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를 가르쳐 준 어머니
문희봉
세상에 둘도 없는 어머니다. 스물둘에 직장 잡아 출근을 시작했다. 농촌 마을에서 자라 직장을 잡았다는 사실에 어머니는 늘 감격해하셨다. 십 리도 넘는 길이었다. 퇴근 무렵쯤 되면 뒤란으로 나와 까치발로 서서 아들이 탄 자전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시는 게 낙이었다. 나도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먼저 장독대쪽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그날도 나와 서 계셨다. 그리고는 손을 흔드셨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한달음에 달려와 자전거를 세우면 어머니는 우선 마실 것부터 내놓으셨다. 어머니는 가슴에 달을 키우셨다. 내가 늦게 퇴근하는 날에는 그 둥근 달을 띄워 놓고 자식을 기다리셨다. 매일매일 어머니의 기다림은 나에게 베풀어 주신 많고 많은 배려 중의 하나였다.
길손이 마을을 지나다가 갈증을 느껴 대문 앞에서 냉수 한 잔을 부탁할 때도, 이웃집 아낙이 출산일이 다가와 손을 필요로 할 때도 모든 것 제쳐놓고 아기 받아주는 일을 우선으로 하셨다. 타인에 대한 배려였다. ‘배려’란 상대방의 처지에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일이다. 마주 할 때마다 들려주셨던 말씀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자신을 낮추다 보면 이웃들이 저절로 생긴다. 눈을 조심하여 남의 단점을 보지 말고, 입도 조심하여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마라.” 배움은 적었지만, 삶의 철학으로 체득한 것들이었다.
내가 지금의 아파트에 입주한 것도 십 년을 넘어선다. 처음 왔을 때는 낯설고 물선 그런 단지였다. 아파트란 곳의 특성이 이웃 간의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말하지 아니했는가. 케이지식 닭장 같은 곳에서 하루 종일 현관문 한 번 열어놓지 못하고 산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인사가 없다. 바로 뒤에 공동현관문을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있어도 쏜살같이 달아나는 이웃들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 중의 하나인 ‘배려’를 내가 먼저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내가 먼저 인사한다. 뒷사람에게 문 잡고 기다려주기도 실천한다. 안에 떨어진 휴지도 먼저 줍는다. 김칫국물을 흘린 자국도 휴지로 닦는다. 매일 새벽 시간 단지 내 헬스장에 간다. 오가는 길에 떨어진 휴지, 특히 담배꽁초를 줍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떤 날은 대여섯 개, 어떤 날은 좀 많다. 나로 인해 내 뒤에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쾌적함을 느끼리라. 모든 것이 주민을 위한 값싼 배려라 생각하면서 실천하고 있다. 산에 오르고 내릴 때도 먼저 인사한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차차 익숙해지면 오래 사귄 지인을 만나는 것같이 자연스럽다.
운전은 안전이 제일이다. 피가 끓던 젊은 시절과 달리 요즘은 과속을 하지 않는다. 뒤에서 경광등을 번쩍거려도 화내지 않는다. 끼어들기를 해도 그대로 받아준다. 된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끓어오르는 된소리들이 목까지 올라와서 부글부글 끓어도 참는다. 사연이 있어 그러하겠지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시궁창 같은 입에서 나는 악취는 자신만 맡을 뿐이다. 웃으며 살기도 짧은 인생인데 화내며 살 필요가 있겠는가. 내 조그만 양보가 다른 사람의 인생관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편하게 살 일이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바다 냄새가 난다고 하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빈 종소리가 옅은 안개처럼 깔리는 숲속에서 들려주는 쓰르라미의 노래 한 소절이 나를 즐겁게 한다. 한밤을 지치지 않고 울던 폭포 소리가 오욕에 밟힐 강물마저 하나로 복귀시키는 끝없는 용서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런 분위기에 젖어 지내다 보면 자연이 내게 속삭이는 낯익은 음성을 듣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유등천 냇가 유채밭에 나비 한 마리로 누워 단잠을 즐기시는 창조주와도 만나고, 영혼이 비추는 샘물같이 맑은 얼굴을 한 동자승도 만나고, 짙푸르게 질주하는 젊음과 만날 수도 있어 좋다.
세속적인 셈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소요됐다.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다 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내 삶을 밝게 비추어준다는 사실을 안 것도 얼마 안 되는 것 같다.
도둑질 한 번 한 적 없는데 기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는 것은 그리움이 가슴속에 살아 있다는 증거이리라. 진주보다 더 말간 햇살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이 모든 것은 어머니한테서 배운 작은 실천항목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