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知事) 허악록공(許岳麓公)이 임금에게 은혜로이 하사받은 열 장의 초피(貂皮.담비의 가죽)로 한강 가에 정자를 산 뒤 ‘십초정(十貂亭)’이라 명명하여 영광을 드러내었고, 그 선조의 무덤이 또 강 건너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망모암(望慕庵)’을 세워 갱장(羹墻)의 사모하는 마음(돌아가신 선조에 대한 지극히 사모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 바로 여기에 임금을 사랑하는 충정과 어버이를 사모하는 효성이 모두 들어있으니, 옛사람의 한 끼 밥을 먹을 때에도 잊지 않은 충정과 종신토록 사모한 (순임금의) 효성을 공에게서 볼 수 있다. 지금 공이 지은 두 수의 시를 얻었으니, 감히 문장이 졸렬하다는 이유로 도외하지 못하고 삼가 그 시에 화운(和韻)하여 애오라지 나의 감회를 펴는 바이다.
한강에 자리 잡은 제일가는 명승지 / 第一名區枕漢江
나라 경륜 담당한 노년의 훈업이로다 / 暮年勳業負經邦
십초 두 글자로 편액 이름 삼았으니 / 却將二字題華扁
흠뻑 받은 은광이 밤 창을 비추누나 / 剩得恩光照夜窓
늙은 재신의 새 정자(十貂亭) 벽강을 굽어보니 / 老宰新亭俯碧江
이곳의 빼어난 경치 동방에 으뜸이라네 / 箇中形勝最東邦
한량없는 은혜의 물결 눈앞에 드넓으니 / 眼前無限恩波闊
만리의 풍광이 작은 창에 제격이로다 / 萬里風煙可小窓
충직함은 저마다 곡강을 이었다 추앙하니 / 忠直人推繼曲江
당일의 말 한마디 나라를 일으킬 만하다오 / 片言當日可興邦
문채나는 초피로 토구의 땅(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곳)과 바꾸었으니 / 文貂換却菟裘地
물가의 달과 구름이 한 창에 모두 들어오네 / 渚月汀雲共一窓
붓끝의 문장 물결 강물처럼 호탕하니 / 筆底文瀾浩似江
집안 명성 대대로 나라에 진동하누나 / 家聲奕世動偏邦
선조 묘소 길이길이 우러러 보고자 / 爲因丘墓長瞻望
작은 집 남쪽에는 창도 내지 않았구나 / 小閣南頭不設窓
즐비한 사대부들 이 강을 함께하였으니 / 袞袞衣冠共此江
지령과 인걸이 동방에 성대한 곳이라오 / 地靈人傑盛吾邦
병든 뒤 성묘가기 어려울까 걱정 마오 / 休嫌病後難登壟
지척 간에 송추(선조의 산소)가 절로 창에 들어오니 / 咫尺松楸自入窓
언덕(望慕庵) 위는 청산이요 언덕 아래는 강이니 / 岸上靑山岸下江
영기로 인재를 길러 번방을 보익하였도다 / 鍾英毓秀翊藩邦
〈사정기〉를 다시 지을 필요가 없으니 / 不須更作思亭記
고상한 시가 본래 있어 비단 창을 비추네 / 自有高詞映綺窓
여러 공의 재학이 반강을 비웃으니 / 多公才學笑潘江
세고(양천세고)의 웅대한 문장 이방(중국)까지 퍼졌도다 / 世稿雄詞播異邦
놀라워라 산천이 경색까지 보태주고 / 怪底山川增氣色
벽간의 빼어난 시 헌창에 찬란하도다 / 壁間奎藻耀軒窓
관악산 마주하고 삼강을 띠었으니 / 平臨冠岳帶三江
천년에 서린 터전 일국에 으뜸이로다 / 盤踞千年壯一邦
빼어난 곳에다 공께서 터를 잡았으니 / 卜築知公能占勝
가을 창에 풍광을 모두 거둬들였구나 / 盡收風景在秋窓
시대는 달라도 재주는 몽필 강엄(뛰어난 문재를 지닌 강엄)이니 / 異代才同夢筆江
성대한 명성 오늘날 나라 안에 우뚝하네 / 盛名今日聳家邦
공업을 가져다 은거할 땅과 바꾸었으니 / 還將事業輸高臥
우주의 맑은 바람 북창 가득 불어오네 / 宇宙淸風一北窓
서남으로 갈라진 산에 큰 강이 흐르니 / 山拆西南畫大江
이곳의 빼어난 절경 동방에 으뜸이로다 / 此間奇絶冠中邦
주인이 본래부터 물 구경을 좋아하여 / 主人自是貪看水
정자 위를 모두 터 사방이 창이로구나 / 亭上皆通面面窓
사가의 빼어난 문장 맑은 강을 읊었으니 / 謝家詞藻詠澄江
하나의 문성이 우리 동방에 비추었도다 / 一點文星照震邦
오늘 기쁘게도 정자 위 작품을 읽노라니 / 今日喜觀亭上作
붓끝에 이는 비바람 밤 창문을 흔드누나 / 筆端風雨夜掀窓
상초(지명)는 평평히 십 리 강물과 연하였는데 / 霜草平連十里江
강가에 역로 한 줄기 남쪽으로 났도다 / 江頭驛路出南邦
슬그머니 처마 앞의 나뭇가지를 꺾으니 / 慇懃手翦簷前樹
산색이 창에 못 닿게 가릴까 해서라오 / 怕礙山光不到窓
창강으로 돌아갈 계획 십 년간 저버렸으니 / 十年歸計負滄江
생시에 도 있는 나라를 만났기 때문이라오 / 只爲生逢有道邦
이웃하여 오랜 맹세 이루도록 허락하면 / 倘許卜隣成舊約
오두막 짓고 흰 구름 창을 마주 대하리라 / 小軒相對白雲窓
허혼의 뛰어난 시문 이재강을 압도하니 / 許渾詩壓李才江
한 나라에 함께 사는 것 얼마나 다행인가 / 何幸吾生得共邦
훗날 조각배 타고 방문하리라 기약하노니 / 他日扁舟期一訪
높다란 물가 정자 밤에도 창이 열렸도다 / 水亭高處夜開窓
태고에 홍수 나자 우왕이 강을 텄으니 / 終古洪流禹鑿江
신라와 백제 땅이 여기에서 갈렸다네 / 地形羅濟此分邦
고사의 마음자리 본래부터 드넓으니 / 高人胸次元來闊
사방의 건곤이 창에 막히지 않았구나 / 四面乾坤不隔窓
한강의 수려한 경치 오강에 견줄 만하니 / 漢江佳麗比吳江
월나라에만 산수가 있다고 하지 말라 / 山水休言在越邦
무엇보다 좋은 건 그림 같은 누대 하나 / 最是樓臺如畫裏
석양 속에 한 사람 정자 창에 기대었네 / 小亭人倚夕陽窓
평상시 갈망으로 얼마나 강을 삼켰던가 / 平生渴夢幾呑江
취중의 호방한 정취 해방 가득 넘쳤다오 / 醉裏豪情溢海邦
봉창 아래 예전 술자리 아직도 생각나니 / 猶憶去年篷底飮
오경에 찬비가 쏟아져 선창을 때렸었지 / 五更寒雨打船窓
제천정(한강의 정자이름) 아래는 긴 강물에 잠겼으니 / 濟川亭下浸長江
예로부터 형승으로는 이곳을 꼽는다네 / 形勝由來說此邦
와유하며 흥취만 부치기 못내 아쉽나니 / 堪恨臥遊空寄興
가을 내내 창가에서 책만 끙끙 읽누나 / 一秋辛苦讀書窓
어부 따라 가을 강에 배를 자주 띄우고 / 慣從漁子泛秋江
평소에도 먼 곳까지 두루 구경하였건만 / 兩眼平生遍遠邦
한수의 풍광이 다시 나를 뒤흔들어 / 漢水風光還攪我
새벽녘 꿈속에서 배를 타고 돌아갔다오 / 曉來歸夢落篷窓
고향 송강 순채 농어 생각이 났으니 / 故鄕蓴鱠憶松江
장한의 풍류는 진나라에 으뜸이지만 / 張翰風流擅晉邦
십초정 주인이 투망하고 술 마시며 / 何似十貂亭上客
한가로이 지내는 즐거움만 하겠는가 / 網魚甌酒倚閑窓 <次許岳麓漢上詩韻 二十首幷序 - 이수광/지봉집2권>
註: 허악록(許岳麓)은 허성(許筬 1548~1612)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언(功彥), 호는 악록ㆍ산전(山前)이다. 허엽(許曄)의 아들이며 허봉(許篈)ㆍ허균(許筠)의 형이고 난설헌(蘭雪軒)의 오빠이다.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1) 생원이 되고, 158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 예조ㆍ병조ㆍ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선조 대에 학문과 덕망으로 사림의 촉망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악록집》이 있다.
허씨 집안의 문장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온 천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는데, 특히 초당(草堂) 허엽(許曄), 악록(岳麓) 허성(許筬), 하곡(荷谷) 허봉(許篈), 성소(惺所) 허균(許筠),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는 허씨 집안의 ‘오문장(五文章)’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온 가족이 문장에 뛰어났다.《양천허씨세고》는 원래 중종(中宗) 때 허흡(許洽)이 선대의 시를 모아 편집한 책이다. 그 뒤 선조(宣祖) 때 허성(許筬)이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 등의 시를 추가하여 속집을 출간하였는데, 명(明)나라에서 사신 온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이 서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