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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慶尙道) / 慶州府 / 古跡
上書莊。在金鼇山北。○高麗太祖之興,新羅崔致遠知必受命,上書有“鷄林黃葉,鵠嶺靑松”之語。羅王聞而惡之,致遠卽帶家隱居伽倻山海印寺終焉。其鑑識之明,羅人服之,乃以其所居名上書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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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집(孤雲集) / 고운 선생 사적 / 여지승람〔輿地勝覽〕
상서장(上書莊)
경주(慶州) 금오산(金鼇山) 북쪽 문천(蚊川) 가에 있다. 진성왕 8년(894)에 선생이 상서(上書)하여 시무(時務) 10여 조를 진달하였는데, 그 글을 작성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 건물을 세워 수호하고 있다.
이종상(李鍾祥)의 시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막부에 노닐 적에도 생각났을 상서장 / 西遊高幕憶書莊
막막히 동방에 돌아와서 뜻이 더욱 깊었으리 / 漠漠東還意更長
한번 가야산 들어간 뒤로 소식은 들리지 않고 / 一入伽倻消息遠
뜬구름 지는 해만 고도에 오늘도 바쁘구나 / 浮雲落照古都忙
독서당(讀書堂)
경주(慶州)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있다. 선생이 글을 읽었던 곳으로, 옛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이 예전의 초석(礎石) 위에 집을 짓고 그 안에서 학업을 닦았다. 유허비(遺墟碑)가 서 있다.
[주-D001] 상서장(上書莊) : 이 상서장부터 아래의 가야산(伽倻山)까지는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를 근간으로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아 엮은 것이다. 상서장에 대해서 이곳에서는 고운이 진성왕(眞聖王) 때 올린 시무 십조(時務十條)의 상소문을 이곳에서 썼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와 한국문집총간 198집에 수록된 《성호전집(星湖全集)》 권7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고려 태조가 일어날 때, 고운이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을 이곳에서 지어 올렸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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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선생 사적 / 낭산 독서당의 유허비〔狼山讀書堂遺墟碑〕[이원조(李源祚)]
선생은 신라 시대 사람인데, 세대가 멀어서 상세히 알아볼 수가 없다. 선생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으로 말하면 성인의 사당에 올랐고, 문장으로 말하면 문단의 맹주가 되었으며, 생애로 말하면 백이(伯夷)처럼 세상을 피하였고, 자취로 말하면 자방(子房 장량(張良))처럼 선도(仙道)에 의탁하였다. 선생은 과연 어떠한 사람인가.”
아, 선생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만당(晩唐)의 여러 시인들과 어깨를 겨루었으며, 황소(黃巢)의 반란 때 지은 격문(檄文)의 한 구절은 구비(口碑)로 전송(傳頌)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동방으로 돌아왔으나 그때는 이미 신라의 운세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기미를 환히 살펴 벼슬을 그만두고 세상 밖에서 구름처럼 노닐었으니, 강역 안에서 명산이라고 일컬어진 곳은 모두 선생 덕분에 이름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참으로 천하의 선비였다. 한 모퉁이의 동국(東國)도 선생을 포용하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구구하게 작은 하나의 주(州)나 하나의 리(里)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정공(鄭公)의 향리(鄕里)를 세우고안락(顔樂)의 정자를 세운 것을 보면 반드시 태어나 자란 곳에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고을의 기록을 살펴 보건대, 선생의 고택은 본피부(本彼部)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있고, 상서장(上書莊)은 금오산(金鼇山) 북쪽 문수(蚊水) 위에 있는데, 이곳은 동도(東都)에서 지령(地靈)이 모여 있는 곳으로, 과연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더군다나 이곳은 성명(聲明)의 기반이 된 곳이요, 후손이 대대로 지켜 온 곳이니, 어찌 기억에서 없어지게 해서야 될 말이겠는가.
이 고을 동쪽의 낭산(狼山)에 독서당(讀書堂)의 옛터가 있고 예전의 그 우물도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옛날의 주춧돌 위에 건물을 세우고 학업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이에 후손 사간(思衎) 씨가 비석을 세워 기념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하였는데, 여러 종인(宗人)들이 합의하여 그 뜻을 이루게 되자, 나에게 기문을 써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선생의 위대함이 천하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당(堂)으로 내려왔으니 이를 참으로 가치 없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당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천하로 벋어 나간 것을 감안하면 선생의 사업과 문장이 꼭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선생의 후손이 된 자로서 어떻게 감히 이 일을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주-D001] 이원조(李源祚) : 1792~1871.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철종 때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냈으며, 이후 공조 판서를 지냈다. 저서로는 《응와문집(凝窩文集)》이 있다.[주-D002] 정공(鄭公)의 향리(鄕里)를 세우고 : 후한(後漢)의 경학가(經學家)인 정현(鄭玄)이 가향(家鄕)인 북해(北海) 고밀현(高密縣)으로 돌아오자, 북해상(北海相)인 공융(孔融)이 그를 존경한 나머지 고밀현에 명령하여 특별히 ‘정공향(鄭公鄕)’을 설치하도록 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주-D003] 안락(顔樂)의 …… 것 : 소식(蘇軾)의 시 〈안락정(顔樂亭)〉 서문에 “안자가 옛날 살던 이른바 누항이라는 곳에 우물이 있다. 그 우물물을 마시던 안씨는 벌써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지 않았으나, 교서 태수 공군 종한이 처음 그 땅을 얻어 우물을 준설한 뒤에 그 위에다 정자를 짓고는 ‘안락정’이라고 명명하였다.〔顔子之故居 所謂陋巷者 有井存焉 而不在顔氏久矣 膠西太守孔君宗翰 始得其地 浚治其井 作亭於其上 命之曰顔樂〕”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5》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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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査集 卷一 / 詩○七言絶句 / 東都遺跡 【二十七首】
百結先生太古心,隨身惟是一張琴。
東鄰西舍舂舂響,傳上鯤絃鐵撥音。
【右碓樂○百結先生,家貧而善琴。歲將暮,鄰里舂粟,其妻慍有語。先生乃鼓琴作杵聲以慰之,世傳碓樂。】
唐、羅天地入昬庸,黃葉靑松叫九重。
色擧歸來雲壑裏,遺莊只見舊仙蹤。
【右上書莊○羅末,崔致遠知王氏受命,上書羅王,有“鷄林黃葉,鵠嶺靑松”之語。王惡之,致遠卽挈家入伽倻。人以其所居,名上書莊。】
尸諫曾爲聖所許,金公今又俾余欽。
路傍斧屋聲毋去,終使君王激悔心。
【右墓諫○新羅眞平王好田獵。金后稷諫不悛。后稷將死,遺命其子,葬於王遊田路側。王後出獵,有聲若曰“王毋去”者。王聞而悲之,不復田獵。人謂之“墓諫”。】
東海鯨波渺接天,良人一去幾時旋。
峯頭悵望無窮淚,化血千秋石更堅。
【右鵄述嶺○訥祗王弟味斯欣,爲質于倭,久不還。朴堤上以王命入日本,竊遣欣還國,倭王怒而燒殺之。其妻上鵄述嶺望日本,日夜痛哭而死。佔畢齋有詩。】
色敗人心國自傾,花王一語爲君評。
羅代文風公始倡,至今文廟配羣英。
【右花王諷○薛聰諷神文王曰:“臣聞花王之發艶也,有一佳人,名曰“薔薇”,請薦枕。又有一丈夫,名曰“白頭翁”,進曰:‘雖有絲麻,不棄管蒯。王亦有意乎?凡人君,親近老成而興,昵比夭艶而亡。’ 花王謝之云云。” 王愀然曰:“子之諷,切矣。請書以爲戒。”】
漢家忠烈紀將軍,爲主捐生樹大勳。
千載貞心誰更繼?羅王船上有溫君。
【右溫君解○武烈王入唐還,至海上,遇高句麗邏兵。從者溫君解高冠大衣,坐於船上,邏兵以爲武烈,殺之,武烈得免。王贈君解大阿飡。】
志士仁人不愛生,臨危肯變素心貞。
孤城風雨聲援絶,叩首呼天灑血誠。
【右訥催○百濟攻三城,訥催殊死固守。及城陷,訥催死,王聞之,悲慟追贈之。】
三代遺風及我東,淳厖民俗古人同。
當時井晝宛然在,安得復行吾國中?
【右井田○新羅時用井田法,今遺基尙存。】
聖德淵宏格彼蒼,垂頒玉帶作奇祥。
可惜孱孫終未守,空將至寶獻他王。
【右玉帶○眞平王元年,神人降于庭曰:“上帝命我,傳賜玉帶。”王受之。及敬順王降高麗,獻于太祖。】
誰琢藍田溫潤姿?裁成七孔笛形奇。
羅家舊物今猶在,吹起千年故國悲。
【右玉笛○長尺有九寸,其聲淸亮。俗云:“東海龍所獻,歷代傳寶之。”】
小山浮海自何來?上有琅玕一笛材。
吹了萬波皆自息,太平風氣此中胎。
【右萬波息笛○神文王時,東海中有小山浮來,隨波往來。上有一竿竹,王取以爲笛。吹之則兵退病愈,旱雨雨晴,風定波平。號萬波息笛。】
奇形詭服處容翁,歌舞王前氣像雄。
市上婆娑凌亂影,至今如見月明中。
【右月明巷○憲康王遊鶴城開雲浦,忽有一人,奇形詭服,詣王前歌舞,自號處容。每月夜,歌舞於市,其歌舞處,後人亦云“月明巷”。李齊賢、李詹有詩。】
羅王崇信沙門法,日引緇從入九重。
若也池翁書不獻,當時難免剝牀凶。
【右書出池○新羅王十年正月十五日,有老翁自池中出,奉書於王。王開見,書中云“射琴匣”。王入宮見琴匣射之,乃內殿焚修僧與宮主爲奸者也,遂殺之。因名其池曰“書出池”。】
多婆那國幾千里,船櫝浮來泊浦邊。
誰識異人終脫解?成家立國信多緣。
【右阿珍浦○多婆那國王含達婆娶女國王女,有娠七年,生大卵。王以爲不祥,棄之。其女以帛褁置櫝中,載船浮海,至辰韓阿珍。有老嫗開見之,小兒在焉,取養之,是爲昔脫解。儒理王遂傳位。】
鍊石爲臺高幾尺?通中上下察天文。
孱孫不守千年業,臺獨嵬然照夕曛。
【右瞻星臺○善德女王時,鍊石築臺,高十九尺,通其中。人由中而上下,以候天文故云。】
三風從古禍之萌,未見荒亡國不傾。
不知門外來擒虎,終見宮庭亂敵兵。
【右鮑石亭○鍊石作鮑魚形,故名焉。甄萱攻新羅,逼至郊畿,時景哀王與妃嬪宗戚遊鮑石亭。忽聞兵至,與夫人走入城南離宮。萱大掠,入宮索王,逼令自盡,立金傅爲王。】
金鰲山頂松亭在,聞昔高仙抱瑟遊。
彈盡新調玄鶴舞,如今往事水東流。
【右琴松亭○景德王時,有王寶高者,入智異山學琴五十年。自製新調彈之,有玄鶴來舞,遂名玄鶴琴,又云玄琴。琴松亭,寶高遊樂之處。】
天降仁賢必有緣,沒柯歌唱豈徒然?
博學訓人經義解,至今東土盛名傳。
【右瑤石宮○太宗王時,有神師元曉者唱云:“誰借沒柯斧?我斫支天柱。”王聞之曰:“此師欲得貴婦生賢子。” 時瑤石宮,有宗室寡婦,王勅宮吏,邀元曉入宮留宿。寡婦因有娠,生子卽薛聰。】
望見楊峯日月形,往尋瓠宅卜王城。
炭埋異術由神略,千歲羅基此日成。
【右月城○脫解登吐含山,望見楊山日月形,下尋之,乃瓠公宅也。潛埋礪炭于其側,謂瓠公曰:“此本吾祖家屋,而曾業冶匠時,有礪炭之埋。”因掘以示驗,瓠公乃與脫解居之。婆娑王時,築城如半月,故云月城。】
金城西畔始林間,聞有鷄聲盍往觀?
金櫝開來誕聖主,鷄林爲號是其端。
【右始林○脫解王夜聞金城西始林間有鷄鳴聲,遣瓠公視之,有金櫝掛樹,白鷄鳴於下。王開櫝視之,有小男兒在。乃收養之,名曰“閼智”,以其出於金櫝,故姓金氏。改始林爲鷄林。】
井現神龍誕女兒,老嫗收養作王妃。
天生賢德成閨範,二聖同心致至治。
【右閼英井○新羅始祖五年,龍見是井,左脇生女兒。老媼異而收養之,以井名名之。及長有德容,始祖納以爲妃。有賢行能內輔。時人謂之二聖。】
新羅始祖赫居世,剖卵生成岐嶷姿。
東國千年王業創,至今人道誕生奇。
【右蘿井○漢地節元年,高墟村長蘇伐公,望見楊山蘿井傍林間,有白馬跪拜。因忽不見,而有大卵,剖之,嬰兒出焉。收養之,年及十三,岐嶷夙成,六部人立爲君,稱赫居世。時人謂大卵如瓠,以朴爲姓。】
一髮孤城受敵兵,禦無良策勢將傾。
忽有神人來助戰,始知陰騭自冥冥。
【右味鄒王陵○儒理王時,伊西國來攻金城,禦之不能抗。忽有異兵來助,皆珥竹葉,攻賊破之。軍退後不知所歸,但見竹葉積於味鄒陵前。乃知先王陰隲,因號竹現陵。一云竹長陵。】
遺命難違葬海邊,波間時見露蜿蜒。
故將追慕無窮意,爲築高臺出半天。
【右利見臺○倭國數侵新羅,文武王患之。誓死爲龍禦寇,遺命葬于東海水中,神文王從之。葬後王追慕,築臺望之,有六龍見于水中。因名利見臺。】
舞劍年方十五六,爲王深入報王讐。
忠雖有裕孝非足,令母喪明吾汝羞。
【右黃昌舞○有黃昌者,年十五六,善舞劍。謁於王曰:“臣請爲王刺百濟王,以報王之仇。” 王許之。遂往舞於百濟通衢,觀者如堵。王召入宮中舞之,昌刺王於座。遂爲左右所害。其母聞之,號哭而喪明。】
躬儉淳風古所難,宮廷分績夜將闌。
名曰嘉俳爲節日,至今遺俗在民間。
【右嘉俳○儒理王分六部爲二,使二女各率部內女子,自秋七月旣望,每日,早集大部之庭續麻,乙夜而罷。至八月望,考其績之多小,負者置酒食以謝。因歌舞百戲,謂之嘉俳。】
君憐吾父代防秋,妾喜君行許好逑。
破鏡分持堅示信,他年成約共衾稠。
【右分鏡○薛氏良家女也。其父老當防秋,薛恨不得代爺,有嘉實者願代。父曰:“君欲代我之行,願以女妻之。”實請期,薛曰:“旣以心許,待歸未晩也。” 乃分鏡爲信,遂行。至六年未還,父欲强婚於他人,薛固拒不從。及實還,衣破形枯,不能識。乃合鏡號泣。約日成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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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7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 상서장〔上書莊〕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일어났을 때에, 최치원(崔致遠)이 그가 반드시 천명을 받을 것임을 알고는 상서(上書)하였는데, 그 글에 “계림에는 누런 잎이고 곡령에는 푸른 솔이다.〔雞林黃葉 鵠嶺靑松〕”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신라 왕이 듣고 미워하니, 최치원이 즉시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감식(鑑識)의 명철함에 대해 신라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이에 그가 거처하던 곳을 상서장(上書莊)이라 하였다.
광명에 난적 토벌 격문을 지은 것 잘한 일이지만 / 廣明討亂檄宜草
글을 지어 부처에게 아첨했으니 허물이 적지 않네 / 作書佞佛多愆尤
암탉 울어 군덕 혼매할 때에 기미를 봄이 밝았으나 / 牝晨昏德見幾明
신라 신하로 외국과 사귀었으니 무엇을 바랐을까 / 爲臣外交果何求
계림의 누런 잎을 옛 신하가 곡하는데 / 雞林黃葉舊臣哭
곡령의 왕업을 도리어 걱정하였구나 / 鵠嶺王業還堪憂
융흥을 몰래 도왔다는 것은 아주 틀린 말이고 / 隆興密贊語大謬
양무에서 제향을 받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라네 / 兩廡血食渠應羞
상서장 앞에서 손뼉을 한 번 치노니 / 上書莊前一拍手
문순의 정론이 이제는 아득하네 / 文純定論今悠悠
[주-C001] 해동악부(海東樂府) : 악부(樂府)는 중국 한(漢)나라 때에 각 지역의 음악을 채집하여 정리하는 관서(官署) 명칭이었는데, 나중에는 채집된 음악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시대가 흐르면서 악곡(樂曲)은 분리되고 가사(歌詞)만 남아 시(詩)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해동(海東)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니, 해동악부는 우리나라의 역사나 문물을 소재로 사용한 악부를 말한다. 특히 성호의 해동악부와 같이 역사 사실을 소재로 사용한 악부를 영사악부(詠史樂府)라고 한다.[주-D001] 광명(廣明)에 …… 것 : 광명은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로 880년에서 881년 전반기까지이다. 당시는 황소(黃巢)의 반란으로 혼란한 시기였는데, 최치원(崔致遠)이 병마도통(兵馬都統) 고변(高駢)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이 시기에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었다.[주-D002] 글을 …… 아첨했으니 :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고 한다. 설교(說敎)의 근원이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실려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포괄하여 군생(群生)을 교화하는 것이다. 들어오면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자는 것은 노(魯)나라 사구(司寇)의 종지(宗旨)이고, 무위(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시행하자는 것은 주(周)나라 주사(柱史)의 종지이며, 제악(諸惡)을 짓지 말고 제선(諸善)을 봉행하자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 하였다고 한다. 성호는, 최치원이 불교를 유교와 나란히 높인 것을 비판적으로 보아, 부처에게 아첨했다고 한 것이다.[주-D003] 암탉 …… 밝았으나 : 최치원이, 여왕이 나라를 다스려 혼란스러워진 것을 보고 신라가 곧 망할 것임을 알았다는 뜻이다.[주-D004] 신라 …… 사귀었으니 : 최치원이, 고려 태조가 사저(私邸)에 있을 때 편지를 보낸 것을 말한다. 그 편지에 “계림에는 누른 잎이고 곡령에는 푸른 솔이로다.〔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주-D005] 융흥(隆興)을 …… 말이고 : 《국역 성호사설》 제18권 〈경사문(經史門) 최 문창(崔文昌)〉에 “현종(顯宗)이 ‘그는 고려의 왕업(王業)을 비밀히 협찬(協贊)하였으니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공자묘(孔子廟)에 배향(配享)하고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 하였다.[주-D006] 양무(兩廡)에서 …… 일이라네 : 대본에는 ‘三字缺’로 되어 있으나, 《국역 성호사설》 제18권 〈경사문 최 문창〉에 의거하여 ‘渠應羞’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고려사》 권2 〈세가(世家) 현종〉에 의하면, 최치원은 1020년(현종11) 8월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여 공자(孔子)의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1023년 2월에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성호의 뜻은, 이단으로 취급하던 도교와 불교를 유교와 나란히 높여 공자를 모독한 최치원이 공자의 문묘에 배향된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주-D007] 문순(文純)의 정론(定論) : 문순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시호이다. 《국역 성호사설》 제18권 〈경사문 최 문창〉에 “퇴계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처에게 아첨하는 그의 글을 보고는 일찍이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의 신(神)이 어찌 감히 양무의 배향(配享)을 편안히 받아먹는단 말인가.’ 하였으니, 이는 이미 정론이 있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퇴계에 대해서는 일마다 존모(尊慕)하기에 겨를이 없으면서 유독 이 말씀만은 채택하지 않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헌순 (역)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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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18권 / 경사문(經史門) / 최 문창(崔文昌)
신라 시중(侍中) 최치원(崔致遠)이 고려 태조가 사저(私邸)에 있을 때 보낸 편지에 “계림에는 누른 잎이요, 곡령에는 푸른 솔이로다[鷄林黃葉 鵠嶺靑松].”한 문구가 있었는데, 뒤에 현종(顯宗)이 “그는 고려의 왕업(王業)을 비밀히 협찬(協贊)하였으니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공자묘(孔子廟)에 배향(配享)하고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 대저 선성(先聖 공자(孔子)를 이름)의 묘에 배향하는 것을 공(功)만으로 한다면 한(漢)의 소하(蕭何)ㆍ조참(曹參)이 마땅히 먼저 배향되었어야 할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대신인데 만약 이미 고려의 왕업을 비밀히 협찬한 뜻이 있었다면 그것은 패역(悖逆)에 해당되어 신하답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그가 말한 문구가 참서(讖書)의 투식(套式)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족히 높일 수 있겠는가? 그가 지은 난랑비(鸞郞碑)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설교(設敎)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는 실로〉 3교(敎 유(儒)ㆍ불(佛)ㆍ도(道)를 말함)를 포용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의 취지요,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여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의 종지(宗旨)요, 모든 악함을 짓지 아니하고 뭇 착함을 받들어 행함은 축건 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 하였다. 난랑(鸞郞)은 화랑(花郞)이다. 화랑은 비설(鄙媟)하기가 심한 것이다. 비록 덕의(德義)의 선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몸을 굽혀 들어가겠는가? 그 식견의 비열함이 이와 같다. 하물며 노자(老子)와 불(佛)까지 공자와 같이 높여서 이단(異端)으로써 유교(儒敎)를 해치는 우두머리(首)가 되었는데, 우리 유교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와 같이 숭봉(崇奉)하였는가?
퇴계(退溪)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그의 불(佛)에 아첨하는 문자를 보매 매양 마음에 통분한데 그의 신(神)이 어찌 양무(兩廡)의 배향(配享)을 편안히 여기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이미 정론(定論)이 있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퇴계에게 일마다 존모(尊慕)를 극진히 하면서 유독 퇴계의 이 말만은 채택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내가 일찍이 시를 짓기를,
광명에 난적을 토벌하는 데는 격문을 지어야겠지만 / 廣明討亂檄宜草
글을 지어 부처에 아첨한 것은 허물이 많다 / 作書侫佛多愆尤
새벽에 암탉이 울 때 기미를 본 것은 밝았으나 / 牝晨昏德見幾明
신하로서 외국과 사귀는 것은 과연 무엇을 구함이었나 / 爲臣外交果何求
계림 황엽에는 옛 신하로 곡할 일인데 / 鷄林黃葉舊臣哭
곡령의 왕업을 도리어 걱정하네 / 鵠嶺王業還堪憂
고려의 일어남을 밀찬했다 함은 크게 틀린 말이요 / 隆興密贊語大謬
양무에 배향된 것은 저도 응당 부끄러운 것이다 / 兩廡血食渠應羞
상서장 앞에 손벽을 한번 치니 / 上書莊前一拍手
문순의 정론이 이제 유유하네 / 文純定論今悠悠
하였다. 이 시가 족히 단안(斷案)이 될 만하다.
[주-D001] 최 문창(崔文昌) : 문창(文昌)은 신라 말기의 학자ㆍ정치가인 최치원(崔致遠)의 봉호. 호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이다. 당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 황소(黃巢)의 난에 고변(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항복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입국 후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아찬(阿飡)에 이름. 아찬은 신라 17관계(官階) 중 여섯째 관등에 불과하니 저자가 대신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한 것은 잘못임.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ㆍ《고운집(孤雲集)》 등이 있다. 《類選》 卷9下 經史篇8 論史門5.[주-D002]
계림에는 …… 솔이로다[鷄林黃葉 鵠嶺靑松] : 이 대문은 신라(新羅)는 시들고 고려(高麗)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곡령(鵠嶺)은 송악(松嶽)의 옛 이름.[주-D003] 공자묘(孔子廟)에 …… 추봉(追封)하였다 : 최치원이 공자묘(孔子廟)에 배향된 것은 고려 현종(顯宗) 11년(1020)이고,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된 것은 현종 14년(1023)이다. 《高麗史 顯宗世宗》[주-D004] 우리나라에 …… 이는 실로 : 이 부분은 《고운집(孤雲集)》 속집(續集)에 실려 있는 난랑비 서(鸞郞碑序)에 의해 보충한 것임.[주-D005] 노사구(魯司寇) : 공자(孔子)의 별칭. 노(魯) 나라의 사구(司寇)를 지냈으므로 공자를 이름. 사구는 법을 맡은 관리.[주-D006] 주주사(周柱史) : 노자(老子)의 별칭. 주(周) 나라 장서실(藏書室)의 주하사(柱下史)로 있었으므로 줄여서 주사라 한 것임.[주-D007] 축건 태자(竺乾太子) : 석가(釋迦)를 이름. 축건은 인도(印度)의 별칭. 석가는 정반왕(淨飯王)의 태자임.[주-D008] 광명에 …… 지어야겠지만 : 이 구절은 최치원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의 난을 토벌한 것을 이름. 광명(廣明)은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주-D009] 글을 …… 많다 : 이 구절은 난랑비 서(鸞郞碑序)를 지은 것을 이름.[주-D010] 곡령의 …… 걱정하네 : 이 구절까지가 왕건(王建)에게 글을 보내 “계림(鷄林)에는 누른 잎이요, 곡령(鵠嶺)에는 푸른 솔이로다.” 하여 신라의 망할 것을 예고하여 왕건에게 아첨한 것을 이름. 본래 신하는 사사로운 외교가 없는 것임.[주-D011] 문순(文純) : 퇴계(退溪) 이황의 시호.[주-D012] 이 시 : 이 시는 《성호선생전집(星湖先生全集)》 권7에 상서장(上書莊)이라는 제목으로 보이는데 그 서(序)를 참고로 옮긴다. “고려 태조가 일어날 때, 최치원이 그가 반드시 천명(天命)을 받을 줄 알고 글을 올렸는데, ‘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나왕(羅王)이 이를 듣고 미워하니 최치원이 곧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감식력(鑑識力)의 밝음에 나인(羅人)들이 탄복하여 그가 살던 곳을 상서장(上書莊)이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철희 성낙훈 양대연 (공역)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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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집 제3권 / 시(詩)○초년습유(初年拾遺)
상서장 2절○최고운(崔孤雲)의 옛 별장으로 반월성 남쪽에 있다. 세간에 전하기로 고려 태조에게 편지를 써 올린 곳이라고 한다. 〔上書莊 二絶○崔孤雲舊莊 在半月城南 世傳上書麗祖處〕
금오산 아래에 옛 별장 남았으니 / 金鰲山下舊莊留
누른 잎과 푸른 솔에 지난 일이 아득해라 / 黃葉靑松往事悠
고운의 감식안이 원대하다 말하지 마오 / 莫說孤雲鑑識遠
그대에게 한스러운 것은 《춘추》를 읽지 않은 것이라네 / 恨君猶未讀春秋
문장은 이미 황소의 격문으로 드러났거늘 / 文章已著黃巢檄
부명으로 무엇 하러 왕씨 조정을 번거롭게 했나 / 符命何煩王氏廷
그날 입산함이 빠르지 않았다면 / 當日入山如不早
상서장은 다시금 현정에 비유되었으리 / 書莊應復比玄亭
[주-D001] 상서장 : 1760년(영조36) 가을 이계가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을 때 지은 시로 최치원(崔致遠)의 옛 별장을 보고 감회를 읊었다.
상서장(上書莊)은 최치원이 살던 곳으로 금오산(金鰲山) 북쪽에 있다. 최치원이 이곳에서 고려 태조(太祖)에게 편지를 올린 뒤 신라 왕이 미워하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였다. 훗날 신라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여 그가 살던 곳을 상서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慶州誌 古蹟》[주-D002] 금오산(金鰲山) : 경주 남산(南山)의 한 봉우리로 남산이라고도 불렸다. 금거북이가 서라벌 안으로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주-D003] 누른 …… 솔 : 최치원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보낸 편지를 말한다. 편지에 “계림에는 낙엽이 지고, 곡령에는 소나무가 푸르다.[雞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기할 것을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주-D004] 고운의 감식안 : 고운(孤雲)은 최치원의 자이다. 감식안은 고려가 흥기할 것을 미리 내다보고 태조 왕건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말한다.[주-D005] 황소의 격문 : 최치원은 18세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난 뒤 고변(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黃巢書]〉를 지으면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桂苑筆耕集 卷11》[주-D006] 부명(符命) :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미리 보여주는 징조를 부명이라 하는데 그러한 상서로운 조짐들을 늘어놓으며 제왕을 예찬하는 글도 부명이라고 한다. 왕씨의 조정을 번거롭게 했다는 것은 왕건에게 편지를 보낸 것과 현종(顯宗) 때 최치원이 고려의 흥기를 예견하고 태조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고 태조의 묘정에 종사(從祀)하게 한 일을 가리킨다. 《東國通鑑》[주-D007] 상서장은 …… 비유되었으리 : 현정(玄亭)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초현정(草玄亭)이다. 양웅은 왕망(王莽)에게 아부하는 글을 지은 것으로 인해 후대에 많은 비판을 받은 일이 있는데, 최치원도 일찍 은거하지 않았다면 양웅과 마찬가지로 아부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서한석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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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9권 / 기(記) / 최고운묘기〔崔孤雲廟記〕
한림시독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翰林侍讀學士兵部侍郞知瑞書監事) 문창(文昌) 최공 고운(孤雲)의 사당이 함양(咸陽) 백연(柏淵) 가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이 일찍이 천령(天嶺)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떠난 뒤에도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천령은 지금 함양이 되었기에 함양부의 사람들이 공의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내고 있다.
공의 휘(諱)는 치원(致遠)이다. 어려서 당(唐)나라에 들어가 건부(乾符) 원년(874)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통(都統) 고변(高騈)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렀다.
광계(光啓) 원년(885)에는 조사(詔使)의 일원이 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와 김씨(金氏) 왕조를 섬겨 한림시독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가 되었다.
건녕(乾寧) 원년(894)에는 시무 십사(時務十事)를 올렸으나 왕이 써 주지 않자 이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하루아침에 관과 신을 벗어 숲 속에 남겨놓았으니 죽은 바를 알 수 없다.
국사(國史)를 살펴보면 공이 본국에 돌아온 지 21년 만에 좌복야(左僕射) 배추(裴樞) 등 38인이 청류(淸流)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백마역(白馬驛)에서 죽으면서 당(唐)나라가 결국 멸망하였고, 그로부터 또 29년이 지나서 신라도 멸망하였다고 되어 있다.
대개 이때는 공이 이미 은거한 뒤였다. 아마도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예견하고, 또 종국(宗國)이 필시 망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초연히 멀리 떠나서 세상을 피해 살면서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마음으로 후량(後梁)에 신하도 되고 싶지 않았고, 또 고려 왕씨(王氏)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깊은 산속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변이 황소를 토벌할 때에 공은 비분강개하면서 고변을 위해 격문을 지어 여러 도(道)의 병사들을 모아서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황소가 없어진 다음에는 조서(詔書)를 받들고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만일 공이 종신토록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면, 청류의 화(禍)를 어떻게 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비록 그 화를 면치 못하였더라도, 필시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면서까지 후량의 조정을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주(慶州) 남쪽에
상서장(上書莊)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공이 이곳에서 왕씨(王氏)에게 글을 올린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왕씨가 처음 일어날 때에 공이 진실로 글을 올려 은밀히 도왔다면 무슨 까닭으로 세상을 피해 홀로 행동하면서 산수지간에서 노년을 마치려고만 하고 벼슬은 하지 않으려고 했겠는가?
왕씨 왕조 중엽에 공에게 문창후(文昌侯)를 추증하고 국학(國學)에서 제사를 올리게 하니 세상에서 영광으로 여기었다. 그러나 공의 높은 절조는 왕씨를 섬기지 않은 바로 그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탄식을 이루 다 말 할 수 있겠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 죽은 것을 백성들은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라고 하셨다. 만일 은나라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굶어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굶어 죽은 것은 그들의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함이었기에 천하의 칭송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공이 가야산에서 관과 신을 벗어놓고 떠난 것으로부터 시간적으로 살펴보면 그때는 이미 김씨 왕조가 망한 뒤였다. 이는 공의 뜻 또한 몸을 깨끗이 하려고 한 것이니, 저 백이ㆍ숙제 두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금상(今上) 21년에 모후(某侯)가 함양부에 수령으로 나가 공의 사당에 참배하고는 부(府)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 남은 터에 사당을 개수하고는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대저 국학에서 공의 제사를 올린 지가 오래 되었으니 부(府)의 관아에 꼭 사당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기왕에 공의 유적이 있고 보면, 또한 백세토록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에 기문을 쓴다.
[주-D001] 최고운(崔孤雲) :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869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고,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885년(헌강왕11)에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등이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함을 통탄하며 외직을 요청하여 지방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 견당사(遣唐使)에 임명되었으나 가지 못했고 이듬해 시무10조를 상소하였다. 그 후 난세를 비관하여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이 있다.[주-D002] 자금어대(紫金魚袋) : 적동(赤銅)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장식에 붙어 있는 주머니로 당송(唐宋)시대에 관리가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의 신분을 표시하던 것이다. 공복(公服)의 띠에 매달아 관직의 귀천을 구분했다.[주-D003] 황소(黃巢)가 …… 불렀다 : 황소(黃巢)는 당나라 말기 농민반란의 우두머리이다. 왕선지(王仙芝)의 반란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가는 곳마다 관군을 격파했고 5년 뒤에는 장안에 입성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랐지만, 관군의 반격이 있자 자결했다. 당시 최치원은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주-D004] 건녕(乾寧) …… 남겨놓았으니 : 시무 십사(時務十事)는 진성여왕 8년(894)에 잘못된 정사가 많고 도적들이 떼지어 일어나는 상황에서 최치원이 올린 10조목의 개혁책이다.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을 포함해 대부분의 역사서에서는 당시 시무책이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정권을 쥐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배척을 받아 결국 시행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관직을 버리고 소요하다가 마침내 은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주-D005] 좌복야(左僕射) …… 멸망하였다 : 당(唐)나라 애제(哀帝) 때에 권신(權臣) 주전충(朱全忠)이 배추(裵樞) 등 조사(朝士) 30여 명을 백마역에 집결시켜 하루저녁에 다 죽이고 그 시체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은 사건을 말한다. 당초 주전충의 좌리(佐吏)였던 이진(李振)이 진사시(進士試)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조사들을 매우 미워하여 주전충에게 말하기를 “이 조사들은 늘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하니, 황하(黃河)에 던져서 영원히 탁류(濁流)가 되게 하시오.” 하니, 주전충이 그 말을 따랐다고 한다. 《唐書 卷240 裵樞傳》 《通鑑節要 卷48 唐紀 昭宣帝》[주-D006]
상서장(上書莊)이 …… 올린 곳 : 상서장은 최치원이 왕건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계림에는 나뭇잎이 노랗고 곡령에는 소나무가 푸르다.〔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을 넣어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하는 곳이다. 이 구절은 신라의 망할 것을 예고하여 왕건에게 아첨한 것이라고 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심지어 후대의 이익이나 안정복은 신라왕이 이를 듣고 미워하자, 최치원이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상서장이 진성왕(眞聖王) 때 올린 시무 십조(時務十條)를 쓴 곳이라고 적고 있어서 분명치 않다.
[주-D007] 왕씨 …… 여기었다 : 최치원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11)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주-D008] 백이와 …… 있다 : 이 말은 《논어》 〈계씨(季氏)〉에 보인다.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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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상서장이 진성왕(眞聖王) 때 올린 시무 십조(時務十條)를 쓴 곳이라고 적고 있어서 분명치 않다.-><고운집(孤雲集) / 고운 선생 사적 /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상서장이 진성왕(眞聖王) 때 올린 시무 십조(時務十條)를 쓴 곳이라고 적고 있어서 분명치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慶尙道) / 慶州府 / 古跡
上書莊。在金鼇山北。○高麗太祖之興,新羅崔致遠知必受命,上書有“鷄林黃葉,鵠嶺靑松”之語。羅王聞而惡之,致遠卽帶家隱居伽倻山海印寺終焉。其鑑識之明,羅人服之,乃以其所居名上書莊。
*[주-D001] 상서장(上書莊) : 이 상서장부터 아래의 가야산(伽倻山)까지는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를 근간으로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아 엮은 것이다. 상서장에 대해서 이곳에서는 고운이 진성왕(眞聖王) 때 올린 시무 십조(時務十條)의 상소문을 이곳에서 썼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와 한국문집총간 198집에 수록된 《성호전집(星湖全集)》 권7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고려 태조가 일어날 때, 고운이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을 이곳에서 지어 올렸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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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후대의 이익이나 안정복은 신라왕이 이를 듣고 미워하자, 최치원이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삭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慶尙道) / 慶州府 / 古跡
上書莊。在金鼇山北。○高麗太祖之興,新羅崔致遠知必受命,上書有“鷄林黃葉,鵠嶺靑松”之語。羅王聞而惡之,致遠卽帶家隱居伽倻山海印寺終焉。其鑑識之明,羅人服之,乃以其所居名上書莊。이익이나 안정복의 주장이 아니라 여지승람에 나오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