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이 게시판안에 있는 이전 글들 다시 옮긴 건데요. 약간의 편집이 있어요. 원주인께서는 이해해주시길…
시는 책을 펴드시구요.^^; 여기에 님의 생각, 또 단평 올리셔도 좋습니다.
합평정팅 기초자료라고 생각하시면 되구요.
이번 주에 합평합니다. 대문에 공지있어요. 그리고 이번 주에 못하면 다음주에 또 해요.^^;
<오래 된 서적>.1985
80년대 초반을 대학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여있던 그가 85년에 발표한 시이다. 그래설까 이 시에서는 거대한 사회적 현실 앞에서 무기력해져버린 젊은 <그>들의 절망을 보는 듯하다. 아니, 꼭 그렇게 고정관념처럼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텅 빈 희망 속에서' 그저 살아지는 것에 대한 회의일수도 있다.
기형도는 스스로를 도서관 구석 한 귀퉁이에 꽂힌 채 누렇게 변질되어 버린 책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대부분이 검은 페이지이다. 검은 페이지란 것은 그가 처한 현실이 어둡고 암울한 것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현실에서 그가 존재하는 방법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게 한다. 그의 다른 시에서 말했듯이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쓰여지고 있는 책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쓰여져서는 어딘가 구석에 처박힌 채 하루하루 낡아가고 있다는 상상, 끔찍하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살아온 것이 기적적이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엔 자신이 살아온 방법에 대한 반감처럼 읽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유쾌한 패러독스처럼 보인다. 우리가 완벽한 한 권의 성서처럼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완벽하게 불가능하다. 어쩌면 '나'라는 책은 단 한 줄도 건질 게 없는 지도 모른다.
... (푸른향기)
여기 이시 개인적으론 파장이 좀 컸던 구절들이 많이 보이네요
굳이 뽑아 내자면
내 미래가 내 과거이므로라는 구절,
이 구절로 1,2,3 연이 거느린 모든 단어들이 모여 든다는 생각이 드네요
축축한 세계와 들여다 보지 않는 질서
텅빈 희망과 몇몇 되지도 않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 기능을 들여다 보기,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저 무책임한 용기
선뜻 용납되지 않는 아니 하기 싫은, 미래가 내 과거라는 단언
삶의 내용이 어제와 또는 1년전과 10년전과 같을수 있는가 어제는 소주를 오늘은 맥주를 마시는데 내일은 집에서 잠들 수도 있는데 왜 같을 수 있는가
아마도 살아 있다는 내용이 살아간다는 형식의 하부 구조라는 의미라고 보이는데 서양철학과 요즘 거래가 활발한 불교의 욕심, 서양의 욕망 그 형식 아래에서 삶의 내용이란 과거가 미래 일수 밖에 없다는 ,그래서 미래가 과거일수 밖에 없다는 ,,,
이 개인적인 시인에 대한 해석 안에서도 미래가 과거라 해서 그의 단어처럼 축축한 세계라는 단어를 쓸 필연은 없다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유년의 기억들이 낸 상흔을 대입하지 않을 수 없군요 유년의 그물망들이 얼마나 촘촘히 그를 둘러 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푸코와들개)
<진눈깨비>1988
진눈깨비.
땅 위에 닿지 못하고 하늘가에 서성이는 진눈깨비는
지극히 순간적이다. 그것은 황동규 식으로 말하자면
'어둠을 온 몸으로 껴안고' 그 어둠 속으로
형체도 없이 사그라들, 그런 운명의 것이다.
. . .
때마침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기형도의 눈에 비치는
그러한 진눈깨비는 아름답다.(아름다움이란,
아는 대상 다웁다라는 뜻이다.)
그 진눈깨비는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릴' 것이며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기형도에게 있어 이 진눈깨비는 아름답다, 슬프게도.
'취한 사내들이' 유년 시절 '하루 종일 버스를 탔던' 기억처럼'쓰러진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런 사람들은
'조치원'역으로 사라지던 청년들의 모습이다.
'톱밥같이 쓸쓸해'보이는 모습이다.
하늘 아래 영속적인 것은 없다. 진눈깨비처럼 형체도 없이
사그라들 것이다. 마침내 남는 것은 진눈깨비의 영락처럼
끝도 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망가진 꿈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뿐.
그 망가진 꿈 속에는
「위험한 가계·1969」에서 보여지는 '가난'과
「빈집」에서 나타나는 '이별'의 '상처'뿐이다.
시인은 상처 투성이다. 코트 주머니 속에
'딱딱한' 손을 집어넣고
시인은 갑자기, 때마침(!) 눈물이 흐른다.
진눈깨비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의 망가진 꿈은 아름답다, 진눈깨비처럼.
그의 상처도 아름답다, 진눈깨비처럼.
어차피 그러한 것들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들이니까.
꿈을 꾸지 못하는 것들이니까.
(꿈이, 희망이 거세된 생명이란!)
시인은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느낀다.
시인은 인생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시인은 너무 일찍 늙어버렸다. 그래서
시인은 너무 일찍 죽었다,
진눈깨비.
그는, 그의 실제 죽음은 '아름 - 아는 대상답다'.
끔찍하다! (푸른저녁)
우선...
기형도의 작품들이 대분분 그렇듯,
이 '시'역시 사람을 바보로 만듭니다.
빠질 것 같이 생기지도 않은 것이
사람을 어느새 잡고 있으니까요.
진눈깨비... 저는 '아픔을 사랑한' 시인...아니
사람 기형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쓰러질듯한 어떤 사람.
그리고 그 아픔을 씻어줄 대상을
비가 아닌 진눈깨비로 했던 글을 쓰는 어떤 사람...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진눈깨비'는 회상을 할 수 있도록
비 보다는 천천히 또... 눈 보다는 빨리
우리의 발 딛는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일생의 몫이란 것....)
비교를 하도록 하는 진눈깨비/
비교를 당하는 '지남'과 '지금'/
지금의 희미함 아니면 불안정함...
일생의 몫이란 것은
비교하지 말았으면...했던 삶.
기형도는 진눈깨비에 의해
비교를 해버린 것이 아닐까여?
마치 스크린에 담아놓은 영상처럼 말입니다 . ………(바람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