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백씨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따르면 시조 백우경(白宇經)은 중국 고대의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
16세손 백을병(白乙丙)의 후손으로 중국 소주(蘇州)
출신이다.
당(唐)나라에서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아 780년(신라 선덕왕
1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지금 경주시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후 영월당(迎月堂)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 보급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불분명하여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917년 ∼ 924년)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된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1세조로 한다.[1]
백창직(白昌稷)의
증손 백휘(白揮)가
고려 목종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고, 그의
9세손 백천장(白天藏)이
원(元)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고려 충선왕 때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졌다.
수성은 수원의
옛 지명이다.
탐진 최씨의 기원
(고조선 유민 -> 진한의 고허촌 사량부 -> 최씨 (AD 32) -> 최치원 (경주 최씨 시조,
돌산고허촌 (소량부)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대 자손) -> 고려 해주 목민관 최온 해주 최씨 시작 -> 최사전 (최온의
4대손)이 탐진 최씨 시작)
진한 6부(辰韓六部)는 현재 한반도 동남쪽에 있었던 부족연맹체 진한에서 신라의 기반이 된 서라벌의
여섯
부락이며,
씨족
집단으로
육촌(六村) 또는 육부촌(六部村)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고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살며 생겨났다고 하였다.[1]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지촌(干珍村),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 혹은 加里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다.[2]
유리 이사금이
32년에
개편하여 양산촌을 양부(梁部)라 하며 이씨(李氏)를,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라 하며 최씨(崔氏)를, 대수촌을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牟梁)이라 하며 손씨(孫氏)를, 간진촌을 본피부(本彼部)라 하며 정씨(鄭氏)를, 가리촌을 한기부(漢祇部)라 하며 배씨(裵氏)를, 고야촌(명활부, 明活部)를 습비부(習比部)라 하며 설씨(薛氏) 성을 주었다.[3]
경주
최씨(慶州 崔氏).
경주최씨의 시조 최치원(崔致遠)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 또는
서라벌, 기원전 50년경) 6천 중의 돌산고허촌 (소량부)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세손이다.
그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촌장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이, 최, 손, 정, 배, 설 이라는 성을 각각 받았으니,
소벌도리는 최라는 성을 받아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로부터 24 세대에 이르러 최치원이 869년(신라 경문왕 9) 12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간지
5년후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에 이르고 자금어의를 하사받았으며, 제도행영 병마도총 고변의종사관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으나 외직을 원하여 대산,
천령, 부성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고 아손이 되었다. 그
후 난세를 비관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며 수도하다 63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해주 최씨
해주최씨는 경주최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해주 최씨(海州 崔氏)의 시조인 최온(崔溫)은 고려 해주의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또한 문명이 높았고, 후에 판이부사(判吏部事)에 이르렀다. 황해도(黃海道) 대녕군(大寧郡 : 海州)에서 조상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였으며 해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모든 것이 해주에서 이루어졌고 또 여러 대에 걸쳐 해주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여 대를 계승하고 있다.
최온의 아들 최충(崔沖)은 고려 문종 때 구재학당(九齋學堂)이라는 사학을 건립하여 인재들을 길러내어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는다.
탐진 최씨
고려 때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의 손자이며,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 최사전(崔思全, 시호는 장경)이 시조이다. 그는해주최씨의 시조 최온의 증손(최온의 손자의 아들)이다.
그는 예종의 내의(內醫)였다. 그 후
1126년(고려 인종 4년) 권신 이자겸이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부리자, 최사전은 인종과 협의하여 이자겸의 심복 탁준경(拓俊京)을 설득하여 이자겸을 제거케 하였고 그공으로 병부상서를 지내고, 후에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고 탐진(강진의 옛 이름)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탐진으로 하였다.
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탐진으로 고쳐서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으며, 고려시대에는 영암(靈巖)에 속하였다가 장흥(長興)으로 이속시켰다. 1417년(태종 17)에 병마도절제사영을 도강현(道康縣) 소재지에 옮기고 두 현을 합쳐 강진으로 개칭하였고 치소는 탐진으로 하였다. 1429년(세종 11)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는데 1475년(성종 6)에 탐진으로 돌아갔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탐진군으로 승격되어 나주부(羅州府)의 관할이 되었고,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백도면(白道面) 일부를 해남군에 이속하였고, 가우도(加牛島)를 합쳤고,
1936년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다.
Soo-Won
Baek
Baek Daedongbo (白氏 大同譜) nach ist Baek, Woo Gyeong (白宇經) ein Nachkomme von Baek,
Eul-Byeong(白乙丙) ), der 16. Nachkommen des legendären chinesischen Kaiser (黃帝)
Heon, Won Si (軒轅氏) war. Eigeentlich wohnte er in Suzhou (蘇州) in China. In dem
Kaiserreich Dang (唐) hatte er das Amt von Richter (佥议事) und Innenminister (吏部尙书)
inne. Aber durch die falsche Beschuldigungen der bösen königlichen Diener (奸臣)
kam er 780 nach Silla (im ersten Jahr
von Königin Seondeok) und siedelte unter dem Berg Jaoksan (紫玉山: Jetzt Angang-eup Gyeongju Oksan-dong in Gyeongjoo) an und baute Haus Youngwol
(迎月堂) und Manseam (萬歲庵)und verbreitete seine wissenschaftliche Kenntnisse.
Allerdings war die Abstammungsreihe (上系)
unklar. Darum hat man Baek, Chang-Jik (白昌稷), der in der
Regierungszeit von Gyeongdeokwang (景德 王:
Reigning 917-924 Jahre) von Silla-Dynastie als Jungrangjang (中郞將) mit dem Ehrentitel sangjanggun (上 將軍)
dem Staat diente, wurde die als mittel-Gründer (中始祖) des
Baek-Familiennamens.
Herkunft
von Tamjin Choe
(Gojoseon-Flüchtlinge à Dorfbewohner von Go-Heo-Chon Saryangbu in Jin-Han à Familienname Choe (AD 32) à Choe Chiwon (Stammvater von Gyeongju Choe, 24.
Nachkomme von Saryangbu) à Choe On, Beginn von Hae-Joo Choe à Choe Sa-Jeon (4. Nachomme von Choe On, Beginn von
Tamjin Choe)
Jin-Han-Yuk-Bu (辰韓六部) ist die Allianz von 6
Stämmen. Aus dieser Allianz hieß Seorabeol und war die Frühform des
Königreiches Silla. Seorabeol war im Südosten der Halbinsel. Nach dem Samguk-sagi
war Silla Seorabeol durch die Flüchtlinge von GoChoseon entstanden. Einer von
sechs Stämmen in Seorabeol war Go-heo-chon. Juri Isagum gab den Bewohnern in
Goheochon den Familiennamen Choe. Andere Dorfbewohner bekamen Familiennamen
Lee, Son, Jeong, Bae und Seol.
Kyeong-Joo Choe (慶州 崔氏).
Der Anfänger des Kyeong-Joo Choe ist Choe
Chi-won (崔致遠). Er ist ein 24. Nachkomme von Sobeoldori, dem Stammeschef von
Go-heo-chon.
Choe Chi-Won ging 869 (Sillas König Gyeongmun-wang
9. Jahr) nach Tang-Dynastie als 12-jähriger. Er kam zurück und bestand mit 17
Jahren mit bester Note die Beamtenprüfung. Er stieg auf die höchste Position
des Amtes.
Hae-Joo Choe(海州 崔氏):
Der Gründer von Hae-Joo Choe ist Choe On
(崔溫).
Er stammt von Kyeong-Joo Choe. Er war
ein guter Oberbürgermeister von Hae-Joo. Seine Nachkommen wohnten in Hae-Joo.
Darum hieß seine Nachkommen Hae-Joo Chie. Choe Chung (崔 沖),
ein Nachkomme von ihm hieß Hae-Dong-Gong-Ja(海東 孔子)., d.h. Konfuzius in
Korea
Tam-Jin
Choe (耽津 崔氏)
Stammvater ist Choe Sa-Jeon. Er ist ein
Enkel von Choe Cheol (崔哲), welcher königlicher Arzt mit dem Titel
Sang-Yak-Won-Jik-Jang (尙 藥 院 直 長)
war, und ein Sohn von Choe Jeong,
Er ist 4. Nachkomme von Choe Sa-Jeon (崔思全).
Er war ein königlicher Arzt (內 醫). Als Lee Ja-Gyeom gegen
den König aufstand, entfernte Choe Sa-Jeon ihn durch seine klugheit. So wurde
er Verteidigungsminister. Er wurde als Tam-Jin Baek ernannt. Tamin ist der alte
Namen von Gang-Jin neben Chang-Heung, dem Geburtsort von Esther.
Tamjin (耽津) bedeutete den Strom
gleich, der durch Kangjin fließ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