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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高善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많은 철학자들이 다루어 온 중요한 주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선을 행복이라고 말했다. 행복을 인간이 살아가면서 도달해야 할 최고의 목적으로 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좀 거리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개인의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활동을 매우 중시했는데, 여기서 영혼의 활동이란 도덕을 따르는 최고의 정신활동을 말한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행복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 기독교 신학이 철학보다 위에 있었던 당시 최고선이란 성경에 나오는 신을 가리키며, 신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라고 가르쳤다.
반면 칸트는 최고선이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개인의 행복이나 쾌락은 최고선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개인의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중적이고 유한한 존재다. 자연법칙에 따라 본능적으로 살기도 하지만, 이성을 가지고 스스로 의지를 세우고 판단해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지만, 즐거움이나 쾌락은 주변환경에 따라 수시로 변하므로 최고선이 될 수 없다. 최고선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목적과 이상이어야 한다.
행복은 어떤 행위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사람은 중간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예컨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에 도전해 성공하면 큰 성취감을 얻는데, 성취감을 통해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행복에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그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인간 스스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최고선이란 도덕을 통해 실현하는 최고의 가치다. 최고선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 최고선은 도덕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감각의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켜 주고,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연법칙에만 따르지 않고 더 나은 도덕적인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이 최고선의 목적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떤 목적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특성이 있다. 만약 달성할 수 없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최고선은 선한 의지를 전제로 하는 실천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최고선을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선한 것을 실현하려는 善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칸트는 선한 일을 하려는 의지를 실천이성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실천이성을 통해서 보편적인 법칙과 일치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이 세계가 바로 목적의 나라다. 목적의 나라는 각각의 이성적 존재들이 정언명령에 따라서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지성의 세계다.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상상의 나라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는 나라다.
인간은 목적이 있을 때 자연법칙을 따르려는 본성을 극복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훌륭한 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자연법칙은 나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일을 숭고하게 여길 수 있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서 이념을 가능한 현실로 만드는 타고난 능력이 있어. 그 능력을 바탕으로 어떤 목표를 정하면 실천계획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긴다.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실천을 해서 실제행동으로 보여 줘야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가치있는 이념이라도 생각에 그친다면 그 또한 진정한 의미의 이념이라고 할 수 없다. 이념을 실천에 옮겼을 때라야 비로소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실천이성은 최고선의 세계를 목적으로 삼았을 때 현실을 개혁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최고선은 실천이성이 바라는 가장 현실적인 목적이다.
최고선은 덕과 행복을 종합한 이념의 세계다. 최고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의무와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칸트는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행복을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본성에 따라서 행복을 추구하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목적을 세우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있으며, 선한 일을 행동에 옮기려는 의지와 능력 또한 있다. 그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도덕법칙을 완성하고, 더불어 최상의 행복도 함께 얻을 때 인간은 최고선을 이룰 수 있다.
최고선은 도덕과 행복이 결합된 세계로, 행복은 도덕의 결과로 나타난다. 도덕법칙을 실현해 갈수록 행복은 도덕과 결합하고 최고선이라고 하는 궁극적 목적에 다다르게 된다. 인간의 행복은 도덕적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 도덕적 노력에 의해 이성의 목적과 자연의 목적이 필연적으로 결합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행복이 자연스럽게 실현된다.
결론적으로 칸트가 주장하는 최고선이란 도덕법칙을 실현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칸트는 최상의 도덕과 행복이 일치하고 정확하게 비례할 때 최고선이 실현된다고 했다. 최고선은 도덕과 자연을 조화시켜 최고의 통일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행복하지만 도덕이 없는 세계는 최고선이 아니다. 나쁜 수단으로 행복을 얻거나, 올바르지 못한 것을 목적으로 삼아 행복을 바란다면 그것을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해서 행복을 느낀다면 이것 또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둘 다 최고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도덕법칙에 따라 살지만 행복이 없는 세계도 최고선이라 할 수 없다. 도덕법칙을 따르기만 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삶은 공허할 것이다. 완벽하게 도덕적인 세계에 살아도 거기에 삶의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다면 도덕법칙은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최고선의 이념은 희망의 세계다. 이념은 실천이성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사람의 경험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현실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며, 어떤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를 알려 준다. 즉 경험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이론을 세우면 이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칸트는 이들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이념은 실천을 통해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고 했다. 최고선의 이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실천의 방향을 정하고 행동하면 최고선의 이념이 실제로 실현될 수 있다고 했다.
최고선은 우리에게 희망의 세계다. 칸트는 최고선을 통해 윤리적인 공동체를 이루기를 열망했고, 최고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인간은 불완전하며 유한한 존재이므로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최고선을 실현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최고선을 실현할 수 없다면 도덕법칙은 쓸모가 없어지고, 사람들은 도덕법칙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칸트에게 전능한 신의 존재는 자신의 도덕철학을 완성시키는 데 꼭 필요한 개념이다. 그는 최고선의 이념은 인간의 인격이 발달하고 역사가 진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며, 최고선의 목적이 자연과 도덕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므로 신의 존재가 꼭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최고선이 반드시 실현되려면 인간의 영혼은 불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인간은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면서, 신은 수단으로 대해도 되나?
최고선을 추구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고, 목적을 정할 수 있으며, 자신이 정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다. 지구에서 이러한 능력을 지닌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 이러한 이유로 칸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 이유가 타당한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칸트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인간을 설명하려고 했다.
1)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칸트는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다 보면 인간의 특징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 마지막 질문인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최고선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희망하는 세계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희망한다'고 할 때 이 말은 다음 질문으로 바꿔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희망해야 옳은가? 우리는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행복의 필요조건으로서의 희망을 묻고 있다. 이것은 권리로서의 희망을 뜻한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우리의 권리일 수도 있음을 알려 준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해야 옳은가?'라는 질문은 희망의 도덕적인 면을 묻고 있다. 우리가 어떤 조건이나 제약 없이 모든 것을 갖기를 희망한다면 그 희망은 도덕법칙과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그릇된 희망을 갖지 않고, 올바른 희망을 자기 내면에 세울 때 우리는 희망에 대한 도덕적 선의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질문은 희망에 대한 도덕적 의무론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도덕적 의무란 윤리적으로 권장하지만, 강제하지는 않는 의무를 말한다. 희망하는 것이 윤리적 선함에 비추어 볼 때 부끄럽거나 후회되지 않도록 스스로 반성하고, 꼭 필요한 도덕적 요소를 의무적으로 세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은 희망을 가지고 실천적인 행위를 할 때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최고선은 자유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이 세계에 실현할 수 있는 최고선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이 말은 '우리는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이기도 하다.
- 자유는 도덕법칙의 근거다.
자유는 칸트의 철학에서 정말 중요한 개념이다. 칸트는 자유의 개념을 '인간은 이성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다'라는 말의 근거로 삼았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생각의 중심에는 사람의 도덕성이 있고, 도덕성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사람은 도덕법칙이 아니었다면 잘 알지 못했을 자유를 자신 안에서 스스로 인식한다." - 칸트.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1) 사람의 주체적 자유는 사고의 자발성에서 시작한다.
2) 실천의 자유는 당위를 포함한다.
3) 실천적 자유의 본질은 선택의 자유다.
4) 자유는 의무동기에 따른다.
5) 자유롭기 때문에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다.
6) 자유는 하나의 요청이며 도덕법의 근거다.
1) 사람의 주체적 자유는 사고의 자발성에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생각한다. 사고의 주체자로서 자발적으로 정신활동을 하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사고활동을 한다. 칸트는 이러한 사고의 자발성을 자유의 특징으로 보았다.
순수한 사고의 주체자는 경험을 초월한 초감성적 존재자이며 예지자라고 할 수 있다. 사고의 자발성을 특징으로 한 자유는 의지의 자유와 실천의 자유의 뿌리가 된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음 단계의 일이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 전부를 실천에 옮기지는 않는다. 모든 조건을 검토해서 행동으로 옮겨야 할 타당한 근거를 확실하게 찾았을 때 비로소 실천에 옮긴다.
사고의 자유와 실천의 자유는 둘 다 사고의 자발성을 뿌리로 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칸트는 우리가 사고의 자유에 머물지 않고, 실천의 자유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생각만 하지 말고 실행에 옮기라는 말이다.
2) 실천의 자유는 당위를 포함한다. 當爲란 마땅히 해야 하거나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당위를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의미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칸트는 당위를 자각하는 것을 의무의식이라 부르고, 실천의 자유에 당위의 뜻도 포함시켰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의욕이 있어야 한다. 당위는 어떤 행동을 하기에 앞서 자신의 의욕이나 의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돌아보게 한다. 즉 자신이 바라는 목표와 기준이 정당한지를 생각해보도록 한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지나 의욕이 감정에 치우친 건 아닌지 먼저 생각한 후에 실천하기 때문이다.
당위는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의무의식이기 때문에, 당위가 내리는 명령은 우리가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과는 다르다. 실천적인 자유의지로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천의 자유는 당위를 포함해야 한다.
살다 보면 어떤 일을 후회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가 있다. 인간이 도덕법칙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법칙에 구속되어 있는 사람은 당위를 자각하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실천의 자유를 갖고 있다는 반증이다.
인간이 체험하고 수행하는 자유는 오로지 실천의 자유 뿐이다. 자유에 기초하거나 자유로 가능한 것, 자유의지에 관계하는 것은 모두 실천적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유가 실천이성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천의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또 다른 개념을 도입했는데, 바로 초월론적 자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우주의 탄생비밀을 정확하게 알거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주가 탄생한 원리를 외부에서 찾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그중 초월론적 자유가 자연현상을 탄생시킨 제1원인이라고 보았다.
초월론적 자유는 사람들의 경험적 사건을 초월한다. 또한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시간 속에 있는 모든 사건을 시작하게 하는 근원적인 활동능력이다. 칸트 이전의 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주가 탄생한 원인을 신에게서 찾았다. 그러나 칸트는 기존의 이론을 뒤엎고 초월론적 자유라는 개념을 내세워 새로운 우주관을 펼쳤다.
칸트는 초월론적 자유가 실천적 자유의 근거라고 믿고, 초월론적 자유가 없다면 자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을 도덕세계의 주체로 변화시켰다. 인간은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유일한 존재이고, 이러한 자유는 초월론적 자유의 자발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3) 실천적 자유의 본질은 선택의 자유다. 실천적 자유는 선택의 자유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무엇을 실천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한다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결정한다는 뜻이다. 어떤 일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율적인 존재로서 행동한다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어 생각했다.
소극적 자유 - 일반적으로 말하는 '~로부터의 자유'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유다.
적극적 자유 -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을 위한 자유'를 적극적 자유, 자율이라 한다.
칸트는 자유란 자연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무를 따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곧 자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율은 곧 선택의 자유를 의미한다. 또한 선택의 자유는 실천적 자유의 본질이다.
감각이 중심이 되는 경험의 세계에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 경험의 세계는 인과적 법칙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자율은 단순히 우리가 자신의 욕구나 어떤 것에 끌리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욕구란 이성적으로 사고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이나 충동에 따라 선택하는 것은 자율이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우리가 공중에 던진 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해서 그것을 돌의 자유라고 말하지 않는다. 돌은 중력에 의해 땅으로 떨어졌을 뿐이다. 자신의 의지로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다. 칸트는 돌이 땅에 떨어지듯이 자연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 즉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을 끌림동기라고 했는데, 끌림동기는 타율에 의해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4) 자유는 의무동기에 따른다. 끌림동기와 반대되는 개념은 이성의 명령으로 생기는 의무동기다. 의무동기는 이기심이나 순간적인 욕망 등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도덕적으로 올바른 이유에서 생긴다. 칸트는 실천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오직 도덕법칙 뿐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이성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만든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목적의 주체인 이성적인 존재가 모든 행동원리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는데, 오직 이성적인 존재만이 자율의지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율의지의 주체가 될 때 자신을 감각적인 존재보다 더 높은 존재로 만들 수 있고, 완전히 독립적이고 이상적인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사람은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자율의지의 주체인 우리는 실천이성을 따르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 자연상황이나 개인의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5) 자유롭기 때문에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다. 자유란 인간이 스스로 목표를 삼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연법칙을 만들 수는 없지만 자유롭게 행동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자유인은 자연상태나 인간의 성향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선을 추구할 수 있다. 만약 자유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도덕적 행동을 할 수 없고, 도덕법칙과 가치를 실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유를 실천하는 능력은 이성에서 나온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덕법칙을 지키려는 의무감을 가지며,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가치있는 이념들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런 이성적 존재를 다른 말로 예지적 존재라고 했다. 예지적 존재는 자연적인 충동이나 개인의 경험을 경계하고 이성으로 이념들을 따져 보며, 실천할 수 있도록 규칙을 정하고, 규칙에 따르도록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사람은 스스로 정한 도덕법칙의 주체로서 현실을 변화시키고 최고의 도덕성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로 나아간다.
6) 자유는 하나의 요청이며 도덕법의 근거다. 칸트의 비판철학의 핵심은 자유다. 그래서 칸트는 '실천이성은 자유를 요청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자유라는 개념은 증명하기 어렵지만, 자유라는 개념이 없다면 칸트의 정언명령과 실천이성비판 철학은 근거를 잃게 된다. 칸트가 자유를 정언명령과 실천이성의 전제로 삼은 까닭은 자유를 이성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를 요청한다'는 말은 자유가 개인의 경험에 좌우되지 않고 순수한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성은 자신의 자발적 행동에 의해서 자유에 도달한다. 자유는 시간과 공간에 구속되지 않으며, 이성 자신의 원리이자 이성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자유는 경험으로 추리할 수도 없고 직접 느끼거나 파악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유는 실천적인 행위와 반드시 연관될 수 밖에 없다.
자유는 어떤 행위나 실천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칸트는 자유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 도덕법칙을 내세웠다. 도덕법칙과 정언명령은 '나는 이것을 해야만 한다'라는 실천명제에 바탕을 두고 있고, 우리는 개인의 의지를 뒤로 하고 실천명제에 조건없이 따라야 한다. 의지가 당위와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다.
예컨대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내가 그를 득실을 따지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이성적 자유의 판단에 의해서이다. 아무도 그렇게 판단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이성의 명령에 따라 생각하고 하나의 행동규칙으로 정해 실천하는 것 뿐이다. 자유가 도덕법칙의 근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자유는 인간이성의 모든 체계를 만들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 순수실천이성의 방법론
순수실천이성의 방법이 중요한 이유. 우리는 순수실천이성의 원칙들을 머릿속으로 이해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원칙들을 행동으로 보여 줄 때라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 학문을 배운다는 건 원칙에 합당한 방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칸트의 실천이성에 관한 이론들도 마찬가지다. 방법을 이해하고 실천과정을 체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는 이를 순수실천이성의 원칙들이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입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이론으로 설명한 실천이성을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론적으로 아무리 옳고 좋아 보여도 그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강력한 동기가 필요하다.
도덕법칙은 도덕적 문답법으로 배운다. "덕은 가르칠 수 있고, 가르쳐야 한다." - 칸트.
칸트는 특히 청소년 도덕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도덕교육을 주입식으로 달달 암기해서 가르치는 방법에 반대하고, 반드시 실제 사례들과 연계해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칸트는 이러한 교육방식을 도덕적 문답법이라고 불렀다. 청소년의 도덕교육으로 칸트가 특히 추천한 방법은 위인의 전기를 읽는 것이다. 위인전에는 구체적인 실천사례들이 많아 교육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한 행위들을 비교해 가르치면 학생들이 구체적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런 행위들이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도덕교육을 할 때 학생에게 함부로 칭찬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경계했다. 교사는 학생이 순수한 동기로 선행을 하면 칭찬하고, 순수하지 않은 동기로 선행을 하면 비판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반복학습을 한 학생은 정직한 행동을 하게 된다고 믿었다.
항상 실증적 교육을 강조한 칸트는 실제 사례를 통해서 청소년의 도덕적 판단력을 키우자고 주장했다. 그는 교육이 이룰 수 없는 소망이나 완전한 것을 동경하다 끝마치지 않기를 바랬다. 도덕교육의 실질적인 효과는 없고, 고작 소설에 나오는 영웅만 만들어 낼까 봐 걱정한 것이다.
칸트는 학자들이 장황한 글로 영웅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느껴야 할 책임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는 점을 비판했다. 몇 사람의 영웅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의무를 행하면서 도덕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고결한 행위들을 지나치게 강조해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고, 모든 것에 순수한 마음으로 도덕적 의무감을 갖게 하고, 자신의 눈으로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는 의식에서 나오는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칸트.
순수한 윤리적 태도란 어떤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 칸트가 제안한 방법은, 교사가 어린 학생에게 역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들려주고, 학생이 교사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칸트가 사례로 든 역사적 사건은 헨리8세와 앤 불린의 이야기다.
헨리8세는 왕비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야망이 컸던 앤 불린은 헨리8세의 유횩을 뿌리치고, 자신과 정식으로 결혼해 왕비로 삼으면 왕의 곁에 있겠다고 했다. 앤 불린의 요구에 헨리8세는 즉각 결혼을 약속했다. 헨리8세는 왕비 캐서린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캐서린과 로마교회가 종교적 이유를 들어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헨리8세는 영국교회를 로마카톨릭에서 분리시켜 스스로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고, 앤 불린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임신한 상태였던 앤 불린은 그 해에 소원대로 영국의 왕비 즉위식을 올리고, 몇 달 후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그러나 아들을 기대했던 헨리8세는 실망이 컸다. 앤 불린이 잇달아 유산을 하면서 점차 마음이 멀어진 헨리8세는 앤 불린의 시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왕이 돌아서면서 앤 불린은 온갖 죄를 뒤집어쓰고 런던탑에 갇혔다. 그녀의 죄목에는 마법으로 왕을 유혹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시중에는 모든 일의 배후에 앤 불린을 쫓아내려는 헨리8세가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결국 두 차례의 재판 끝에 앤 불린은 사형을 판결받았다. 사형 당일 칼날 앞에서 앤 불린은 왕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충성을 다해 섬겨 달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칸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덕심 깊은 사람은 처음에는 앤 불린을 중상 모략하는 사람들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도덕심 깊은 사람은 값진 보물과 높은 지위도 거절하고 도덕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칸트는 여기서 학생들이 도덕심 깊은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고, 생각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라고 한다.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까지 포기하면서 옳지 않은 일에 가담하지 않은 도덕심 깊은 사람을 보면서 학생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다음에 교사는 좀더 극적인 이야기를 준비해 학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게 한다. 도덕심이 깊은 사람은 온갖 방법으로 위협을 당한다. 왕의 편에 선 권력자들이 헐뜯기 시작하고, 주변의 친구들도 서서히 멀어진다. 심지어 친척들은 상속권을 빼앗고, 가족들은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심 깊은 사람은 권력자들에 당당히 맞서서 자신의 뜻을 지키며 끝까지 앤 불린의 무죄를 주장한다.
여기까지 들은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칸트는 학생들이 도덕심 깊은 사람의 행동에 공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공감에서 경탄으로, 경탄에서 경이로, 마침내 최대의 경의를 표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자신도 도덕심 깊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열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은 후 자신도 이야기 속의 도덕심 깊은 사람처럼 되겠다고 결심한 학생들은 바로 도덕적인 순수함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도덕법칙을 지키는 이유는 법칙을 지키기 쉬워서가 아니다.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행복이나 보상이 따르지 않아도 도덕적인 의무의 신성함으로 법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학생들이 알아주기 바랬다. 교육자가 어린이에게 도덕성을 교육할 때 고결한 행위를 강조하거나 물질적인 보상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도덕교육의 근본목적에 어긋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도덕적 문답은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도록 한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문답법은 교사가 주로 혼자 설명하는 수업과는 다르다. 서로 묻고 대답하는 대화식 학습법도 아니다. 인간은 훌륭한 인물을 모방한다고 도덕법칙을 바로 자신의 마음에 새길 수도 없고, 도덕법칙을 저절로 얻을 수도 없다. 인간은 도덕법칙을 처음부터 갖추고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법칙은 실천이성의 자율성에서 비롯된다.
칸트가 강조한 도덕적 문답법의 핵심은 이성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성을 토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도덕법칙의 타당성을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실천할 때, 도덕법칙은 우리 안에 자리잡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도덕은 실천이성이다'리고 강조했다.
칸트에 따르면 행동이 나쁜 학생에게 다른 선한 학생을 가리키면서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방법이다. 오히려 행동이 좋지 않은 학생의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고 했다. 선한 학생은 증오의 대상이 되기 쉽고, 비교당한 문제학생은 더욱 나쁜 학생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교육방법은 다른 사람을 본보기로 삼지 않고, 순수한 동기로 도덕적 의무를 다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교사는 문제학생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말고, 선한 학생이 도덕법칙을 왜, 어떻게, 얼마나 지켰느냐 하는 것을 문제학생에게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즉 선한 학생을 다른 학생의 본보기나 경고를 하기 위한 도구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 문답법을 진행할 때 학생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이성에 물어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칸트가 생각한 도덕교육의 문답법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인생에서 너의 가장 큰 바람이 뭐니? 언제나 네가 소망하고 네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겠지? 사람들은 그러한 상태를 뭐라고 할까? 사람들은 그러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불러. 행복은 나눌수록 더욱 행복하지. 그런데 너라면 아주 게으른 사람에게 부드러운 방석을 주고 놀고 먹으며 인생을 헛되게 보내게 하겠니? 술주정뱅이에게 술이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술을 주겠니? 사기꾼에게 화술을 가르쳐 타인들을 속이도록 하겠니? 폭력배에게 강한 주먹과 배짱을 주어 타인을 억누르도록 하겠니? 지금 내가 말하는 것들은 그 사람들이 각자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고 소망하는 상황이란다.
하지만 너 자신의 행복을 얻으려고 할 때는 주저하지 않겠지? 이때 너는 자신이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나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 거야. 네가 오직 행복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애착이라 할 수 있어. 너의 애착을 제한시키는 것이 이성의 역할이야. 네가 자신의 이성을 통해 자기의 성향을 제한하는 것이 네 자유의지야. 행복에 대한 개인의 애착은 이성을 통해 제한할 수 있고,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뜻이지.
이성이 말하는 대로 도덕법칙에 맞게 행위를 하는 것을 무엇이라 할까? 의무라고 해. 인간이 자신의 의무를 준수하는 것은 행복을 누릴 품격의 보편적이고 유일한 조건이다. 행복을 누릴 품격을 갖추는 것과 의무를 준수하는 것은 같다고 할 수 있어..."
칸트는 교사의 지시나 명령으로는 학생이 도덕법칙을 학습하고 실천에 옮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문답법을 통해 학생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림으로써 도덕법칙의 의미를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 것이다.
도덕적 의무를 아는 것은 영혼을 강하게 한다. "도덕적 의무를 아는 것이 본인은 물론 타인에게 손해나 이익을 끼쳐서는 안 된다." - 칸트.
도덕적 의무를 아는 일은 전적으로 순수하게 윤리적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 손해나 이익을 얻는 것은 다만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만약 우리의 행위에서 덕의 존엄이 없다면, 의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오직 훈계하기 위한 지시사항만 남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격의 고귀함은 사라지고 개개인이 상품처럼 취급될 것이다.
문답법은 사람의 연령,성별,신분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지극히 높은 곳에 있는 경탄의 대상으로 바라볼 것이다.
칸트는 도덕교육의 문답법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문답법으로 도덕교육을 훌륭하게 마쳤다면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도덕법칙에 대한 의무감을 잃지 않게 된다.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고난은 물론이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처해도 도덕법칙에 대한 의무감을 버리지 않는다."
칸트는 사람들이 스스로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네 안에 있는 무엇이 자연본성과 싸우고, 자연본성이 너의 윤리적 원칙들과 충돌하게 되더라도, 그것들을 이겨낼 수 것인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완전하게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생겨나는 이 물음을 통해서 영혼은 괴롭힘을 당할 테고, 그럴수록 더 강하게 자기의무를 신성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도덕법칙에 대한 의무를 인식하게 하고, 의무의 신성함을 깨닫게 해준다." 도덕규칙을 훈련하고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도덕규칙을 훈련하고 실천할 때 우리 마음은 두 가지 상태로 나뉠 것이다.
1)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나타나는 유쾌한 마음상태이고,
2) 도덕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을 만났을 때 이들과 투쟁하려는 마음상태다.
투쟁하려는 마음을 누르기 위해서는 도덕은 그 힘을 모아야 하고, 살면서 누리는 인생의 많은 기쁨들을 희생시켜야만 한다. 기쁨을 잃은 사람은 때때로 마음이 우울해지거나 투덜거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일에 기쁨을 느끼지 못한 채 한낱 노동으로 여긴다면, 자신의 의무를 따르는 일에 아무런 가치를 찾지 못할 것이다.
도덕법칙을 주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 도덕훈련을 하면서 겪은 어려움과 고난을 견뎌야 하고, 헛된 기쁨과 즐거움을 좇지 말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불편함에 습관을 들이고, 안락함만을 추구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 칸트와 계몽주의
칸트 철학에서 계몽주의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주제다. 뉴턴이 기초를 다진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영국을 시작으로 프랑스로 전해졌고, 이후 프랑스에서 계몽주의가 크게 발전했으며,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계몽주의는 당시 가장 진보적인 사상운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7~18세기 유럽과 미국의 정치,사회,철학,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계몽이란 미신이나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을 일깨워서 새롭고 바른 지식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또한 무지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이성의 빛을 비춰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사상을 깨닫게 한다는 뜻도 있다. 무지는 어둠, 이성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계몽을 뜻하는 프랑스어 뤼미에르(Lumieres), 영어 Enlightenment, 독일어 아우프클뢰룽(Aufklaerung)에는 '빛, 빛을 비추다, 투명하게 하다'의 의미가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에게 이성의 빛을 비춤으로써 무지한 과거에서 벗어나 진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성을 강화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면 인류의 역사는 더욱 발전하고, 밝고 행복한 미래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몽주의의 핵심은 그동안 당연하게 믿고 받아들였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是非를 따져 비판적으로 사고해보자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전통,관습,도덕을 습관적,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이런 태도는 인류역사가 발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상식,경험,과학지식을 중요하게 여기며, 개인의 자유, 평등한 권리, 평등한 교육을 요구한다.
그런데 당시 칸트의 조국인 독일은 계몽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독일은 300여 개의 작은 공국들로 분열되어 있었고,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프로이센조차 사회적,문화적으로 유럽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도 점차 유럽의 사상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칸트가 있었다. 사실 독일의 계몽주의는 칸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칼 포퍼와 같은 현대철학자들이 칸트를 최고의 계몽철학자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1783년 <월간 베를린>에 실린 <교회를 거치지 않은 결혼을 비판하면서 시민 결혼이라는 관념을 만든 계몽이란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글에 대해, 칸트는 답변이라고 할 수 있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는 논문을 써서 1784년 <월간 베를린>에 발표했다. 당시 유럽을 풍미했던 계몽사상과 자신의 계몽주의 철학을 명확하게 밝힌 이 글은 칸트의 다른 저서들보다 읽기 쉬워서 칸트철학 입문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논문은 다음의 유명한 구절로 시작된다.
"과감하게 알려고 하라!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책임 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1784.
이 문장은 칸트의 계몽주의를 설명하는 가장 멋진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칸트는 계몽을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했다.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성년의 상태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상태, 즉 다른 사람의 지도와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자신의 이성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이성을 잃었다고 해서 그것을 미성숙하다고 하진 않는다. 결단과 용기가 부족하면 미성숙의 상태가 되는데, 그게 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칸트는 사람들이 계몽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을 이성과 지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려는 용기가 부족한 것에서 찾았다. 칸트의 계몽주의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네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미성년 상태에 머물면서 자신을 대신해 일 처리를 하는 후견인을 두려고 한다. 칸트는 이런 사람들이 생기는 이유를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상태가 무엇보다도 편하기 때문에 미성년의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미성년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칸트는 몇 가지 예를 들었다.
1)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책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 어렵고 수준 높은 책을 읽고 많은 것을 아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용기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때 인간은 미성년 상태를 극복하고 계몽에 도달할 수 있다.
2)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을 대신해 양심있는 목사를 후견인으로 내세우는 사람 - 자신의 양심에 따른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지시를 따른다는 말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후견인에게 맡긴다는 의미다.
3) 건강한 음식을 챙겨주는 의사를 고용해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후견인으로 삼는 사람 -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챙겨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경우다.
미성년 상태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은 조금도 수고로울 필요가 없는 상태에 머물고 싶어하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골치 아픈 일들을 처리해 주기를 바란다.
칸트는 대다수 사람들이 미성년에서 성년, 즉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능력을 가진 계몽된 상태가 되는 단계를 위험하게 느낀다며 비판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많은 사람들이 지도를 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매우 위험한 행위로 보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 "우리가 참을, 진실을 두려워할 때에는, 그 진실은 우리가 힐끗 본 것이지, 전체의 진실은 아니다." -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그러나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계몽은 결코 위험하지 않다. 계몽과정은 걷기와 같다. 걸어본 적이 없는 아기가 처음에 혼자 걸으려고 하면 자주 넘어진다. 그러다가 좀 시간이 지나면 잘 걸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한 번 실수했을 때 그를 겁쟁이로 만들어서 다시 도전할 용기를 빼앗아 버리면 안 된다. 용기가 없으면 미성년 상태에 머무는 것이 거의 천성이 되고,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나아가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성년의 상태를 오히려 편하게 느끼고, 좋아한 나머지 자신의 지성을 점점 더 사용하지 않을 때다.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문제가 있다고 느끼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때 문제를 고치려고 끝까지 노력해야 하는데, 문제점을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고 미성년의 상태가 주는 편안함 속에 머무르려고만 한다.
이성을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칸트는 타율,억압,관습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태도이며, 이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잘못된 법이나, 타고난 재능을 억압하면 인간은 이성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자유롭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은 사람을 영원히 미성년 상태에 가두는 족쇄를 채우는 것과 같다.
칸트는 개인을 계몽시키는 일보다 대중을 계몽시키는 일이 오히려 쉽다고 주장했다. 대중의 계몽 여부는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자유만 보장된다면 대중은 계몽의 상태에 도달하기가 쉽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중에게 후견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후견인 중에는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며, 후견인 스스로 미성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계몽사상을 앞장서서 퍼뜨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견인은 미성년의 굴레를 벗어 던진 후, 자신의 가치와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인간의 사명을 합리적으로 존중하는 정신을 널리 퍼뜨릴 것이다."
대중이 계몽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계몽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개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에는 정치혁명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칸트는 대중의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이러한 자유를 구속할 때, 흔히 쓰이는 구호가 있다. "제발 좀 따지지 마!"
따지는 행위는 스스로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에게도 물어 보는 이성적인 활동이지만, 사실 따지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힘이 세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따지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칸트는 따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장교,세무직원,성직자를 들었다. "까라면 까! 영창 갈래?... 따지지 말고 세금 내!... 따지지 말고 믿어! 의심은 죄악이야!"
모든 분야에서 무제한으로 완전한 자유를 실현하기는 몹시 어렵다. 칸트도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할 때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일에는 자유가 절대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은 대중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이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경우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학자가 독자나 대중 앞에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도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 할 수 있다.
군대의 경우는 좀 다르다. 한 군인이 상관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면 명령이 적합한가를 따지는 일은 불필요하다. 공동체 안에서는 정해진 규정을 수동적으로 지켜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군대라는 공동체에서 상관의 명령을 실행하는 것은 공공의 목적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군인이 학자로서 병역의무제도를 비판하고, 대중에게 호소한다면 누구도 이 일을 금지시킬 수 없다. 후자의 경우 군인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학자로서의 행동은 이성의 공적 사용에 해당된다. 만약 학자가 세금을 내야 하는 시민의 입장이라면 세금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 그것은 납세의 의무에 불만을 가진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학자로서 과세의 부당함이나 부정을 연구해 대중 앞에 발표한다면 이것은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 할 수 있다.
성직자는 교리에 따라서 신자들에게 강론하거나 설교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자유롭게 강론해서는 안 된다. 성직자 마음대로 교리에 어긋나는 강론을 하는 일은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직자가 학자로서 잘못된 교회제도를 개선하자고 대중 앞에서 제안한다면 그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고, 성직자가 양심의 갈등을 겪어야 할 이유도 없다. 바로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때에는 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이성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누군가를 계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성의 사적 사용은 개인이나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성을 사용한다는 뜻으로, 직업이나 직무를 수행하는 일도 여기에 포함된다. 누구든지 한 조직이나 단체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자율적이고 자유로우며 주체적인 한 사람으로서 이성을 사용했다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전체적이고 세계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칸트는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권리는 모두에게 있으며, 이를 실천하는 데 필요한 자유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자유는 많은 제한을 받았다. 특히 종교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종교가 계몽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 칸트는 종교적 미성년 상태에 있는 것이 가장 해로우며,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성직자들이 신자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며 신자들의 생활을 감독할 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보았다. 설령 국민의 미성숙함을 깨우치기 위한 좋은 목적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시대상황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다음 세대가 지식을 확장하지 못하고 현재의 잘못을 없앨 수도 없으며 계몽을 진행할 수도 없는 상태에 머물러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은 인간성을 침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대는 자신을 미성년 상태로 두려는 결정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인류의 진보를 잠시동안이라도 방해하고, 후손들에게 누를 끼치는 행동은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몽은 인류의 신성한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자신이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다. 조국 독일은 계몽된 시대는 아니지만, 계몽이 진행되는 중이라고 믿었다. 종교분야에서 계몽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칸트의 계몽사상과 칸트 이전의 계몽사상은 큰 차이가 있다. 칸트 이전의 계몽사상은 과학과 합리성에 치중한 반면, 칸트의 계몽사상은 도덕에 중점을 두었다.
"계몽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거나 지식을 기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의 게으름과 비겁함을 극복하는 것이다." - 칸트.
적극적으로 인간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성숙하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계몽은 인간성 실현이며, 더 나은 진보를 향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