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막연히 희망하지 않는다.
지금 김영민은 담담하지만 자유롭게 자기만의 기준을 만드는 중이다.
재킷과 팬츠 모두 아더에러 셔츠 프리즘웍스 슈즈 브래드스튜디오 타이 스타일리스트 개인 소장
“저 오늘 ‘귀때기’ 같나요, 회계사 ‘손제혁’ 같나요?” 질문을 미처 하기도 전에 김영민이 조심스레 물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순박한 북한군 ‘정만복’, 3월에 개봉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자신이 ‘장국영’이라 우기는 판타지적 남자, 요즘 주목받는 <부부의 세계>의 ‘손제혁’까지. 20년이라는 배우의 시간 동안 작은 역할에도 최선을 다해온 그는 어느 때보다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며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한껏 들뜰 법도 한 그의 대답에서는 불안이나 조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는 “이제야 ‘내 기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걸 배우고 있다”고 했다. 김영민이 장난스러운 표정과 분명한 마음가짐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드라마에서 늘 입던 포멀한 스리피스 슈트 대신 캐주얼한 의상을 입은 기분은?
오랜만에 손제혁의 모습을 벗어나니 새롭다. 그래서 촬영 중 내 얼굴에 어떤 캐릭터가 묻어나는지 궁금해 물었다. 현실 속 내 모습이 손제혁 같은 놈이면 안 되니까. 요즘 매일 지인들에게 ‘나쁜 새끼’라는 말을 밥 먹듯 듣는다. 하하.
빠른 전개와 몰입도 때문에 <부부의 세계>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김희애 선배님이 연기하는 지선우를 중심으로 매회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이 쉴 새 없이 터지는 극이다. 선배님은 말할 것도 없고 나처럼 연극을 오래 해온 해준이, 내공이 많은 선영 씨까지 모두 매우 몰입하고 있다. 그래서 내용을 아는 나조차도 방송을 재미있게 보게 된다. 내면을 끝까지 파고드는 섬세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드물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촬영하고 있다.
재킷과 팬츠 모두 프롬마크 슈즈 컨버스 슬리브리스 톱 스타일리스트 개인 소장
손제혁이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주변에 한 명쯤 있을 것 같은, 어디선가 만날 법한 나쁜 남자의 모습을 여러 사람에게 캐묻고 찾아봤다. 가정에 대한 배려도 없고, 이기적이고, 자기 욕망만 사랑하고, 그 욕망을 채우는 게 최우선인 인물이다. 그렇다고 마냥 악을 연기해야 하는 캐릭터는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어설프고 욕망도 납득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하는 캐릭터다. 귀띔하자면, 회차가 거듭되면서 반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선우를 매혹해야 하는 장면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김희애 선배님이 고맙게도 내가 준비한 걸 펼쳐 보이게 해주신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것을 유지하고 자기가 해석한 캐릭터의 기준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법을 많이 배운다.
최근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는 스스로 ‘장국영’이라 우기는 판타지적 남자를 연기하기도 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해 색달랐을 텐데.
어릴 때부터 진한 이목구비 때문인지 유덕화, 장국영 같은 중화권 배우나 일본 배우 같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아비정전>을 다시 보며 장국영 형님이 좋은 배우였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누구나 마음 안에 꿈이나 이상향을 품고 살 텐데, 그런 무형의 존재로 변신해 연기해야 했다. 김초희 감독님의 발상이 워낙 재미있고, 찬실을 연기한 강말금 배우의 연기가 참 사랑스러운 영화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개봉해 아쉬움이 있지만, 유쾌한 기운을 얻을 수 있으니 많이 보셨으면 좋겠다.
어릴 때는 미래만 바라보니 고통스러웠다.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배우로서 우선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면 외부 요인들은 따라올 수도, 아닐 수도 있으니까.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드는지 궁금하다.
30대까지는 뚜렷한 이목구비가 배역을 한정시킨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에쿠스> <햄릿> <청춘예찬>같이 유명한 연극 작품을 많이 했는데도 늘 갈증이 있었다. 도화지처럼 변신할 수 있는, 보통의 생김새를 갖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불만족스러웠다. 더 유명해지고 싶고, 손에 잡히는 게 없다고 생각할수록 조바심이 들었다. 외부 요인에 신경을 많이 쓴 거다. 지금은 내 얼굴이 좋다. 외연과 내면이 더 일치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굉장히 여유로워 보인다.
연극을 오래 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다. 연극 초대권으로 택시를 타고 집에 간 적도 있으니까. 택시 기사님께 “제가 연극하는 사람이라 돈이 없는데, 태워주실 수 있나요” 하고 부탁을 했다. 무모했지만, 낭만이 남아 있던 그 당시에는 태워주는 기사님도 계셔서 참 감사했다. 하하.
힘들 땐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난 언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해왔다. 몇 년을 주기로 ‘연기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보면 또 연기가 좋아지고, 다시 버티게 되고, 내 계획대로 되는 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깨닫고. 청춘이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감정적이었다.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라 겉으로 티가 나진 않았지만 내면의 기복이 심했다. 내 색깔과 연기의 답을 고민하면서 술도 많이 마셨다. 흔히 떠올리는 가난한 연극배우의 이미지처럼 치열하게 사회, 예술,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고…. 돈이 없는데도 술자리는 어찌나 잦았는지. 하하.
전역 후에 서울예대 연기과에 입학했다. 늦깎이로 시작해 힘들지는 않았나?
고등학생 때 연극 동아리를 하면서 연기에 푹 빠졌다. 군 입대 전까지 연극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는데, 전역한 뒤 정식으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드라마에서 활약하는 이천희, 송창의, 배성우, 김희원 형 같은 좋은 동기를 많이 만났다. 열등감보다는 그들의 재능을 보고 배우는 기쁨이 컸다. 매 학기 공연을 하는데, 나처럼 숫기 없는 천희가 연기만 하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신기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30대 초반까지 극단에서 막내로 바닥 닦고 청소하면서 살았다. 계속 연기를 할 수 있어서 견뎠던 것 같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굵직하고 강한 캐릭터도 많이 맡았다. 박근형, 김기덕 같은 굵직한 연출가나 감독과도 호흡을 맞췄고.
보통 한 극단에 오래 소속되어 연기하는데, 나는 운이 좋아 다양한 연출가와 작업을 해왔다. 같은 주스 마시는 장면이라도 연출자마다 디렉션이 다르다. 매번 다름을 발견하는 경험이 큰 자양분이 됐다. 그때의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 ‘작가님은 이 대사 한 줄을 어떤 생각으로 썼을까?’ 고민을 한다. 원체 자기 확신이 부족한 성격이라 객관과 주관 사이에서 고민이 꼬리를 무는
편이다.
드라마보다 무대를 더 선호하는 줄 알았다.
사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이후 배역이 들어오곤 했는데, 늘 타이밍이 어긋났다. 연극이나 영화를 하고 있을 때 연락이 왔는데, 동시에 여러 역할을 맡을 성격이 못됐다. 작품이 겹치면 민폐일 것 같고, 비록 작은 역할이어도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연하지 못했다. <나의 아저씨>
이후 드라마를 이어서 하고 있는데, 시청자의 피드백이 빠른 점이 흥미롭다.
연극과 드라마의 연기는 어떻게 다른가?
본질은 같다. 단, 연극은 매번 처음인 것처럼 날마다 새로운 걸 발견해야 하는 과정이다. 책에서 알아낸 것, 동료들과 연습하며 익히고 찾아낸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거다. 반면 드라마는 혼자 준비한 걸 한 번에 바로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 큰 차이다. 다음은 없다. 시청자에게는 눈동자 움직임 하나가 깊은 발성보다 크게 와닿을 수 있다는 점이 새롭다.
요즘처럼 작품이 잘될 때도 고민은 여전한가?
배우로서 확고한 나만의 기준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또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어릴 때는 미래만 바라보다 보니 고통스러웠다. ‘계속 인기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배우로서 우선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면 외부 요인들은 따라올 수도, 아닐 수도 있으니까.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고, 휘둘리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다. 또 내가 지금까지 배우라는 직업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20년간 묵묵히 응원해준 가족의 힘이 크다. 편찮으신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요즘에는 현재가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과거에 묶이기보다 ‘지금이 내가 가장 젊고 잘할 수 있는 시기’라는 걸 되뇌곤 한다.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다음엔 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싱겁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난 목화도 예쁘고, 개나리도 예쁘고, 벚꽃은 벚꽃대로 예쁘고. 그런 사람이다.
지금의 김영민은 스스로에게 얼마나 집중하고 있나?
내 안에 흐르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두는 것에 몰입 중이다. 어릴 때는 부정적인 감정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다가 한 번씩 까칠하게 표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배우로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이라 여기게 됐다.
오늘처럼 촬영이 없는 날이나 시간이 날 땐 무엇을 하나?
주로 극장에 간다. 영화는 영화 사이즈로 봐야 한다는 철칙이 있다.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 자주 가지만, 예술영화를 보러 시네큐브나 인디스페이스를 찾을 때도 많다.
이번 작품을 끝내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 한 작품을 끝내면 차를 몰고 서해로든 남해로든 떠난다. 도장깨기를 하듯 작은 바닷가 마을을 둘러보고, 지나가다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밥을 먹곤 한다. 사실 ‘집돌이’라 작품이 끝나면 일주일 안에 떠나야 한다. 밍기적거리다 가고 싶은 마음이 줄어드니까.
부부의 세계란 무엇일까?
개인과 개인은 각자 성숙도가 다르기에 관계를 맺는 일 자체가 어렵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서로 끝없이 존중의 기술을 배우는 게 부부인 것 같다.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결의 사랑을 엮어나가는 것이 부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