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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
얼마 전 이웃 중에 이슬님이 그림 한 점을 보여 주시면서 화가 이야기를 부탁하셨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습니다. 막상 자료를 찾아보니 유화보다는 포스터 분야에서 더 많은 이름을 남긴 화가였는데 자료가
많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포스터는 제가 잘 모르는 분야인데, 대답을 해 놓고 더욱 곤혹스럽습니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일, 공부도 할 겸 정리해 보겠습니다. 프랑스의 쥘 그룬 (Jules A. Grun / 1868~1938)입니다.
프랑스 예술가 살롱의 금요일 Friday at the French Artists' Salon / 1911
그룬의 많지 않은 유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 이 그림 속에는 100명 가까운 프랑스 예술계
유명 인사가 묘사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룬 부부와 스승인 앙투앙 기으메도 있다고 하는데,
어디 계신가요? 손 좀 들어 보세요.
알 수가 없군요. 참석한 사람들로 화면이 꽉 찼습니다. 담배를 피는 사람, 인사를 하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
사람 ---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왼쪽 조각상이 벌떡
일어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 여러분들 조용히 좀 하세요.
파리 살롱전에도 출품도 했고 수상도 한 그룬이지만 정작 그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파리에서 출생했다는 기록 다음에는 바로 그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들로 이어집니다. 그는 두 명의 스승으로
부터 그림을 배웠는데, 한 사람은 파리 오페라의 유명한 연극 무대 장식을 했던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풍경화가 앙투앙 기으메 (Antonie Guillemet)였습니다. 기으메와의 인연은 평생 계속됩니다.
디너 파티 The Dinner Party / 60cm x 90cm
식사 후 (After Dinner)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이 작품에는 그룬과 그의 아내, 친구들과 스승이 등장합니다.
화면 오른쪽 턱을 괴고 여인의 이야기를 듣는 신사가 그룬의 스승인 앙투앙 기으메입니다. 마치 딸의 말을
듣고 있는 아버지의 눈빛입니다. 기으메가 바라보는 여인, 그러니까 손에 부채를 들고 뒤통수를 보이고 있는
여인이 그룬의 아내 마리안입니다. 화면 가운데 서 있는 콧수염 난 멋쟁이 신사는 포스터 장르에서 영원히
기억 될 쥘 쉬레이고 그 옆에 있는 대머리에 턱수염 아저씨가 바로 그룬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유쾌한
자리의 끝 무렵입니다. 밤을 꼬박 새도 좋은 자리가 있죠.
잠깐 스승인 기으메를 알게 된 이야기를 그룬이 남긴 말을 인용해서 꾸며보겠습니다.
‘언젠가 친구가 살롱전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을 만나러 간다고 집에 들렀습니다. 저의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친구를 따라 나섰습니다. 처음 만난 기으메 선생님은 혹시 내가 그린 작품을 볼 수 있겠냐고 하셨습니다.
높이가 2m나 되는 작품이어서 운반이 어렵다고 하자 어쨌든 한 번 보자고 하시더군요. 며칠 후 저는 작품을
가지고 기으메 선생 화실을 다시 찾았는데, 선생님은 제 작품을 보고 크게 감탄하셨습니다. 저는 기쁨 속에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 했지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해 다시 선생님을 다시 만났고 선생님은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선생님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그룬, 참 좋은 제자였군요.
실내의 인물들 Figures In An Interior / 60.3cm x 81cm
앞의 작품과 구성과 내용은 비슷한데 이렇게 묘사 방법이 다를 수 있군요. 방법이 다르다 보니 그림에서 오는
느낌도 다릅니다. 화사하기 보다는 차분하고 오히려 적막합니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윤곽이 모호해
지면서 얼굴이 감춰졌습니다. 그룬의 작품이 아닐 것 같다는 의심도 가지만 그의 작품으로 소개되어 있으니
그렇게 믿어야겠지요.
그룬은 정물화와 초상화 그리고 파리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주제로 화가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살롱전에도
꾸준히 작품을 출품했는데 기록이 맞는다면 1885년, 17세의 나이로 살롱전에 데뷔합니다. 다른 화가들에
비하면 이른 나이였습니다.
물랭루즈
몽마르뜨를 대표하는 카바레이자 캉캉춤이 처음 시작된 물랭루즈는 영화로, 그림으로 우리에게 너무 많이
소개된 곳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무랑루즈’라는 이름의 종로에 있었던 맥주집 이름으로 먼저 다가옵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학생 때 어쩌다 여유가 생기면 종로에 있는 무랑루즈에 가서 생맥주를 마셨습니다. 좀 더
여유가 있을 때는 병맥주를 주문하는 객기를 부리곤 했죠. 포스터 속 여인은 없었지만 가슴은 뜨겁고, 세상은
좁았지만 눈 빛은 빛나던 때였습니다.
그룬이 살롱전에서 거둔 수상 경력은 많지 않습니다. 3등과 2등 메달을 각각 한번씩 받았다고 하니까 그가
오랜 기간 출품한 것과 비교하면 좀 아쉽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그룬은 작품 선정위원회의 멤버를 거쳐
살롱전의 심사위원이 됩니다. 그렇다면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군요.
페삐니어 컨서트 A Pepiniere Concert / 1898
페삐니어 라는 이름이 카바레 이름인지 컨서트의 주인공의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 고수님들의 말씀을
기다립니다. 어쨌든 이 남자들, 난리가 났습니다. 무대 위에 어떤 광경이 있는지 상상을 하는 수 밖에 없는데
흰 콧수염의 아저씨는 거의 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른쪽 두 남자, 수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는 장면에서 저렇게 차분하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경우는 아주 특별합니다.
어이 거기 두 사람, 잠깐 검문 좀 ---- 하고 싶습니다.
그룬은 파리의 보헤미안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자료의 행간에 담긴 뜻을 상상하건데, 그룬이 작품을 판매해서
여유 있게 살았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살고 있는 동네의 카페와 카바레를 자주 갔는데 내부 인테리어와 무대
장식 일을 맡아서 하곤 했습니다. 그룬의 화가로서의 항로가 크게 바뀌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눈
여겨 보던 가게 주인들이 그룬에게 쇼를 선전하는 포스터 제작을 의뢰한 것이죠.
타바렝 무도회장 Bal Tabarin
1904년 발표한 이 포스터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유명한 무도회장인 타바렝의 포스터 안에는 두 명의
사내와 예쁜 여인이 있습니다. 구성이나 분위기로 봐서는 유쾌하기 그지 없는데 문제는 뒤 쪽에 있는 검은
피부의 사내였습니다. 지금이야 문제가 없지만 당시 보수적인 파리 사람들 사이에는 흑인이 자신들의 우상인
여인과 있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죠. 할 수 없이 그룬은 흑인을 백인으로 다시 그려야 했습니다.
그 때는 20세기 초였으니까요.
포스터는 그 역사가 고대 이집트까지 올라 가는 장르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포스터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석판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866년 쥘 쉬레 (Jules
Cheret)가 석판 인쇄를 처음 시작했다고 하니까 150년 정도 된 것이죠. 그룬이 ‘공식적’으로 포스터 디자인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4세가 되던 해인 1892년이었습니다.
몽마르뜨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 Guide de l'etranger a Montmartre / 1900
붉은 색 옷의 여인에게 눈길을 주다 몽마르뜨 안내서의 표지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빨간 풍차
(물랭루즈)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배치했군요. 팔을 뻗은 여인의 자세는 무슨 뜻일까요?
혹시 제 손을 잡고 가실 분 안 계시나요?
넵, 여기 있습니다!
손을 얼른 내밀고 싶군요.
그룬은 몽마르뜨에 있는 많은 카바레로부터 주문을 받게 됩니다. 파리의 자유분방한 저녁의 모습을 건져
올리는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던 그의 포스터는 칼라로 제작되어 프랑스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젊고 예뻤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그룬의 포스터에서 몽마르뜨 카바레의
가장 유명한 가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전 중학생 때 영화 포스터를 몰래 뜯어서 방에 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포스터에는 저의 여인 데보라 카가 있었거든요.
르 투께 파리 플라쥬 Le Touquet Paris-Plage
르 투께는 프랑스 북부 바닷가를 끼고 있는 도시입니다. 휴양도시로 유명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자주 만나는 관광 포스터 종류가 되겠군요. 골프코스를 따라가는 부부와 남자 캐디가
보입니다. 아이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 넋을 놨습니다. 해안가에 즐비하게 서 있는 자동차가 보이시는지요?
이 포스터 안에는 당시 최신의, 최고의 문명 이기들이 다 등장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있는 사람들’이
세상 사는데 불편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당시 파리에는 ‘포스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쥘 세례가 왕성하게 포스터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투르즈 로트렉 (http://blog.naver.com/dkseon00/140055583690)도 포스터를 제작하고 있었지만 경쟁은
쥘 세례와 그룬으로 좁혀졌습니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쥘 세례는 역사상 가장 많은 포스터를 그린 화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룬의 작품 속에는 쥘 세례가 자주
등장합니다. 제 생각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달리 그룬은 쥘 세례를 존경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 흐르는 곳이 고수들의 세계니까요.
상류층 재단사의 일상 High Tailor Life / 1902
이 작품은 일러스트로 보입니다. 그룬은 삽화가로도 유명했습니다. 제목을 보면 이 여인 중 한 명은 상류층
사람들의 재단사일까요? 어둠 속 오른편 남자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온통 검은색인 배경 속에 얼굴 따로
손 따로 떠 있지만 표정은 아주 생동감 있습니다. 뭘 보고 저렇게 놀란 걸까요?
아저씨, 입 다무세요.
남자를 흔드는데 여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나 봅니다.
그룬은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에 색을 입히고 싶었고 자신의 깨끗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 화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삶과 예술이 합쳐진 사람’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턱수염이 있었고 대머리였지만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맑아 사람을 관통하는 듯 했다고 합니다. 농담을 잘 했고
코는 매력적으로 굽었다고 합니다. 제가 가능성 있는 것이라고는 대머리 밖에 없군요.
르 스히흐 Le Sourire
불어로 수히흐는 미소라는 뜻입니다. 화면에 웃는 얼굴이 가득하니 ‘미소’라는 제목도 틀리지는 않는데
제 생각에는 ‘미소’라는 무도회장의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남자는 아주 멋쟁이입니다.
카이젤 수염에 근사한 연미복, 외눈 안경 그리고 벨트 아래로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금줄 시계까지 ‘폼’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를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이 묘합니다.
이번에 제가 큰 것 한 건 했습니다. 언제 식사라도 한 번 하시지요. 하, 하, 하
뷁!
쥘 그룬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했으나 파킨슨 병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병은 그의 몸만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그를 분리시키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벨 에포크 시대의 마지막 포스터
작가라는 평을 들은 그룬의 사망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라 씨갈 La Cigale
씨갈은 ‘매미’라는 뜻으로 재미있는 상호입니다. 혹시 손에 악기를 든 여인을 ‘매미’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돈을 들고 앞으로 나오는 노인의 표정이 아주 흡족합니다. 팁을 주는 것이겠지 했는데 옆에
쓰인 글씨에도 동일한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그러면 팁이 아닐 것 같은데 ---- 역시 고수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설마 가슴 만져보는 값은 아니겠지요?
안녕, 꼬꼿 Adieu, Cocottes / 1903
꼬꼿은 매춘부를 뜻하기도 하지만 사교계의 꽃을 말하기도 합니다. 한 때 살롱을 주름 잡았던 여인들 중에는
매춘부도 있었지요. 교양과 미모로 사교계 남자를 유혹하는 여인들을 통칭하는 말이지만 유혹이라는 말
보다는 연애를 했다는 말에 마음이 더 끌립니다. 유혹은 사랑이 철저하게 배제된 각본 같거든요. 마신 술로
얼굴이 붉어진 여인이 날아 갈 듯한 몸 짓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한 잔 더 할까요?
넵!
큰 소리로 대답하고 싶습니다.
살롱전의 공식 자료는 그룬의 사망을 1938년이라고 했지만 또 다른 자료들에서는 1934년, 1945년이라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남아 있는 그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포스터가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미술의 한 분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 데는 쥘 쉬레와 그룬 같은 화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이슬님 때문에 포스터 세상을 잠깐 둘러보고 왔습니다. 역시 어렵군요.
이슬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