있고 제가 본 실견을 한 춘화첩이 전부 틀로 치면 20폭 짜리 8폭 짜리 3개 그 다음에 일제시대 때 정재 최우석이나 이런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렸는데 이 모든 그림이 혜원의 스무폭짜리 그림의 도상에서 벗어나 있지를 않았어요.
그러니까 혜원이 그린 스무폭짜리의 춘화첩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는 적나라한 장면들이 나오는데 관심 있는 분은 한국의 춘화라고 이렇게 교보문고 가면 껍데기 씌워져 있는 책 나온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것이 내가 얘기한 20폭 짜리 폭이 아니고 다른 것 8폭 짜리하고 4폭 짜리를 묶어서 만든 책이 있습니다.
신윤복 소년전홍(少年剪洪)
그런데 그것이 또 김홍도가 그렸다라고 얘기하고 김홍도 도장이 있는데 나는 그것은 김홍도가 그렸다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김홍도는 절대로 그런 춘화를 그릴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도장은 후대 다른 사람이 찍은 것이었으니까요
전세계 춘화에서 왜 한국은 빠졌나
그 춘화를 여러분하고 다 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고, 한 폭만 보는데 74년, 75년에 코펜하겐에서 그때 프리섹스 선풍이 열었을 때 에로틱 아트 전시회가 열려서 이마만한 책으로 에로티시즘에 관한 책이 도록이 두 권으로 나와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세계 화가의 대가 쳐놓고 그것을 안 그린 사람 하나도 없는데 피카소나 마티스뿐만 아니라 그 전시대에도 나오는데 각국이 다 나오는데 인도 춘화, 중국 춘화, 일본 춘화, 몽고 춘화 전부다 춘화가 그 딱 보면 그 민족성을 다 보여주는데 오직 한국의 춘화 만 거기에 없는 거예요. 이것이 개인소장품으로 해서 구중궁궐이 아니라 깊고 깊은 곳에 들어가서 혼자 즐기니까 문화유산의 효용 가치가 그만큼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도판이라든지 리플리카라도 만들어져서 우리에게 전해지면 우리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이러한 문화가 있었다 하는 것이 에드와르 훅스가 ‘풍속의 역사’를 쓰면서 성의 풍속을 가지고서 설명을 해왔던 그 재료가 되는데 그것이 사실은 좀 아쉬웠습니다.
그런 중에 역시 동양3국을 비교하면 우리나라 사람의 입장에서는 혜원의 춘화에 훨씬 더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아까 김홍도 그림이나 이런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스토리텔링이 있습니다. 첫 장면만 같이 보겠습니다. 춘화의 첫 페이지입니다. 깊은 한밤중인 것을 알겠죠. 댓돌 위에 신발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서 급히 벗어 놓고 들어갔는데 창밖에는 빨간 치마가 이렇게 걸려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춘화냐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프롤로그입니다. 그 안에 보면 한 남자가 두 여자와 희롱하고 있는 성희장면까지 나오는 것 보니까 그 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을까하고 놀라는 그런 장면까지 나옵니다.
세월이 흘러서 상업자본이 형성되면서 돈이 자본주의 바이러스가 결국은 사회질서를 흔들기 시작을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숙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양반은 전체 인구의 10% 내지 15%였습니다. 그랬는데 19세기 후반 으로 들어오면 양반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전 인구의 반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결국은 양반질서가 무너져가는 그 과정 속에서 돈이 갖고 있는 그런 위력이었습니다. 어디 갔는가 궁금해 이병직씨라고 하는 궁내부 내시 마지막 내시 서화를 잘 그렸던 그 분이 소장하고 있었던 그 도장이 이병직 부장이라고 하는 도장이 여기에 있는 것인데 이것이 어디 갔나 했더니 결국은 어떻게 어떻게 돌아서 평양 박물관에 있는 것을 북한 답사 때 이것을 보고 정말 너무나도 반가웠는데 나는 이 그림이 김홍도의 자기 자화상을 그린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이것이 화인열전 2권 표지화로 쓴 것도 바로 그런 점이었습니다.
왜 김홍도 작품이 아니라 가짜인가
어떤 미술사가가 이 그림을 보고 ‘이것은 김홍도 작품이 아니라 가짜다’라고 글을 쓰는 것이 있는데 그 분의 의견도 존중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 분이 이것이 가짜다고 얘기하는 데에는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작품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은 작품을 본 사람이 판명을 하는 것이지 사진을 갖고 판명하는 것이 아닌데 그 사람은 이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짜일 수 있다 내 느낌에’ 이렇게는 쓸 수는 있지만 이것은 김홍도의 가짜다라고 쓴 것은 그 사람은 감정하는 기본이 안됐다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를 하지 않았죠.
김홍도의 작품이 틀림없고 그리고 김홍도의 작품이 30대에서부터 60무렵까지 계속해서 변합니다. 그것을 50대 그림의 김홍도만 본 사람은 30대 후반의 김홍도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김홍도의 전, 그동안의 전 과정을 봐서 또 김홍도가 얼굴이 길고 준수하게 생겼고 그리고 성격이 맑고 또 한편으로 술 마시면 호방하고 그런 호탕한 기질이 있고 그 증언들 모든 것에 다 들어맞고 더군다나 여기에 지금 탁자 위에 이렇게 집기들을 이렇게 놔뒀는데 김홍도 그림 중에는 이런 집기만 가지고 그린 그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 50 넘어서 ‘포의풍류도’라고 하는 그림 속에서는 이 탁자는 없이 이것만 갖다 놓고서 또 그려 놓은 그림이 있고 어찌됐든간에 참 명작입니다. 그리고 김홍도의 얼을 보는 것 같고 그는 출신은 화가였지만 자기 스스로는 단아한 선비풍의 그림을 그리려고 그래서 이제까지 문인화풍이 갖고 있었던 그 높은 화격과 화가가 가질 수 있는 치밀한 테크닉을 종합을 하려고 하는 의지가 이런 그림 속에서 나타났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금강산 담은 66권 60장 '사군첩' 밑그림만 남아
뚝 뛰어넘어서 46세 때 정조 대왕이 하도들 금강산 가니까 그 금강산 하나 스케치 그림으로 그려오라고 해서 김홍도하고 그의 선배인 복헌 김응환이 금강산을 40여일 동안에 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 때 아까 선생님 표암 강세황이 자기 아들이 회양 부사로 근무를 하게 돼서 회양 아들 근무처에 놀러갔다가 거기에서 김홍도를 만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김홍도와 김응환을 ‘금강산 가는 김홍도를 송별하면서’라고 하면서 쓴 글이 있어요. 그러고 나서 돌아온 다음에 표암은 늙어서 금강산은 못 가고 김홍도는 전체를 보고서 그려놓은 것이 ‘사군첩’ 이라고 하는 10장 들이 66권 60장 스케치북이 하나입니다. 바친 것이 한 20-30미터짜리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임원경제지에 나와 있는 증언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없고 이 밑그림만 남아 있습니다. 금강산 가보시면 구룡폭포 위에서 떨어져서 여기에 구룡연을 해서 나가고 산 전체가 하나의 통돌로 되어 있는 장관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소나무들을 그린 것을 보면 겸재 이래로 내려오는 소나무 풍이 되는데 이 그림도 김홍도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제작 여건이나 나이를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주 선생의 우리나라 옛 그림에 보면 그런 얘기를 쓰죠. 김홍도의 작품으로는 예외적으로 꼼꼼하고 치밀한 그림이다. 아마도 임금의 명으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기의 불성실할 것 같은 개성을 발휘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신에 그 본 말고 다른 금강산 그림을 그릴 때에는 이렇게 그리지 않고 이것을 뛰어넘는 그림을 그리게 됩 니다. 그것은 50대를 넘어간 다음입니다. 능을 화성으로 옮기고 그리고 그 앞에 용주사라고 하는 원당사찰을 지으면서 거기에 벽화를 그리는데 김홍도가 이 벽화를 그리게 됩니다. 이런 것이 다 공이 되어서 김홍도는 연풍에 현감으로 취임을 하게 됩니다. 연풍은 지금 수안보 고개에서 이화령 고개로 넘어가고 있는 그 입구가 지금은 터널로 확 지나갑니다마는 이화령 고개로 넘어가면 그 초입 거기가 괴산군 연풍면인데 연풍의 현감으로 가서 3년 2개월 동안 근무를 하게 됩니다.
정조대왕 화성행차가 남긴 것
그 이전에 정조 대왕이 화성으로 행차를 12번인가 13번 하는데 한 번 행차를 하면 한강 다리를 건너가는 것 에서부터 수원 화성으로 가는 이것을 8폭 그림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화가를 척출합니다. 여기에도 김홍도 같은 화가들이 이런 기록화, 행렬도 같은 것을 그려놓는 것을 김홍도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 기록화보다도 장중한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 보면 배를 가지고 선주교를 놔서 임금 가마가 지나가고 있는데 이 배를 선주교로 놓는 것을 설계한 것이 다산 정약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그로부터 1800년에서 1950년이니까 150년이 지나서 6.25 동란이 터지니까 한강 다리 끊어 지고 난 다음에 미 해병대가 다리를 놓은 것이 선주교를 놓아서 통행증이 있는 사람만 건너가게 했던 것이 똑 같은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여기 나온 것도 행렬의 장렬함 장중함은 물론이고 구경나와 있는 동네사람들 그린 것 보면 정말로 어떤 기록 사진 기록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록영화 전편을 8폭 병풍에 담은 것 같은 그런 일을 합니다.
이때 회화적인 궁중의 요구와 그것을 감당해주는 양이 앞 시대 어떤 때 앞 시대를 다 더한 것만큼이나 많은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한 시대 문화가 일어날 때는 그마만한 생산량이 있어야 되는데 정조 시대에는 그만한 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녹봉을 받아서 녹봉을 받아서 먹고 있는 공직자로 살아가는데 아들을 얻었다고 해서 자기 아들을 이름을 연목이라고 하는 이름을 지어서 연풍에 있는 산에다 시주를 해 놓는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충청 병마사가 청주에서 시회를 여니까 김홍도 오라고 해서 황운조가 글씨는 쓰고 누가 시를 짓고 이한진은 시를 짓고 황운조는 글씨를 쓰고 김홍도는 같이 놀고 그림으로 그렸다. 그렇게 하는 그런 에피소드 같은 얘기들을 전해지는데. 근무가 다 끝나갈 무렵이었어요. 데 없습니다.’ 라고 하는 보고를 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감사를 3년에 한 번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회계연도가 1년마다 회계연도를 잡잖아요? 옛날에는 3년에 하나였거든요? 그러니까 옛날 사람이 3넌 결려서 했다라고 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1년 걸렸다. 아니면 요즘 속도로 보면 5년의 속도는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세종대왕이 여론 조사 17년을 해서 실시했다라고 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한 4년 정도 조사했다 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이 정기 감사에 그렇게 걸릴 때 정조 대왕이 의금부에 조사를 시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감사를 하는데 그 감사 보고서에 뭐라고 썼냐하면 ‘김홍도라는 자가 천기로서 임금의 은혜를 입어서 중인신분으로 갈 수 있는 최고가 현감 종6품이니까 현감이 됐으면 그것을 감지덕지해서 하게 해서 제대로 품위를 지키면서 일을 봐야 할 것인데 여염집 과부 중매나 일삼으면서 겨울에 사냥을 간다고 병력을 동원해서 원성이 자자하다’하는 식의 그 보고를 씁니다.
그래서 ‘마땅히 조사를 시키는 것이 옳겠습니다.’ 했는데 어찌됐든 정조 대왕이 더 이상 처벌하지 말라고 하고 파직을 시키는 것으로 불명예 제대하는 것으로 납니다.
고시출신 목민관과 중인 신분 현감
제 화인열전에 보면 그 구절에 대해서 그 다음에 나의 변론이 시작이 되는데 액면 그대로 보면 김홍도는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얘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감사원의 조사 보고서나 경찰서에서 꾸민 조서를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것 속에서 그것을 봤을 때에는 얘기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자료는 일체 없는데 그것만 갖고 얘기하는 것은 정말 이것은 내가 공무원 되기 전에 쓴 것이에요. 공무원으로서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감안을 해줘야 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김홍도가 뭘 잘못했는가? 동네 과부하고 저쪽에 있는 홀아비하고 둘 짝 맞춰서 결혼시켜 준 것은 얼마나 섬세하게 서정을 살폈으면 어느 집 과부하고 홀아비를 중매를 했겠는가? 미담이 되려면 얼마든지 미담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사건이 되려면 얼마든지 사건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식의 이야기로 저는 김홍도 편을 들었는데 아마 그런 것은 있었겠죠.
아주 차근차근히 몸조심 하는 관리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고 우봉 조희룡이 증언하듯이 ‘나중에 말년에 그림을 한 폭을 그려서 돈을 3천 냥인가 하는 돈을 받았더니 그가 매화를 좋아해서 매화나무 한 그루를 사고 술을 사서 먹고 나니까 남은 돈으로는 끼니를 때우는 것이 몇 끼를 못 때우더라.’ 그런 호탕한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연풍 현감을 하면서 다른 고시출신의 목민관하고는 그런 다른 모습이 보였고 무엇보다도 그는 중인신분으로 해서 현감을 한다는 것이 관찰사나 이런 사람 눈에는 아니 꼽게 보였던 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일어나는 궁중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궁중의 회사에도 차출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부터 김홍도는 비로소 자기가 이제까지 갈고 닦아 와서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전부 50대 이후에 그림을 그립니다. 개인적으로는 불명예였는지 몰라도 한국 미술사를 위해서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그러한 기회가 됐던 것 입니다. 개인의 불명예가 회화사의 발전으로
을묘년에 파직 됐는데 가을에 김경림이라고 하는 당시 을지로에 3백 칸 되는 집을 지으면서 페르시아 카펫 까지 깔아서 문제고 됐던 아주 대부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김홍도의 페트론 이었습니다. 그래서 김경림이 자기 사랑채에 와서 그림을 그리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세 분 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이동주 선생님인데 이동주 선생이 미술사를 오세창 선생한테 배웠거 든요? 그 오세창 선생의 아버지가 역매 오경석입니다. 추사가 과천에 살 때 역매가 스물 댓 살 되어서 마지막 제자에 해당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동주 선생한테 물어봤어요. “혜원이 춘화를 그려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하는 얘기를 선생님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랬더니 그 대답이 참 기가 막혔어요. ‘위창 선생이 그러는데 자기 아버지한테 들었대.’ 그러니까 꼭 옆집 아저씨처럼 되어 버리는 거예요.
나는 뭐 깜깜한 곳의 얘기인 줄 알았는데 내가 동주 선생한테 물으니까 동주 선생이 자기 선생한테 물어봤더니 당신 아버지가 들었는데 그랬다라고 하니까 단원, 혜원, 추사 시절로 그냥 가버리는 거예요. 한 3세대만 건너서 와도 150년의 이야기가 어제 얘기처럼 들릴 수 있는 것이 사실 우리의 역사적인 거리입니다.
김홍도가 총석정의 그림을 그리면서 실경에 준하면서도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생략해버리고 여백을 살리 면서 청량한 바람이 부는 것 같고 공기를 표현한 것에서부터 분위기가 한국적인 시정이 듬뿍 들어가 있는 이런 산수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까 한국적인 산수화가 가지고 있는 리얼리티를 표현한 것은 겸재가 훌륭하게 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남종문인화법의 화법에 맞추어서 하나의 정형을 티피컬(Typical) 타입을 만들어 낸 것은 김홍도였습니다. 그래서 김홍도의 그림 속에서는 실경 산수가 있는 박진감과 남종문인화가 가지고 있는 그윽함이 동시에 한 화면 속에서 들어가니까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한국적인 산수를 그릴 때면 김홍도의 화풍을 따르게 되는 것입 니다.
실경 산수의 박진감과 남종문인화 그윽함을 한 폭에
단양에 있는 옥순봉입니다. 을묘년 다음이 병진년인데 병진년 화첩 지금 호암 미술관에 있습니다. 20폭으로 되어서 산수 10폭 화조 10폭입니다. 이 화폭에 맨 마지막 폭에만 싸인이 있고 여기에는 구룡산인 김용진이 가지고 있었던 소장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저분이 참 대단한 안목이었고 미술품 구룡산인 김용진이 가지고 있던 소장품이 무지하게 많았는데 아들이 마약하는 바람에 그 돈 대느라고 다 팔아서. 어찌됐든 지금은 호암 미술관에 있고 보물이 되었습니다. 이 그림도 총석정 그림과 마찬가지로 강약의 대비와 공기를 표현한 것에서부터 우리 실경이 가지고 있는 박진감에 남종화가 가지고 있는 그윽함이 맞아 떨어지는데 여러분들 저보고 그것이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아마 있었을 거예요. 내가 그것을 증명을 해줄 게요.
이 그림을 오기 전에 나는 김하종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린 옥순봉 그림을 보면서 이 사람이 나는 마이너 화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구도는 하나는 잘 잡았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더니 나중에 보니까 김하종이 그린 그림이 이것을 베낀 거였어요. 그런데 봐요.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고 이 디테일의 맛들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 마이너 화가는 그 디테일은 못 그린다는 그 시범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어느 것이 잘 그렸는지 그것을 모른 다고요? 이 그림하고 이 그림하고 어느 것이 잘 그렸냐고 했을 때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도 아니라고요? 그러면 그렇게 물어보지 않고 여러분들한테 물어봐요. 둘 중에 하나 가지라면 어느 것 가질래요? 전부 다 이것 갖지 이 작품 갖겠어요? 이 그림은 한편으로는 또 김홍도가 그려진 그림이 얼 만큼 일반화 되었는가. 혜원이 그린 춘화가 얼만큼 일반화 되었는가 하는 것과 똑 같은 얘기입니다.
헬기 샷으로 그린 단원의 '도담산봉'
김홍도의 병진년 화첩 중에 단양의 도담산봉을 그린 이 그림을 보면 이 시대 21세기도 이렇게 참신한 비율을 시각을 갖고 있는 풍경화를 아직까지 저는 못 봤습니다. 이 그림이 보십시오. 누가 그러대요? 영화감독이 이것을 보더니 헬기 샷이래. 이것은. 헬리콥터 타고 가면서 촬영했던 속도감까지 잡아냈다는 거예요. 참 옛 사람들이 날개를 달고서 위로 올라가서 봤는지 어쨌는지 어쨌든지 도담산봉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 도담산봉을 본 사람은 도담산봉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잖아요. 김홍도의 위대함은 실경이 이해가 빠르니까 했지. 이것보다 사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이 작품입니다.
버드나무 가지에 새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냇물을 두어 번 그었는데 남김없이 표현했죠. 그리고 우리 어느 아무 이름 없는 계곡에 냇가의 서정이 이 그림처럼 살아나는 것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김홍도의 그림 속에서는 우리 산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풍경을 잡아서 회화적으로 승화시켜서 내 놓는 그런 탁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렇게 대담한 기법을 구사하는 것이 이 시대에도 보기가 힘들죠. 그래서 모든 명작들이, 명작이라고 불리는 것은 꼭 어제 그린 그림 같은 참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을 가지고 얘기합니다. 필씨는 원숙해집니다. 원숙해져서 그린 구룡폭포 그림입니다. 군더더기 다 빼버리고 강조할 것 다 강조해 놓고 붓 몇 가닥 안 간 것 같이 불성실한 것처럼 했는데 감동은 더 오는 것. 그것은 겸재에서 얼마나 많이 봤습니까? 김홍도도 똑 같은 구룡연을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그렸는데 이렇게 그렸습니다.
군더더기는 빼고 감동은 더하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기 위해서는 젊었을 때 이렇게 그려야지 나중에 이렇게 그린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그리려고 하는 사람은 조로해서 이렇게 그릴 수가 없는 거예요. 내공의 힘이 이러한 과정을 거친 사람만이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것이지. 나중에 노대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젊은 사람이 하려고 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죠.
아마 요즘의 젊은 작가들이 크게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일찍 조로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끝까지 표현을 해낸다는 그런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추사 김정희의 글씨의 기본의 특징을 꼽으라고 그러면 ‘괴’입니다. 아주 개성적인 것을 뛰어넘어서 괴죠. 괴이하게 쓴 것이죠. 추사가 그 말이 처음에 듣기 싫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요즘 내 글씨를 가지고 괴이하다 그러는데 혹시 영감님께 드린 이 글씨가지고 또 그렇게 말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글씨 가지고 뭐라고 하던 나를 가지고 조롱을 하건 괴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걸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렇게 쓴 하소연에 편지가 굉장히 심금을 울려요.
그런데 왜 추사 김정희가 글씨가 제주도 귀양살이 이후에 괴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개성적인 글씨를 썼는가에 대한 여러 해석 중에서 내가 가장 설득력 있게 들은 것이 귀양살이 9년 동안 하는데 그 이전의 글씨는 ‘이 글씨 는 써서 누구를 준다’ ‘누구에게 보여준다’ 라고 하는 전제 하에서 작품이 되었는데 제주도 귀양살이에서는 그는 억울해서 쓰고, 쓸쓸해서 쓰고, 할 일 없어 쓰고, 쓰고 싶어 쓰고 자기의 작품을 제3자에게 객관적으로 보여준다는 계기가 전무한 상태에서 글씨를 쓸 수 있었던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부끄러움 없이 마음껏 개성적으로 쓸 수 있는 창작의 여건을 그 시절에 가졌다고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 탁견이라고 생각을 해서 굉장히 길게 그 얘기를 완당평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 이 개성을 갖는 다고 했을 때 우리가 자기의 개성이 없는 것은 현대 미술 속에서는 치명상인데, 그 개성은 어떻게 가져올 수 있는가?
그것은 이렇게 해야지 평가를 받는다던지 이래야지 현대 사조에 들어갔다라든지 이렇게 것이 아니고 정말로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것으로 해야 되는데 추사나 단원이나 그 시절 됐을 때에는 꼼꼼하게 그리려면 꼼꼼 하게 해서를 쓰라면 해서, 모든 기본기에 대한 것을 완벽하게 소화를 했기 때문에 능숙하게 그것을 뛰어넘어 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꼭 김홍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추사 김정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추사를 평한 글 중에서 유명한 글 중의 하나가 추사의 글씨는 법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았다. 그것이 참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개성은 기본기를 완벽하게 소화해야
그의 글씨를 보면 구속받지 않으면서 또한 그렇다고 해서 법도를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정말 어디까지 경계를 그어야 할런지 모르지만 이 기법에 있어서 이와 같이 충실할 수 있을 대로 모든 화법, 화법에 다 맞추어서 이와 같이 그릴 수 있고 모든 태점 하나까지 정성되게 다 해낼 수 있는 풀 한 포기까지 진실로 다 남아낼 수 있는 사람이 어느 날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때는 그 과정을 다 소화를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쳐 강의할 수 없습니다마는 김홍도 시절에 상벽을 이룬 동갑내기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단발령에서 본 금강산 그림입니다. 참 명화입니다. 그리고 산수에 대해서만은 김홍도하고 이인문하고는 상벽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속화는 김홍도하고 혜원이 상벽을 이루었었고. 그런데 이인문의 그림을 보면 굉장히 평수가 넓어요. 파노라마식으로 합니다.
그런데 김홍도의 주특기는 이분은 망원렌즈로 클로즈업 한 것처럼 당겨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림을 볼 때면 화폭을 이렇게 감상을 하잖아요? 감상을 하면 이인문 그림을 보면 자꾸 멀리 놓고 보게 됩니다. 그런데 김홍도 그림을 보면 자꾸 끌어당겨서 가까이 이렇게 놓고 보게 돼요. 겸재 그림은 어떻게 보게 되느냐? 이 사람은 시각을 하도 좌우상하로 휘둘 러서 그림을 계속해서 이렇게 돌려가면서 보게 돼요.
겸재는 수출용, 단원은 내수용
김홍도의 그림에서 한 폭을 고르라면 ‘마상청앵도(馬上廳鶯圖)’ 나귀 타고 말 가는데 버드나무에서 꾀꼬리가 울고 있어서 그것을 말을 멈추고 그 소리를 들었다. 주변은 아무것도 없어요. 비스듬한 길을 걸어가는데 여기 한쪽에 붙어서 꾀꼬리 한 마리 그리는데 저런 서정은 내용에서부터 여기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인물, 나귀를 뜨는 동자 전부 이것은 완벽한 한국 사람이죠.
이러한 그림이 국제 시장에 나왔을 때 그들이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정말 진실로 한국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아주 정말 느긋하고 한국인의 시정이 듬뿍 들어있는 그림인데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홍도의 그림이 수출용보다는 내수용이고 겸재의 그림이 수출용이 아니었는가. 그 런 생각을 합니다.
이 그림은 세마도인데 사리문 바깥에서 버드나무가 쫙 흐트러지게 봄빛이 오르죠. 거기에서 말의 등을 쓸어 주고 있죠. 말의 등을 목욕시켜 주고 있으니까 목덜미를 잡고서 해 놓으니까 말이 기분 좋아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어요. 그렇죠?
그런데 여기에 ‘문외녹담은 춘새마요 누전홍척은 야영인’이라고 문밖에 있는 푸른 연못은 봄날 말을 목욕시 키기 위함이고 누대 앞에 있는 빨간 촛대는 밤중에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기 위함이다. 빨간 촛대도 수상한 데 밤중에 찾아오는 사람을 맞는다네? 그러고 보면 이 그림은 세마도로 그렸지만 실제 속의 내용에 은유된 것은 애마부인도가 된다고 하는 거네요.
마지막 작품 '구양수 방야독서도'
김홍도의 마지막 작품은 구양수 방야독서도라고 하는 작품인데 그 작품은 완전히 너무 헐어서 재미가 없고 나이 60에 개성에서 52 사람의 노인네 공동 파티가 열렸어요. 송악산 밑 만월대에서 차일을 치고. 그래서 여기에 죄다 뷔페 상 하나씩 가지고 파티를 하고 있고 관객이 140 몇 명이 관객이 먹을 것을 나르기도 하고 하는 중에 가운데 거지가 냄비 들고서 가고 있는 그런 장면까지 있습니다.
이 풍요로운 잔치의 모습, 그리고 그것이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송악산 만월대의 진경 그러니까 이 그림 한 폭 속에는 김홍도가 가지고 있는 온갖 기량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 화폭에 총 200명의 인물을 가져다 이와 같이 집어넣어 놓고 흥겨운 잔치 한 마당을 표현하면서 그 위의 송악상의 빛나는 화강암을 표현을 해 놓은 것이 김홍도의 몸이 아파서 쓸쓸하게 지내던 김홍도의 마지막의 혼신의 힘으로 그렸던 것을 역력히 봅니다.
그리고 60세 겨울 아니면 61세 봄에 단원은 세상을 떠납니다. ‘단노’ 늙은 단원, 그리고 연꽃에 실려서 염불을 하면서 극락세계를 가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보입니다. 화연열전 처음에 연담 김명국의 죽음에 자화상을 여러분들 기억을 하고 있으시죠? 그것은 진짜 술주정뱅이 연담의 모습이고 이것은 이렇게 살고 싶었던 김홍도의 자기의 바람이었는지 모르겠 습니다.
[출처] : 유홍준의 문화유산 보는 눈] / 문화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