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因緣
<제8편 풀꽃>
①어느 봄날-37
천복은 보덕이 상은을 말하고 있다는 걸 이내 알아차리자, 속으로는 울적한 마음에 놀라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그녀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잇고, 있었다.
“...그는 새벽녘이면, 인수보살을 따라 불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고 기도하며, 불심에 심취되었소이다.”
‘보덕스님! 내 죄가 큽니다.’
천복은 그녀에게 이렇듯 모두를 털어놓고, 고백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마치 천복이 상은의 소식을 묻기라도 하였듯 아주 자세하게 그녀의 일상적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복과 상은사이가 어떠한 관계인지는 아직 모르리라고, 짐작하였다. 다만 도선암에 식구 하나가 더 늘어 네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상은의 이야기를 꺼내어놓았던 걸로 믿어지었다.
인수보살과 보덕, 그리고 한창 자라나고 있을 만덕과, 임신한 채 입산한 상은이 이렇게 네 식구로 늘었다는 소식 말이었다. 그렇게 전하다보자니, 상은에 대한 이야기가 저절로 흘러나왔을 게 분명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앞에서 입을 열어 자신의 죄가 크다는 걸 실토하고, 싶었던 거였으나, 그만큼 보덕은 몸에 농익은 불가의 향내가 짙게 풍기었던 거였다.
그녀는 연신 말을 잇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본디 사회학을 전공하다가 철학과로 바꾸었다는데, 그로부터 그 자신이 사회를 초연하게 보는 관념이 생겼다고, 털어놓더군요. 자기 자신의 인생관이라든지, 결혼관과 생활관 같은 데는 취미를 잃고, 말았다는 얘기였어요.”
“...!”
그녀의 상은이 하였다는 말은 이미 천복이 서울에서 그녀를 만났을 적에 그녀 스스로가 쏟아놓았던 내용들이어서 갑자기 그녀의 체취가 느끼어지는 거만, 같았던 거였다.
“그동안 우리 도선암을 여러 해 동안 드나들었던 그 한상준 씨란 학도의 흔적을 따라서 불문에 들어오게 되었다더군요. 한상준은 불자께서도, 이미 잘 아시다시피 고시공부를 했잖아요? 지금은 문교부에 근무하고 있다는데, 여학생이 온 뒤로는 한 번도 온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천복이 상은의 오빠 한상준과 방학 때 도선암에 들어오면, 서로 만나 시국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일을 되살리면서 묻는 거 같았다.
“알고말고요. 그때 도선암에 함께 있었으니까요.”
천복은 담담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그 여대생이 바로 그의 여동생이라는군요.”
보덕의 말에 천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어 보이었다.
“...!”
“어느 날 그녀는 내게 푸념처럼 말했어요.”
보덕은 어느 날 푸념처럼 말하였다는 상은이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옥희가 밥상을 들이어오고 있었다. 스님밥상이라 생선이나 고기는 없었고, 김치 동치미랑 고사리나물에 말린 호박나물, 그리고 맨숭맨숭한 미역국이 상위에 올라 있었다.
“부인이 내 바랑이랑 가사를 죄다 벗겨 옷장에 잘 넣어두었답니다.”
그녀는 밥상을 앞에 놓고, 옥희가 듣는 앞에서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보덕이 스스로 가사를 벗어부치고, 속옷차림으로 앉은 게 아니라, 옥희가 죄다 벗기어서 챙기어두었다는 말이었다.
아직도 낮에는 봄볕에 가시가 돋치고, 뒷방이라 훈기가 덜 미치는데, 할랑한 속옷에 살빛이 어른거리는 게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 한마디를 흘리고는 시장기가 일었는지, 다복다복 밥술을 입으로 가지어가고 있었다.
옥희는 다시 나아가 정읍댁과 바우네가 있는 방에 밥상을 들이어갔는지, 좀 뒤에는 숭늉을 양푼에 퍼들고, 들어오는 거였다.
그녀는 잠든 지흥이를 깨워 젖을 물리면서 말하였다.
“스님, 시장허실틴디, 건건이넌 읎지먼, 많이 드셔유.”
그러자 보덕이 밥술을 뜨다가 말고, 대꾸하였다.
“이만하면 족하지요, 뭘 또? 오랜만에 불자를 만났으니, 굶어도 배가 부르군요.”
보덕은 옥희의 말에 사족을 붙이고 있었다.
“지가유. 스님이랑 우리 냄편새럴 모르건남유. 냄편이 성공언 못혔어도, 절간이 있얼 적이 스님께서 도와주신 은공얼 지가 갚어야헌디. 증말로 고맙고, 죄송혀유.”
“부처님보다 착한 처자!”
보덕은 음식을 우물거리면서 옥희에게 부처님보다 착하다고, 극찬하고 있었다.
보덕이 또 저녁을 그러한 대로 마친 뒤에는 구수한 숭늉 한 모금을 마시더니, 물린 밥상을 내려는 옥희에게 생경하게 말을 건네는 거였다.
“소승도 처자와 똑같은 인간이오. 오욕(五慾)을 물리치라는 계시 때문에 입술을 깨물어야하는 중생이나, 다를 게 털끝만큼도 없소이다. 무아의 경지를 항상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은 하지만, 한번 맺은 인연을 저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그렇겄지유.”
첫댓글 보덕이 천복과 잠시 치룰 행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 자락 까는 듯 싶습니다 ^^*
ㅎㅎ 그러네요.
모든 불륜 범죄 무도가 까닭이 없을 순 없겠지만 다 핑계를 대면 그럴듯하지요.
보덕은 비구니를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왜냐면 종교도 인구가 많아야지 사람이
없으면 그도 소용이 없으니 사람을 만든다는 데에 반대할 업종이 없을 겁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풍수학에서도 자손번성하는 발복지가 있지요. 내가 50년간
각처를 뛰면서 염원했던 건 바로 인간이 번성해야한다는 거였지요. 그래서 부자되고
명예얻고 권세를 누려도 다 부질없는짓이고 첫째 자손이 만당해야한다는 입장을 언제나
강조했어요. 그런데 보덕은 얄팍한 욕구는 아니고 인간의 바탕을 말하지요. 보덕도 인수보살만큼
지식을 갖춘 기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