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런 영광이...나의 존경하는 선배님께서 나를 지목해주시다니...
당시 선배들에 대한 감정은 이럴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데, 왜 나를 지목하고 난리야! 그저 눈은 높아서..." (종훈선배, 왔다는 거 사실이에요? 중국가기 전에 나한테 연락 안 해서 나 무지하게 삐졌는데, 그거 풀어 줄려면 돈 좀 꽤 들걸.내 맘 알지?)
종훈 선배의 글을 읽고, 많은 후배들이 머리에 쥐가 났을 것이다. 혹 카테고리를 무슨 고리의 일종으로, 혹 헤게모니는 석가모니의 가족쯤으로 생각하는 후배들이 있지 않을까? 학습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난 당시 86학번이던 언니의 영향을 받아 이미 고교시절부터 운동권학생(?)이 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입학을 했다. 고3때 읽었던 '꽃바람 꽃샘바람'이라는 소설의 주인공 '윤익'의 여자친구 '은미'가 학보사 기자였는데, 그 때문인지 벌써 고3때부터 입학하면 학보사에 들어가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광야'를 듣게 되었는데, 어린 감수성탓인지 눈물이 나는 거였다. 그래서 실제로 입학할 즈음에는 노래패에 들어가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내가 한림대에 입학했을 당시에, 학교는 학민투쟁으로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하늘의 뜻이었던가 매점에서 당시 총학생회 사회부장으로 매 집회를 이끌고 있었던 함성87 태준건 선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 형부의 후배였던 것이다. 그것이 결심의 계기가 되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같은과 우명희와 함께 함성 오디션을 보게 되었는데 미모의 여성회원이 부재했던 탓인가 선배들로부터 환영을 받게 되었다.(안 믿거나 반박하는 사람 있으면 학번에 상관없이 칼부림이 있을 것)
그러다 학민투는 파업으로,파업은 휴업령으로 이어갔고, 그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첫mt를 가게 되었다.
남이섬 1박2일의 일정으로 떠났는데, 지금과는 달리 재정정 후원을 해 줄만한 선배가 없었던 지라, 여유자금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약 20여명의 인원이었는데 마치 분륜 한 쌍(87권순원, 89임현진)이 여행온 것처럼 가장하여 방가로를 하나만 빌리고 그 옆의 또 하나는 모 선배가 창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열어 적은 돈에 방가로 2개를 얻은 셈이 되었다.
또 지금과는 달리 MT에 대한 준비는 철저한 역할분담 속에 치밀하게 계획되어 식사와 술, 그리고 각종 안주를 푸지게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밤새 이어진 술자리와 끝없는 노래, 90이 입학하기 전에는 단 한 명도 술자리에서 먼저 떨어지는 일이 없어서 그 자리가 끝난 후에도 인원은 늘 그대로였다. 그 관례가 90의 조모, 임모군(그러고 보니 조일균은 그런 법이 없었지)에서 깨지기 시작하더니, 지난 6월 MT를 보라. 얼마나 정신산만하고 무질서하며, 비계획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지 membership을 다지려다 불신을 낳지 않았는가. 함성 지도부는 술자리에서 먼저 떨어지는 이들을 개조하라!
당시 함성에는 여자 선배가 한 명(97이정아, 주량 소주 한 모금)밖에 없었다. 따라서 mt뿐 아니라 모든 술자리에서 우리는 끝없는 주량의 선배들을 대작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주량은 일취월장이었다. 생각해 보라, 윤종훈선배의 20kg은 모두가 술과 안주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 20kg을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술만 마신 게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바, 치밀한 준비라 함은 먹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mt의 목적성은 구체적인 프로그램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첫mt는 신입생환영mt였는데, 대학에 대한 낭만적 꿈이 산산조각나고, 계속되는 학민투에 지친 신입생들을 위로하고, 적응시키기 위해 선배들은 노력했다. 선배들이 대부분 학생회 간부였기에, 제대로 노래를 배울 시간이 없었던 우리를 위해 많은 악보를 준비해서 배웠으며, 함성의 위상과 향후 일정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함성은 자기완결적 구조를 지니지 못한 채, 인자양성에만 급급했던 탓으로 2학년만 되면 벌써 학생회 간부, 혹은 선거후보로 발탁되기 일쑤였다. 그즈음 우리에게 온전히 함성 선배였던 사람은 세사람도 안되었다. 과거 이런 함성의 고민이 어떤 경로로 거급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차후 진지한 대화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1박2일의 일정으로 마치고 춘천으로 돌아가던 중 아쉬움에 발걸음이 안 떨어진 우리는 가다가 강촌에서 내려, 또 1박을 하게 되었다. 물론 궁색했던 탓으로 여학우은 텐트 안에서, 남학우는 텐트 옆에서...또 밤새 이어진 술자리와 끝없는 노래, 삼삼오오 짝을 이뤄 담소를 나누고...동틀 무렵 얼마나 춥던지...
mt의 완결편은 귀춘천으로 이루어진다. 절대 개인행동은 없지. 서울에 가는 한이 있어도, 일단은 춘천으로 함께 가야만 하지. 물론 걸어서...
이틀 동안의 과음과 수면부족으로 심신이 지친 우리는 정신력으로 걸어야만 했어. 아마도 그때 가위바위보로 짐 들어주기까지 했던 것 같은데, 대체로 단순한 봉채가 들게 되었지. 그 대를 나중에는 한경이가 이었지만 말야. 단순한 아이들의 특징이 원지 아니? 꼭 가위 바위 보 순서로 내. 그러다가 계속 지게 되면 한참을 생각하지. 그러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위를 내는 거야. '어, 이것 봐라'생각이 들 필요가 없지.그 다음부터는 바위 보 주먹 순이니까. 그런데 세원의 힘이란 어찌나 대단하던지, 얼마전 보니까 한경이 실력이 많이 늘었더군.
하여튼, 졸며 졸며 춘천으로 왔지. 여기서 끝일까? 아니지, 뒷풀이와 평반의 시간이 바로 이어졌지. 그 mt를 계기로 선후배의 결속을 도모했음은 물론, 어렵게만 느껴졌던 86선배들과도 친해지게 되었지. 또 학교로 돌아가서 선배들에게 이끌려 다니는 후배가 아닌, 모든 집회와 투쟁에서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신감도 길렀고 말야.
난 지금도 강촌으로 지날 때면 그 때의 기억으로 흐뭇해질 때가 있어. 가끔은 그랬던 우리가 서로 연락도 못 하고 지내는 무심함과 바쁜 일상때문에 서글프기도 하지만...그래도 영원히 잊지 못할 mt였지.
'먹고 죽자'는 함성의 술자리가 전원 무사귀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선배들의 노력의 결과라는 점도 후배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어.
에피소드)남이섬 방가로에서 어떤 선배가 자다가 이불에 구토를 했지. 처치곤란한 우리는 이불을 둘둘 말아 한 쪽에 엎어 놓고, 서둘러 범죄현장을 빠져나왔어. 지금 생각해 보니, 이건 추억이 아니라 지우고 싶은 기억이야. 이 정도로 마시진 말자.
광고)이 글을 읽고, 선배들의 mt모습에서 본받아야 할 전과 지양해야 할 점을 각각 지목해서 게시판에 올린 후배에게 푸짐한 술과 안주를 사 주겠다. 물론 서울에서. 왜냐면 난 후배들과의 mt에 한맞힌 게 많은 사람이야. 그 한을 풀고 싶다.
릴레이 지목) 90조한경. 주제는 나의 첫키스. 어? 정향이때문에 안되겠군. 그램, '함성과의 첫만남에 대한 나의 첫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