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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開拓者)★
[노숙 31~35]
31
영등포 시장 뒷길은 이제 김명천에게는 제 동네처럼 익숙해져 있어서 싸고 맛있는 집은 다 알았다. 김명천이 임재희를 데리고 들어간 식당은 낙지볶음이 유명한 곳이었다. 손님이 바글거렸지만 그들은 구석자리를 겨우 잡아 소주에 낙지볶음을 시켰다.
“어디 아프냐?”
임재희의 앞에 젓가락을 놓아주며 김명천이 물었다.
“안색이 안 좋아.”
"신경 꺼.“
젓가락을 든 임재희가 반찬으로 나온 김치를 깨작거렸다.
“나 회사 그만뒀어.”
소주가 먼저 놓여 졌으므로 김명천이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인간적으로는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같이 일은 못하겠어. 그래서.”
“잘했어.”
임재희가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시간에 합숙소에 있었구만.”
“합숙소라니?”
놀란 김명천이 묻자 임재희는 쓴웃음을 짓고 시선을 내렸다.
“알고 있었어.”
“그래?”
한 모금 소주를 삼킨 김명천이 턱으로 임재희의 잔을 가리켰다.
“마셔.”
“그럼 앞으로 뭐 할거야?”
“새벽에 인력시장에 당분간 나갈거야.”
“겨울에 공사 하는 데가 있을까?”
“이삿짐센터 일도 가끔 나와.”
머리를 끄덕인 임재희가 잔을 들더니 입술만 축이고는 내려놓았다. 낙지볶음이 놓여 졌으므로 식탁은 열기와 냄새로 뒤덮여서 분위기가 조금 바뀌어졌다. 임재희가 매운 낙지볶음을 씹더니 손바닥으로 입 주위를 부채질했다.
“아유, 매워.”
“땀 한번 쭉 빼면서 먹으면 진짜 뭘 먹은 것 같아.”
“너무 매워.”
하면서도 임재희는 다시 낙지를 집었다.
얼굴이 차츰 밝아지기 시작하면서 술기운과 매운 낙지까지 곁들여져서 임재희의 모습이 원상으로 돌아갔다.
“사장이 이번 일이 끝나면 3천을 준다고 하더구만.”
한모금 소주를 삼킨 김명천이 붉어진 얼굴로 웃었다.
“딱 15분만 일을하면 3천이 굴러들어 오는 거야. 거기에다 난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고 기록도 없어. 그냥 사라지면 끝나는 일이었지.”
임재희가 눈만 깜박이고 있었으므로 김명천은 말을 이었다.
“사장을 데려다 주고나서 회사 그만 두겠다고 했더니 퇴직금이라면서 50을 주더라. 좋은 사람이었어. 그 사람도.”
“어째 들어간 회사마다 다 그 모양이야?”
술잔을 든 임재희가 술잔 사이로 김명천을 노려보았다.
“다 사기꾼들 아냐?”
“네 외삼촌 소식있어?”
불쑥 김명천이 묻자 임재희는 술잔을 기울여 한모금에 소주를 삼켰다. 임재희의 외삼촌이 바로 돈 떼어먹고 도망간 대리운전회사 사장이다.
“없어. 그깐 자식.”
“요즘 안 좋은 일 있어?”
내친김에 다시 물었을 때 임재희가 정색하고 김명천을 보았다.
“나, 내일부터 룸사롱 나가.”
숨을 멈춘 김명천의 얼굴을 바라본 임재희가 피식 웃었다.
“돈 벌면 놀러 와라.”
“이게.”
했지만 김명천은 어깨를 부풀리고 심호흡을 했다.
32
“너 카드빚 있어?”
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엉켜 있었지만 말로 뱉아진 것은 그렇게 되었다. 그러자 임재희가 놀랍게도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래. 어쩌다 보니까 3천 5백쯤 되었어. 그래서 어제 마담한테 선금으로 2천 받아서 갚았으니까 1천 5백 남았다.”
“죽겠구만.”
머리를 돌린 김명천이 벽을 향하고 말했다.
“신문이나 TV에서 보던 일들이 내 옆에서도 터지는구만. 그래, 카드로 긁고 명품 사모은거냐?”
“그랬다. 어쩔래?”
눈은 치켜떴지만 임재희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임재희가 다시 술잔을 들었다.
“내가 벌린 일은 내가 해결할테니까 신경 꺼. 물어보길래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대답한 것 뿐이니까.”
“시발, 그래도 몸 팔아서 몫 돈 받을 수 있으니 나보다 낫구만.”
“시끄러, 짜식아.”
젓가락을 내려놓은 임재희가 눈을 부릅떴다.
임재희의 시선을 맞받았던 김명천은 곧 검은 눈동자에 덮인 물기를 보았다. 그러자 그것을 의식한 임재희가 시선을 내렸고 그 서슬에 눈물이 두어 방울 흘러 떨어졌다.
“좋아.”
어깨를 부풀렸던 김명천이 호흡을 가누고 말했다.
“내가 남의 제사상에 콩놔라 두부놔라 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너보다는 내가 몇 살 위인데다 너한테 신세 진 것도 있으니까 내 말을 해야겠다.”
김명천이 임재희의 콧잔등을 노려보았다.
“몸을 내 놓을 만큼 갈 데까지 간거냐? 더 이상 방법이 없었어?”
“없었어.”
임재희가 다 식은 낙지볶음을 보면서 대답했다.
“그것밖에 없었어.”
“그럼 도망가, 도망갈 데 없으면 내가 있는 합숙소에라도 숨어.”
주위를 둘러본 김명천이 목소리를 낮췄다.
“합숙소는 안전해. 끝방에 40살쯤 되는 부부가 사는데 부도내고 도망나온 사람들이야. 돈만 내면 아무 말도 않고 조사 나오지도 않아.”
“흥, 저는 거저 준다는 3천도 마다하고 도망쳐 나오고는.”
쓴웃음을 지은 임재희가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김명천을 보았다.
“오늘은 아무 여관이나 가자. 나 피곤하고 졸려.”
“아니, 그러면.”
“어서 날 데리고 나가.”
그리고는 임재희가 몸을 일으켰으므로 김명천은 술잔을 자빠뜨리면서 서둘러 일어났다. 밖으로 나왔을 때 영등포 뒷거리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야아, 눈온다.”
김명천의 팔을 두 팔로 감아 안은 임재희가 소리쳤다.
“영등포 밤거리에 눈이 온다.”
“시끄러.”
“오늘은 술집 옆에 붙어있는 여관에라도 갈게. 너하고 둘이만 있다면.”
“교외로 가자.”
김명천이 말하자 임재희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김명천이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아무데나, 수원도 좋고 천안도 좋고, 아직 전철도 끊기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지금 가.”
임재희가 팔을 끌었다. 바로 옆이 영등포 역인 것이다.
33
전철로 오산에서 내렸을 때는 눈발이 굵어져 있었다. 바람도 없는 밤이어서 눈은 그냥 똑바로 떨어져 내렸는데 거리는 이미 흰 눈에 쌓여졌다.
"눈좀 봐."
역을 나왔을 때 임재희가 일부러 인도 바깥쪽의 사람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 곳만 골라 밟으면서 소리쳤다.
"우리 사람 없는데로 가자."
"안추워?"
"안추워."
"그럼 바닷가로 가자."
"정말?"
임재희가 김명천의 팔을 두팔로 감았다.
피곤하고 졸립다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발안행 버스를 타고 다시 서해 바다가 보이는 허름한 민박집에 찾아 들었을때는 밤 10시 반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임재희는 흰 눈길을 지치도록 걸었지만 방을 잡아놓고 나서도 또 나가자고 했다. 이번에는 바닷가로 가자는 것이었다. 아직도 눈은 그치지 않아서 내일 아침에는 찻길이 막힐 것이라고 민박집 주인은 걱정했다.
바닷가로 나왔을 때는 바닷바람에 눈이 날려 금방 얼굴이 젖었다. 짙게 어둠이 덮여 있어서 사방이 흰눈에 덮여있을 것이지만 보이지 않았다. 김명천이 임재희의 손을 잡았다.
"저기 바위 밑으로 가자."
얼굴을 숙인 임재희가 잠자코 김명천에 끌려왔다. 바위 밑에는 눈도 쌓이지 않았고 바람도 닿지 않았다.
다만 모래가 젖어 있어서 김명천은 근처의 바위를 들어다가 자리를 만들었다. 바다를 등지고 바위에 기대어 앉는 자리였다.
"여기 잠깐 있어. 민박집에서 뭘 좀 사올 테니까."
임재희가 앉았을 때 김명천이 말했다.
"빨리와."
김명천의 파카를 머리 위에서부터 걸친 임재희가 낮게 말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임재희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김명천의 팔에 매달리듯 붙어 따라왔을 뿐이다. 김명천이 가게를 겸하고 있는 민박집에서 소주와 마른안주를 사들고 왔을 때 임재희는 바위 밑에서 꼼짝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민박집에서 200m 쯤이나 떨어진 외딴 곳이었고 주위에는 인적도 없는 곳이다.
"무서웠니?"
김명천이 헐떡이며 묻자 임재희는 술병이 든 봉투를 받아들며 웃었다.
"아니, 행복했어."
"왜?"
"자기 기다리는 것이."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잔에 소주를 따라쥐었다. 파도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왔고 가끔은 눈발이 한두점씩 안쪽으로 떨어졌다. 이제 어둠이 익숙해져서 서로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임재희가 먼저 소주를 한모금에 삼키더니 앞쪽을 본채 말했다.
"아버지 빚 때문에 그래."
김명천의 시선이 볼에 닿았지만 임재희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나하고 남동생이 엄마랑 셋이서 살아. 아버지는 도망다니는 중이고."
그때 김명천이 팔을 들어 임재희의 어깨를 안았다.
임재희가 김명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낮게 숨을 뱉았다.
"2000 받아서 아버지한테 1000만원 드렸어. 그리고 어머니가 빌린 돈 갚으라고 600 드렸고, 나머지 400은 동생 등록금 줬고."
그리고는 임재희가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기뻤어.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 좋아하는걸 보고, 난 보험회사에서 수당 탔다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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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희는 지금까지 한번도 집안 사정을 말한 적이 없어서 김명천은 식구가 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가만있으면 파도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김명천은 잠자코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임재희에게 내밀었다.
"그 방법밖에 없었느냐고 물었잖어?"
잔을 받은 임재희가 김명천을 보았다.
서로 어깨를 붙이고 앉아 있어서 눈동자가 바로 20㎝쯤 앞에 떠있다.
"그래서 난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대답했지만."
임재희가 술을 한모금에 마시더니 진저리를 쳤다.
"솔직히 말하면 날 받아준 그 마담이 고마웠어. 그 방법도
누구나 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미안해."
술을 삼킨 김명천이 길게 숨을 뱉았다.
"내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냐."
피식 웃은 임재희가 웃음띤 얼굴로 김명천을 보았다.
"내가 룸사롱 나간다고 해서 머가 달라지니? 왜 그렇게 심란한 얼굴이야?"
"아니, 내가 뭘."
"나 키스해줘."
임재희가 턱을 치켜든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었는데 눈은 그대로 떴다.
"안해?"
임재희의 맑고 높은 목소리가 파도소리를 누르고 울렸다. 김명천은 먼저 임재희의 허리를 두손으로 당겨 안았다. 그러자 임재희가 안겨오면서 얼굴이 바로 부딪칠 듯 다가왔다. 그때 임재희가 눈을 감았으므로 김명천은 마음놓고 입술을 붙였다. 임재희의 입술에서 금방 마신 술맛이 났다. 그러나 임재희는 이를 맞물고 있었으므로 김명천은 입술만 빨았다.
그때 입재희가 두손을 뻗쳐 김명천의 목을 감아 안았다.
"나, 좋아?"
김명천이 입술을 떼었을 때 임재희가 더운 숨을 목덜미에 품으면서 물었다.
"응."
다시 입술을 빨려던 김명천이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던지 덧붙였다.
"널 좋아했어."
"언제부터?"
"회사 나갔을 때부터."
"그럼 왜 한 번도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았는데?"
"내가 연애할 처지가 안 되어서."
"빙신."
이번에는 임재희가 먼저 김명천의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는 악물었던 이를 풀더니 혀를 조금 김명천의 입안으로 내밀어 주었다. 김명천은 머리 위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행복했다. 그때 임재희가 입술을 떼면서 말했다.
"여기서 해줘."
김명천은 그 순간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했다가 임재희가 스스로 바지 지퍼를 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서둘러 파커를 젖은 모래위에 펼쳐 놓았을 때 임재희는 말 잘 듣는 색시처럼 다소곳이 누웠다. 그러나 바지만 벗은 채 윗도리는 스웨터에 코트까지 그대로 걸치고 있다. 김명천은 서둘러 바지만 벗고는 임재희의 몸을 안았다.
임재희가 낮게 신음을 뱉았지만 두팔로 김명천의 어깨를 더세게 안아주었다.
"아, 별이 떴으면."
임재희가 신음과 함께 그렇게 말했을 때 김명천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서야 파도소리가 들렸고 귓가를 스치는 임재희의 가쁜 숨결도 느껴졌다.
"나 자기 좋아해."
그때 임재희가 몸을 더 붙이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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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방바닥은 따끈해서 추위에 얼었던 온몸이 나른한 피로감과 함께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밤 12시가 되어가고 있어서 안채의 불은 꺼졌고 주위는 조용했다. 김명천과 임재희는 이제 민박집의 두툼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는데 서로 빈틈없이 안았다.
방의 불도 꺼놓아서 방은 물론이고 창밖도 검다. 가만있으면 파도소리가 들렸는데 가끔 그것이 자동차 소음같게도 느껴졌다.
"나 말이야."
김명천의 가슴에 볼을 붙인 임재희가 소근소근 말했다.
"나 대학 2학년 중퇴한거 알아? 모르지?“
물론 알리가 없는 김명천은 잠자코 임재희를 안고만 있었다.
임재희가 말을 이었다.
"대학 때 남자를 만났어. 동아리 선배였는데 서로 첫눈에 반했지. 우린 사랑했어."
임재희가 목을 조금 빼고 김명천을 올려다보았다.
"사랑했단 말야. 들었어?"
"응."
"내 첫사랑이야."
"응."
"내가 처음으로 몸을 주었고."
"응."
그러자 임재희가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촛점을 잡고 김명천을 보았다.
"난 후회하지 않아."
"잘했다."
김명천이 임재희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인 임재희의 몸이 다시 바짝 붙여졌고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맡아졌다.
"그래, 그렇게해."
이번에는 김명천이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간직할 것이 있으면 오래 갖고 있어."
김명천이 이제는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임재희의 귀에 대고 말을 이었다.
"버리지 말고, 다 소중하게 지켜."
"빙신."
"네 첫사랑이었다는 놈도."
"쪼다."
"난 널 좋아해."
"웃겨."
"네가 뭘 하든 네 옆에 있어줄게."
"미쳤어."
"난 배신하지 않아."
이번에는 임재희가 대꾸하지 않았으므로 김명천이 머리를 숙여 아랫쪽을 보았다. 임재희는 자신의 가슴에 한쪽 볼을 착 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는데 곧 맨 가슴에 더운물이 길게 흐르면서 아랫쪽으로 갈 때는 차거워졌다. 눈물이다.
김명천이 머리를 숙여 임재희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내가 널 지켜줄게."
김명천이 낮게 말했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는거다. 절대로 좌절하면 안돼."
그리고는 김명천이 길게 숨을 뱉았다.
"우리는 아직 젊어."
"안아줘."
불쑥 임재희가 말했으므로 김명천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때 임재희가 손을 뻗어 김명천의 팬티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다시 안아줘. 아까는 추워서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어."
그리고는 임재희가 누운 채 브래지어와 팬티를 끌어내려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임재희가 김명천을 몸위로 끌어 올리면서 말했다.
"난 죽을 때까지 오늘밤을 잊지 않을 꺼야."
그리고는 한 몸이 되었을 때 신음처럼 말했다.
"사랑해, 자기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