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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arksd0907님의 플래닛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하얀나비
정조대왕님의 아름다운 예술적 성품은 역대 유일할만큼 띄어났다고봅니다.
파초芭蕉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 다음해 영조가 죽고 난 다음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된 후,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내는 동안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가지며 학문과 수양에 힘썼다. 그런 과정으로 인해 정조대왕은 즉위하자마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펴 나갔고, 홍국영을 중용하여 장헌세자를 죽이게 하고 자신의 즉위를 끈질기게 방해하였던 벽파僻派 일당(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홍상간洪相簡, 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했고, 바로 이어 왕의 총애를 믿고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함으로써 친정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는 영조의 기본정책인 탕평책蕩平策을 계승,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여러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 있게 장려하고 진작하였으며, 서얼을 등용하고,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또한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하여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며,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이는 정조대왕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당시 정치문제로 되고 있던 서학(西學)에 대하여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것이었다.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그가 그린 <파초>를 보면 참으로 쓸쓸하다. 바위 옆에 꼿꼿하게 서있는 파초가 넓은 잎을 좌우로 상하로 펼치고 있어 그의 덕과 기개와 아량을 볼 수 있지만 느낌은 참으로 적막하기 그지없다. 그도 안견을 불러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던 世宗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같은 심정이었을까. 파초를 보면 그가 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견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밤을 세워가며 사형수의 결옥안을 10번이나 확인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애를 쓰고, 궁성 밖 행차를 통해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했던 그가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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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하는마음으로 잘보았습니다 추운데 감기조심하셔요 송정선생님...
잘 보았습니다.
어려운 그림 잘 보구 갑니다....
우리나라 역대 임금 중 이처럼 그림의 세계까지 섭렵한 임금이 또 있습니까? 잘 몰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