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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님의 응답으로 오는 계시와 지각,
그리고 신성한 진리의 입류와 인간의 깨달음에 대하여
주 앞에 나아가 필요한 것을 구할 때 주님의 응답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에서 부담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내 뜻과 주님 뜻 사이 불일치에 대한
염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도하는 동안 주님 뜻을 알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이기도 하다.
주님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알게 모르게
매번 응답을 받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상황이 흐지부지 종료된 후 나타나는 결과를 보고
자연스럽게 아하! 그것이 주님 뜻이었구나! 확인하게 된 것일 뿐
주님으로부터 확실하게 응답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는 아니다.
따라서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지 못하는
답답함 속에 계속 갇혀 있게 된다.
설령 나타난 결과가 자신이 간절히 구한 응답에
부합한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과의 소통의 느낌은 전혀 없이
모든 것이 꽉 막힌 것 겉은 상태에 있었으니
그것을 주님의 응답으로 여기기에는 부족함을 크게 느끼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혹 겉으로는 주님 뜻을 구했지만
속으로는 은밀히 내 뜻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았을까..
돌아보면 중대한 문제꺼리 앞에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마다
정말 내 뜻보다 주님 뜻을 앞세우려고 나름 애써보지만
노력에 비해 진정한 마음을 실은 기억은 드물다.
어쩌다 진심으로 주님 뜻을 구했다고 생각한 것조차
사실 그것은 배운 바 지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을 뿐
거기 참된 애정을 싣지는 못했다.
주님 뜻을 찾아 기도할 때
적어도 겉으로는 내 뜻 실현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만일 그 일의 결말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절망으로 치달으면 어찌하나 라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마음 한 편으로는 여전히
내 뜻을 꼭 붙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자신의 진실한 애정이 실린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애정은 곧 그 사람 자신으로, 그 애정에는 그동안 그가 살아온
인생 전체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든 당면한 문제를 놓고 주님 뜻을 구할 때
자신이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뜻을 구하고 있는지,
과연 지금 무엇을 위해 주님 뜻을 구하고 있는지에 대해
한번쯤 의문을 품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음이 진실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주님에게서 응답으로 주어지는 계시가 주어질 수 없고
설령 주어진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경건해야할 기도가 그의 자아실현의 도구로 전락되고
나아가 주님 또한 그의 욕망을 채워줄 대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든 상황 앞에 기도 응답으로 어둠을 밝히는
계시의 빛 보기를 원한다면 기도 중에 무엇보다
자신의 욕망을 비우는 작업이 무척 중요하다.
우리가 중대한 문제에 부딪쳐 기도할 때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이 들고 일어나
마음을 크게 요동시킨다.
때문에 그러한 마음 상태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순수하기 어렵다.
그때 그의 마음은 악한 영들의 공격에 이미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주님의 도우심으로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보지만
거기 진실한 마음을 싣기 까지는 갈등과 유혹을
이겨내는 힘든 과정이 필요하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뜻을 구하는 일이 이처럼 어렵지만
주님 뜻을 구하는 마음 속 불순한 동기 또한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때 만일 그의 기도가 순수하다면 주님 뜻을 구할 때 그의 관심사는
그 상황이 결국 어떤 결말을 가져올 것인 지에 두어지기보다,
다시 말해 그 일의 결과를 미리 알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응답의 빛을 기다리기보다,
그 상황의 결정권은 주께 맡기고
자신은 그저 마음의 불안을 조성하는 악한 영들과 싸우며
진행과정의 순간순간마다 주님을 향한 신뢰 안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는 자세를 취할 것이다.
물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그가 세상적 측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성실히 이행하면서
영적 측면의 방해물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상황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염려와 궁금증으로
그것에 관한 것을 미리 알기 위해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결과를 미리 알려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뜨리는 것이 되어 오히려 여러 망상에 사로잡힐 수 있고
결국 영혼에 해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 충분히 다루었다.
하지만 이것은 상황이 어떤 식으로 결말지어질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 응답으로 상황이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그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구하는 결과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보다 우선하는 것이
그의 거듭남을 위한 영적 정결이고
이것이 그 상황을 허용하신 주님의 주요 뜻인 만큼
주님의 응답은 그 일을 치루는 과정에서 마련되어야할
그의 영적 정화를 거쳐 최선의 결과를 그에게 부여해주실 것이다.
따라서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자는
주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그 안에 그분의 뜻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결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먼저 자신을 정결히 하여 온전한 제물이 됨으로
결과도 이에 연계되어 나타나기를 소원해야 한다.
물론 주님의 뜻은 결과를 보고서야 완전히 확정적으로 알게 되지만
그러나 결과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도 응답으로 오는 신성한 빛의 인도를 수시로 받으며
차츰 더 환한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항상 최선의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섭리에 맡기고
우리는 다만 여러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그때그때마다
응답으로 적절한 계시의 빛을 비춰 마음을 환히 밝혀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각자의 지성으로 그 계시에 담긴 주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며 또한 그분의 뜻이 그에게서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그 뜻에 적용시키는데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인에게 있어서
그가 지금 겪고 있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은,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이
그에게 있는 여러 악과 거짓들로 방해를 받아 실현되지 못하는 탓에
그것들을 찾아 제거하여 그의 거듭남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주께서 허용하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절박한 상황으로 인해
관심이 온통 결과에 집중되는 와중에
주님의 뜻이 자신에게서 막히지 않도록 내면의 정결에
힘을 쏟는 일에는 악한 영들로부터 많은 공격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자신을 얼른 위험과 고통에서 벗어나 위로와 평안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그 상황에서는 그런 생각들이 그에게 선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는 지금 자신이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또 그들이 주는 악한 욕망들과의 투쟁으로 마음을 정결히 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도 응답에 앞서 자신이 먼저
그분 앞에 흠 없는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예배 자세를 갖추는 것도 생각하지 못하며
오직 자신의 안전과 평안만을 온 힘을 다해 부르짖게 된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그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지각할 수 없게 만드는 주된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이때, 즉 그 상황과 관련하여
악한 영들로부터 오는 충동이 속에서 줄기차게 올라올 때,
그가 주님 주시는 힘으로 사력을 다해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면
한층 고요하고 평온해진 마음으로 인해
주님에게서 오는 계시의 빛을 볼 수 있는 내적 시각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뜻을 구하려 한다면
그의 관심사가 상황의 결과보다는
과정에서의 내적 정결에 두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주님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계시는
그 자신의 여러 악과 거짓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거할 힘을
공급해주시는데 그 진정한 의미가 있는바
주님 뜻을 구하는 자는 계시로부터 이러한 것들을 깨우침 받고
그것을 자신에 적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모두는 그 힘든 상황의 최종 결과가
어떤 식으로 결정될 것인지와 우리가 구하는 주님의 뜻과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어쩌면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상황의 최종 종착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은
인간의 세상적 관심사가 대부분인 반면
주님의 관심사는 그의 영적 성장과 거듭남에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인간의 관심은 그 문제의 최종 결정이
어떻게 날 것인가를 궁금하게 여기기에
이런 측면에서 주님 뜻을 확연히 보고 따라가기를 원하지만
이와 달리 주님의 가르침은
결과를 주께 맡기고 인간은 다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안의 방해물들을 치우는 것이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고
이에 대한 깨달음의 빛을 얻기 위해 주께로부터 오는 계시를
지각하는데 온 지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 뜻을 구할 때 우리는
직접적인 소통의 방법으로 주님 뜻을 계시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말씀을 통한 내면의 깨달음 등의
간접적인 소통의 방법으로 계시 받을 수도 있다.’(말씀에 관하여 13)
또 주님은 들리는 음성으로만 말씀하시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말씀을 통해 또는 설교나 옆 사람, 또 환경 등을 통해 말씀하시고
심지어 아무런 응답도 없는 중에도 주님은 일하고 계신다.
그 시간조차 주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는 위에서처럼 주님과의 다양한 방식의 소통 그 모두를
성령의 인도로 여기며 보다 확실한 빛을 눈으로 보고
강한 확신 속에 그 길을 가기를 원하지만
여기에는 분별이 필요하다.
내가 보고 듣는 이것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내 생각이나 감정의 산물인가?
마음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의 출처는 어디인가?
요한복음 10장27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인지 알 수 있나?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것도 거기서 확신이 설 정도의 강한 빛을 보아야
혹 그 안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용기 내어 주님 뜻을 따를 마음이 생기고 또 위험도 그만큼
줄어들 텐데 모든 것이 너무 모호하지 않은가?
특히 주님 뜻에 대해
어떤 선택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악한 영들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이 쉽지 않다.
이럴 때 우리는 듣고 보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지성의 도움을 힘입어 마음의 불순한 것들을 제거해낼 때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천비 2535
‘.. 기도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고
동시에 기도하는 대상에 대한 그의 내적 시선(view, 바라봄)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거기에는 마음의 지각이나 생각에 흘러드는 입류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내면의 확실한 열림을 만든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도하는 사람의 상태,
그리고 그가 기도하는 것의 본질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만약 그 기도가 사랑이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기도하는 사람의 목적이 전적으로 천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라면
그 기도에는 계시와 같은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애정에는
소망, 위로 또는 어떤 내적인 기쁨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내적인 의미로 볼 때
기도가 ‘계시되는 것’을 가리키는가의 이유다.
.. 주께서 기도하실 때 계시가 있었다는 것은 누가복음에서 분명하다.
눅 3:21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니 하늘이 열렸다.”
눅 9:28-29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려고 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
얼굴의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하얗게 되었다.”
요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
그런데 사실 시험과 고난의 상황에서는 악한 영들이 주는 불안으로
마음의 관심이 온통 삶의 안정과 평안에만 쏠리기 때문에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힘들다.
물론 안정과 평안은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때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님에게서 오는 내면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주께서 그 상황을 그에게 허락하신 것은
세상적 성공이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고
따라서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영적 성장이라는 깨달음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게 해준다.
주님의 응답으로 오는 계시에는
바로 이러한 내용들에 대한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 깨달음의 빛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
그리고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느냐에 대한 처방이 아니라
그를 통해 이루시려는 주님 뜻을 방해하는 세력들과 투쟁할 수 있는
강한 힘과 위로를 공급하는 신성한 진리의 처방인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도
내 마음속을 비춰줄 깨달음이
어느 한 순간에 강력한 빛으로 임하기를 고대해서는 안 된다.
어둡다고 여길 때마다
지성의 도움으로 여기저기 뜯어고치고 수정하며
주님 뜻을 조금씩 올바르게 찾아가는 것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기도 응답으로 주님 뜻을
밝은 빛 가운데 보기를 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확정된 결과로서의 주님 뜻을 보려는 인간의 욕망인데
이는 그것이 영적 정결보다 세상적 평안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질 때
자연스레 속에서 올라오는 자기 방어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 뜻을 위해 기도할 때
그런 식의 강력하고 확정적인 응답을 구하지 말고 방향을 바꾸어
다만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주님에게서 주어지는 계시,
곧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통해 생각과 지각으로 오는 깨우침을 받아
그것을 자신에 적용하려는 자세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그러한 깨우침의 빛은
평소 그가 말씀을 통해 여러 방면으로 기억에 수집한
지식과 거기서 일어나는 생각으로 나타나기에
(아래 저서 인용 글 참조)
어떤 특별하고 기적적인 방식으로 오는
주님의 역사만을 고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나 주님 뜻을 그처럼 확실히 보며 인생길을 걷고 싶겠지만
사실 인간의 상황은 자기 속에 있는 악과 거짓으로 인해
그 환한 빛을 온전히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주님은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빛의 역량에 맞춰
희미한 가운데 그의 이성을 활용하여, 또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조금씩 보다 환한 빛 가운데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인간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주님의 뜻이 그에게 알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주님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기 전에는 그런 삶을 살기 어렵고
따라서 선에서 나오는 진리에 대한 애정이 없는 상태에서는
주님에게서 기도 응답으로 오는 계시도 지각하기 힘들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의 빛이 속사람을 거쳐
겉 사람으로 유입할 때
그 빛을 제대로 수용할 역량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주님의 뜻을 알거나 그 음성을 듣는 것이 쉽지 않아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 부담으로 느껴진다.
더구나 그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좀 더 밝은 빛 속에서 보려는 것은 욕심으로까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처럼 눈 어둡고 귀 먹어 오래토록 주님을
가까이 뵙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주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응답은 없이 답답하고 모호한 상황이 지속되는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돌아보는 변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주님의 또 다른 형태의 깨우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적 시각인 그의 이해가 열려
천국의 빛으로 그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 답답하고 모호한 시간들을 그냥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어둡고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포기하지 않고 믿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본다면
주님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그의 영적 상태에 걸 맞는
최선의 응답을 주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그분의 섭리를 통해 배워 알고 있다.
하지만 내면의 시각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리에 달라붙어 있는 거짓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유입을 천국의 빛 안에서 볼 수 없고
따라서 주님과 천국에 속한 것들을
오히려 왜곡과 부정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특히 시험과 고난 등 삶의 여러 힘든 일들을 당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응답의 작은 조각이라도 발견하려고
자신의 안과 밖 여기저기를 살피지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응답은
그의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을 안정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불안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보다 확실하고
선명한 것 보기를 원하지만
주께서 그와 함께하며 보호하고 계신다는
뚜렷한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한다.
물론 주께서 응답을 주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비의 주님은 모든 이들의 기도에 맞춰 적절한 응답을 주신다.
만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응답을 수용할 수 없는
그 자신의 몫인 만큼 주님으로부터 오는 유입을 가로막는 것은 없는지,
아니면 그것을 변질시키는 것은 없는지,
또는 영적으로 무뎌져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겸손히 돌아보아야 한다.
또 때로는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다가 주님에게서
예기치 않게 무시를 받게 된 수로보니게 여인처럼(막7:24-30)
구하는 자가 좀 더 확고한 믿음 위에 설 수 있도록
주께서 응답을 조금 늦추실 수도 있기에
한편으로는 주님 도우심을 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도 응답으로 기대할만한 빛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낙심치 말고 자신의 지성을 적극 활용하여
작고 희미한 빛이나마 찾아내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빛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보다 환한 빛의 상태로 이끌림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한다.
주님은 항상 그가 수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풍성한 응답을
준비하고 계시며 훨씬 더 밝은 빛 비춰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받는 자의 역량을 감안하여
오히려 그것이 넘쳐 해가 되지 않도록 조절해주시며
그 응답의 밝기 또한
그가 자신의 어둡고 모호한 상태로부터
스스로 헤쳐 나올 힘을 얻도록 은밀한 중에 조금씩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것이 주님 역사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 빛이 아무리 환하게 비칠지라도
그가 수용할 수 있는 역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더 밝을 뿐
결과나 진행과정을 구체적이고 확정적으로 볼 정도로
선명한 빛은 아니다.
그 빛은 마치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이 지난 후
세미한 소리에 여호와께서 계시듯(왕상 19:11-12)
구하는 자의 영적 감각에 따라 어쩌면 극히 희미하고 작게
느껴지는 빛과 음성으로 내면에서 발하여지기 때문에
그가 힘써 주시하지 않으면 놓치는 때가 다반사일지도 모른다.
참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에서.. Bible Study Notes
‘.. 주님은 시험 중에 있어 그분의 권능이 없다면
깡그리 실패하고 마는 기독교인에게 아주 친밀하게 현존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마지막 목적(end)안에,
그리고 내적 생명의 평온한 애정 안에 현존하실 뿐
바깥쪽 인간의 싸우는 열정의 법석댐에는 계시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에 의해 통제되고,
이 목적에 시험의 결과도 의존된다.
만일 주님이 삶의 우리 목적 안에 계신다면
그분은 행복이라는 수확을 거두는 삶의 모든 싸움들 안에도 계신다.
그러나 그분은 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멀리 떠나 있으신 듯 여겨지기까지 한다.
만일 그분의 현존하심이 환난의 때에 지각된다면
시험은 저지 될 것인바 그 시험의 근원이 된 악은
복종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만일 주님의 현존이 지각된다면
시험의 환난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의 현존은 저것의 부재를 함축한다.
주님은 바람에도, 지진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는다.
시험의 모든 잡음이나 법석댐이 지나 간 후
들려지는 여리고 작은 소리 안에 계신다.(열왕기상19:11,12).
신랑이 있는 동안 신랑의 친구들은 단식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라자로가 죽게 아프고 있는데 거기에
계시지 않은 것을 두고 기뻐하셨다.
제자들이 그 일로 믿게 될 것이기에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기뻐하셨다.
우리의 믿음이 확증된다는 목적을 위해, 악을 제거하기 위해,
믿음에 대한 장애물, 여타 모든 은총에 대한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목적을 위해 시험은 허락되고 시험의 끝(목적)에 까지
계속 허용되어진다..’
주님 편에서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 편의 사정에 의해 받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지속됨에도
이를 깨닫지 못할 경우
주님을 향한 마음의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이것이 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처럼 답답한 상황이 지속될수록
그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그러한 겸손을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특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님의 마음을 바꾸려 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주님의 원하심대로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 겸손한 마음이 준비되지 않을 경우
주님은 그가 답답함을 느끼는 그 어둡고 모호한 빛을
계속 유지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응답이 오지 않거나 늦춰지는
사정의 대부분은 우리 인간 편에 있다.
삶의 힘든 시간들 앞에 설 때마다 인간이 주께 구하는 것은
상황의 급반전이 이루어지기를 보는 것이지만
어쩌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은
그것을 받을만한 상태로 자신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깨우침이
사실상 그 전부요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
큰 능력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있을 경우 그의 눈에는
그런 작고 희미한 빛으로 오는 응답은 잘 들어오지 않는다.
기도하는 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일상의 생각처럼 그냥 스쳐지나가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재차 언급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주님 뜻은 너무나 분명하다.
즉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그 결정권은 주께 있으니
인간은 이를 간섭할 수 없고
다만 그의 영적 형편을 고려하여 언제나 가장 최선으로
일을 도모하시는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
동시에 선과 진리로 유입하시는 주님을 가로막는 인간편의
여러 악과 거짓들을 제거해야 주님이 그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깨우침을 얻도록 하는 것이
그 어려운 상황을 허용하신 주님의 뜻이요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은
눈에 확 뜨일 정도로 밝거나 강력하지 않을 수 있어
그 빛을 찾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에 인간에게 있는 지성(intelligence)의 역할이 중요한바
주께서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러한 깨우침의 빛을 주실 때,
다시 말해 신성한 진리의 빛이 그에게 흘러들어올 때
지성은 설령 그 계시의 빛이 그의 수용 능력에 제한 받아
작고 희미한 빛으로 흘러들게 될지라도
그것을 놓치지 않고 지각하여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도록 그를 깨우쳐 준비시키고,
또 주님에게서 응답으로 오는 빛이
모호한 원인을 찾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게도 하며,
나아가 그런 이유로 인해
주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떨어지지 않도록
용기와 위로를 갖게 해주는 것도 지성의 역할이다.
- - - - -
‘지성이 속사람 또는 합리적인 사람에 속한 것인 반면
이해는 속사람과 겉 사람 모두에 속하는데
속사람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겉 사람은 세상의 빛으로부터 이해를 가진다.’(천비 3138)
‘겉 사람에 속한 이해가
육체의 눈을 통해 자연적인 빛에 있는 사물을 보고 분별하여
그것을 기억에 저장하는 외적 시각이라면
속사람에 속한 이해는 내적 시각으로,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로부터 온 지식이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되면
속사람은 그것을 천국의 빛 안에서 보고 그 빛에서 자신의 사랑에
맞는 것들을 선택하고 끌어내어 내부 기억에 저장한다.
이 내부 기억에서 속사람의 삶과 지성과 지혜가 나온다.
영적 지성과 지혜에 속하는 것들도,
즉 신앙과 사랑에 속한 것들도 마찬가지다.’(천비 9723)
‘지성은 바로 이러한 이해의 기능을 통해 계시를 지각한다.
곧 지성은 속사람 또는 합리적인 사람에게 있는
보다 더 내적인 시각 또는 지각으로
겉 사람과 속사람 사이 상응이 있을 때 천국의 빛이
세상의 빛으로 형성된 자연적인 사람의 생각 속으로 유입되면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인식(recognition)이 생기고’(천비 3138)
‘이때 속사람에 속한 지성은
천국의 빛으로 깨우쳐진 이해를 통해 겉 사람의 기억에 수집된
말씀이나 교회의 교리에서 온 지식들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그의 사랑에 적합한 것을 골라서 끌어내어
그를 신앙과 사랑에 속한 삶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천비 9723)
(이 천국의 빛이 얼마만큼 들어오느냐에 따라,
즉 좁은 틈새 정도인지 아니면 충만한지에 따라 이해의 정도가 다르며
그 빛이 충만할수록 그것은 지성적이 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거나 환상을 보는 것보다
평범한 생각으로 오는 내적 깨달음에서
주님의 계시를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된다.
‘기도 응답으로 오는 주님의 계시는 일반적으로
천국의 빛 안에서 속사람의 지성에 받아들여진 후
그 천국의 빛이 합리적인 마음을 거쳐
그의 겉 사람의 기억에 수집된 지식들에 유입할 때
그 지식들 가운데 자신의 사랑에 상응하는 것으로부터 떠오르는
생각으로 나타나 그에게 깨달음을 주게 되는데
이는 주께서 사람을 가르치실 때 직접 가르치지 않고
천국을 통하여 사람의 가장 낮은 차원인 기억의 지식에
흘러드는 신성한 진리의 빛에 의해,
즉 인간이 시각과 청각을 수단으로 받아들인 기억의 지식 위에
신성한 진리에서 나오는 천국의 빛이 유입함으로
결국 그의 사랑의 애정과 이해의 결과인 생각을 통해
깨달음을 주시는 방법에 의해 간접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아래 저서 인용항목들 참조)
(본래 주님에게서 기도 응답으로 오는 계시는
속사람의 시각인 지성에 의해 지각되지만 그 지성에 지각된 것이
겉 사람의 감각적인 것에 나타나지 않는 한
그 계시는 그 사람에게 온전히 지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천사는 그것을 영적으로 지각하지만
사람은 천사와 달리 그것을 자연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속사람의 지성에 의해 영적으로 지각된 계시가
겉 사람의 자연적 사고로 흘러 들어와서 거기 나타나지 않고는
그 사람은 그것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러한바,
주님에게서 천국을 거쳐 그의 속사람의 지성에 지각된 계시는
상응에 의해 천적, 영적 관념에서 겉 사람이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자연적 관념으로 바뀌어 그에게 유입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겉과 속의 상응으로 천국의 빛이
겉 사람에 속한 것들에 유입하여 그의 기억의 지식들을 비추면
속사람의 지성은
말씀이나 교회의 교리로부터 저장된 기억의 지식들 가운데
그의 사랑에 상응하는 것을 취하게 되고
그 지식을 통해 생각이 일어날 때
계시는 그 속에 나타나 ‘겉 사람의 지성’에 지각된다.
천비 6240 ..‘속사람의 지성’은 "합리적"이고
‘겉 사람의 지성’은 "자연적"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합리적인 것은 내적이고 자연적인 것은 외적이며
그들은 서로 완벽하게 구별된다..
그 결과 그의 속사람은 물론 겉 사람까지
천국의 빛 속에서 지성과 지혜를 얻게 되고
이에 지성은 그 계시에서 온 깨달음으로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잘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하게 된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온 계시가
그의 속사람을 거쳐 겉 사람을 일깨우기까지
이와 관련된 저서의 여러 참고 부분들..
천비 3223, 10551, 7442, 5114, 8780, 9905, 10547, 10548, 9723, 3138,
계시록 해설 1177, 천비 2535, 3391, 4096, 4408, 9394, 5373, 4405,
5510, 천국과 지옥 130)
천비 3223
‘.. 사람을 비추는 빛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세상의 빛과 천국의 빛이 그것이다.
세상의 빛은 태양에서 나오고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나온다.
세상의 빛은
자연적인 사람 또는 겉 사람의 관심사들
(concerns,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심사들이 물리적 빛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관련이 있다.
자연적인 사람은 자연적인 태양의 세계에서
발생하고 보이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들이 그 세계의 빛과 그늘에 의해
눈에 보이는 어떤 형태를 얻지 않는 한 파악할 수 없다.
자연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하며
그것들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모든 시, 공간 개념도
역시 세상의 빛에 속한다.
그러나 천국의 빛은 영적인 사람 또는 속사람을 위한 것이다.
비물질적이라고 불리는 그의 지성적 관념들이
거주하는 사람의 내면적인(보다 깊은) 마음이 그 빛에 속한다.
비록 그가 자신의 지성을 시력이라고 부르고
그 빛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아무도 이것을
즉시 의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관심사에 몰두해 있는 한
그의 인식은 세상의 빛에 속하는 것들에 국한되고
천국의 빛에 속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며
천국 전체가 그 빛으로 뒤덮여 있다.
이 빛, 즉 천국의 빛은
세상의 빛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완벽하다.
세상의 빛 속에서는 한 줄기 광선을 만드는 것들이
천국의 빛 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광선을 만든다.
천국의 빛은
그 안에 지성과 지혜를 담고 있다.
이 빛은 겉 사람 또는 자연적인 사람에게 있는
세상의 빛으로 흘러들어
그가 감각으로 사물을 지각하게 하는 빛이다.
그리고 이 천국의 빛이 흘러들지 않았다면 사람은
어떤 인식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이 그 빛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겉 사람 또는 자연적인 사람이
속사람 또는 영적인 사람과 하나가 될 때,
즉 겉 사람이 속사람에게 종속될 때
이 두 가지 형태의 빛, 즉 천국의 빛에 속한 것들과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 사이에는 상응이 존재하다.
이 경우 세상의 빛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천국의 빛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표징한다.’
천비 10547, 10548
‘.. 주께 묻는 것은
교회와 예배의 진리와 선에 관해
지시를 받기 위한 것이고(기도 응답으로 오는 계시의 의미)
이는 주님이 성언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에
성언을 살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생각이나 지각을 통한 내적 깨달음으로 오는 계시의 성격)
주님으로부터 오는 응답과 계시는
사물의 궁극적이고 가장 낮은 차원에 있는 것들, 즉
성언의 외적인 의미 안에서 이루어진다..’
천비 10551
‘.. 여기서 외부(without)에서 보는 것이 무엇이고
내부(within)에서 지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야 하겠다.
말씀을 읽을 때 깨달음 속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내부에서 본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적인 것은 열려 있고,
내적인 것(the internal)이 열릴 때 그것은 천국의 빛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빛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흘러 들어와서 깨닫게 한다.
그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이 빛이 사람의 기억 속에 있는 지식들로 흘러드는데
이 지식들은 자연적인 빛 속에 있고
이 지식들로부터 사람은 생각하기를, 마치 자기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는 유입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깨달음 속에 있다는 것을
그는 다양한 표시들로부터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리를 위해 그리고 삶의 선을 위해
진리를 아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 한,
또 그가 삶을 위해 신성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한,
자신이 깨달음 속에 있다고 믿는 모든 사람은 속은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모든 깨달음은 주님이 사랑받을 때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또한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유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간단히 설명하겠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천사도 말씀이 읽힐 때 그것을 지각하는데
천사는 그것을 영적으로,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자연적으로 지각한다.
내적인 것이 열린 사람도 말씀을 영적으로 지각하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의 영적 사고가 겉 사람의 자연적 사고로 흘러 들어와서
거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사고다..
.. 하지만 그들은 내적인 사고를 구성하는 관념이
영적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이것들이 자신의 차원에서 아래로 유입할 때
자연적 관념으로 바뀌고 나서 다른 모양과 모습을 취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겉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자연적 사고뿐이기에
영적 사고가 흘러들어올 때
상응에 의해 그 모습을 자연적 사고로 바뀐다.
내적인 사고를 구성하는 영적 관념이
자연적 관념으로 바뀌고 나서 다른 모양과 모습을 취하기에
자연적 관념만 인식하는 인간은
그것이 영적 관념으로부터 온인 줄 알지 못한다.
비록 겉 사람은 자연적 사고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고 여기지만
정작 깨달음을 주며 주님의 유입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는 것은
내적인 사고다.)
천비 5114
‘.. 사람 안에는 천국의 빛 가운데 있는 지성의 영역에서부터
이 세상의 빛 가운데 있는 감각적인 것까지 내려온 것들이 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각적인 것은 인간적인 그 어떤 생명도 가질 수 없다..
.. 이 천국의 빛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 빛에서 비롯된 것들 속으로 들어오면
그 빛은 그것들을 생기발랄하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대상물들을 지성적으로 보게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보고 들은 것들에서 생성된,
따라서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들어온 것들에서 생성된
온갖 지식들에 의해 그는 지성과 지혜를 얻고 이로 말미암아
시민적인 삶이나 도덕적인 삶, 또는 영적인 삶을 영위하게 한다..’
천비 4405
‘.. 세상에는 두 가지 빛이 있기 때문인데
하나는 태양에서 온 세상의 빛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온 천국의 빛이다.
세상의 빛 속에는 지성이 없지만 천국의 빛 속에는 지성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는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이
천국의 빛에 속한 것들로부터 빛을 받는 정도에 따라,
(천국의 빛에 속한 것들에 의해 밝혀지는 한)
그리고 이 두 종류의 것들이 서로 상응하는 정도에 따라,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이해와 지혜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계시는 일반적으로 들리는 음성으로 주어지지 않고
사람이 내적으로 받는 계시를 의미한다.
이 계시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이해, 곧 내적 시각의
깨달음(조요 照耀, enlightenment)을 통해 주어진다.
그 깨달음은 그곳의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천국의 빛에 의해 이루어진다.
또 계시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유입하는 신성한 진리,
또는 그 신성한 진리를 통한 신성의 유입이며
그것은 인간의 내적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이해의 차원에 속하여
이해가 천국의 빛에 깨우침 받을 때 지각되는 진리이다.
그리고 그 계시를 지각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가 천국의 빛에 깨우쳐질 때 지각이 생기고
그때 계시의 진리가 지각된다.’(천비 8780)
‘일반적으로 이 지성의 영역은
주님에게서 비롯된 천국의 빛으로 보는
속사람의 시각을 가리킨다.
사람 안에는 천국의 빛 가운데 있는 지성의 영역에서부터
이 세상의 빛 가운데 있는 감각적인 것까지 내려온 것들이 있어
거기 생명을 불어넣고 대상물들을 지성적으로 보게 한다.
그 결과 그 감각적인 것들을 통해 들어온 온갖 지식들에 의해
그는 지성과 지혜를 얻게 된다.
따라서 만일 인간이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수집하지 못하였을 경우
거기 계시도 주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 응답에 대한 계시로 오는 내적 깨달음의 빛은
그 빛의 수용처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생각이나 지각으로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해 인간의 기억에 수집된 지식으로 흘러들기에
이러한 지식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러한 계시가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천비 5114, 5373, 9723)
물론 그러한 계시는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들은 것과 같은 특별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들리는 음성으로 주어지지 않고 사람이
내적으로(inwardly) 받는 계시를 의미한다.
이 계시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이해, 곧 내적 시각의
깨달음(조요 照耀, enlightenment)을 통해 주어진다.(천비 8780)
그것은 어두운 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며 스쳐 지나듯
순간적으로 그의 내면을 환히 비추는
깨달음(조요照耀, enlightenment)의 빛으로 온다.
그러나 시험 때 비치는 그 계시의 빛은
마치 교회의 종말의 때와 같아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밝히고
지나가기 때문에 주의하지 않으면 지각하지 못한다.
그만큼 많은 방해거리가 내면에 있어 그 빛을 유지하기 힘든 것이다.
(깨달음/조요/enlightenment : 내적 시각인 이해가
천국의 빛 안에서 대상을 밝히 보는 상태)
사람이 지성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이해의 기능과 기억의 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주님이 사람 마음의 합리적 부분에 유입하시면
그의 눈, 즉 그의 내적 시각인 이해가 열려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 상태에서는 그가 듣거나 읽는 진리가
그의 지성 깊은 곳에 있는 일종의 지각에 의해 확인이 된다.’
(천비 2701)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자연적 신앙을 영적 신앙으로 변화시킨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비춰보는 거울이고
그 지식은 인간의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영혼으로부터,
이해의 더 높은 영역으로 들어가는 선행(先行) 경로를 통해
인간에게 들어오는 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은 후행(後行) 경로를 통해 들어오는데
왜냐하면 그 지식들은 이해가,
계시된 말씀으로부터 육체적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형태의 유입은 이해의 중간에서 만난다.
거기서 단순한 신념인 자연적 신앙이 참된 시인인 영적 신앙으로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해는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정제 용기와 같다..’(순정 기독교 11)
‘또 기억의 지식은 내면적인 것이 마치 거울처럼
그 자신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수단과 비슷하다.
(기억의 지식은 더 깊은 것을 반영하는 수단이며 거울과 비슷하다.)
거울과 마찬가지로 이 (내면적인 것의)이미지 안에
신앙의 진리와 선이 반영되고 표징 되어 결과적으로
천국에 속한 것과 영적인 것으로 불리는 것들이 나타난다.’
(천비 5201)
지성적(intellectual)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적(mental)이라는 것과 다른 것은
그 안에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합리성이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선과 악이 진리와 거짓에 반하는 것임을 알고
이를 제거하려는 사람이다.
따라서 속에서부터 선을 선으로,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진리를 진리로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지
어떤 대상을 날카롭게 추론하고 분석할 수 있는 사람,
곧 지적인 사람 정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는 시각 또는 지각은
천국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밝고 선명한 빛이 비춰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빛을 수용할 수 없는 자에게 자연계에서 사물을 보듯
아주 밝고 선명한 빛 속에서 영적 대상을 보게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영혼에 독이 된다.
따라서 주님은 순수 진리를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마쳐질 때까지
상대적으로 보다 선명하지 않은 모호한 빛 속에 있도록
허용하심으로 그를 보호해주신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신성한 진리들을
오직 그늘진 곳에서 모호하게 볼 수밖에 없었으나
주께서 세상에 오신 후에는 밝은 빛 아래서 보게 되었기에
그만큼 진리는 가려진 것 없이
순수 그대로에 가까운 상태로 우리의 이해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주께로부터 오는 기도의 응답도
흐리고 모호한 것보다 밝고 선명한 빛 속에서,
또는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빛 속에서 보고 듣게 되면
더욱 좋을 텐데 실제로 그렇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 역시 아주 밝고 순수한 빛을
그대로 받을 수 없는 인간 편의 사정 때문이다.
주님 강림 후 구약에 더하여 신약의 말씀을 주셔서
이전보다 훨씬 밝은 빛 속에서 진리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순수 진리는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없었고
계시록에서처럼 여전히 문자 속에 꽁꽁 감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교회에 대한 또 한 번의 최후심판이 진행됨으로
그들의 지성이 순수진리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주님은 재림을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그동안 감춰진 순수 진리를 모두 보게 해주셨다.
그로 인해 이제 말씀 속 순수 진리를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는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빛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는 여전히 흐리고 모호한 빛으로 인해
진리를 왜곡하면서도 그것이 참 빛 인양
그 빛 속에 거할 수밖에 없다.(이전 글들 참조)
기도 응답도 그러하다.
아주 밝고 선명한 빛 속에서 보고 듣는 기도의 응답은
인간의 이성을 단번에 마비시키는 기적과도 같아 해롭기 때문에
주님은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이거나 확실한 것을 보려는
인간의 욕구에 응하지 않으신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결과가 확정되어 나타나기 전
주님의 뜻이나 그분의 음성을
구체적으로 확실히 보거나 들을 수 있게 하지 않으시고
다만 내면의 음성, 곧 깨달음의 빛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게 하시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증으로
그분과의 직접 교통의 경험을 내면의 깨달음보다
더 앞세우는 경우들을 본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으며
환상을 보고 기적을 경험하는 등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내적으로 보는 깨달음의 빛보다 더 중요시한다.
‘그들은 천사의 음성이나 환상 등으로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응답을 받는 것이
내적 깨달음을 통해 말씀으로 간접적인 계시의 응답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우월하게 여기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 경우가 더 밝고 선명한 빛 속에서
대상을 보기에 더욱 지혜로워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말씀을 통한 깨달음은
의지를 통해 이해로 가는 내적 경로로 이루어지는 반면
직접적인 계시를 통한 깨달음은
청각을 통해 이해로 가는 외적 경로로 이루어지기에
직접적인 계시로 유입된 것은 기억 속에만 있고
그의 삶으로 표현되지는 않기 때문이다.’(말씀에 관하여 13)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도 응답으로 주어지는 계시,
곧 주의 뜻을 알고 그 음성을 듣는 것은
일반적으로 내면의 깨달음으로 온다.
그러한 깨달음은 대체로
저마다 이해하여 기억 속에 저장하고 있는 성경 지식이나
또는 이 지식을 근거로 자신의 양심이 옳거나 선하다고 판단하여
받아들인 관념 위에 비추이는 천국의 빛을 통해 지각된다.
주님의 뜻과 주님의 음성을
보다 명확한 빛으로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주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영적 상태에서는 내면의 깨달음으로 오는 빛 또한
그리 선명한 것이 아니기에 지성의 도움을 받아
자기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흐리게 만드는 것들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응답으로 오는 주님의 계시를
내면의 음성으로 듣거나 내적 시각으로 보고 지각한다는 것은
계시가 어떤 특별하고 신비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성경을 읽거나
어떤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기도할 때
어떤 지각이나 생각이 자연스레 마음에 흘러들거나 떠오르고
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기도 하는 평범한 방식으로
응답이 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영적인 것이 아무리 특별하고 높아도
그것이 자연적인 인간에 계시되어 지각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춰 인간의 시각과 청각 등의 감각으로 유입되어야 하고
또 어떤 것을 지각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내면적으로 보는 것, 즉 내적 시각이기 때문이다.’
(천비 8780, 2535, 6063, 2245)
내면으로 들리는 음성이 기적 같은 특별한 것을 뜻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들은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깨우침으로 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듣는다는 표현 대신 본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천비 4408
‘..청각을 통해 들어오는 것
역시 세상의 빛으로부터 오는 시각적 이미지와
같은 형태로 내부에서 변환되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계시에 의한 내적 깨달음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내면 깊은 곳으로 유입한 것을
그의 지성이 합리성을 통해 지각하게 된 것,
즉 지성이 합리성을 통해 겉 사람에 속한 기억으로 유입하여
그곳에 저장된 지식들을 둘러보고
그의 애정에 적합한 지식들을 취하여 이로부터 일어난 생각에
계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것이 설마 주님의 응답인 줄 알아차리기 어렵다.
즉 사람의 내면이 열리면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와
그를 깨닫게 하는데 그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 빛이 사람의 기억 속에 있는 지식들로 흘러들 때
이 지식들은 자연적인 빛 속에 있고 사람은 이 지식들로부터 생각하되,
마치 그 생각의 근원이 자신인 듯 스스로 생각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는 그에게 흘러들어 오는 것을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천비 10551)
‘그러나 이러한 유입으로 인해 생기는 지각이나 생각이야말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보편적이면서도 능력 있는
응답임을 알아야 한다.
그의 내면에 음성을 들려주시고
또 그의 내적 시각을 열어 진리의 빛을 보게 하시는
이러한 주님의 응답은
보기에는 평범한 것 같아 거기 능력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된 지식과 달리,
또 천사의 음성이나 환상 등으로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 것과 달리
의지를 움직일 힘이 그 안에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지각이나 생각 속에는
감동을 일으키며 확연히 다가오는 큰 힘이 내재해있기 때문인데
그때 그가 보고 깨닫는 것은
그의 겉과 속의 상응으로 말미암아 그가 천사들이 거하는
천국의 빛 속에서 지각하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비 5114, 4526, 4405, 3223, 9577, 천국과 지옥 130)
천국과 지옥 130
‘천국의 빛이 영적이고 이 빛이 신적 진리라는 사실은
사람의 경우를 보아도 추론할 수 있다.
즉, 사람에게 신적 진리에서 비롯되는 지성과 지혜가 있으면
그만큼 그는 천사들처럼 영적 빛 안에 있고
그 빛으로 깨달음(enlightenment)을 얻는 것이다.
사람의 영적 빛은 그의 사고력(understanding, 이해)의 빛이며,
이 빛이 비추는 대상은 진리다.
사고력은 이 진리를 분석하여 분류하고 합리성을 형성하며
거기서 일련의 결론을 도출한다.
사고력을 비추어 이런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빛이야말로
진정한 빛이라는 것을 자연적인 사람은 모른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도 지각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을 비추는 진정한 빛, 즉 이 세상 자연적 빛과는
완전히 다른 빛이 있음을 자주 감지하고 목격하도록 허락받았다.
나는 내적으로 그 빛 속에 단계적으로 올라가 보게 되었고,
올라갈수록 내 사고력은 너무도 밝아져,
전에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게 되고
마침내 자연적 빛에 의한 사고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때로 나는 천국의 빛으로는 이렇게 분명하고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하기조차 했다..’
천비 9577
‘.. 너희가 산에서 보도록 허락받은 것..
이것은 영의 눈으로 천국에서 본 것을 의미한다..
천국에 나타나는 표징들에 대해 말할 때
"보는 것"이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가장 낮은 천국, 곧 첫째 천국에 거주하는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은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들과 유사한 것들의 형상,
예를 들어 낙원, 그 안에 있는 과일이 있는 나무, 꽃과 식물,
또한 집, 궁전, 마찬가지로 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끊임없이 보고 있다.
그 외에도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것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더 높은 천국에 존재하는
천국적 실체들을 표징 하는 것이며, 이러한 실체들은 아래에 있는
영들의 눈앞에 그와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
그것으로부터 천사적 영이 더 높은 하늘에 존재하는
특정한 실체들에 대해 알고 통찰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 심지어 가장 세부적인 것조차
표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 높은 천국의 실체들을 자연계에서는 자연적으로 보지만
영계에서는 영적으로 본다.
자연계에서는 상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나
천국의 빛이 세상의 빛에 흘러들어
자연적인 사물 안에서 영적 실체들의 표징을 볼 수 있을 뿐
대개는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아 그 표징을 보지 못하고
자연적인 사물 그대로 본다.
그러나 가장 낮은 첫째 천국에서는 상응이 이루어진 까닭에
그들이 보는 것은 천국의 빛으로 인해
더 높은 천국의 실체들에 대한 표징을 본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이 세상에 있는 한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따라서 물질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도록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눈은 너무 불완전하여
그 시력으로는 자연 질서의 비밀을 볼 수조차 없다.
확대경이 증명하듯이 자연 질서의 가장 작은 숨겨진 비밀을 보려면
이것들이 제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러한 눈은 극도로 어둡기 때문에
저 세상에서 영들에게 나타나는 표징들을 볼 수 없다.
이들이 나타나려면
세상의 열등한 빛이 눈에서 제거되어야 하고
그것이 제거되면 천국의 빛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 보인다.
왜냐하면 천국의 빛이 있고 세상의 빛이 있으며
천국의 빛은 사람의 영을 위해 존재하고
세상의 빛은 사람의 몸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예는 다음과 같다.
천국의 빛 속에 있는 것들은
사람이 세상의 빛으로 보는 한 짙은 어둠 속에 있으며 반대로,
세상의 빛 속에 있는 것들은 사람이 천국의 빛에서 볼 때
짙은 어둠 속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세상의 빛이 육체적 눈의 시각에서 제거될 때
사람의 영의 눈이 열리고
천국의 빛 속에 존재하는 것들, 즉 앞에서 말한 바
표징적 형상이 보이는 것이다..’
천비 3223
‘.. 사람을 비추는 빛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세상의 빛과 천국의 빛이 그것이다.
세상의 빛은 태양에서 나오고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나온다.
세상의 빛은
자연적인 사람 또는 겉 사람의 관심사들
(concerns,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심사들이 물리적 빛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관련이 있다.
자연적인 사람은 자연적인 태양의 세계에서
발생하고 보이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들이 그 세계의 빛과 그늘에 의해
눈에 보이는 어떤 형태를 얻지 않는 한 파악할 수 없다.
자연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하며
그것들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모든 시, 공간 개념도
역시 세상의 빛에 속한다.
그러나 천국의 빛은 영적인 사람 또는 속사람을 위한 것이다.
비물질적이라고 불리는 그의 지성적 관념들이
거주하는 사람의 내면적인(보다 깊은) 마음이 그 빛에 속한다.
비록 그가 자신의 지성을 시력이라고 부르고
그 빛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아무도 이것을
즉시 의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관심사에 몰두해 있는 한
그의 인식은 세상의 빛에 속하는 것들에 국한되고
천국의 빛에 속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며
천국 전체가 그 빛으로 뒤덮여 있다.
이 빛, 즉 천국의 빛은
세상의 빛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완벽하다.
세상의 빛 속에서는 한 줄기 광선을 만드는 것들이
천국의 빛 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광선을 만든다.
천국의 빛은
그 안에 지성과 지혜를 담고 있다.
이 빛은 겉 사람 또는 자연적인 사람에게 있는
세상의 빛으로 흘러들어
그가 감각으로 사물을 지각하게 하는 빛이다.
그리고 이 천국의 빛이 흘러들지 않았다면 사람은
어떤 인식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이 그 빛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겉 사람 또는 자연적인 사람이
속사람 또는 영적인 사람과 하나가 될 때,
즉 겉 사람이 속사람에게 종속될 때
이 두 가지 형태의 빛, 즉 천국의 빛에 속한 것들과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 사이에는 상응이 존재하다.
이 경우 세상의 빛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천국의 빛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표징한다..’
말씀에 관하여 13
‘.. 사람들은 영과 천사와 대화를 통해
직접적인 계시를 받으면 더욱 깨달음을 얻고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은 내적 경로로 이루어지지만
직접 계시를 통한 깨달음은 외적 경로로 이루어진다.
내적 경로는 의지를 통해 지성으로(이해로) 가는 것이고,
외적 경로는 청각을 통해 지성으로 가는 것이다.
사람은 그의 의지가 선에 있는 한
말씀을 통해 주님에 의해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의지가 악에 있더라도
그는 청각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깨닫게 될 수 있다.
악에 지배되는 사람의 지성에 들어오는 것은
그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으며,
기억 속에만 있고 그의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의 외부에 있고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적어도 죽음 이후에 조금씩 사라지거나 더 일찍 사라진다.
악에 지배되는 의지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질식시키거나,
그것을 위조하고 더럽히기 때문이다..’
앞에서의 그러한 능력들은
‘천국의 빛이 그의 기억에 수집된 지식을 비췰 때
그의 속사람이 그 빛 속에서 지식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그렇게 고양된 진리가 합리적인 선과 결합됨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이다.’
(천비 3190, 3084, 3391)
주님은 그가 외부에서 수집한 그 지식 위에
신성한 진리의 빛을 비춰주심으로
그 빛에 의해 그의 지성이 깨우침을 얻게 하시는 방식으로
과거 기적의 효과를 대신하게 하셨다.
우리가 육체의 눈을 통해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세상 빛이 대상을 비춰 그 모습을 환히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눈만 있으면, 눈의 기능만 잘 작동하면
대상을 볼 수 있으리라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빛이 대상에 비춰지지 않으면
대상과 그 주변이 어두워 사물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기에
눈은 대상을 볼 수 없게 되고 따라서 그 영상을 가져올 수 없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사물을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사람의 영이 눈을 통해 그것을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 빛이 대상을 비춰 그 모습이 드러나고
그것이 눈에 영상으로 맺힐 때
그 사람의 영(속사람)이 눈을 통해 대상을 보는 것이다.
여기 눈 대신 이해를,
그리고 세상 빛 대신 천국의 빛을 대입해 보면
인간의 내적 시각이 영적인 사물들을 보는 것도
같은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이해성만으로 천국과 영계의 사물,
곧 영적 시각의 대상물인 선과 진리들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천국의 빛이 그 대상과 주변을 환히 비춰주어야 볼 수 있다.
소위 사람의 합리성과 지성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대상은
모두 자연계라는 무대 위에 존재하고
그곳은 항상 자연적인 빛이 비치고 있으며
인간 역시 육체의 감각으로 그 빛 안에 살고 있다.
그러나 천국의 사물들인 선과 진리에 관한 영적인 것들은
겉 사람이 가진 기억의 창고에 지식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눈과 귀를 통해 수집되었기에
마치 그 활동 주체가 육체의 감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때 눈과 귀는 단지 기능적으로 활용된 수단에 불과할 뿐
실제 그것을 보고 듣는 주체는 그의 영인 것이다.
‘사실 속사람은 겉 사람에게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그가 수집한 지식이 담긴 그 기억의 저장소만 보는데
이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천국의 빛이다.
또 속사람은 그것을 봄으로 내적 시각인 이해를 통해
자신에 알 맞는 것을 골라 내적 기억에 저장하고
때를 따라 그 안을 들여다보며
중요한 원리로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을 끄집어내어 사용할 수 있다.’(천비 9723, 9394)
진리의 말씀이 강력한 능력으로 인간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기억 속 지식으로 저장되어 있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것에 생명이 불어넣어져야 한다.
내면의 깨달음으로 오는 계시에는 그러한 힘이 있다.
그것은 기록된 성경 말씀이나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말씀 정도가 아니다.
주님이 사람 안에서 생생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보다
더한 능력이 그 안에 있다.
이른 바 사람의 영적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그 안에 있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계시가
천국의 빛으로 깨우침을 받은 그의 이해를 통해 지성에 지각될 때
그것은 큰 감동과 자유함 속에 지옥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주님이 자기 안에 말씀하시는
계시를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때 그 계시의 말씀은 삶을 변화시킬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와 내면에서 보고 듣는 계시의 말씀은
인간의 성품에 맞춰 수용되기 위해 그 안에 신성한 진리가 내재한,
선과 진리에 대한 교리의 형태로 유입한다..’(천비 7004)
‘이는 오늘날의 인간은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을 가지지 못하고
마치 구름 속 물방울에서 반사된 햇빛이 무지개를 만드는 것처럼
시각과 청각이라는 외부 경로를 통해 마음에 들어온
지식 속에서만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사람에게 있는 진리 안으로 작용할 때,
그 진리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명확한 경우는 거의 없고
다만 그 진리와 상응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과 그에 따른 애정이 생겨날 뿐이다.
그때 천사들의 작용은
선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진리로 구성된
빛줄기가 유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천사들은 상응에 의해
인간의 기억이라는 저장소에서 발견하는 언어로
자신들의 생각에 옷을 입힌다.
그들의 영적 관념은
자신의 차원에서 아래로 유입할 때
자연적 관념으로 바뀌어 다른 모양과 모습을 취하고
그들의 영적 사고는 겉 사람의 자연적 사고로
흘러 들어와서 거기 나타난다.
그러한 경우 비록 겉 사람은
자연적 사고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고 여기지만
정작 깨달음을 주며 주님의 유입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는 것은
영적인 사고요 영적인 관념이다.’(천비 10551)
이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에 대한 내면의 깨달음은
시험과 고난에 지쳐 절망 속에 있는 자를 일으켜 세우는 큰 힘이 된다.
그 내면의 빛이 그의 마음을 환하게 조명하면
그의 모든 어둠과 답답함이 사라지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다.
주님을 찾은 성경 속 수많은 병자들처럼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꺼리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될 때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연약함이나 절망적인 환경에서 돌이켜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어둠 속 한 줄기 빛이 나타나 생각을 환희 비추일 때,
다시 말해 내면을 비추는 천국의 빛에 의해
하나님의 계시가 환한 빛 속에 지각될 때
비로소 그는 응답으로 주님의 뜻과 음성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고
앞선 이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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