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우술임 수산나(1803〜1846)
o 1803년 경기도 양주 출생. 양반.
o 인천에서 살다가 과부가 된 뒤 서울로 이주하여 장동 이간난의 집에서 거주함
◦ 1846년 우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
우술임(禹述任) 수산나는 경기도 양주의 비신자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만 열네 살 때 인천에 살던 교우에게 출가하였다. 그 덕택에 그녀는 비로소 천주 교리에 대해 알게 되었고,남편의 권유로 입교하여 신앙생 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0년 만인 1828년에 일어난 지역 박해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임신한 상태였으므로 가벼운 문초와 형벌만을 받고 는 2〜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끝에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된 뒤 그녀 는 당시에 받은 형벌로 후유증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 수산나는 1841년에 서울로 이주하였 다. 그리고 이때부터 신앙의 열의와 덕행으로 교우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 하였다. 그녀 는 기도와 묵상에 전념 했으며 , 남을 배려 하고 겸손과 인내의 덕을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교우 집을 전전하면서 하인 노릇 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자신의 일에 만족하였고, 천하게 취급을 받더라 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가진 것이 라고는 거친 옷밖에 없었지만 얼굴에는 언제나 기쁨이 흘렀다.106>
이 무렵에 수산나를 괴롭힌 것은 이전에 체포되어 순교할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후회뿐이었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끊임없이 뉘우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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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11,이 이사벨라의 증언. 이사벨라는 이간난 (아가타)의 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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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종종 자신의 죄를 통회하곤 하였다. 이후 그녀는 장동(현 종로구 청 운 동의 창의동)1°7)에 거주하던 이간난(아가타)의 집으로 가서 그녀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에는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고 이어 병오 박해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현석문 가롤로 회장은 돌우물골(현 중구 소 공동의 석정동) 신부댁에 있던 김임이(테레사)와 정철염(가타리나)을 가마에 태워 장동 아가타의 집을 거쳐 새로 마련한 사포서동(현 종로구 수송동) 김조이의 집으로 피신시켰다. 이때 아가타도 그들을 따라 사포 서동으로 갔고, 따라서 장동 집에는 수산나 혼자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포교들이 그들의 종적을 캐고 있던 터였다. 결국 포교들은 가마꾼들을 찾아냈고,그들을 앞세우고 장동 아타가의 집으로 들이닥쳐 혼자 집을 보고 있던 우술임 수산나를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즉시 사포서동으로 가서 아가타 • 테레사 • 가타리나와 가롤로, 그리고 김조이를 모두 체포했으니 , 그때가 7월 15일(윤5월 22일)이었다.108)
수산나와 동료 5명은 모두 우포도청109>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수산나는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주뢰와 곤장 등 갖은 혹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약해지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신앙을 굳건히 지켰으며, 옥에 갇혀서는 인내와 애덕과 겸손의 모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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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12, 이 이사벨라의 증언. 김 프란치스코는 이 간난의 집 이 ‘우대 잣골’에 있었다고 하는데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81,김 프란치스코 증언), 여기에서 ‘우대’는 청운동에 있던 마을이고, ‘잣골’ 도 청운동의 자핫골을 말한다.
108)『일성록』헌종 12년(1846) 5월 22 • 23일 :『기해 • 병오 재판록』, 김 프 란치스코의 증언. 테레사와 동료들이 체포된 날짜를 음력 윤5월 16일(양 력 7월 9일)로 증언한 기록도 있다(『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12, 이 이 사벨라의 증언).
109)『일성록』헌종 12년 8월 1일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81, 김 프란치 스코의 증언. 반면에 김 가타리나는 수산나와 동료들이 좌포도청에 갇혔 다고 증언하였다(『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9, 김 가타리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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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었다.11。》그러다가 조정의 명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포도청에서 교 수형으로 순교했으니, 그때가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 43세였다.
순교 후 포도청에서는 수산나와 동료들의 시신을 시구문 즉 광희문 밖 에 버렸다. 이에 몇몇 교우들이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수산나의 시 신과 정철염 가타리나의 시신을 찾아 하나의 광중에 묻었다고 한다.110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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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옥에 갇힌 뒤 이간난과 우술임이 ‘포교들에게 사포서동의 새 집을 가르쳐 주었다.' 는 이유로 다투었으나,현석문과 김임이 등의 권면으로 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한다(『기해 • 병오 재판록』,김 가타리나의 증언).
111)『순교자 약전』, 22〜23쪽 :『일성록』헌종 12년 7월 29일, 8월 1일 : 『기해 • 병오 재판록』, 김 가타리나의 증언 및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페레올 주교는 순교 당시 수산나의 나이가 43세 (음력 )였다고 기록하였다(〈페 레올 주교의 보고서〉, 9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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