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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30일 목요일 [(녹)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를 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에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신다(복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시작입니다. 1,1-9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2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42-5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45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46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49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5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도둑의 비유와 충실한 종의 비유로 깨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첫째 비유에서 ‘깨어 있음’의 형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둘째 비유에서는 주인에게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충실한 종의 자발적인 깨어 있음을 다룹니다. 깨어 있음의 비유에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은 확실하면서도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은 확실한데 언제 오실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때’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깨어 있음의 핵심입니다. 사도 시대의 몇몇 공동체는 예수님의 재림이나 두 번째 오심을 열렬히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당신의 생명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불러 주신다고(1코린 1,7-9 참조) 코린토인들을 격려합니다. 지나치게 윤리적, 개인적인 성향의 종말에 대한 과거의 관점은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최후 심판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걱정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깨어 있어야 하는 목적도, 구성 요소도 아닙니다.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에게 두려움의 이유가 아닌, 신뢰에 가득 찬 깨어 있음, 그분과 만남을 기다리며 느끼는 타오르는 염원과 기쁨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인간 역사의 흐름은 주님의 날에 정점에 이릅니다. 그때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미국판 무소유의 삶을 추구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의 생애가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소로의 생애는 거대한 집단주의에 맞서 홀로 투쟁한 외롭고 고독한 예언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무지막지한 자연 훼손과 개발, 물욕과 전쟁, 국가주의에 항거하며, 자연과 한 인간 개인의 소중함, 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전력질주한 고귀한 나날들이었습니다. 1845년 소로는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와 전쟁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콩코드 근처 월든 숲 호숫가 외딴 곳에, 작은 오두막을 하나 짓고 홀로 살았습니다. 소로는 평생토록 절망스런 삶으로 이끄는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며, 이런 명언(名言)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도 일맥상통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4자 42~44절) 사막의 교부들 역시 깨어있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황량하고 깊은 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어두운 동굴 깊숙히 들어가 기도와 노동에 전념했습니다. 홀로 고독 속에 단식하며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시메온 교부 같은 경우 언제나 깨어 있기 위해 37년 세월 동안 높은 기둥 위에서 기도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 평생토록, 환한 얼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40년간 주방장 소임을 다한 가르멜 수도회 소속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역시 언제나 깨어 있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영성생활은 지극히 단순명료했습니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늘 깨어 있을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거룩하게 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늘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이 일 가운데 하느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저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 저것 부탁하는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저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 처럼 깊은 고요 속에 하느님을 모십니다.” 다음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말씀은 세상 안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거룩함에 도달하는 길은 일을 바꾸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지 않으시고, 그 일을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인간관계의 목적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인포시크 등 4개의 IT업체를 성공시킨 성공한 벤처기업가인 스티븐 케이시는,
“내가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나는 MIT 공대에서 최고의 공학기술을 배웠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IT사업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뛰어난 기술이 아니라 좋은 인간관계라며 “요즘 나에게 공학기술과 인간관계 기술 가운데 한 가지만을 택하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인간관계 기술을 선택할 것이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카네기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정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중 15%는 자신의 기술적 지식에 의한 것이며 85%는 인간관계 즉,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는 능력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15%의 사람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 예를 들면 변호사라면 아주 뛰어난 법률 지식을 갖고 있어서, 회계사라면 회계에 관한 지식이 뛰어나서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85%의 사람들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능력, 즉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잘 받아들여서 사람들과 함께 원만하게 지내는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인생에서 성공한 것입니다.
이는 카네기연구소장 최염순씨의 글입니다.
최첨단 기술을 요하는 IT업체에서조차 인간관계가 성공을 좌우한다면 다른 직장들에서야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도 이 말에 동의는 하지만, 일면 인간관계의 목적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것처럼 인식될까 우려가 됩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며 자신의 행복을 키우기 위함이라면 그런 사람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기분은 썩 좋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 이용당하며 기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하겠다는 친구들이 찾아와 “행복하기 위해 결혼한다”고 말하면 저는 이를 바로잡아줍니다.
그것은 참다운 인간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결혼하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원망이 늘어나고 결국엔 좋은 결말을 맺을 수 없게 됩니다.
성자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일까요?
그분은 인간이 없어도 삼위일체 사랑 안에서 충만히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그 행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관계는 내가 상대를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맺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먼저 행복하여 그 행복을 전해준다는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해님, 달님 동화에 떡을 팔고 돌아오는 어머니가 호랑이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인간관계를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람을 충분히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떡은 언젠가는 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떡이 무한대로 나오는 누군가를 찾아야만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의 떡의 원천은 하느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관계의 목적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여야 합니다.
호랑이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 그리스도는 그 사람을 통해 무한한 떡을 제공하여 그 둘의 관계가 소진되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예수님과의 친교를 목적으로 불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친교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빠진다면 조만간 누군가는 잡아먹혀 관계가 깨어지는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친교는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친교가 목적이 되어야 나머지 관계도 오래 갑니다.
그 친교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밖에는 없습니다.
친교가 이루어진다는 증거는 시간이 갈수록 그리스도와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고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깊은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의 친밀함도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모든 관계가 참다운 친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 관계는 무조건 그리스도와의 친교로 향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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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녀 요안나 유간(Jane Jugan)
신분 : 설립자
활동연도 : 1792-1879년
같은이름 :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주강, 쥬강,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의 브티트 크로와에서 1792년 10월 25일 태어난 성녀 요안나 유간(Joanna Jugan, 잔 주강)은 어린 나이에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난 아버지가 실종된 후 다른 세 명의 형제들과 함께 일찍 가난과 고된 노동을 알게 되었다.
집 근처에 위치한 저택의 부엌일을 돕는 하녀로 시작하여 생-세르방의 로제 병원에서 간호사로, 가정부로 때로는 간병인으로 일을 하였다. 한 젊은 어부의 구혼을 받았을 때 그녀는 “하느님께서 저를 원하십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어떤 사업, 알려지지 않은 그 사업을 위해 저를 쓰시고자 하십니다.” 하며 그 청혼을 거절하였다. 그 후 그녀는 오직 하느님과 이웃, 특히 가장 불쌍하고 헐벗은 이들을 섬기고자 결심하였다. 그래서 25세에 탄복하올 어머니 3회에 입회하였다.
1839년 겨울 어느 날 갑자기 혼자가 된 수족을 못 쓰는 반신불수의 장님 할머니를 집에 모셔와 보살핀 것이 계기가 되어, 1843년 그녀를 중심으로 세 명의 젊은 동반자와 합세하여 40여명의 노인들을 보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세 젊은이들은 수도회의 기틀이 잡혀가는 이 작은 모임의 원장으로 잔 주강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녀는 부당하게 원장 자리에서 밀러났지만, 오로지 침묵과 온순함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써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차 그녀는 잊혀졌고, 그녀가 세상을 떠날 무렵 그녀가 수도회의 창립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수녀는 거의 없었다. 1879년 8월 29일 그녀가 사망한 후, 1902년에 이르러 그 동안 잊혀졌던 잔 주강 십자가의 마리아 수녀가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경로 수녀회)의 창립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1982년 10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2009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