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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테레즈는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4세와 프랑스 앙리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드 부르봉의 사이에서 1639년 9월 10일 스페인 에스코리알에서 태어났으며, 1660년 6월 9일 루이 14세와 결혼했다.
왕비는 매우 무지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정숙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예의범절에서 확실한 위대함을 가지고 있었고 궁정을 어떻게 유지해 나가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왕비는 국왕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좋든 나쁘든 모두 다 믿었다.
그녀의 치아는 매우 보기 흉했는데 검고 부러져 있었다. 이것은 왕비의 초콜릿을 마시는 계속된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해진다. 또한 왕비는 자주 마늘을 먹었다. 그녀는 키가 작고 뚱뚱했으며 피부는 우유처럼 매우 희었다.
왕비가 걷거나 춤추지 않을 때는 매우 키가 큰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먹었는데 그녀의 음식은 언제나 노래부르는 새에게 주는 만큼 작은 조각으로 잘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식사 예법이다. 입술과 볼에 동물처럼 묻히고 먹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왕비는 고국을 잊을 수 없었고 그녀의 예법은 언제나 눈에 띄는 스페인 식이었다. 그녀는 놀이를 매우 좋아해 바세트, 리베르시스, 옴브르와 같은 카드놀이와 때때로 프리메로를 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건지 몰랐기에 이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
왕비는 국왕에게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기 위해 그의 눈빛을 늘 주시하곤 하였다.
만약 그가 그녀를 친절하게 대해준다면 왕비는 남은 날 동안 유쾌한 기분으로 있었다. 국왕이 왕비를 위해 자신의 애인들을 버렸을 때 왕비는 매우 기뻐했고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그녀는 이 주제에 관해 농담하는 데에 어떤 반대 의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작은 손을 비비며 눈을 깜박이면서 웃곤 하였다.
루이 14세 애인1- 헨리에타 앤(앙리에트 안) 스튜어트
1644년 6월 16일 엑시터에서 출생
1670년 6월 30일 생 클루에서 사망
아버지는 영국 국왕 찰스 1세, 어머니는 프랑스 왕녀 앙리에트 마리(헨리에타 마리아) 드 부르봉
1661년 3월 31일 팔레 루아얄에서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결혼
미네트로 알려지기도 한 헨리에타 앤은 영국 왕 찰스 1세와 프랑스 왕녀 앙리에트 마리의 막내딸이었다. 헨리에타는 엑시터에 있는 베드포드 하우스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지 2주 후, 어머니인 앙리에트 왕비는 헨리에타를 레이디 빌리어스에게 맡기고 영국을 떠났다. 헨리에타 앤('앤'은 카톨릭 세례를 받고 나서 덧붙여진 이름이다)은 2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헨리에타 앤은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파리에 있는 팔레 루아얄에서 결혼하였다. 이 결혼으로, 헨리에타 앤은 프랑스에서 두번째로 가장 권세있는 여성이 되었다. 그들이 결혼했을 때, 필리프는 헨리에타와 매우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는 곧 그녀에게 싫증을 냈고, 그녀 역시 마친가지였다. 헨리에타와 루이 14세가 밀통을 했다는 몇가지 증거가 있으며, 그녀의 첫째딸이었던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은 아마도 필리프의 자식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자식이었을 것이다.
헨리에타 앤은 오빠인 찰스 2세와의 서신 왕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도버 밀약(1670)을 협상할 때 오빠를 도와주었다. 이 협정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공격적이면서도 방어적인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협정이 체결된지 2주만인 1670년 6월 30일, 헨리에타는 파리 근처의 생 클루 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헨리에타 앤의 죽음에 관해서, 남편의 질투심 많은 애인인 로렌 기사(슈발리에 드 로렌)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말년에 헨리에타 앤은 매우 불행했다. 그녀는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너무 신뢰했다. 사악한 이들과 관련되어 있었던 그녀는 비난받기보단 동정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젊고, 예쁘고, 명랑했던 그녀는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람둥이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지독한 적들의 정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헨리에타 앤의 사후 검시가 이루어졌고, 천공성 궤양으로 인한 복막염으로 사망한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루이 14세 애인 2 - 아테나이 드 몽테스팡
1641년 4월 26일 출생
1707년 5월 28일 부르봉 라르샹보에서 사망
1663년 1월 28일 앙탱과 몽테스팡의 후작 루이 앙리 드 파르델랑 드 고르댕과 결혼,
1674년 7월 7일 이혼
1641년 Tonnay-Charente 성(오늘날 Charente-Maritime 성)에서 태어난 몽테스팡 후작부인 프랑수아즈는 가브리엘 드 로쉬슈아르의 딸이었다. 프랑수아즈는 성 마리 수녀원에서 교육받았고, 20살 때 마리 테레즈 왕비의 시녀가 되었다. 1663년 1월, 그녀는 1살 연하인 몽테스팡 후작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으며 아들은 훗날 앙탱 공작이 되었다.
처음에 루이 14세는 몽테스팡 부인을 견딜 수 없어했고, 오를레앙 공작과 왕비가 그녀와 교제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마침내 왕은 그 스스로 몽테스팡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오를레앙 공작부인 리젤로테의 말에 따르면, 몽테스팡 부인은 방탕한 여성이라기보단 야심찬 여성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악마 그 자체인 것처럼 사악했다. 그녀는 야망을 위해 어떤 희생이든 만들어낼 것 같았다.
미모는 그녀의 매력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몽테스팡 부인은 생 시몽이나 세비녜 부인같은 사람도 감탄할 만큼 교양있고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었다.
몽테스팡 부인의 입은 매우 예뻤고, 그녀의 미소는 매우 기분좋은 것이었다. 몽테스팡 부인의 얼굴빛은 라 발리에르보다 더 희고 깨끗했으며, 눈빛은 더 대담했고, 전체적인 용모는 그녀의 매혹적인 기질을 나타내고 있었다. 몽테스팡 부인은 라 발리에르에게는 없는, 매우 밝고 아름다운 머리칼과 고운 팔, 예쁜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 발리에르는 항상 깔끔했던 반면, 몽테스팡은 극도로 불결했다. 그녀는 대화할 적에 아주 재미나는 사람이었고, 그녀와 함께 이야기할 때 지겨워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몽테스팡 부인은 왕비의 지위를 공공연히 불쾌해하였고, 이는 궁정을 몹시 놀라게 했다. 몽테스팡 부인과 루이 14세 사이에 태어난 7남매 중 1669년 3월에 태어난 맏이가 스카롱 부인에게 맡겨졌다. 스카롱 부인은 훗날 맹트농 부인이라 불리게 되며, 왕이 전쟁에 나간 동안 몽테스팡 부인의 친구로 지냈다.
몽테스팡의 아이들은 1673년 합법적인 자식이 되었는데, 이때 그 어머니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몽테스팡 부인이 그들의 어머니로 여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첫째인 루이 오귀스트는 멘 공작이 되었고, 둘째 루이 세자르는 벡생 백작, 셋째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마드무아젤 드 낭트(훗날 부르봉 공작부인)가 되었다.
1674년, 몽테스팡 후작이 스페인으로 물러나도록 강요받을 동안, 샤틀레의 여섯 판사로부터 도움을 받아 법적으로 공식적인 부부 별거가 선언되었다.
루이 14세 애인 3 - 퐁탕주 공작부인
1635년 9월 8일 니오르에서 출생
1719년 4월 17일 생 시르에서 사망
맹트농 후작부인 프랑수아즈 도비뉴는 1635년 니오르의 감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다. 프랑수아즈의 아버지는 쉬리노와 오비니의 영주인 콩스탕 도비뉴 남작이었고, 어머니는 잔느 드 카르디약이었다. 잔느는 감옥에 갇힌 남편 곁에 머물게 되었다. 콩스탕은 위조죄로 수감된 것이었지만, 또한 그는 살인자이기도 했다. 프랑수아즈는 위로 두 명의 오빠가 있었다. 큰 오빠인 콩스탕은 1628년 태어나 1646년 사고사했으며, 작은 오빠 샤를은 1634년 태어나 1703년 사망했다.
프랑수아즈의 할아버지는 테오도르 아그리파 도비뉴로, 군인이자 역사가이며 시인이자 칼뱅교도였다. 앙리 4세 치하의 위그노 운동 속에서, 조부인 테오도르의 삶은 위험과 모험으로 점철되었다. 테오도르는 제네바의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했고, 영웅으로 죽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불태워졌다는 'Histoire Universelle and Histoire Secrete'를 비롯하여, 'Les Aventures du baron de Foeneste' 와 'Les Tragiques, poemes satiriques'같은 저서를 남겼다.
프랑수아즈의 아버지는 위그노에 대한 찬동으로 박해받았다. 신교도 신앙의 대물림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즈는 카톨릭 교도로 세례를 받았다.
콩스탕이 출소했을 때, 콩스탕은 자신이 라 마르티니크의 통치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여 가족들을 전부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맡고 있었다. 2년 후, 그는 결국 단념하고 라 로쉴로 갔다. 가족들은 마르티니크에서 몇 년을 보냈으나, 콩스탕의 부음을 접하자 프랑수아즈와 어머니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주 빈곤하게 살았다. 12살 때, 프랑수아즈와 두 오빠는 친척인 신교도 아주머니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와 대모 뇌이앙 부인은 안 도트리슈 왕비로부터 특별 승인을 받아, 어린 프랑수아즈를 그 신교도의 집에서 납치했다. 이 당시, 프랑수아즈는 칠면조를 모으며 시종으로 일했다.
마침내 프랑수아즈는 니오르에 있는 위르쉴린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프랑수아즈는 여전히 카톨릭 신앙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파리에 있는 다른 수녀원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프랑수아즈는 자유를 얻기 위해 개종하기로 결심했고, 매우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프랑수아즈가 아직 16살일 때, 그녀의 대모는 프랑수아즈를 결혼시키기로 결심하고는 프랑수아즈보다 25살이나 연상에 심각한 류마티즘을 앓고 있던 한 남자를 배우자감으로 골랐다. 1652년, 프랑수아즈는 폴 스카롱과 결혼하였다.
시인이었던 폴 스카롱은 프랑스의 사실주의 소설가이자 'Roman comique'로 기념되는 극작가였다.
폴 스카롱의 'Nouvelles magicomiques'는 몰리에르, 보마르셰 등에게 캐릭터, 플롯 그리고 타이틀을 제공하였다. 스카롱은 자신의 집에 살롱을 열었다. 그의 살롱에는 방세라드, 마리니, 모르트마르, 빌라르코, 세비니 후작부인 등이 출입하였다. 스카롱의 지위를 통해 프랑수아즈는 파리의 문학계와 지식인 사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녀 스스로도 훌륭한 작가였다.
1660년 스카롱은 약간의 빚을 남긴채 세상을 떠났다. 프랑수아즈는 빈털터리였지만, 왕의 모후는 그 미망인에게 죽은 시인의 연금을 계속 지급하였다.
진짜 전설은 1669년 시작되었다. 몽테스팡 부인은 루이 14세와의 사이에 첫아이를 갖게 되었다. 맹트농 부인은 이 아이를 비밀리에 감추도록 고용되었고, 태어날 때까지 대기하다가 아이를 파리에 있는 작은 집에 숨겼다. 이는 몽테스팡 후작이 이 아이를 그의 적자로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아이가 생겼을 때도 같은 일을 요구받았고, 이번에는 파리 밖에 있는 또다른 집에 숨기게 되었다. 몽테스팡 부인이 다시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왕은 맹트농 부인 프랑수아즈를 가정교사로 임명하기로 결심했다. 왕의 사생아 6명은 모두 보지라르에 머물렀다. 1673년 모후가 죽었을 때, 왕은 몽테스팡 부인의 아이들을 합법적인 자식으로 만들었고, 프랑수아즈는 베르사유 궁으로 갈 수 있었다.
마리 테레즈 왕비의 시녀였던 몽테스팡 부인은 몽테스팡 후작과 이혼하고 왕의 공식적인 정부가 되었다. 맹트농 부인은 마리 테레즈 왕비에게 헌신하였고, 왕비는 그녀의 품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때가 1684년으로, 루이 14세는 맹트농 부인 프랑수아즈 도비뉴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프랑수아즈가 왕의 정부였다는 사실은, 비록 가능한 일일지라도, 그녀의 높은 도덕적 규범을 생각한다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를레앙 공작부인은 맹트농 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맹트농 부인은 재치에 부족함이 없었고, 화술이 뛰어났다. 그녀는 후작부인으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앟았고, 맹트농 부인으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하였다.
맹트농은 왕세자비를 싫어했는데, 이는 왕세자비가 자신을 어린 아이처럼 다루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왕세자비는 궁정을 지키고 싶어했고, 맹트농 부인 프랑수아즈가 스스로의 신분에 맞게 살길 바랬다. 그러나 이 늙은 여자는 참을 수가 없었고, 참으려 하지도 않았다. 맹트농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걸 아주 좋아했고, 나중에 부르고뉴 공작부인과 함께 그렇게 했다. 그녀는 왕이 자신을 왕비로 여기고 그렇게 선포하길 바랬다. 그러나 맹트농 부인의 갖은 술책에도 불구하고, 왕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비와 왕세자비가 있던 그 시절에는 궁정의 모든 것이 정숙함과 위엄으로 통솔되었다. 은밀한 환락에 탐닉하던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상황을 계속 존중하였다. 그러나 맹트농의 지배가 시작되고부터, 그리고 왕의 서자들이 왕족의 일원으로 만들어진 뒤부터, 전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맹트농 부인은 1715년 왕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다. 맹트농 부인은 왕의 장관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국가의 문제들에 있어서 왕에게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중 대부분은 앙리 4세 이후로 여전히 프랑스에 살고 있던 다수의 신교도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맹트농은 7년간 감옥에 갇혀있던 마담 드 기용을 석방시켰다. 기용 부인은 당시 교황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정적주의(17세기 말 신비주의적 종교운동)를 가르친 혐의를 받고 있었다.
맹트농 부인은 귀족 혈통을 가진 가난한 소녀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그 소녀들이 자신들과 같은 계급 또는 그 이상의 남자와 결혼할 때를 위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날 무렵, 맹트농 부인은 생 시르로 떠나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