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24
600년 전의 부동산 광풍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이무를 처결한 태종은 심신이 피로했다. 쉬고 싶었다.
숨 막힐 것 같은 한양을 벗어나 바람을 쐬고 싶었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탈상도 끝났다.
마음 같아서는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조선에 들어오면 대충 업무를 마무리하고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명나라 사신들이 부러웠다.
개경에서 개성 유후사로 명칭은 바뀌었지만 개성은 마음의 고향이다.
송악산 품에 안기면 지친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또한 개성은 어머니 신의왕후가 지근거리에 잠들어 있는 곳이다.
어머니의 능침을 살펴보고 개성에 머무르면 피로가 회복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개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의정부에 개성 거둥을 준비하라 명했다.
공신과 정승은 물론 각사(各司)를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한양에 남고 반은 호종하게 했다. 한양에는 오직
한성부, 성균관, 전사시, 전농시, 광흥창, 도염서, 혜민국, 제생원, 전옥서만이 도성에 머물게 했다.
조정이 옮겨가는 셈이다. 이러한 채비는 하루 이틀에 돌아올 일이 아니라 장기간 머무를 계획이란 뜻이다.
슬픔에 잠겨있는 정비에게 큰 선물을 준비하다
중궁전을 지키던 정비와 세자는 물론 왕자도 대동했다.
어엿한 성년에 이른 세자 양녕은 세자빈을 거느리고 뒤 따랐다.
열세 살배기 충녕(세종)은 무조건 좋았다.
한양에서 태어난 충녕은 양녕, 효령 두 형님처럼 개성에 대한 아릿한 추억은 없지만 행차 그 자체가 좋았다.
태종의 개성 행차는 아버지와 두 동생을 잃고 비탄에 잠겨있는 왕비 민씨를 위로하기 위한 배려도 깔려 있었다. 깜짝 선물도 준비했다.
집안의 기둥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시고, 잘 나가던 두 남동생이 큰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으니
정비 역시 가슴 아픈 우울한 나날이었다.
한양을 떠나던 날. 태종은 번잡스러운 공식행사를 금지시켰다.
이에 사간원에서 예의에 어긋난다며 상소했다.
"인군(人君)의 거동은 대절(大節)입니다. 유후사에 행행(行幸)함에 있어서 성(城)에 드시는 길과 연(輦)에서
내리시는 때에 모두 처음 즉위하신 때와 같지 않으시니 신 등은 유감스럽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무릇 행행(行幸)하실 때에 모든 대간과 법관으로 하여금 수종(隨從)하게 하고 영송(迎送)하게
하여 만세에 법을 남기소서."
임금의 행차가 '너무 파격적이다'는 얘기다. 간소함이 도에 지나쳤으니 위엄을 세워달라는 얘기다.
태종은 듣지 않았다. 반송정에서의 환송행사마저 시행하지 말라 일렀다.
조용히 떠나서 소리 없이 돌아오고 싶다는 뜻이다.
임금을 태운 어가(御駕)가 임진 나루터에 머무를 때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을 불렀다.
"세자는 도성으로 돌아가라."
"아바마마 아니 되옵니다. 아바마마가 도성에 돌아가실 때까지 소자가 시종하겠습니다."
개성에 이는 부동산 광풍
태종은 세자 양녕의 소청을 가납했다. 이례적인 일이다.
임금이 도성을 비우면 세자가 지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태종이 허락했다.
왕도(王都) 한양은 권력이 공동화된 도읍지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뜻밖의 문제가 불거졌다. 부동산 광풍이다.
임금이 대소신료를 이끌고 개성으로 행차하자 한양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개성으로 또 다시 천도할 것이라는 유언비어였다.
개성에서 한양으로 환도할 때 곤혹을 치른 관료들이 먼저 선수를 치고 나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은 정보다.
정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대부들이 움직이니 이재(理財)에 밝은 잡배들이 뛰어들었다.
뭐가 뛰니 망둥이도 뛰는 격이다.
개성에 부동산 광풍이 불었다. 한양의 집값은 폭락했고 개성의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에 편승하여 사대부의 부인과 고위관리들의 부인들이 설치기 시작했다.
원조 '빨간 바지'의 등장이다. 이들은 개성의 땅과 집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덩달아 집값과 땅값이 뛰어 올랐다. 부동산 파동의 악순환이다.
태종 즉위 초, 갑작스러운 한양 환도 당시 집을 마련하지 못한 관료들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고생을 많이 했다.
집이 있는 개성으로 출퇴근 할 수도 없고 집을 사자니 한양 집값이 폭등하여 개경 집을 판 돈으로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사놓은 집을 웃돈을 주고 사들이거나 집 매입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어 송사가 빈발하여 파직된
관리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모든 것의 매매에는 호가와 매매가가 있게 마련인데 당시 관료들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터무니없는 값을
쥐어주며 힘없는 백성들의 집을 빼앗다시피 했다.
삶의 터전을 관료들에게 빼앗긴 백성들은 관료들을 성토했다. 억울하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민원과 쟁소가 끊이지 않자 조정에서 구의동에 대토를 마련해주고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운 일이
있었다.
도강 금지를 발표한 극약처방
한양과 개성에 일고 있는 부동산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사헌부에서 상소문을 올렸다.
"천사(遷徙)하는 거동은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구도(舊都)에 이어(移御)하신 것은
부득이한 일입니다. 시종하는 신하가 다투어 서로 가권(家眷)을 끌고 오니 무지한 백성들이 고토를 그리는
정으로 낙역부절(絡繹不絶-소식이 끊이지 않음)합니다.
시종하는 대소 신료로 하여금 가권을 끌고 오지 못하게 하고, 이미 온자는 되돌아가게 하면 민생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개성에 집을 사려는 사람들이 한양에서 개경에 이르는 길에 끊이지 않으니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에 태종은 단호한 조치를 내놓았다.
"여러 신하들이 가족(家族)을 끌고 오는 것은 불가하다. 관진(關津)으로 하여금 부녀자가 강을 건너는 것을
금지 하라."
극약처방이다. 이 때부터 임진나루터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부녀자들의 도강을 금지하였다.
도강 금지가 부동산 광풍에는 약효를 발휘했지만 또 다른 부작용이 튀어나왔다.
임금을 따라 개성에 호종한 신료들을 홀아비로 만들고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때 아니게 색향 평양이 호황을 맞았다. 평양에서 개성에 이르는 길목에 여인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경덕궁에 행재소를 마련한 태종은 사냥으로 소일하며 심신을 추슬렀다.
새벽에 나가 열마파(閱馬坡)에서 노루 33마리를 잡고 밤에 돌아오니 의정부에서 각사(各司)를 거느리고
선의문 밖에서 맞이하였다.
태종 이방원은 이러한 격식이 싫었다.
"오래 사냥하는 것도 아닌데 교외에서 맞이하는 것은 부당하다."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불러 책망하고 대언(代言)이 각사(各司)에서 마중 나오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고
예조좌랑(禮曹佐郞) 심도원을 칼을 씌워 순금옥에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석방했다. 경고표시였다.
정치의 비정함에 몸서리치는 처남을 불러내다
임금이 개성에 머무르는 시간이 장기화 하자 한양 민심이 다시 술렁거렸다.
'개성 천도가 헛소문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한양 민심을 잠재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 태종은 세자 양녕을 한양으로 돌려보냈다.
중전 민씨와 평주 온천에서 휴식을 취하던 태종이 지신사 안등을 불러 교지를 내렸다.
"이천우로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겸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 이숙번을 참찬의정부사
(參贊議政府事) 겸 지의흥부사(知義興府事), 민무휼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민무회로
한성윤(漢城尹)을 삼는다."
민무구와 민무질 두 형이 처형되는 것을 목격하며 정치의 비정함에 정치와 손을 끊고 재야에 묻혀 있는
민무휼과 민무회를 발탁하는 파격적인 인사이동이었다.
격랑이 일었던 정치파동에서 두 처남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매형으로서의 속죄와 나머지 두 처남은
보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두 동생을 잃고 가슴앓이하고 있는 정비 민씨에게 최대의 선물이었다.
개성에 머물던 태종은 5개월 만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임금의 어가가 양주 녹양평(綠楊坪)에 머무르니 세자가 나가서 맞이하였다.
성균관(成均館) 학생과 부거생도(赴擧生徒) 1천 1백여 명이 환영 행사에 참석했다.
다음. 125에 계속
첫댓글 임금의 개성 행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