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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성 탈환전에서 향토의병을 이끌었던 박춘무(朴春茂)[1544~1611]의 공적을 기리는 전적비.
195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월 4일 지금의 복대동에서 거병하였으며, 8월 1일에 조헌(趙憲)[1544~1592]의 의병과 더불어 청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 뒤 진천지역으로 진격하여 진천지역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임진왜란 때 육지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였던 청주성 탈환전에서 향토의병을 이끌었던 박춘무의 공적을 기려 1988년에 세운 전적비이다.
청주시내 중앙공원(中央公園) 동쪽 출입구의 오른쪽 화단에 조헌전장기적비(趙憲戰場紀蹟碑)의 왼쪽에 있다.
높이 226㎝. 폭 83㎝. 두께 51㎝의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가첨석(加簷石)을 얹었다.
전서(篆書)로 쓴 비의 제목은 “愍襄公花遷堂朴先生戰場紀蹟碑銘(민양공화천당박선생전장기적비명)”으로 성균관부관장 김우현(金禹鉉)의 글씨이며, 비문은 성균관장 김경수(金敬洙)가 짓고 성균관전례위원장 강정희(姜正熙)가 썼다.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섬멸한 박춘무의 호국정신은, 국란에 직면했을 때 국민된 도리가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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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시민에디터] 중앙공원 ③ 중앙공원이 품고 있는 역사 이야기_김애중, 김진주
중앙공원에는 임진왜란 시 청주성 탈환에 힘쓴 3명의 전장기적비가 있다 중앙공원에는 언뜻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의외로 많은 비석이 곳곳에...公園) 동쪽 출입구의 오른쪽 화단에 세 비석이 나란히 있다. 박춘무전장기념비(朴春茂戰場紀蹟碑)는 1988년에 세워졌으며 영규대사 전장기적비는 1974... 조헌전장기적비(趙憲戰場紀蹟碑)는 1710년 건립 청주성 서문에서 이건
202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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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무 (朴春茂)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청주성 수복을 이끈 의병장이자 문신.
이칭
자지원(至元)호화천당(花遷堂)시호민양(愍襄)
인물/전통 인물
성별남성출생 연도1544년(중종 39)사망 연도1611년(광해군 3)본관순천(順天)
박춘무는 임진왜란 때 청주성 수복을 이끌었던 의병장이자 문신이다. 청주성 수복은 임진왜란 초기 육상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이다. 토정 이지함의 문인으로 동문수학한 조헌과 호서 지역 의병을 이끌었으며, 청주성 수복 이후 진천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지원(至元), 호는 화천당(花遷堂)이다. 박춘무의 집안이 청주 지역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증조할아버지 박의륜(朴宜倫) 때이다. 이후 지역의 세력가와 혼인 관계를 맺으며 집안이 성장하였다. 할아버지는 박곤손(朴坤孫), 아버지는 진사 박기정(朴箕精)이다. 박기정은 경주김씨 사이에 5남 3녀를 두었다. 맏형 박춘영(朴春英)은 1548년(명종3) 문과 급제, 둘째 형 박춘화(朴春華)도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동생 박춘번(朴春蕃)은 임진왜란 때 박춘무와 함께 종군하였다. 박춘무의 장남 박신명(朴新命)은 선전관을 지냈고, 아버지를 따라 종군한 차남 박동명(朴東命, 1575~1636)은 태안군수를 지냈다.
박춘무가 청주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것은 증조할아버지 이후 닦아온 지역 기반에 힘입었다. 특히, 아버지 박기정 대에 학문과 사회경제적으로 집안이 일어났다.
주요 활동
박춘무는 토정 이지함의 문인이다. ‘화천당(花遷堂)’이라는 박춘무의 호도 이지함과 관련이 있다. 동생 박춘번과 함께 거처를 이지함이 있었던 청주 산동(山東)의 화천(花川)으로 옮기고, 이를 기념해서 화천당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었다.
박춘무는 조헌(15441592)과 1592년 8월 2일 청주성 수복을 이끌었다. 이 승리는 임진왜란 초기 육상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박춘무와 조헌을 두 수반으로 호서의병이 구성된 계기는 김천일 의병진의 발의로 마련되었다. 김천일 의병진이 전라도 나주에서 창의하여 1592년 6월 중순에 경기도 수원까지 북상하였고, 연합작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김천일 의병진의 종사관 송제민(宋齊民, 15491602)이 파견되어 소모(召募) 활동을 전개하였다. 송제민, 조헌, 박춘무는 모두 이지함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당시 박춘무의 거주지는 청주 복대리(福臺里: 지금의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였다. 의병진은 청주성을 수복하기 위해서 7월 초 이곳에서 출정식을 하였다. 박춘무의 의병진 규모는 대략 1,00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때 종사관으로 활약한 사람이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과 한혁(韓赫)이다.
조헌은 서문을 공격하고 박춘무는 남문을 공격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때 조헌은 좌의대장, 박춘무는 우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송제민, 조헌, 박춘무의 연합작전은 청주성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청주성 싸움을 시작으로 좌의대장은 황간 영동 이남의 적과 싸우고, 우의대장은 금강 이북의 적과 싸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금산이 위급하여 조헌의 좌의대는 700여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으로 달려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한편, 박춘무는 진천(鎭川)으로 나아가서 진천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병사를 진천으로 옮겨 적을 열흘이나 포위했는데, 충청도관찰사 윤국형(尹國馨)이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힘이 부친 박춘무가 포위를 풀려고 하자 지역민이 와서 만약 포위를 풀면 백성들이 왜군에게 살육을 당할 것이라 호소하였다. 박춘무는 그날 밤 남쪽의 포위망을 풀어 왜적이 달아나게 하였고, 후에 병사들로 하여금 왜적을 추격하도록 하여 진천 일대를 안정시켰다. 1597년 4월 임천(林川) 군수에 나갔다가 스스로 사직하였다. 1598년 4월에는 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에 임명되었다.
접기/펼치기학문과 저술
박춘무는 이지함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호서 및 호남 지역에서 이산보(李山甫)와 더불어 그 문하를 대표할 만한 학자 중 한 명이다. 1895년(고종 32) 11대손 문규(文圭)가 박춘무의 시문을 엮어 편집, 간행한 『화천당집(花遷堂集)』이 있다.
접기/펼치기상훈과 추모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민양(愍襄)이다. '박춘무 전장기적비(朴春茂戰場紀蹟碑)'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중앙공원 내에 남아 있다.
기참고문헌
원전
『선조실록(宣祖實錄)』
단행본
이석린, 『의병장 박춘무 일가의 삼대창의록』(서경문화사, 2005)
논문
김강식, 「조선후기 청주 순천박씨 가문의 충의 정신과 의병 활동」(『우암논총』 3, 충북대 우암연구소, 2010)
이석린·전호수, 「화천당 박춘무의 임진왜란 의병활동」(『중원문화논총』 4집 1,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00)
이석린, 「임진왜란기 화천당 박춘무의 의병활동에 대한 예비적 고찰」(『중원문화논총』 2·3합집,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1999)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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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무(朴春茂)
주요 정보대표표제한글표제한자표제분야유형지역시대왕대집필자호시호출신성별본관주거지저술문집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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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천당집(花遷堂集)』 | |
| 박춘무(朴春茂) | |
총론
[?~? = ?].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 활동한 문신이며, 의병장(義兵將)이다. 호는 화천당(花遷堂)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거주지는 청주(淸州)이다.
선조 시대 활동
박춘무(朴春茂)는 찰방(察訪)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호서(湖西) 지방을 지키는데 큰 활약을 하였다. 1593년(선조 26) 3월에도 선거이(宣居怡) 및 허육(許王夏) 등과 함께 적을 차단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6년 3월 5일]
용병(用兵)에 능하였던 그는 의술(醫術), 특히 침구술(鍼灸術)이 뛰어나 허준(許浚)을 비롯하여, 이연록(李延祿)과 이공기(李公沂), 김영국(金榮國), 정희생(鄭希生), 양예수(楊禮守), 심발, 허임(許任) 등과 함께 의관(醫官)으로도 활약하였다.[『선조실록』선조 28년 4월 13일, 선조 28년 12월 28일, 선조 29년 5월 11일] 1596년(선조 29) 5월 이후 지방관인 임천군수(林川郡守)가 되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4월 중순까지 있었다.[『선조실록』선조 30년 4월 21일] 그러다가 같은 해 4월 하순에 내의원(內醫院)에서 세자에게 침을 놓기 쉽게 가까운 곳으로 그의 부임지를 옮길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그는 서울과 거리가 가까운 인천부사(仁川府使)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0년 4월 21일, 선조 30년 4월 23일] 그리고 선조 31년(1598) 10월 부평부사(富平府使)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1년 10월 15일]
저서로는 그의 유언 등을 모은 3권 1책의 『화천당집(花遷堂集)』이 있다.
시호와 추증
시호는 민양(愍襄)이다. 후에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