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이 진짜 민간인 학살을 했나요?
네이버 지식인에 질문이 올라왔다. ‘한국군이 진짜 민간인 학살을 했나요?’ ‘화석바이크 연구소’님의 답변이 달렸다. ‘아닙니다. 한국군 사령부는 강간이나 민간인 살해를 엄격히 금지했고 이를 위반할 경우는 매우 엄중한 처벌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답변에 6명의 사람들이 눈에 하트가 달린 표정의 좋아요를 눌러 놓았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설명을 한 줄만이라도 더했다면 이런 질문은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휴,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아 다행이다. 사과는 하지 않아도 되겠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은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 교전 상황이 아닌 마을에서 무고한 노인, 여자, 어린이가 죽었다. 기어다니는채로 죽은 아기, 땅굴에 숨어 앉아있는채로 죽은 엄마와 조카, 밥을 먹는 중에 밥그릇을 든 채로 죽은 아빠, 젖을 먹이다가 죽은 외조카. 마을 사람들의 가족이 죽고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한국 참전군에게 ‘민간인을 보호하라’라는 명령은 주어지지 않았다. 베트남의 마을 곳곳에는 증오비와 위령비가 세워졌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국가마다 다르게 쓰여지고 전승된다. 학살로부터 약 50년의 세월이 지난 2022년 현재, 우리는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까?
1960년에 발발한 베트남 전쟁은 1975년까지 이어진다. 한국은 1964년 베트남에 비전투 부대를 파견하고 1973년까지 군대를 파견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지역에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이야기한다. 내 앞에서 내 부모가, 자식이, 형제가 죽었다고 말이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그날의 기억을 꺼내어 막힘없이 이야기한다. 그들이 내뱉는 문장마다 진실이 서려 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어디서 몇 시에 어떤 사람들이 왔는지, 무엇으로 아이, 여자, 노인을 죽였는지를 보고 듣고 말했다. 한꺼번에 몇 명이 동시에 죽었는지를 기억하며, 자신은 살려달라고 싹싹 빌어서 살았다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고 기어다니는 네 살짜리 아이는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진실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존재방식을 찾지요. 진실의 조각들은, 삶 속에, 사람 속에, 자연 속에 존재합니다. 이 편린들을 통해 진실은 드러나지요.’
김현아,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199쪽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베트남 전쟁 도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의 교과서는 정확한 서술을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미국으로부터 받은 경제적 지원과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외화벌이, 한국 참전 군인의 고엽제 피해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빠짐없이 서술하고 있는 반면 민간인 학살에 대한 서술은 대체로 소극적이다.
2020년 출판된 미래엔 한국사(한철호 외)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국군의 전력이 증강되고, 건설업체의 해외 진출과 인력 수출 등이 활발해져 경제 성장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희생되었다. 또한 일부 한국군에 의해 많은 베트남 양민이 희생되기도 하였으며, 한국인 혼혈인(라이따이한)이 남겨졌다.” 이 서술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경제 성장과 한국 군인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 이후에 덧붙이듯이 양민 희생을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해냄에듀에서 2020년에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에서는 그나마 2018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 평화 법정’이 열린 사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발 나아갔다. 하지만 해냄에듀를 포함해 대부분의 교과서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구체적인 민간인 참상의 정도나 수를 헤아리지는 않는다. 그러니 베트남 푹빈에서 1966년에 일어난 베트콩 소탕작전인 ‘용안작전’으로 인해 마을의 민간인이 몇 명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한국 교과서는 불도저 밀 듯 불을 지르고 총을 쏴댄 초토화 작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군에 의해 발생된 여러 베트남 민간인 학살 중 하나인 용안작전은 청룡여단 2, 3, 1 대대가 투입된 민간인 마을 초토화 작전이다. 19일간 선띤현의 민간인을 ‘보이는 대로 다 갈겨버리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한국군은 꾸앙응아이성 선띤현의 민간인을 학살하게 되는데, 그곳에는 주로 여자, 아이, 노인이 남아 있었다. 대체로 젊은 남자들은 군인으로 남과 북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들은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무장한 이도 없었고 누구도 한국군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을 ‘민간인 학살’이 아닌 전쟁 중의 피치 못할 ‘민간인 피해’로 명명하는 것이 타당할까? 조국을 위해 죽은 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 민간인의 유족에게는 베트남 정부의 보조금이 지원되지도 않았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사람들은 오직 전쟁과 관련하여 활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으로의 파병은 미국의 강요나 부탁에 의한 결정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미국에 먼저 파병 신청을 하였다. 이승만 정부 때에도 이미 프랑스 군대가 인도차이나 공산군과 투쟁할 때에 파병을 제의한 적이 있었다. 이를 이어 정당성 없이 군사쿠데타로 장악한 정권에 정통성을 갖기 위해 미국의 확고한 원조가 필요했던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 정변 후 케네디와의 회담에서 베트남 참전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군권을 장악한 1961년 5월부터 합법적인 정부가 된 1963년 12월까지 정권에 대한 역쿠데타 시도는 계속되었고, 미국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경제 자금과 주한미군 원조 획득 등을 고려하여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으로의 파병을 택한다.
파병 결정의 과정을 살펴볼 때 박정희 정부의 결정은 어쩔 수 없는 도움을 준 것이라기보다 적극적인 정치적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교과서의 서술과 사뭇 다른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2020년 출판된 미래엔 고등학교 한국사에는 다음과 같이 파병 과정을 서술한다.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자 미국은 한국에 베트남 파병을 요청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6.25 전쟁을 도와준 나라에 보답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요청에 응하였다.” 이러한 짧은 서술 안에는 파병 결정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박정희 정부가 요청을 수용한 듯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2020년 출판된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한국사에는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과 함께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교과서의 서술은 베트남 민간인의 피해와 고통을 외면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교과서의 서술은 한국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한국의 시선에서만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민간인의 피해는 희미해진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교과서 서술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2013년, 고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 후 ‘민간인 학살’이라는 표현에 대해 보수 언론과 베트남 참전 전우회는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표현에 대해 직권으로 수정을 요구하게 된다. 교학사를 제외한 모든 출판사의 집필자들은 정부의 수정 요구를 거부하지만 이때 집필자와 출판사 사이 갈등이 생긴다. 출판사들이 집필자와의 상의도 없이 자체적으로 글을 수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집필자들은 교육부와 집단 소송을 이어가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며 교과서는 ‘학살’이라는 표현에 대해 직접적인 서술을 꺼리게 되었으며 내부의 검열을 거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군의 ‘밀라이 학살 사건’의 경우 사진기자와 통역사까지 대동하여 계획적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진행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은 끔찍한 학살이 일어난 손미마을 지역에 밀라이 박물관을 짓고 과거를 정확히 기억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권의 변화에 따라 과거에는 사과를 했다가도 이제 와서는 다시 책임을 부인하는 실정이다. 2022년 베트남에서 온 응우옌티탄과 응우옌득쩌이는 지난 8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걸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인 학살 의혹 국가배상소송 8차 변론기일에서 “피해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라며 책임을 전면 부인하였다. 응우옌득쩌이는 공판이 끝난 후 "한국에 배상을 요구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한국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을 진심으로 위로해주면 된다"고 하였다.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책임 회피를 멈추고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다. 베트남에 병원이나 학교를 지을 것이 아니라 위령비를 함께 짓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일이다. 교과서를 개정하고 역사를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온전히 스스로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한 개인이 내리는 판단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짧은 기사 한 줄, 주변 사람의 말 몇 마디, 대중매체에 나오는 몇 분짜리 영상과 교과서 한 문단이 쌓이고 쌓이는 것이다. 그 작은 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알고 있던 정보에 의문을 품을 때 비로소 커다란 폭력과 억압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