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묘비(墓碑)는 윤증(尹拯)이 찬(撰)했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블로그에서 옮김.
橫額 : 贈左承旨李公墓碑(篆書)
碑題 : 碧珍李公堜之墓
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配贈貞夫人全義李氏
내용요약: 이상급 묘역 오른(동)쪽 능선의 밭가에 위치한다. 판석으로 넓게 이중 기단을 만들고 대석을 놓은 다음 비를 세웠다. 4면비로 묘비의 형태가 특이하다. 좁은 쪽을 앞면으로 삼아 비제를 넣고 반대편에 관직을 새기고 넓은 양면에는 윤증(尹拯)이 찬한 비문이 음기되었다.
출처: 《충주의 금석문, 2006년》
《개미실 사랑방》블로그에서 옮김.
崇禎後二丙申이라 써있다. 1716년 숙종 42년이다.
윤증(尹拯)이 사망한 해이다.
이련(李堜) 비문 모습.
한수재집(寒水齋集)
한수재선생문집 제32권 / 묘표(墓表)
《증(贈) 승지(承旨) 이공(李公) 연(堜) 묘표》
이 사문 세환(李斯文世瑍)이 선친의 유언에 따라 할아버지의 사행(事行)을 적어 가지고 내게 와 울면서 청하기를 “우리 할아버지는 남다른 바탕이 있으신 분으로 당대에 부응할 만한 충분한 재주와 행실을 갖추었으며 그 이름 또한 후세에 전하기에 넉넉한데,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뜨신 지 지금 70년이 되도록 아직 묘비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후손으로서 너무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 당신의 말 한마디를 얻어 지하의 영령을 빛나게 했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그것을 받아 읽어 보았다. 아, 하늘이 이미 그러한 인물을 낸 것은 무엇인가 하기 위해서였을 것인데 이어서 다시 막아 버렸으니, 그 또한 불행한 일이 아닌가. 내가 비록 지식이 얕고 인품이 용렬하여 감히 입언(立言)을 한다고 자처할 수는 없지마는 그 아름다운 행실이 영원히 묻혀 버리고 전해지지 못할까 적이 마음이 저리고 또 효자의 지극한 간청에 감동이 되어 마침내 사양을 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연(堜)이고 자는 교옹(郊翁)이며 관향은 벽진(碧珍)이다. 아버지는 참지(參知)로 판서에 추증된 휘 상급(尙伋)인데 병자년 난리에 삼학사(三學士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의 논의를 주장하여 한때 명망이 높았고, 할아버지 휘 희선(喜善)은 교관(敎官)으로 찬성(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부 휘 석명(碩明)은 군수로 참판에 추증되었다. 청렴한 지조로 대대로 가문을 지켜 사람들이 맑은 물에 비유하였다.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첨지중추부사 주(胄)의 딸이었으며, 첨지중추는 또 음애(陰崖 이자(李耔)) 이 문경공(李文敬公)의 미생(彌甥 자매의 손자)이었다.
공은 만력(萬曆) 정미년 1월 20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영리하였으며 성품도 효성스럽고 조심스러워 부모의 뜻에 순응하고 어김이 없었고 얼굴 모습 또한 화기가 넘쳐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자라서도 화사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겸손과 공순함으로 스스로를 길렀으며 말도 골라서 하였다. 친척과 친구에게 후하고 사람을 다정하게 대하여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부정한 일은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하지 않았으며 남이 하는 경우 옳은 길로 가도록 타이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판서공이 일찍이 외읍(外邑)을 맡고 있었는데, 그때 공은 뜻을 간결하게 가져 문방(文房) 도구 같은 것까지도 청정(淸政)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고, 무릇 자제(子弟)로서의 허물을 한 번도 저지른 일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을 제어하였다.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생각하는 것이 정밀하고 전일했으며 늘그막까지 외곬으로 마음을 써 거의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였는데 어쩌다 못 다한 것이 있으면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좌우에서 들려와도 못 들은 체 할 만큼 입지(立志)가 확고하였다. 일찍이 별시(別試)를 통과하고 전시(殿試)를 보기 전에 정부인 상을 당하여 절도에 넘게 몸이 야위도록 상을 치르다가 점점 병이 고질화되어 드디어 죽기에 이르렀는데, 그때가 바로 숭정(崇禎) 을해년 2월 24일로서 공의 나이 겨우 29세 되던 때였다. 충주(忠州) 서쪽의 황금곡(黃金谷) 해좌(亥坐) 둔덕에 장사 지냈는데 이는 그곳이 선영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막내아들의 공훈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씨(李氏)는 대대로 알려진 인물들이 많다. 신라(新羅) 말기에 총언(悤言)이라는 이가 벽진 태수(碧珍太守)로서 여조(麗朝)의 통일 시기를 당하여 공을 세워 장군(將軍)의 호를 받았는데, 그가 이씨의 시종이다. 공의 6세(世) 조부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에 이르러 청백으로 이름이 나 세상에서 그를 노촌 선생(老村先生)이라 불렀고, 공의 중부(仲父)인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은 의로운 절개로 나라 위해 몸을 바쳤는데 공이 또 효도로 마지막을 장식했으니, 그야말로 전통적으로 풍성(風聲)을 지닌 가문으로서 대대로 주고받았다고 할 것이다.
공의 초취(初娶) 임천 조씨(林川趙氏)는 죽음공(竹陰公) 희일(希逸)의 딸로서 자태가 단정하고 성품이 총명하여 매우 시부모의 뜻에 들었는데 자식이 없이 공보다 13년 먼저 죽어 양주(楊州)의 불암산(佛巖山) 선영에 술좌(戌坐)로 장사 지냈다. 재취(再娶)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도사(都事) 구준(耈俊)의 딸로서 청강공(淸江公) 제신(濟臣)이 그의 할아버지가 되며,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화기가 넘치고 상냥하여 매우 훌륭한 부덕(婦德)을 지녔다. 미망인이 되자 외롭고 연약한 두 아들이 잘 성취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는 데 있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고, 집안이 몰락할 지경이 되어도 그 사실을 모르게 숨기고 오직 날마다 스승을 찾아 학업에만 힘쓰게 하였다. 그래서 외형(外兄)인 동회(東淮 신익성(申翼聖)) 신공(申公)이 언젠가 감탄을 하면서 이씨매(李氏妹)는 참으로 여사(女士)라고 하기도 하였다. 숭정(崇禎) 후 정미년에 세상을 마쳤는데, 묘는 공의 묘 뒤에 있다.
아들이 둘이다. 맏은 지웅(志雄)으로 두 사마시(司馬試)에 모두 합격하고 한성 서윤(漢城庶尹)이 되었으며, 차남 지걸(志傑)은 사마시를 통과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가 되었다. 서윤은 4남을 두었는데 목사(牧使) 세황(世璜)과 세구(世球)ㆍ세관(世瓘)ㆍ세환(世瑍)이며, 두 딸은 참봉 윤규(尹揆)ㆍ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다. 첨추(僉樞)는 아들이 둘인데 세근(世瑾)은 교리(校理)이고 세진(世璡)은 별제(別提)이며, 딸 다섯은 유중영(柳重榮), 진사 어사하(魚史夏), 정만준(鄭萬準), 부사(府使) 조세망(趙世望), 유창진(柳昌晉)에게 각각 시집갔다. 세황은 아들 정상(挺相)이 진사이고, 세관은 자식이 없어 아우의 아들 정박(挺樸)을 후사로 삼았으며, 세환은 아들 정욱(挺郁)과 정박 둘 모두 진사이다. 세근은 3남을 두었는데 정주(挺柱)가 진사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세진도 3남인데 정즙(挺楫)과 어린아이들이다. 그리고 안팎으로 증손과 현손이 모두 50여 명이나 된다.
아, 공은 비록 일찍 죽어 자기가 할 바를 다 못하였지만 후사들이 번창하여 현재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그의 복록(福祿)이 끝난 것이 아니다. 공과 같은 이야말로 이른바 하늘이 그 못다 발휘한 축적을 모아 두고두고 후세에 복을 주는 그런 경우라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청수한 인물 오래 못 사는데 / 淸粹者難久
기품 때문에 그런 것인가 / 氣稟之然耶
후손들 경사 누리고 있으니 / 餘慶方來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늘이런가 / 可必者天耶
오늘날 착한 일 하는 이들이여 / 凡今爲善之人
날아오르는 저 난곡을 보시게나 그려 / 盍觀鸞鵠之騰騫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0
원문
《贈承旨李公 堜 墓表》
李斯文世瑍甫以先大夫遺命。錄其王府君事行。泣請於余曰先王考有異質。其行其才。足以需當時。其名足以傳後世。而不幸短命。今七十年而尙闕墓文。此後孫之至痛也。願得子一言。以爲地下重。余受而讀之曰。嗚呼。天旣生若人。若將有爲。而又從而閼之。其亦不幸矣夫。顧余淺劣。雖不敢以立言自居。竊傷其懿行湮沒而無傳。又感孝子之至懇。遂不能辭。謹按公諱堜字郊翁。碧珍人。其考參知 贈判書諱尙伋。丙子之難。主三學士之論。名重一時。王考諱喜善。敎官 贈贊成。曾王考諱碩明。郡守 贈參判。廉操世家。人比淸水。妣 贈貞夫人密陽朴氏。僉樞胄之女。僉樞。陰崖李文敬公之彌甥也。公以 萬曆丁未正月廿日生。幼而警悟。性孝謹。有順無違。容色愉婉。爲父母所鍾愛。長不喜芬靡之習。謙恭自牧。擇言而發。厚於戚故。與人款曲。爲儕流所愛慕。至於不正之事。雖小不爲。見人之爲。亦不忘偲切。判書公嘗典外邑。而公飭志簡潔。雖至文房之具。亦不欲以浼淸政。凡所謂子弟過者。一未嘗有焉。其制行有如此者。早好讀書。思慮精專。兀兀窮年。殆忘寢食。苟不卒業。雖鬧聒之言左右至。若無聞也。其立志有如此者。嘗擧別試解額。未赴殿試而遭貞夫人憂。致毀過節。輾轉沈痼。遂至滅性。是 崇禎乙亥二月廿四日。得年纔二十九。葬于忠州西黃金谷負亥原。從先兆也。後以季子從勳 贈左承旨。李氏世多聞人。羅末有曰悤言。以碧珍太守。當麗祖統一。以功受將軍號。爲李氏鼻祖。至六世祖平靖公約東。以淸白顯。世稱老村先生。仲父忠肅公尙吉。以義節殉國。而公又以孝終。可謂故家風聲。有授而有受矣。公初娶林川趙氏。竹陰公希逸女。姿性端明。甚得舅姑意。先公十三年卒。無子。葬在楊州佛巖山先塋戌坐之兆。次娶全義李氏都事耇俊女。淸江公濟臣其祖也。莊肅和婉。婦德甚盛。旣稱未亡。以兩兒孤弱。恐不克成立。義方之敎。靡不用極。雖家事旁落。不使知之。唯日勉其就師問業。外兄東淮申公嘗歎曰李氏妹眞女士也。以 崇禎後丁未卒。墓在公墓後。有二子。長志雄。中司馬兩試。漢城庶尹。次志傑。司馬僉知中樞。庶尹四男。世璜牧使。世球,世瓘,世瑍。二女適參奉尹揆,尹熀。僉樞二男。世瑾校理,世璡別提。五女適柳重榮進士,魚史夏,鄭萬準府使,趙世望,柳昌晉。世璜男挺相進士。世瓘無子。取弟子挺樸爲後。世瑍二男。挺都,挺樸拜進士。世瑾三男。挺柱進士。次幼。世璡三男。挺揖。次幼。內外曾玄摠五十餘人。噫。公雖早世。未究厥施。後嗣繁昌。方將發揚於世。福祿蓋未艾也。若公者所謂天鍾未發之蓄。錫衍於無窮者歟。銘曰。
淸粹者難久。氣稟之然耶。餘慶方來。可必者天耶。凡今爲善之人。盍觀鸞鵠之騰鶱。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