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용택(86)옹의 고향은 평양 황금정이다. 스물 다섯 되던 해 월남, 북파공작원 역할을 하며 아주 잠깐 고향 인근을 둘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고향은 금기의 땅이 됐다. 언젠가 꼭 돌아가리라 기대하며 결혼까지 미뤄왔건만 아흔이 다 되도록 통일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청주의 택시운전사가 됐다.
◆ 고가네마찌, 그리운 고향 '황금정' = "누를 황(黃), 쇠 금(金)자를 써서 왜정 때는 고가네마찌라고 불렀어요. 내 고향이야. 부모님 고향은 황해도 운율군이고. 지금도 눈 감으면 그 모습이 다 그려져요. 눈에 선해…."
월남 후 고향 땅을 다시 밟은 것은 미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 8240부대 제7연대에서 근무할 때다. "우리가 특수부대인 동키부대였어요. 당나귀부대라고 불렀지. 1개 소대를 배에 태워서 월북을 시켰는데 극동사령부 본부가 동경에 있었잖어. 정보수집 일을 하다보니까 우리 위치가 노출되면 안된다 말이여. 그래서 호위가 대단했어. 무전을 쳐서 좌표 정해놓으면 제트기 네 대가 날아와서 다 때려부쉈으니까. 후퇴할 때까지 비행기가 계속 따라붙어줬어. 다른 부대보다 안전했지."
고향 땅을 밟아본 것은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제대 후 가족들과 상봉한 곳은 전북 군산. "내가 평양 고급중학교 다닐 때 수학선생이던 신문술 선생님이 군산비행장 통역으로 와 있었거든. 그분이 울 아부지한테 군산비행장 청소사업을 연결해 줬지. 그때 돈 좀 모았어요. 군산에서 최고 갑부가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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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지역의 최고령 택시기사인 홍용택할아버지가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노익장을 과시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김용수 |
홍옹은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면서 중앙대 약대에 들어가게 된다. 3학년1학기까지 다녔을까, 피난민 돕기에 적극적이었던 아버지의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학업도 접어야 했다.
"내가 우여곡절이 많어요. 학교 관두고 분석사로 일했어요. 오창에 들어가 있는 거 그게 뭐지? 아! 식약청! 그런 데서 분석 일을 했어요. 공업연구소에 있다가 중앙대 약대에 들어간 게 52년인가 53년인가 하여간 60년 다 됐을 때인데 경북 봉화군 소천면 대현리에 있던 연화광업소에 스카웃 됐다가 가족들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지. 대한토건 서울지점에서도 잠깐 일했고."
◆ 충북 청주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다 = 청주에 정착한 것은 1974년이었다. "내 남동생이 네명이에요. 셋째가 칠십 둘인데 청주서 개인택시를 하지. 여동생도 하나 있었는데 급성폐렴으로 세살때 죽었어요. 동생들 때문에 청주에 왔어요. 내가."
가장인 그가 선택한 직업이 개인택시 운전이었다. "지금은 2천500대 정도 되는데 내가 처음 택시 시작한 1974년에는 개인택시 10대, 일반택시 80대 정도였어요. 1973년에 유류파동이 나서 수입이 형편없었는데 1975년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영업이 괜찮았지. 하루 4만원씩은 벌었으니까. 지금 돈으로 사오십만원씩은 벌었단 말이야. 사십평 집 한채가 오십만원할 때지."
슬하에는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애들은 관두라고 벌써부터 그러지. 근데 계원이나 친구였던 사람 중에서 운전대 놓은 사람들 3년 안에 다 죽었어. 그래서 '나도 운전대 놓으면 죽는다'고 안놓았지. 정말 운전대 잡고 있는 사람은 지금 다 살아 있어요."
15년 전 사고만 없었더라면 허리 디스크로 인한 고생도 없었을 것이다.
홍옹은 지난 1996년 사직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트럭에 받쳐 죽을 고비를 넘겼다. 건강이 나빠지면서 요즘은 하루 평균 100km 정도만 운전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 절반 수준이다. 수입도 반으로 줄었다.
"영업은 그렇게 많이 안해요. 아침 여섯시부터 아홉시반까지 하면 아침장사는 끝나고 점심때 나왔다가 다섯시경에 다시 들어가고 퇴근시간에 잠깐 하는 거지." 돈 버는 욕심은 내려놓은 지 오래다. "수입이 형편없어요. 보험료 내고 감가상각 따지면 백만원도 안돼. 하루에 한 오만원벌까. 그 정도지."
택시운전 경력 38년. 충북 최고령 택시운전사는 택시운전을 하며 '관용과 배려'를 배웠다고 말한다. "운전하면서 여러 사람 만나고 나이도 들고 하니까 남하고 싸우고 말다툼 하는 게 싹 없어졌어요. 내 성격이 아주 괄괄했거든."
소원은 통일이었다. 하지만 택시를 타고 평양까지 갈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기대는 접어야 할 것 같다.
"내 생전에 고향 가기는 틀린 거 같어. 다만 몸 건강하게 죽을 때까지 운전대 잡는 거, 그거면 족해요." 쓸쓸한 미소가 흘렀다.
/ 김정미·박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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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깜짝놀란건 저 할배차가 새차라는것,,구십넘길 생각이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