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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스승이라는 柳義泰는 허구다!
“실존인물 유이태는 허준보다 100년 뒤 인물”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글 : 류철호 삼부시스템 대표이사·韓醫史學 박사
⊙ 유이태, 1696년 홍역치료書 《마진편》 쓰고 숙종 때 御醫까지 지내
⊙ 1965년 《인물한국사》에 허준 스승으로 유의태 처음 등장… 책 지은이 일부 오류 인정
⊙ “산청군청, 지역홍보 위해 상상 속 인물 ‘유의태’를 ‘산청을 빛낸 인물’로 선정하고
동의보감촌까지 지어”
劉喆鎬
⊙ 64세. 동아대 경제학과 졸업. 고려대 석사, 경희대 韓醫史學 박사.
⊙ 논문 〈조선의 名醫 유이태 연구〉 〈마진편 저자와 저술 시기에 대한 고찰〉,
단행본 《說話 속에서 現實로 나온 산청의 神醫 유이태》 출간.
얼마 전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가 발생하자 온 나라가 전염병 공포에 떨었다. 어떤 마을은 출입이 통제되었는가 하면, 해외에서는 자국(自國) 국민에게 대한민국 방문을 자제하라고도 했다.
메르스와 같은 무서운 전염병이 조선시대에도 창궐했음은 물론이다. 대표적인 전염병이 두창과 홍역(마진)이었다. 두창은 세조 때부터 그 치료법이 알려져 있었고 《동의보감》도 치료법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신종 전염병이었던 ‘홍역’에 대해 《동의보감》은 치료법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익의 《성호사설》이 기록한 홍역 창궐 연도를 보면 1613년에 처음 홍역이 발생했다. 1668년, 1680년, 1692년, 1706년, 1718년, 1729년, 1752년에도 창궐했다고 돼 있다. 홍역이 발병하면 한 가족은 물론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됐다. 전염병이 발생한 마을의 입구에는 깃발을 세워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았으며, 사람들은 홍역에 감염되지 않도록 다른 지역으로 피난했다. 당시 홍역 치료는 중국 의서(醫書)에 의존했다.
조선인 최초로 홍역 전문 치료서를 저술한 이는 유이태(1652~1715)이다. 한자로 劉以泰이며, 劉爾泰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1680년과 1692년 전국적으로 발병한 홍역을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1696년 《마진편》을 썼다. 유이태는 조선의 홍역 퇴치의 문을 열었고 홍역학 태두(泰斗)이며 경남 산청을 홍역 치료의 발상지로 만든 전설적인 명의(名醫)이다. 유이태의 《마진편》은 조정준의 《급유방》, 이헌길의 《마진기방》, 정약용의 《마과회통》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75년 방송에 처음 등장한 ‘유의태’
1975년 당시 문화방송은 이은성 극본, 김무생 주연의 드라마 〈집념〉을 방영했다. 허준(1539~1615) 선생의 스승이며 살신성인의 명의로 ‘유의태’가 등장했다.
필자는 고향인 산청에서 어릴 적부터 ‘묘금도 유(劉)씨 유이태는 우리 고장의 전설적 명의였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 그런데 당시 드라마에 버들 유(柳)씨 ‘유의태’가 등장해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아무튼 출처가 불분명한 ‘유의태’가 방송에 등장하자 산청군 생초면의 유이태 후손들 집에 전국 각처에서 편지가 날아들었다. 학자들도 다녀갔다. 산청 출신인 필자의 작은 할아버지 댁에 대학교수라는 두 분이 방문해 유이태 선생이 남긴 의서(醫書) 두 권을 가족들 허락 없이 가져간 일도 있었다. 그 중요한 사료는 지금까지 되돌아오지 않고 있다.
필자의 가계(家系)에는 한의업에 종사한 분들이 많다. 그런 연유로 어릴 때부터 조부님과 고향 어르신들로부터 유이태 선생의 의술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1984년 어느 봄날, 필자는 남산 국립도서관을 방문해 유이태 선생 사적을 찾기 시작했다.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의사학(醫史學) 문헌에 유이태 선생은 등재돼 있었으나 드라마 〈집념〉에서 허준 선생의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는 접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된 것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유의태’를 허준의 스승으로 학계에 발표한 학자가 경희대학교 한방병원장을 지낸 노정우 박사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필자는 그를 만나려 했으나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필자는 유이태와 ‘유의태’ 관련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국내외를 상관 않고 찾아가 자료를 수집했다. 물론 유이태 선생 자료가 대부분이었다.
우리 세대에서 한의(韓醫)는 맥이 사실상 끊겼고 서양의학이 대세를 차지하고 있다. 필자는 28년간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대학원에서 《마진편》을 연구했다. 한의사 자격을 획득할 수는 없었지만 가문의 업(業)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한의학 공부와 유이태 선생께서 남긴 문헌들을 연구해 왔다. 2015년 〈劉以泰 생애와 痲疹編 연구〉로 경희대에서 한의사학(韓醫史學)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응답자의 81%, 유의태를 허준 스승으로 알아
산청군청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허구인물 유의태의 묘를 조성하고 동상도 세웠다.
1975년 방영되었던 드라마 〈집념〉은 한의학 드라마의 출발이었다. 이후 1990년 이은성 작가는 《소설 동의보감》을 출간,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소설 동의보감》을 읽은 독자들과 드라마 〈허준〉을 시청한 사람들은 명의로 묘사된 ‘유의태’를 허준 스승으로 알고 있다.
필자는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2014년 11월 11일 여론조사기관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허준의 스승이 누구인가?”를 내용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의 81%가 ‘유의태’를 허준의 스승으로 답했다. 특히 고학력자일수록 이런 답변이 많았다.
역사학은 학문으로서 엄정한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고 현재의 일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역사를 깊이 인식하고 올바른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해야 한다.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허준〉의 인기로 경남 산청은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이에 따라 산청군청은 자기 지역을 한의학 본고장으로 만들기 위해 유의태를 상징인물로 선정하고 ①산청한의학 단지 조성 ②한의학박물관에 유의태 영정 전시 ③유의태 유적지 건립 ④‘산청을 빛낸 인물 유의태’ 산청박물관 전시 및 산청군청 홈페이지와 어린이산청 홈페이지에 게재 ⑤류의태 약수터 조성 ⑥약수터 안내판과 이정표 설치 ⑦산청군 관광지도에 류의태 약수터 표시 ⑧유의태 설화 게재 ⑨홍보 카탈로그 발행 ⑩단행본 《동의보감·산청 류의태와 허준 이야기》 저술 등을 실행했다. 근거 없는 유의태가 실존인물이 된 것이다.
산청군청은 《산청의 한의학 전통과 한의약 문화연구》를 간행해 문헌에도 없는 유의태의 출생연도, 출생지, 의술활동 사실 등을 기술했다. 사대부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귀천(貴賤)과 친소(親疎)를 구분하지 않고 병든 환자를 치료한 명의 ‘유이태’의 유적지와 설화를, ‘유의태’ 유적지와 설화로 바꿨다. 필자는 행정자치부와 경남도청에 산청군청의 역사왜곡을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두 기관은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산청군청은 “유의태가 실존했고, 설화·민담도 있다”고 답했다. 필자의 오랜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1965년 한의학 박사가 쓴 《인물한국사》에 허준 스승으로 ‘유의태’ 첫 등장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허준〉에서 살신성인의 명의로 묘사된 ‘유의태’는 실존인물일까. 유의태는 《동의보감》 편찬자 허준의 진짜 스승일까. 진상을 추적해 봤다.
먼저 유의태는 언제, 어디에, 누구에 의해, 어떤 내용으로 학계와 방송에 나타났는지를 알아보자.
허준의 어린 시절은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허준이 문헌에 나타난 첫 기록은 1568년 그의 나이 29세 때 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춘의 《미암일기》이다. 이 책에 “허준이 찾아오다”라는 대목이 있다. 경남 함양군수를 지낸 김려(1766~1822)가 쓴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에서 “허준은 양예수의 문인이다”라고 밝힌 것 이외에는 허준의 스승을 밝힌 문헌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허준의 스승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유의태를 허준의 스승으로 학계에 최초로 발표한 학자는 앞서 언급한 경희대 한방병원장을 지낸 노정우 박사이다. 1965년 노 박사는 경남 진주에 거주하는 허모씨에게서 산청의 신의(神醫) 유이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런데 《인물한국사》 ‘허준 약전’편에서는 ‘유의태’라는 인물을 등장시켰다. 아울러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이라고 했다. 책의 일부분이다.
그의 생애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적어 이를 다방면으로 장시간을 두고 고증(考證) 답사한 결과 그는 지금의 김포군(金浦郡 陽村面 孔岩里 陵谷洞)에서 고고의 소리를 내었고, 자라기는 경남(慶南 山淸郡)이라고 믿어진다. (중략) 할머니가 진주(晉州) 출신의 유(柳)씨인 점으로 미루어 그의 어렸을 때의 생장은 역시 경상도 산청이라고 생각된다. 그 당시 산청 지방에 유의태라는 신의가 있었는데 그는 학식과 의술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품이 호탕하고 기인(奇人)으로서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남기고 있는데 이 유의태가 바로 허준의 의학적인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었다는 것이 여러 각도로 미루어 보아 부합되는 점이 있어 수긍이 간다.〉
노정우 박사가 《인물한국사》를 발표한 이후 ‘유의태는 허준의 스승’으로 다른 문헌들에 검증 없이 계속 인용됐다. 이후 노정우의 ‘허준 약전’을 읽은 소설가 이은성 선생이 1975년 허준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집념〉의 극본을 썼고 이를 문화방송이 방영했다. 이은성 작가는 〈집념〉 극본을 바탕으로 1990년 《소설 동의보감》을 썼다. 이를 바탕으로 1991년 드라마 〈동의보감〉, 1999년 드라마 〈허준〉 그리고 2013년 드라마 〈구암 허준〉에서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이며 살신성인의 명의로 묘사돼 전국에 알려졌다.
필자는 이은성 선생이 유의태를 허준의 스승으로 설정하게 된 경위를 물어보기 위해 오래전에 그의 집에 전화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고인(故人)이 되어 진실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부인이 전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부인은 필자에게 “남편이 소설을 집필할 때 중앙일간지 편집위원을 지낸 ○○○라는 분이 곁에서 많이 도와줬다”고 했다. 필자는 ○○○라는 분을 만나봤다. 그에게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이 된 연유를 물었더니 그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유씨 족보를 복사해 오라. 연도가 일치하면 유의태에서 유이태(劉以泰)로 바꾸겠다”고 했다.
오류를 인정한 著者
류의태 약수터 안내문. 여기에 나오는 설화는 실존인물 유이태 설화를 ‘유의태’로 이름만 바꿔놓은 것이다.
《소설 동의보감》은 유의태를 버들 유씨로 그리고 있다. 필자는 진주 유씨 족보에 ‘유의태’ 가문이 있는지 알아봤다. 《소설 동의보감》에는 유의태 조부(祖父) 유술이는 약초 캐는 사람, 부친(父親) 유흥삼은 ‘비전의 유가고약(柳家膏藥) 행상’, 아들 유도지는 ‘의과에 합격해 종8품 혜민서 봉사(奉事)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등으로 묘사돼 있다.
유의태가 실존한 명의였다면 족보에 반드시 등재돼 있어야 했다. 그런데 1762년 최초 족보부터 1983년까지 간행된 《진주유씨족보》에는 유의태가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2005년 간행된 《진주유씨족보》에 조부는 유지(忠贊), 부친은 유응성(文行鳴世), 유의태는 후사가 없는 ‘유운’이라는 이름에 ‘일명 의태’로 기록되어 있다. 《소설 동의보감》의 유의태 가계와는 전혀 달랐다. 2013년 6월 12일 《진주유씨족보》 전문가 류보형을 만나 유의태의 실존 근거를 물었다. 그는 “방송에 나오기에 우리 조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족보에 등재했다”고 필자와의 대화에서 밝혔다. 진주 유씨 가문에는 유의태가 실존했다는 고증된 사료가 없음을 필자는 확인했다.
그렇다면 ‘유의태’가 어떤 연유로 허준의 스승이 되었을까.
2000년 2월 1일 필자는 서울시 강남구 포이동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던 노정우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노 박사에게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인 근거에 대해 물었다. 노정우 박사는 이렇게 답했다.
“1965년 모 백과사전 출판사로부터 허준의 약전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허준을 연구했습니다. 허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습니다. 족보를 조사해 본 결과 허준의 조부가 경상우수사, 조모가 진주 유씨로 되어 있어 진주와 관련 있다고 생각해 진주에 거주하는 허모에게 전화해 ‘허준의 조부가 경상우수사, 조모가 진주 유씨로 되어 있어 허준이 진주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진주 근처에 유명한 한의로부터 의술을 배운 것으로 판단된다. 혹시 유명한 한의가 있었느냐’라고 존재 여부를 그에게 물었습니다. 허모씨는 ‘산청에 수백 년 전에 유이태라는 전설적인 명의가 있었다’고 답해 진주 유씨(晉州柳氏), 의로울 의(義), 클 태(泰)를 썼을 것이라 보고 ‘유의태’를 허준의 스승으로 발표했습니다.”
1965년 《인물한국사》를 통해 유의태를 학계에 처음 소개한 노정우 박사는 필자에게 ‘유의태’에 대한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다.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점에 대한 오류를 인정한다. 허준 스승은 역사학자들이 밝혀내야 할 몫이다. 유이태의 후손인 거창 유씨 가문에 미안하다”고 말한 것이다.
2000년 2월 중앙일간지 편집위원을 지낸 분을 만나 《소설 동의보감》에 허준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을 쓸 때 이은성 선생과 함께 경희대를 수차례 방문했었다. 이은성 선생은 대단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유의태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이야기해 줄 수 없다. 자료가 모이면 《소설 동의보감》 후반부를 다시 쓰고 싶다.”
드라마 〈허준〉의 집필가 최완규는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는 유이태의 모델 인물”이라는 점과 “거의 꾸며진 이야기이며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엎은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은성 선생의 《소설 동의보감》은 몇 가지 사실만 제외하면 거의가 픽션으로 꾸며진 소설일 뿐이다. 일부 대목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시기적으로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는, 허준보다 백 년 후에 태어난 명의 ‘유이태’를 모델로 설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설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실존인물 유이태
조선 숙종 때 명의(名醫) 유이태는 역사적 문헌에 기록돼 있다. 그는 어의(御醫)까지 지냈으며, 의술의 경지에 도달한 유의(儒醫)이다.
그렇다면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채록되어 있는 설화 속의 유의태(또는 유이태)는 누구일까.
《한국구비문학대계》와 또 다른 《설화집》에 채록되어 있는 내용을 분석한 결과, 몇 가지 관점에서 유의태와 유이태는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유이태의 출생지 위천면(경남 거창 소재)과 인근 지역 남상면에 ‘유이태’와 ‘유의태’ 두 개의 이름으로 설화가 채록되어 있다. 위천면에서 채록된 설화는 동일한 내용으로 《거창군지》와 《거창의 역사와 전설》에 유이태로 채록되어 있다.
둘째, 유이태가 실제 의술활동을 했던 생초면(경남 산청)과 인근 지역 금서면, 오부면, 함양군 유림면에 유이태 설화가 채록되어 있다. 생초면에서 채록된 의료설화 속의 명의는 ‘유이태’와 ‘유의태’ 두 개의 이름으로 채록되어 있다. ‘이’와 ‘의’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채록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현상은 경상도 사투리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의사’를 ‘이사’로 발음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셋째,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채록된 유이태 설화와 유의태 설화의 내용을 분석해 보았다. ①거창군 위천면 설화32 ‘신연당 유의태’에 유적지 ‘서마디’ ‘유의태 침바우’ 등이 채록되어 있다. ‘신연당’은 유이태의 호이다. ‘서마디’는 유이태 생가가 있던 ‘사마리(司馬里)’이다. ‘유의태 침바우’는 유이태가 뱀 입안에 꽂힌 비녀를 빼주고 그 뱀으로부터 보은으로 침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따라서 위천면 설화32의 주인공 ‘신연당 유의태’는 ‘신연당 유이태’이다. ②의령군 칠곡면 설화59 ‘명의 유의태와 공주의 이상한 병’에는 《마진법》의 저자가 유의태로 채록되어 있다. 마진은 홍역 또는 홍진이며, 《마진법》은 《마진편》을 지칭한다. 따라서 의령군 칠곡면 설화59의 명의 유의태는 유이태이다. 이렇듯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채록된 모든 설화에서 ‘이’와 ‘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발음 현상을 발견했다.
넷째, 《설화집》에는 채록된 명의의 이름이 실존 명의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으로 채록이 되어 있다. 출생지역에서 불리는 이름과 다른 지역에서 불리는 이름이 비슷한 이름으로 채록된 사례를 확인했다.
허구인물의 영정까지 전시
유이태는 반상(班常)과 적서(嫡庶) 등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봉건사회에서 귀천, 친소, 빈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는 박애정신을 펼친 심의(心醫)였다.
의료설화 속 명의는 실존인물 명의를 토대로 하고 있다. 실존인물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명의의 이름은 세월이 흐르면서 비슷한 이름으로,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졌다. 요컨대 설화 속의 명의 유의태는 실존인물 ‘유이태’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그렇다면 유의태가 어떤 경위로 산청군 동의보감촌의 상징인물이 되었을까. 1995년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관광 소재를 찾기에 바빴다. 1990년 간행된 《소설 동의보감》이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산청이 한의학으로 널리 알려지자 산청군청은 한의학단지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한의학단지 건립을 준비하는 동안 1999년 문화방송에서 드라마 〈허준〉을 방영했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산청군청은 방송과 소설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 고증을 거치지 않고 유의태를 한의학단지 상징인물로 선정했다. 산청의 유림(儒林)들과 묘금도 유씨 가문은 당시 산청군수와 문화관광과 담당공무원들에게 유의태는 존재하지 않았고, 유이태만 실존했다는 사실(史實)을 알렸으나 이러한 의견은 묵살됐다. 오히려 당시 산청군청 담당자들은 필자에게 “유의태는 실존인물”이라며 그 근거로 노정우 박사의 《인물한국사》, 이은성 작가의 《소설 동의보감》, 드라마 〈허준〉과 《한국구비문학대계》의 설화를 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산청군청이 유의태를 실존인물로 만든 논리는 처음부터 역사적 사실과 달랐다. 허준 선생보다 100년 후의 인물인 ‘유이태’를 허준의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 산청군청은 유이태의 사적(史跡)·설화를, 허구인 유의태의 사적·설화로 바꿨다.
산청군청은 2009년 《산청의 한의학 전통과 한의약 문화연구》와 《지리산 산청 약초와 민간요법 기행》을 발간했다. 두 책은 ①유의태가 태어났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1516년(중종 11년)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상정에서 출생했고 ②산청군 금서면 화계에서의 의술활동 기록이 없음에도 의술활동을 했으며 ③유이태 유적지(서실·약수터·낚시터·황산·다름재·침대롱바위)를 유의태 유적지로 적고 있다. 또 ④각종 백과사전의 명의 설화 편에 기록되어 있는 ‘경상도의 유이태’를 ‘산청의 류의태’로 ⑤《한국구비문학대계》의 유이태 설화를 유의태 설화로 바꿔놓았다.
산청군청은 실존인물 유이태를 허구 유의태로 왜 바꾸었을까. 산청군청은 유의태를 ‘산청을 빛낸 인물’로 선정해 산청박물관에 영정까지 전시하고 있다. 또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있는 유이태의 ‘장군수약수터’를 ‘류의태약수터’로 개명했다. 약수터 안내판에는 《산청군지》 《거창군지》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채록돼 있는 유이태 설화를 유의태 설화로 변경해 놓았다. 관광지도에도 ‘류의태 약수터’를 그려놨다. 산청군청은 실존하지 않은 유의태를 ‘산청을 빛낸 인물’로 선정한 후 동의보감촌까지 만들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백과사전에 기록돼 있는 ‘유이태탕’은 ‘초객탕’으로만 해놨다는 점이다. 이것까지 ‘유의태탕’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아무튼 역사적 업적을 남긴 명의 유이태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허준 스승은 유의태’라는 논리가 무너지면 지금까지 벌여놓은 일들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유이태 선생 재조명해야
《인물한국사》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허준〉이 명의로 묘사한 유의태, 산청군 동의보감촌의 상징인물 유의태는 허준의 스승도, 실존인물도 아니며, 전설·민담에도 나오지 않는 허구인물이다. 조선 숙종 때 어의(御醫)를 지낸 유이태 이름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나오는 설화 속 유의태는 실존인물 유이태를 지칭한다.
산청군청은 유의태를 실존인물인 것처럼 만들어 대한민국 역사를 왜곡하는 일을 지금이라도 중단해야 한다. 산청군청은 조선시대 당시 공포의 전염병 ‘홍역’을 퇴치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홍역학 태두(泰斗) 유이태 선생을 재(再)조명해 후손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
실존名醫 유이태는 어떤 인물?
유이태의 14가지 건강관리법
유이태는 묘금도 유씨로 본관(本貫)은 거창, 자(字)는 백원, 호(號)는 신연당이다. 1652년 거창군 위천면에서 태어나 10세 전후에 산청군 생초면 신연으로 거처를 옮겼다. 허준 선생보다 100년 뒤의 인물이다. 유이태는 생초면과 위천면을 오가면서 인술(仁術)을 펼쳤다. 서부 경남의 향반으로 7대조(代祖)는 양녕대군 손서 유귀손, 고조부는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의병장 유명개, 조부(祖父)는 복호를 받은 효자 유우도, 외증조부는 경상좌수사를 지낸 이의립, 외조부는 봉상시 판관을 지낸 이광훈이다. 10세 전후에 모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유학자와 같은 시묘살이를 했고, 1685~1686년 산청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경상좌우도의 사우들에게 백미를 빌려와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는 등 효행과 선행을 펼쳤다.
유이태 선생은 조선인 최초로 홍역 전문치료서 《마진편》을 썼고, 《인서문견록》 《유이태유고》 《효행장》 《정영장》 등을 남겼다. 1710년과 1713년 위독했던 숙종을 치료해 어의가 됐다. 그는 숙종의 환후를 고친 공로로 숭록대부 안산군수로 제수됐으나 고사하고 산청으로 돌아왔다.
유이태는 백성들에게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인서문견록》에는 후학들이 새로운 처방들을 덧붙인 새로운 《인서문견록》이 나오길 당부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유이태는 사람들과 후학들에게 ①건강할 때 계절에 따라 섭생하여 몸을 튼튼하게 하라 ②마음이 편안하면 기운이 편안하고 근심이 지나치면 마음을 해하니 마음을 다스려라 ③화를 내면 화기가 일어나 치료가 어려우니 노여움을 경계하라 ④과식하면 몸을 해하여 질병의 근원이 되니 소식(小食)하라 ⑤몸을 힘들게 하면 원기가 허하게 되니 절제 있게 생활하라 ⑥병은 몸을 해하니 사전에 질병을 예방하라 ⑦조그마한 병(病)이 큰 병이 되니 발병 초기에 신속히 병을 치료하라 ⑧병이 완쾌한 이후에 새로운 질병이 발생할 수 있으니 철저히 건강을 관리하라 ⑨치병 시(時) 병의 근원이 되는 곳을 탐구하여 치병하라 ⑩목숨이 재물보다 중요하니 치병에 최선을 다하라 ⑪병을 물리치기 위해 약물을 잘 복용하라 ⑫의원의 처방에 따라 정확히 약제를 투약하라 ⑬병을 치료하는 동안 약의 오남용에 주의하라 ⑭기존 처방에만 의존하지 말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새로운 처방을 하라고 가르쳤다.
유이태는 입신양명의 뜻을 접고 의학에 입문, 30세에 의술의 경지에 도달한 유의(儒醫)이다. 그는 반상(班常)과 적서(嫡庶),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봉건사회에서 귀천, 친소, 빈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일생 동안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을 치료했다. 위민·애민의 박애정신을 펼친 심의(心醫)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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