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又山) 손경석의 『韓國登山史』 읽어보기 14
1934~1935년 동계 경도대학의 백두산 등정
조장빈(근대등반사팀)
경도대학의 동계 백두산 등정
1934년 12월에서 1935년 1월에 걸쳐 적설기 백두산을 목표로 한 대규모 원정 등반대가 몰려왔다. 일본 관서지방(關西地方)의 세력일 수 있는 경도대학(京都大学) 산악부의 잘 조직 된 등반대는, 이마니시긴지(今西錦司) 교수를 대장으로 총 18명의 직업적인 산악 가이드까지 동반해서 이른바 극지법 방식에 따른 고산등산 방법을 채택해서 성공시켰다. 아마 이것은 일본으로서는 동계등반의 본격적인 규모를 갖춘 해외등반 제1호가 될 수 있고 무전기를 사용한 정공법(극지법) 방식의 원형으로 평가되었다.
대원 중 니시보리 에이사브로(西堀榮三郎), 가토다이안(加藤秦安), 고지마 간지(兒島勘次), 미야자키 다케오(宮崎武夫), 후지키 큐조(藤木九三) 등은 패전 후 일본산악회의 역대 회장과 부회장을 역임하는 석학이며 학자 산악인들이었다. 그렇다고 학술 답사 위주가 아닌 알피니즘을 추구했고 순수 등반대면서 학술보고서도 낼 수 있는 역량 있는 클라이머들 이었다. 그들은 이를 계기로 일본의 히말라야 고산 진 출의 첫 포석으로 삼고 운행을 비롯하여 장비, 식량 등 당시 일본 산악계가 마련할 수 있는 최고의 준비를 했다. 각 분야의 창의성 있는 기획은 결국 향후 일본 산악계의 지침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이것이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주어 어쩌면 오늘날 해외원정 기획준비의 규범이 될 정도로 완벽 한 것이었다.
물론 이 본보기는 영국산악회나 독일산악회의 여러 기록들을 참고한 모방임을 부인 할 수 없다. 이 대원들이 후일 일본의 대표적인 히말라야 원정이나 남극탐험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음을 보아도 당시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운행만 보더라도 정공법인 극지법 포위 방식을 써서 혜산진~삼지연~백두계~주봉으로 전 진캠프를 치고 등정한 후 철수하고, 각 캠프 철수에 맞추어 일부 항공지원을 하면서 주변의 북포대산(北胞培山 2,289m), 남포대산, 소백산(小白山 2,174m)까지 별도 행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폭풍설에 부딪혀 부차적인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12월 20일부 터 다음해 1월 22일까지 34일간의 겨울 적설기 등반을 마쳤다. 완벽에 가까운 보고서와 등반에 부수된 학술적 연구보고도 전해져서 보고 형식의 모델이 되었다.
1932년 여름의 동경대학 산악부의 금강산 암벽등반은 원정 형식이 아닌 클라이밍 위주의 소규모 등반대인데 비해, 대조적으로 원정 등산의 형식을 갖추고 동계 원정 등산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경도대학 산악부의 백두산 등반을 진정한 일본의 해외원정 등산의 효시로 삼기도 한다. 이들의 구호가 히말라야 같은 세계의 고산이나 중앙아시아의 곤륜산맥에 꿈을 건 포석으 로, 일본 후지산과 한국의 백두산 등에서 동계훈련을 해야 이런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일본 대학 산악부를 대표한 규모라 할 수 있다. 1936년 일본의 릿교(立教) 대학은 히말라야의 난다코트(Nandakot 6,867m)를 초등정했다. 비록 경도대는 아니었으나 조직화된 젊은 학생 산악인의 고산에의 정열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대학의 산악활동이야말로 한 나라 산악운동의 중추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온 경도대학의 백두산 원정과 같은 시기인 1934년 말에서 1935년 초에 경성대의 이즈미 등은 부전고원의 차일봉(遮日峰 2,506m)에 올라가 '동계 백두산 전진(前進)을 뺏긴 허탈을 참기 어려웠다' 고 그의 저서에서 술회하고 있다.
등반코스도
(白頭山 京都帝國大学白頭山遠征除報告)
이 등반은 ‘알피니즘’이 동계등반으로 구현되는 것으로 생각한 일제강점기 경성의 클라이머들에게 기친 영향은 지대하다. 또한 당시 경성의 등산 열기로 이어져 1937경 경성 부근의 암장이 번잡해진 것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여겨지며, 등반 일정에 이어 김정태와 신승모의 글을 옮겨 적는다.
원정대 운행 일정표(遠征隊行程表)
본 부(本 部) : 今西, 浅井, 長谷川, 杉山
정찰대(偵察班) : 奥, 兒島, 加藤, 佐伯
가설대(架設班) : 西堀, 平吉, 堀, 大和
수송대(輸送班) : 高橋, 宮崎, 谷, 飯山
통신대(通信班) : 藤木, 丸山, 今田
제1차 공격대 : 奥(리더), 平吉, 堀, 兒島, 加藤, 谷, 佐伯
제2차 공격대 : 今西(리더), 西堀, 高橋, 浅井, 大和
제3차 공격대 : 宮崎(리더), 長谷川, 杉山, 藤木, 丸山, 今田
날짜 | 날씨 | 운행 |
12월 29일 | 매우 맑음 | 전원 포태리에서 허항령까지 이동 |
12월 30일 | 매우 맑음 | 奥정찰대: 소천지(小白澤)까지 정찰 西堀정찰대: 천지 동단까지 정찰 |
12월 31일 | 매우 맑음 | 정찰대: 奥소천지(小白澤)까지 정찰 가설대: B.C 일부 가설 수송대: 막영장비와 긴급용품 수송 |
1월 1일 | 매우 맑음 | 정찰대: 浅井 외 B.C. 야영 수송대: CⅠ, CⅡ 용품 수송 |
1월 2일 | 매우 맑음 | 정찰대: 소연지봉까지 정찰 본대: 허항령 B.C.까지 이동 수송대: B.C.에서 2박한 인부 6명 포함 16명의 인부 이이야마의 인솔로 허항령 하산 |
1월 3일 | 눈 | 휴식: 본대일부 편제 개편 수송대: 인부6명 B.C.에서 허항령까지 왕복, 高橋 허항령까지 인솔 인부 16명 해고, 내 9명과 수비대 인근 6명 포함 하산, 이이야마 복통으로 하산 |
1월 4일 | 매우 맑음 | 1차 공격대: CⅠ가설 후 야영, 今西 외 10명 CⅠ, CⅡ 용품 수송 인부 5명 허항령 왕복 |
1월 5일 | 매우 맑음 | 1차 공격대: 정찰, 수송 정계비 부근까지 今西 외 2명 CⅠ야영, 長谷川, 今田 CⅠ 수송 본대 일본비행기 캠프 비행 |
1월 6일 | 매우 맑음 | 1차 공격대: CⅡ 가설 2차 공격대: CⅠ 진출 수송 인부 15인 CⅠ 왕복 |
1월 7일 | 매우 맑음 | 1차 공격대: 정상 공격 후 B.C.로 귀환 2차 공격대: CⅡ 가설 3차 공격대: CⅠ 진출 |
1월 8일 | 바람 · 눈 | 각대 현장소 체재 본대 일본비행기 캠프 비행 |
1월 9일 | 매우 맑음 | 2차 공격대: 천지, 종덕사 진출 3차 공격대: CⅡ 진출 |
1월 10일 | 맑은 후 눈보라 | 2차 공격대: 층암등정, 丸山、今田 천지로 내려 종덕사 진출 佐伯 CⅡ~종덕사 왕복 宮崎、藤木 백암 등정 奥、杉山 정상 등정후 CⅠ으로 귀환 |
1월 11일 | 맑음 | CⅡ, 종덕사 캠프 철수 CⅠ으로 귀환 |
1월 12일 | 맑음 | 平吉 등 CⅠ철수 지원을 위해 CⅠ왕복 今西 등 CⅠ B.C.로 귀환 본대 일본비행기 캠프 비행 |
1월 13일 | 맑음 | |
1월 14일 | 눈 | |
1월 15일 | 눈 | 전원 포태리 결집, 철수 작업 완요 |
“일본 京都大隊 「冬季 白頭山「원정」 ◇1935년 1월 일본 京都帝大 산악부, 学士山岳会 「적설계 백두산 원정」 초등반(기록 :京都帝大 학사산악회 1936년간 백두산 원정보고) 일본의 대학 명문인 京都제국대학 산악부에서 동대학 학사산악회와 공동으로 34년 12월 하순~35년 1월 하순에 걸쳐 적설계 백두산원정대를 파견하였다. 1932년8월. 동경제대의 금강산 원정등반 다음에 두 번째로 한반도에 일본의 대학원정대가 온 것인데 전자보다도 등반대의 성격과 규모가 훨씬 크고 본격적인 원정대였다. 그들은 곧 일본의 첫 진출을 뜻하고 있는 히말라야 원정을 위한 시금석적인 등반으로 원정성격의 오지성(奥地性)과 극지성(極地性)이 있는 동계 백두산을 선정한 것이라 하였다. 등반을 위주로 한 학생현역을 중추로 기상, 지질, 의학 등 학술반을 포함하고 일본 산악계의 선구자인 今西錦司(理博)교수를 대장으로 하는 0B혼성대의 편성이었다. 그 뿐 아니라 일본 산악계의 알피니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藤木九三(註: 1924년 일본 R.C.C. 창시자, 朝日新聞 기자) 등 지도층을 망라해서 大阪 朝日新聞의 후원과 일본 정부당국의 지원을 받는 등 일본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대규모의 원정행각이었다. 코스는 혜산진~普天堡간 자동차 수송, 虚項嶺(1,401m) 지나 밀림속에 B.C를 설치하고 길 없는 白頭大澤(註: 화산성의 물 없는 계곡지형 밀림지대)을 따라 일본대로서는 처음 시도되는 극지탐험 방식으로 전진 캠프 I, II, Ⅲ을 설치하면서 올라갔다. 16명 대원 전원이 스키로 등반 운행하고 강풍과 최저 영하 45도의 극지적 상황에서 1,900m 수림한계 위의 얼은 눈지대는 아이젠 행동이었다. 정상 將軍峰(倭稱: 大正峰 2,744 m)에는 1차, 2차식으로 전원 동계 초등정을 하였다. 그리고 동결된 천지 속으로 내려가서 C4를 설치, 천지 화구 연봉 중에 가장 험준한 벽의 하나인 層岩峰 남벽(표고차 500m)을 초등반하였다. 이와 같은 원대의 움직임은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어 일본 전국의 판심을 끌었으며 일본 산악계에서도 등산사상 가장 선구적이고 대표적인 업적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김정태, 「한국등산사 考察」, <山>(1983. 8)
“1900년대를 지나며 백두산을 찾는 대· 소규모 원정과 등반이 잦아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학술조사를 목적으로 한 등반도 잦았지만, 본격적인 원정훈련을 목적으로 조직된 해외원정대는 1935년 일본 교토제대의 백두산 원정일 것이다. 1934년 12월말에 일본 교토를 출발한 일본교 토제대 원정대가 그 효시가 된다.
1913년 도지사의 순찰 때와 비교해 보면 그 3분의1 정도에 지나지 않는 적은 인원이었다. 그러나 이 원정대는 등반보험료를 지불했을 뿐만 아니라, 통신기재 도 설치해서 방송을 청취하거나 당시 극지의 천막으로 불리던 극지용 돔형텐트 를 전진캠프로 사용하기도 했다. 9일만에 포태리(胞胎里)에 도착한 그들의 등반방식은 극지법(또는 정공법). 하루에 일정한 거리를 오르고 천막을 친 다음 되돌아 내려와 잔다는 것이다. 캠프는 천막과 식량, 장비가 운송되고 대원이 머무를 수 있어야 완전한 캠프로서 인정되는 범주의 것이었다. 본부조는 대장 외 3명으로 구성하고 정찰반, 가설반, 운송반, 통신반 각각 3명의 대원이 배치되었다. 3명의 길잡이를 고용하고 국경수비대 의 호위까지 받은 이 원정대는 운송수단 으로 소(牛)를 이용한 썰매도 이용했다. 남극북극의 극지에서 개를 이용한 썰매에 비한다면 한국땅 백두산 고원의 설원 에서 소가 끄는 짐썰매 또한 이국적인 정취가 있었으리라.
아울러 이 원정대는 등반도중 의학적인 검사와 측정도 실시했는데, 그 가운데는 콜린씨(Colin) 악력계(握力計)를 사용한 근력측정을 실시했으며, ·배근력 (背筋力)과 맥박수를 조사하기도 했다. 아마도 1935년 교토제대의 원정대가 전무후무한 과학적 탐사에 신경을 집중 했던 원정대가 아닐까 한다! (전체 원정의 일정은 1개월 소요). 백두산 산정까지 오른 현대적인 개념 의 한·일 원정대는 1942년 한일합동 백두산원정일 것이다. (중략) 아울러 1900년대 이후 몇 차례의 원정상황을 그 의미별로 구분해 볼 수 있었다. 한민족의 얼과 한이 뒤얽혀 있는 극동의 영산 백두산, 이 산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근대의 등산활동은 곧 한국산악운동의 발원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한국 고소등반이 태동하기 시작한 원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승모, 「한국근대등산사 재조명 3 '산중의산, 신의 요람 白頭山 영허즈번드와 京都大隊를 중심으로 한 백두산 등반사」, <사람과 산>(199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