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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과 누명에 대한 예화
▣ 빠삐용과 샤리에르
영화 빠삐용의 실제 주인공 '앙리 샤리에르'는 20세 때 파리 시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 당했습니다. 검사는 거짓 증인을 내세워 살인자로 누명을 씌웠고 샤리에르는 중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검사에 대한 복수심으로 탈옥을 결심했고 탈옥 후에는 남미 곳곳을 다니면서 갖은 일을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자신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나자 그 검사를 죽이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과거에 대한 향수와 복수에 대한 다짐으로 누명을 당했던 거리를 거닐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고민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복수를 포기한 대가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겼다. 친구여. 너는 자유롭고 사랑받는 네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에 있다. 내 원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라. 그들은 과거의 한 부분일 뿐이다."
37년동안 스스로 가두어 두었던 자신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류중현 / 사랑의 편지 발행인
▣ 억울한 일을 겪을 때
살다보면 억울한 일을 겪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정성을 다해 도와준 사람에게 오히려 엄청나게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있는 힘 다해 열심히 일했는데도 하루아침에 누명을 쓰고 일터에서 쫓겨나는 수도 있습니다. 엉뚱한 오해를 받아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악의에 찬 중상모략에 의해 한 집안의 앞길이 막히기도 합니다. 억울한 일은 직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일어나고 집안에서도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와 노회와 총회와 기독교 단체 안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억울한 일은 개인만 겪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겪기도 합니다. 이는 지난 세기를 지내오면서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지역적으로 민족적으로 겪은 숱한 불행에서 잘 드러납니다. 때때로 다행스럽게 사건의 앞뒤를 잘 밝혀서 마침내 억울함을 풀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한 번 상처 입은 마음과 몸을 본디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억울함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한평생 억울함을 곱씹으며 살아야 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홧병을 얻어 목숨을 잃기까지 합니다. 대를 물려가며 억울함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겪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아시고 마침내는 잘잘못을 가려 주실 하나님에 대한 굳센 믿음을 잃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억울함을 밝히고 풀 수 있도록 끝까지 힘쓰되 그 억울함이 나의 삶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잘 다스리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정말 너무 너무 억울한 일을 겪으면 여간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무엇보다도 정서적으로 이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아니, 사람이란 것이 바로 그런 존재이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게 목숨을 잃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억울함을 풀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 앞서, 우리 스스로 알게 모르게 남을 억울하게 하는 짓을 저지르고 있지 않은지 늘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억울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 사건의 한가운데에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박동현
▣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고문서를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알아봤더니 그분 조상의 노비문서였다는데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이 노비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전문가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소설 "동의보감"에 조금 언급되기도 했지만 효종8년(1657년) 9월에 선조실록을 수정해서 나온 "선조수정실록"과 인조11년(1633년) 유성룡이 쓴 "서애집"을 보면 임진왜란 때 선조가 왜군의 침입으로 궁궐을 비운 후 왜군이 한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경복궁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노비문서를 태웠다고 나와있다. 조선시대 전반기에는 성을 가진 사람이 전체인구의 10% 미만이었지만 임진왜란이후 상민이나 노비의 신분으로 있었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여 영. 정조 때는 특히 양반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철종 때는 전체인구의 70%가 양반이 되었고 지금현재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족보의 대부분은 조선후기 때 만들어진 것들이 많아서 누가 진짜 양반의 뿌리인지 몇 권의 족보만을 보고는 알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조선시대 때 아무리 높은 벼슬에 있어도 정적의 권모술수로 하루아침에 노비가 되는 사람도 있었고 노비나 상인이 돈으로 신분을 샀던 사람들도 있었고 자신의 상전이 억울한 누명으로 노비가 되어 그 상전을 노비로 사서 자기집 노비로 두기도 했다한다. 이렇게 볼때 노비의 자손이라도 무조건 노비의 자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고 양반의 자손이라 해도 순수한 양반의 자손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도 옛날과 같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신분의 구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런 신분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과 동시에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영적인 신분을 영원히 보장받는 다는 것이다. 이것은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시험을 치루는 것도 아니고 준비해야하는 과제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누구의 추천서도 필요가 없다. 그냥 가만히 마음속에 예수님을 내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자라는 집에서 정사무엘
▣ 소망의 씨앗
한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하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 지하 독방 안에서 그는 고독과 절망에 몸을 떨었다. 그가 절망과 고독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자신이 그토록 사랑을 쏟았던 가족과 친구들도 모두 그를 외면해 버렸다. 그는 독방 벽에 글을 적어놓고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신은 없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감방의 갈라진 틈새로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새싹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향해 강인한 생명력을 보이며 자라고 있었다. 그는 간수가 주는 물을 아껴서 매일매일 새싹에 물을 주었다. 며칠 후 새싹은 자라 꽃망울을 맺었고 드디어 아름다운 파란 꽃을 피웠다. 억울한 죄수는 생명의 신비에 감동해 무릎을 꿇고 벽면에 적어놓은 글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곳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놓았다.
"하늘이 준 생명의 신비, 이제 나는 외롭지 않다. 인생은 고독한 여행이다. 그러나 여행의 동반자를 만나면 행복하다. 나는 결코 고독하고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하늘의 소중한 선물이다." 소망의 씨앗이 그의 마음에 싹을 틔우고 아름다운 소망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 억울함의 보상
성경에서 억울함을 제일 많이 겪은 사람은 요셉이다. 형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갔다. 애굽에서도 주인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하다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다. 억울한 일이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 뿐만 아니라 보디발에게도 억울함이 있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신을 욕보이려고 했다고 고발한다. 과연 보디발이 그 말을 믿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보디발은 같이 살던 아내의 성향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별로 정숙한 태도로 살지 않았음도 알았다. 동시에 가정의 모든 일을 맡긴 요셉의 충성됨과 신앙태도도 알았다. 요셉은 결코 아내를 범할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보디발이 요셉이 진짜 범인이라고 믿었다면, 단순히 요셉을 감옥에 넣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사회의 노예는 죽이고 살릴 수도 있는 존재이다. 고문도 없이, 채찍질도 없이, 죽이지도 않고 감옥에 넣었다는 것은 요셉이 범인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방송에서 요셉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요셉에 관한 설교를 준비 중이었는데, 마침 방송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었다. “요셉아 오늘 밤 나하고 즐기자” “나는 아줌마같이 못생기고 늙은 여자는 싫어요.” 매달리는 여자가 옷을 잡자 옷을 남겨둔 채 요셉은 도망친다. 그때 보디발의 아내는 얼굴이 일그러지고, 요셉에 대한 호의가 분노로 변화된다. 소리를 지르고 노예놈이 나를 욕보이려고 했다고 외친다. 장면은 바뀌고 온 집안 식구가 모인 자리에서 보디발이 재판을 한다. 그의 아내는 요셉을 죽이라고 외친다. 요셉은 결백을 주장한다. 결국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 넣는 것으로 판결을 내린다. 장면이 또 바뀐다. 보디발의 침실이다. 보디발의 아내는 화가 나서 남편에게 대든다. “나를 욕보이려는 녀석을 왜 죽이지 않았느냐? 감옥에 보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보디발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요셉을 믿는다. 요셉은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네가 일부러 유혹했지” 그러면서 그의 아내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더 이상 경건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 보지 않았다. 요셉은 보디발의 명예를 위한 희생양이었다. 보디발 자신과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요셉의 결백을 알면서도 감옥에 보낸 것이다. 시저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이 났었다. 조사해 보니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저는 아내를 쫓아내 버렸다. 왜? “시저의 아내는 소문도 나서는 안된다”는 것이 시저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남자의 심리이다. 사실보다 명예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속성 때문에 그렇다. 요셉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요셉은 보디발의 명예를 살리기 위해서 이런 억울함을 당해야 했다. 요셉은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사람과 싸우지 않았다. 억울함을 하나님께만 부르짖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요셉은 억울함을 가지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감옥은 바로왕을 만나기 위한 지름길이기도 했다. 단기적으로는 암담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은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억울하다고 느낄 때,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의 이끄시는 방법에 대해서 억울함이 아니라 황송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전병욱(삼일교회)
▣ 억울하게 당할 때
살다보면 억울하게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피난처가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시편기자의 피난처는 의로우신 하나님 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억울하게 당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그분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나를 건져 주옵소서"라고.
억울하게 당했다고 느낄 때 제일 먼저 드릴 기도는 자신을 성찰하는 기도입니다. 억울하게 당할때 그 원인을 다른이 에게서 찾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더 더욱 쉬운 일입니다. 이런 경우 다른 이들에 대한 비난이나 저주는 내 영혼에 조금의 유익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성찰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내면에 있어서 부요한자가 됩니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그의 변호사가 될지 언정 검사역을 자처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의 불행이 그의 죄값이라고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이 과오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는 스스로 검사역을 자처하고 엄중하게 참회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나의 불행이 주의 징계였다면 참회는 나의 새로운 아침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오늘의 나의 고난이 나의 과오와 상관없는 억울한 당함으로 다가오거든 이제 나를 찢고자하는 원수의 회개를 위해 기도할 시간입니다. 원수를 저주하지 말고 원수가 회개하도록 기도하십시오. 원수가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기십시오. 원수가 나를 위해 파놓은 함정은 스스로를 위한 함정이었음이 곧 드러날 것입니다. 그분의 의로우신 심판을 신뢰하며 소리 높여 주를 찬양하십시오. 억울함이 곧 물러갈 것입니다.
* 기도: 오, 나의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시여, 나의 억울함을 굽어 살피사 저를 구원하여 주소서. 제가 저를 위해 스스로 변호하지 않겠사오니 주께서 나의 변호사가 되어 주소서. 그러나 주여, 행여나 이 억울함의 과정에 저의 잘못함이 있었다면 저를 교정하여 주소서. 다만 주 앞에 올곧게 서는 자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이동원 목사
▣ 억울해하지 마세요
2001년 5월 11일은 한동대 총장이었던 남편이 학교 재정 문제로 형사 고발을 당해 오성연 행정 부총장과 함께 법정에 서는 날이었다. 나는 몇 개월이나 조사를 받아 온 이 사건이 오늘로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징역 2년을, 오 부총장님은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저녁 때 한동대의 한 교수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모님, 이 시대에 주님의 일을 하다가 갇힌 자가 얼마나 되나요? 감옥에 보내실 정도로 하나님이 총장님을 신뢰하고 계신 겁니다. 절대 낙심하지도, 슬퍼하시도 마세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총장님과 사모님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 우리를 위로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조금도 억울해하지 마세요. 도저히 상식으로는 있을 수없는 일이 일어났으니,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 이사야 51:12~16을 전합니다.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사모님, 하나님이 총장님을 옥에서 속히 나오게 하시고, 이제 후로 한동대는 양식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동대와 남편을 향한 주님의 생각은 평안이고 미래에 희망을 주려는 것이었다.
/김영애
▣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반석 혹은 바위라고 할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요? 반석은 무엇보다 보호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무사들은 바위 뒤에 숨게 됩니다. 적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나의 잘못과 별로 상관없이 잔인한 이웃의 공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누구도 나의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 때 나를 변호할 분은 내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친히 이 땅에 계실 때 이런 억울한 비난과 모함을 체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반석은 사막지대에서 종종 유일하게 여행자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반석은 피난처요, 안식처가 됩니다. 인생의 길은 생각보다 더 뜨거운 열기를 감내해야 하는 고단한 길입니다. 우리는 이 길에서 쓰러져 생의 의지를 포기해 버린 기권자를 생각보다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나의 반석되신 그분으로 인하여 쉼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반석은 또한 우리가 디디고 설 인생의 견고한 기초가 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너무나 많은 건축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지혜로운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친히 우리의 반석이 되어 주십니다. 반석위에 세운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수 없다 하셨습니다. 내가 인생에서 경험한 가장 큰 행복은 예수님을 만난이래로 내 인생의 집을 반석위에 짓게 된 일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쫒겨 다니며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이 바위 뒤에 숨었습니다. 그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의 큰 슬픔을 경험할 때에도 이 바위그늘 아래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이웃 열강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이 반석위에 서서 적들과 맞서 용감하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 동일한 반석이 내게 주어져 있는 이 행복이여! 나의 반석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 기도: 나의 반석이요,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되신 주님이시여, 주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위로하신다면 인생의 어떤 위기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일어나 나의 반석되신 주를 찬양하며 내 인생의 집을 반석위에 부지런히 지어갈 것입니다. 아-멘
▣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찬송가 218장, <통> 369장)
1.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
주께서 우리게 명하시니 그 명령 따라서 살아가리
2. 널 미워 해치는 원수라도 언제나 너그럽게 사랑하라
널 핍박하는 자 위해서도 신실한 맘으로 복을 빌라
주께서 우리게 명하시니 그 명령 따라서 살아가리
3. 나 항상 주님을 훼방하고 형제를 억울하게 괴롭혔다
이러한 죄인을 사랑하사 주께서 몸 버려 죽으셨다
속죄의 큰 사랑 받은 이 몸 생명을 다 바쳐 충성하리 아-멘
▣ 모함, 억울함에 관한 성경 말씀
0 (신명기 19: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0 (신명기 24: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0 (신명기 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0 (사무엘하 19: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0 (욥기 19: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0 (시편 72:4)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0 (잠언 18:5)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0 (이사야 29:21) 그들은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느니라
0 (예레미야애가 3: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0 (예레미야애가 3: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0 (아모스 5: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0 (말라기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0 (디모데전서 3: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0 (디모데후서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0 (디도서 2: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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