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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시계를 나선 뻐꾹새의 시학
1.
어느 대학의 교양 필수 과목에 「독서와 작문」이라는 강좌가 있다. 1학년생들이 반드시 이수해야 할 3학점 과목이다. 몇 년째 이 강의를 맡아 열아홉 혹은 스무 살 정도 된 신입생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다. 시조를 쓰는 사람으로서 풋내기 학생들에게 시조에 대해 소개하고자 하는 강열한 열망을 가지고 있기에 총 45시간의 강의 중 12시간 정도를 할애하여 시조를 알리고 있다. 주 텍스트가 시조비평집이지만 주로 ‘이 한 권의 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읽은 시집과 소설책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진다. 얼마 전 『정격과 역진의 정형 미학』에 대한 감상비평을 학생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소감 끝에 그들에게 시조를 한 마디로 정의하여 보라고 했을 때 여러 가지 다채로운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시조 비평집을 통독하고 난 후 들려준 발언들은 꽤 의미심장하였다. 수학능력평가에서 출제가 거의 되지 않고 고등학교 국어시간에도 아주 낮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시조’라는 말 자체가 아주 생소했는데, 책을 통해서 새롭게 시조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조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특히 미래의 교사들인 만큼 시조에 대한 식견과 안목을 가지게 된다면 일정 몫에서 시조를 교육하는 교사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들이 특히 놀라워한 점은 시조 쓰는 이들이 매우 많은 것과 한 문학평론가가 시조에 대한 본격적인 글을 모아 한 권의 시조 비평집을 묶은 일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 시조의 정형 미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말했고, 전문적인 글인지라 독해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웬만큼은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많아서 흥미로웠다고 하였다.
2.
이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절실하다. 어찌하여 이 땅의 교육은 우리 것을 이토록 등한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시조의 아름다움이 이러할진대 왜 학교교육과정에서 빈약하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교과서의 영향력이 이전보다 못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중요하고 지대하다. 학년성에 맞게 체계적으로 좋은 시조 작품들이 수록되어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시조시인들은 밀도 높은 작품 쓰기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음은 1970년대 초에 등단한 한분순 시인의 단시조 작품들이다. 그간 등단작 이후의 작업들을 유심히 살핀 바 있었는데 어쩌면 이렇듯 한결 같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풍도 그러하고 작품 배열 즉 다채로운 형태의 기사(연행갈이)형식도 여전하다. 이번에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제목들이다. ‘어쩐지 우리, 뻐꾹새는 벽시계를 나섰다, 그렇게 청춘’이 모두 예사롭지가 않다.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이 도저하다. 존재론적 시각으로 인생 담론을 육화하고 있다.
옷섶에 낭창낭창
스친 잎
인연이다
덧니 조금 내밀며
잔잔히
새나는
웃음
이만큼 다가서다가
달빛에
들킨 속내.
-한분순, 「어쩐지 우리」 전문
밤낮 가기만 한다
끊임없이 쉬지 않는다
갇혀있는 탑 속의 새
시작이 없던 곳으로
되짚어
코스모스 길을
허위 단숨
날겠네.
-한분순, 「뻐꾹새는 벽시계를 나섰다」 전문
봄풀 돋는데 흙 한 줌 눌 데 없다
공연히 서성대며
종일
객혈을 참다
정한 빛 그 광망을 떨며
부서지는
종이꽃.
-한분순, 「그렇게 청춘」 전문
「어쩐지 우리」는 행간의 의미가 이채롭다. 초장은 인연을 말하고 있다. ‘옷섶, 낭창낭창, 스친 잎’이 결합되어 미묘한 울림의 파장을 일으킨다. 중장에서 ‘덧니와 웃음’이 전개된다. 어떤 이의 모습이다. 종장은 다 헤아릴 길 없는 애틋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다가서다가 속내를 달빛에 들키고 만 시적 정황이 애절하기까지 하다. 이 때 제목은 시의 한 중요한 부분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어쩐지 우리’라는 구절의 이면에 무한한 사연들이 내재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이기도 하고 우리가 비근하게 경험하는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뻐꾹새는 벽시계를 나섰다」 도 아주 특이한 정서를 표상하고 있다. 늘 가기만 하는 일의 반복, 쉼이 없는 한 존재인 벽시계 속의 뻐꾹새는 급기야 밖을 나서고야 만다. 일탈을 감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갇혀있는 탑 속의 새/ 시작이 없던 곳’으로 날아가고 있다. 여기서 ‘시작이 없던 곳’이 상징하는 바는 특별하다. 결단코 더 이상은 매여 있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의 궤도 이탈은 뻐꾹새에게는 자존을 회복하는 일이다. 존재감 상실 속의 삶을 벗어던지고 ‘되짚어/ 코스모스 길을/ 허위 단숨’으로 훨훨 날아오름으로써 그에게 새로운 생은 멀리 드넓게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제 무한 창공이 모두 그의 것이 된 셈이다.
「그렇게 청춘」 은 소멸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유한자인 인간은 대자연을 바라보면서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청춘은 그것을 겪는 세대에게는 환희이자 고통이기도 하다. 어서 이 어둡고 아픈 청춘의 때를 벗어났으면 하는 열망을 가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좀 더 멋지고 아름답게 보낼 것을 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게 된다. 연륜이 깊은 시인이 봄풀 돋는 것을 어찌 예사로이 보겠는가. 그러하기에 이 시조의 종장 ‘정한 빛 그 광망을 떨며/ 부서지는/ 종이꽃’은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한분순 시인의 단시조 세 편은 모두 소설적인 제목들을 가지고 있고, 제목 자체만으로도 울림이 큰 시를 이룬다. 거기에다 밀도 높은 시적 장치들을 보여줌으로써 자기 앞의 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든다. 자중자애의 길을 스스로에게 묻고 또 되묻게 한다.
다음 작품들은 근간에 발간된 민병도 시인의 『칼의 노래』에 실려 있는 단시조 두 편이다. 한분순 시인의 작품과 일맥상통한다.
어둑어둑 날이 저문
운문사 공중전화
볼이 젖은 어린 스님
한 시간째 통화중이다
등 뒤엔
엿듣고 있던
별 하나가 글썽글썽
―민병도, 「어떤 통화」 전문
손에 손을 건널수록
꼬깃꼬깃 구겨져서
세상 잡내 다 묻힌 채
만신창이로 돌아와도
반갑게
껴안아주는,
껴안아서
품어주는
―민병도, 「지폐」 전문
「어떤 통화」는 단시조에서 종장이 어떻게 놓여야 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때는 ‘어둑어둑 날이 저문/ 운문사 공중전화’ 앞이다. 운문사라는 절의 이름을 ‘날이 저문’이 수식함으로써 특별한 울림을 안긴다. 이 시편의 주인공은 ‘볼이 젖은 어린 스님’이다. 그는 ‘한 시간째 통화중’이다. 그 긴 시간을 쭉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다. 별 하나다. 등 뒤에서 시종 통화 내용을 엿들으면서 별도 ‘글썽글썽’거린다. 어린 스님의 애절한 정황을 다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별은 곧 이 시의 화자의 다른 모습임을 생각하게 된다. 가까이 머물고 있던 관찰자인 시의 화자의 마음이 마침 떠오른 별로 환치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통화」의 이면에는 다 말 못할 서사적인 사연이 숨어 있다. 그 일에 대한 유추나 상상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이렇듯 단시조 안에는 언어로 다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행간과 행간 사이의 의미를 심도 있게 붙좇다 보면 단시조가 소우주를 이루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폐」 는 생뚱맞게 여길지는 모르겠으나 신약성서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미지’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방탕한 생활로 자신의 몫으로 가지고 간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게 된다. 막다른 지경에 몰린 그는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결심을 한다.
즉 창피함을 무릅쓰고 고향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이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작은아들과 그를 기쁘게 맞이하는 아버지와의 만남의 장면이 극적이다.
허물 많은 작은아들을 감싸 안고 있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과 아이러니하게도 지폐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읽힌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실컷 먹고자 했던 작은아들은 분명히 만신창이로 돌아왔지만, 그를 대하는 아버지는 극진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세상 잡내 다 묻힌 채/ 만신창이로 돌아’올지언정 따사로이 맞아주게 될 가족 혹은 어떤 공동체의 존재에 대해서다. 「지폐」 는 그런 관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단시조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상강 절 빈 언덕에
도열한 미루나무들 성근 볕살 쬐고 있다
남루의 금빛 갑주를 야윈 몸에 둘렀다
뜨겁던 그 만큼 배리의 차운 입김
대지는 돌아앉아도 불패의 기상으로
음울한 북국사자 앞에 맨몸으로 맞섰다
자성의 칼을 들고 응시하는 가슴 깊이
한 금 나이테를 야물게 더하기 위해
지근을 모두 버리는 저 결단을 보아라.
-리강룡, 「가을·미루나무」 전문
리강룡 시인의 「가을·미루나무」를 읽으며 자신을 다잡아야 함을 절감한다. 금년 한 해 우리나라는 ‘다사다난’이라는 수식어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아주 극심한 재난들을 겪었다. 참으로 참담한 일들과 연이어 맞닥뜨리면서 국가적으로는 대혼란을, 개인적으로는 처참한 정신적 붕괴를 온몸으로 경험하였다.
시의 화자는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상강 절 빈 언덕’에 서 있는 미루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잠시 사유에 잠긴다. 미루나무는 ‘성근 볕살’을 쬐면서 ‘남루의 금빛 갑주를 야윈 몸’에 두르고 있다. ‘뜨겁던 그 만큼 배리의 차운 입김’을 떠올리면서 ‘불패의 기상’으로 ‘음울한 북국사자’ 그 앞에서 맨몸으로 맞설 태세를 갖추고 섰다. 셋째 수에서
미루나무의 강인한 결단과 의지를 읽는다. 즉 ‘자성의 칼을 들고 응시하는 가슴 깊이/ 한 금 나이테를 야물게 더하기’ 위하여 ‘지근을 모두 버리는 저 결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곧 그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첫째, 둘째 수까지는 과거 진술의 종결을 보이다가 끝수에서 권유형인 ‘보아라.’라고 잔잔히 외치면서 이 장면 혹은 정황은 혼자 보고 말 일이 아니니 함께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심경을 가감 없이 표출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계절을 좇아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자연으로부터 깨닫고 배워야 할 점들이 많다. 오묘한 섭리와 순리의 삶 같은 것이다.
「가을·미루나무」에서 주목할 점은 ‘지근을 모두 버리는’이라는 표현이다. 이 구절이 독자에게 안겨주는 의미는 남다른 것이다. 특히 권력을 가진 한 지도자에게 이와 같은 결단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닐 것이다. 어디 지도자뿐이겠는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모든 이들에게 이러한 자세는 필요하다. 겨울을 맞고 있는 미루나무의 결단 앞에, 나아가서는 순응을 따르는 자연의 결행 앞에 우리는 다시금 옷깃을 여밀 일이다.
이 골 저 골 피돌기가 산천을 감아 돌다
복사뼈 어디쯤서 제 속을 다 보이며
직립의 폭포수 아래 꽃잎처럼 엉기는가
깊이는 고만해도 알고 보면 넉넉하듯
앙상한 두 다리가 가는 만큼 더 선명한
우리네 삶의 둔덕을 두 손 모아 받들고
터질 듯이 꿈틀거리는 생명의 저 몸부림
갈라진 논바닥에 더운 봄물 들어가듯
뻐꾸기 먼 울음소리 종아리에 찍히다
-이서원, 「하지정맥」 전문
「하지정맥」은 특이한 소재다. 미학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나 개성이 뚜렷하고 천착의 깊이가 예사롭지가 않다. 실험적인 작품은 아니지만 오랜 사유의 과정을 거쳐서 생산된 시편이기에 안정감 있고 밀도 높은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진지한 성찰 끝에 이 작품의 관주라고 할 셋째 수 종장 ‘뻐꾸기 먼 울음소리 종아리에 찍히다’라는 결구가 빚어진 것이라고 본다. 기실 ‘하지정맥’이라는 정황과 ‘뻐꾸기 먼 울음소리’는 하등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적 장치로 결합되자 깊은 상관성을 가지는 동일성의 시학을 유발하고 있다. 이 점은 오로지 시인의 유별난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미학적·언어 예술적 결실이 실감실정으로 독자의 뇌리에 각인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하지정맥」은 탁월하다.
이서원 시인의 또 다른 작품 「중년」에서 ‘단봉낙타 걸음으로 산 하나’를 이고 가는 장면이 첫수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 나라 중년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가슴에 뜨는 별들, 메마른 꿈의 한 쪽, 자존의 두 무릎, 드센 격랑 속, 쳐지는 어깨’와 같은 표현들이 세 수 안에서 연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 앞의 인생에 대한 진지한 책무감과 진정성을 진솔하게 육화하고 있다. 불안과 번민 중에도 ‘앞을 향해 갈 뿐 돌아갈 길’ 없는 ‘열사의 먼 먼 사막 언덕들’을 넘어가서 종내 ‘어느 녘 절정의 날’을 고대하는 열망을 드러낸다. 비교적 젊은 시인의 생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믿음이 간다. 다만 젊으므로 이젠 보다 더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시 세계로 나아가기를 주문하고 싶다.
3.
이 글의 제목 ‘벽시계를 나선 뻐꾹새의 시학’처럼 우리 시조도 일탈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실패할지언정 도발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담론으로 이 시대의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노래하면서 부단히 내적 실험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근간에 출간된 최영효 시인의 두 번째 시조집 『노다지라예』를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거듭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시조문단의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언어 운용과 더불어 당대의 애환을 치열하게 노래하고 있다. 하여 2004년에 발간된 그의 첫 번째 시조집 『무시로 저문 날에는 슬픔에도 기대어 서라』를 다시 면밀히 살펴보았다. 다소 지나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그의 시편들은 한 마디로 ‘태산준령’이다. 두 권의 시조집을 관통하는 시정신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고, ‘개성적인 다른 목소리’의 체현이 괄목상대로 다가온다.
시조문단의 중진인 한분순 시인이 이번에 보여준 단시조 세 편들은 실험정신에서 생산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진중하게 모색하고 있는 것을 조심스레 엿보게 된다. 이 점은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또 한 권의 시조선집인『저물 듯 오시는 이』를 출간하였다. 그간 시조문학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헌신으로 창작에 몰입하지 못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시인의 사명에 충실하고자 하는 면모를 읽는다. 작품 해설에서 ‘더 젊어진 사유와 감각으로 정형 양식으로서의 위의를 견고하게 지켜가면서도 그 안에 원숙하고도 역동적인 시선을 담아갈 것’으로 보고 있다. ‘한분순 시조시학’에 대한 적절한 평문이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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