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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어디에선가,
들은 듯 본 듯 읽은 듯한 애절한,
함경북도 홍원 출신 관기(官妓) 홍랑(洪娘)이,
함경도에서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떠나가는 최경창에게 다음의 시(詩)를 읊으니,
묏버들 갇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
자시는 창밧괴 심 거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나린가도 녀기쇼셔.
(산버들가지 가려 꺾어 보냅니다 님에게
님의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 잎이 돋아나면 저로 여겨주소서.)
한글로 쓰인 홍랑의 시를 받아 든 최경창이
훗날,
번방(飜方, 한자로 번역)하여 다음과 같이 옮겨 전하고 있다.
折楊柳寄與千里人(절양류기여천리인) 버들가지 꺾어 천리밖 님에게 드리오니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나를 위해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誰知一夜新生葉(수지일야신생엽) 하룻밤 사이 새 잎이 나거들랑
憔悴愁眉是妾身(초체수미시첩신) 초췌한 근심 어린 눈섶이 바로 저인줄 아세요.
최경창은 홍랑의 시를 받고
유란(幽蘭)을 선물하며 아래의 답창을 하였다고 한다.
相看泳泳贈幽蘭(상간영영증유란) 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드리오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제 가면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오리.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하리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지금까지 운우가 청산에 어둑하구려.
중요한 것은 이 시(詩)라기보다는,
그 이후의
다음과 같은 실제적(實際的) 아름다운 이야기에 있다.
<홍랑의 시묘살이>
고죽(孤竹) 최경창은 1583년(임진왜란이 나기 9년 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상경 도중 마흔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마침 경성 부근이어서 홍랑의 귀에도 들어갔다.
홍랑(洪娘)은 만사 제쳐두고 고죽의 시신을 따라갔다.
고죽은 선영이 있는 파주에 묻혔다.
그날부터 고죽의 묘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부랑자가 한 사람 살았다.
홍랑이었다.
얼굴에는 숯검정을 칠하고 다 떨어진 옷으로 남장을 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은 홍랑은 칼로 제 얼굴을 그어 여러 군데 상처를 내었다.
흉한 몰골이 되어야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도 없고 남정네들이 접근도 안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강 하구인 그곳에는 겨울에는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불어왔다.
작은 몸을 움막 하나에 의지하기엔 너무나 험한 세월이었다.
그렇게 시묘살이를 했다.
고죽의 가족들과 일가들은 다 알았으나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홍랑의 일편단심에 감복했기 때문이었다.
홍랑은 3년 시묘살이를 지나고도 갈 곳이 없었다.
그냥 눌러 있었다.
그곳은 살아서 맺어지지 못한 정인의 몸이 누워 있는 곳이었으나,
홍랑에게는 세상 어느 곳 보다 따뜻한 곳이었다.
(그 이후 - 시인 홍랑 -)
10년이 지나 왜란(임진왜란 1592년~1598년)이 터졌다.
조선 천지에 쓸 만한 집은 다 불타고, 왜군들은 사람이 보이는 족족 죽이거나 끌고 갔다.
피폐될 대로 피폐된 국토,
그 어떤 것도 안전하지 못했다.
파주에 더 머무를 수는 없었다.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남은 생을 정인과 함께 하고팠던 홍랑의 바람은 이어지질 못했다.
7년 전쟁 동안 홍랑이 어디서 무얼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함경도 고향에 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확인은 불가능한 얘기다.
전쟁이 끝나고 어느 해 고죽의 무덤 옆에 사람이 하나 죽어 있었다.
아들이 보고 알았다.(문헌을 보면, 두 분 사이에 최 즙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홍랑이었다.
죽은 사람이 귀중하게 품고 있던 보자기를 풀었다.
거기에는 고죽 최경창이 생전에 쓴 시가(詩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전부 200수가 넘었다.
해주 최 씨 가문은 인심이 넉넉하였다.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홍랑의 장사를 지내고 고죽이 누운 자리 앞에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지금도 시제 때면 홍랑은 ‘할머니’란 호칭으로 제수를 받고 있다고 한다.
해주 최 씨의 가문은 그때나 이제나 후손들이 이 아름다운 사랑을 불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안 그러면 본부인인 할머니의 시앗을 어찌 할아버지 묘 바로 앞에 모실 수 있겠는가?
고죽(최경창)의 원고향인 전라도 영암 땅에서도 고죽과 홍랑의 묘를 이장하여 모시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홍랑의 사랑은 이 땅에 400年을 넘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청석초등학교 북편 산자락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는
고죽 최경창 부부의 묘소와 그 아래로 홍랑의 무덤이 있다.
1969년 6월에 홍랑의 묘비를 세우며 비제를 <詩人洪娘之墓>라 했다.
홍랑의 묘소 아래에는 1981년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세운 홍랑의 비가 서있다
거기에는 번방가 - 묏버들 가려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에...-가 새겨져 있다.
비록 홍랑의 몸은 따로 묻히었으나 고죽의 혼이 그 아래 홍랑의 댁으로 와 밤낮으로 머물 것이다.
그의 손자가 숙종대에 이르러 [고죽유고]를 출판하였다.
1 책 104장. 한시 250수.
1683년(숙종 9) 손자 석영이 편집하여 자기의 《역촌유고》를 부록으로 붙여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송시열이 1683년에 쓴 서(書)가 있고, 책 끝에는 판서 이민서의 발문과 남구만의 서가 실려 있다.
고죽 최경창의 명문장들은 정녕 홍랑의 사랑의 집념이 아니었으면 후세에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서문에서 우암 송시열은 고죽의 시뿐 아니라 사람됨까지도 크게 평가하면서 율곡 이이의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율곡 선생이 말하기를 고죽은 그 성품이 깨끗하고 하는 일마다 선(善)이 되는 사람이니
그 청초(靑草)한 절조는 사람마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송시열 자신은 "사람 때문에 시가 가려진다더니 오히려 시 때문에 사람이 가려졌구나"라는 말로
고죽의 문장과 성품을 칭송하였다.
또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은 그의 문집 호은집에 홍랑의 고죽에 대한 사랑이
오늘날 이 시들을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실었다.
*세 군데에서 [옮긴 글]을 발췌하여 첨삭한 글임을 알립니다.
첫댓글 지리산 안가여?
휴대폰이
없는 사람도 아닌데 ㅋㅋ
어깃장
가터요 ㅎ
잘다녀오시길
지난번에
제주가시겠다고 하시든데
이번에
제주도나
함께 가십시다
@유투(U2) 그럴리가요?
@신다헌 기억력이
별루시군요
@신다헌 스스로
하셔야 할일입니다
自我選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