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생의 제사
출 5: 1-9
예배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예배를 위하여 천지를 만드시고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린다는 상식은 분위기가 아니고 그 예배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아니라 지금이 예배에 주님이 오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가? 를 본다는 것입니다.
가장 예배를 잘 드린 예배는 초대교회의 예배입니다.
그때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으며 그 예배에 임한 성도들은 그 예배를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생명이라도 자신을 언제나 부복을 시켰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드린 것처럼 내가 이 예배 속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에는 성령의 역사 하심이 절실합니다. 예배를 보는 것으로 정리를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성령의 간구 하심과 성령의 말씀하심을 경청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 접해져 있는 상황들은 어떠합니까? 오늘의 상황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예배를 잘 드리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목도하는 바요 우리가 경험하는 바는 오늘의 현실은 지극히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온전히 드리도록 한다던지 아니면 예배를 통하여 삶의 모양이 바꾸어지도록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들을 우리는 지금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고백을 하나님이 이 교회를 세우시고 이 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신적인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를 일반적인 사회 기관으로 전락을 시키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앙의 중심부에는 반드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경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바로 그런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전형적인 표현]이 예배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교회의 예배상황은 그 교회의 영적인 수준과 신앙생활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한 개인의 예배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우리 주님이 사마리아의 수가성을 지나시다가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으로 시작을 하십니다. 다섯번이나 결혼을 하였지만 지금 같이 사는 사람도 그녀의 진짜남편이 아닌,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아가는 이 여인에게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인생의 타는 목마름을 해결하여주는 시원한 생수와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의 남편들에게서는 아무리 함께 있어도 그 여인을 시원하게 하여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시원함을 줄 수 있는 진정한 물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이 여인과 말씀을 나누십니다.
가령 그 시원함을 소개하기 위하여 가까이에 있는 우물물을 소개를 합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자는 또다시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물"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인간이 제공하여 주는 물은 갈증을 더해주는 우물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은 사람들의 물처럼 달콤하다가 쓰디쓴 것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하다고 말씀을 하시자 이 여인은 이런 물을 마셨으면 좋겠다고 자신에게 이런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말씀을 하시다가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는 예배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목마르지 않고 흡족히 살아 갈 수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공적인 예배에 힘을 써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경건의 실천과 기도, 그리고 성경 읽기 자기 성찰등의 일들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근간은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공적인 예배입니다.
누구든지 개인적인 예배생활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공적인 예배를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적인 예배는 개인적인 예배와는 별도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시고 강조를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 것이 편한 것인가? 가 아니고 예배는 하나님이 정하신 가장 중요한 방식입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림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얼마만큼의 이익이 되고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느냐를 따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예배드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여서 예배를 드림은 선택의 여지가 아니라 의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하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을 하시기를 히10:24-25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어둡고 추울수록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함께 모여 예배하는 생활에 더욱 힘을 써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예배의 귀중함과 소중함을 전제로 하면서 이제부터는 우리들의 예배의 상황들을 함께 출애굽기서의 상황들을 비취어 보면서 묵상을 하려고 합니다.
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모세는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여보지만 그분의 강한 명령에 거절을 할 수가 없어 40년 전에 밟던 애굽의 궁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바로를 만나서 이런 요구를 합니다.
(1)절의 말씀입니다. "그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덧붙여서 3절의 말씀에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이것이 모세가 바로를 향하여 던진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낸 이유를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선언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말씀을 하시기를 "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이 들어있습니다.
[내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받으시려는 영광]이 들어 있음을 봅니다. 그들이 본래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속한 지역은 어디입니까?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들은 어디입니까? 그들은 애굽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문화라는 영향권속에 들어있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참으로 우리가 저항하기가 힘든 것들입니다. 문화에 접해있던지 혹은 익숙하여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역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문화에 익숙하여지면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것들 중에 신앙적인 것들은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을 하고 있습니까?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요 기본적인 요구입니다.
그래서 발달된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에게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예배입니다.
문화에 익숙하기 시작을 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예배가 그다지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를 탓하면서 예배를 의무감에서 드리는 신앙의 부끄러운 모양을 관찰을 하게 됩니다.
그 몇 가지를 나열을 합니다.
하나는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 바쁨은 어디에서 와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의 일들을 성취하려는 인간적인 것에서 와지는 것입니다. 많은 것들을 동시에 이루어 내려는 것들에 의하여 바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쁘다는 것으로 예배는 밀려나기를 시작 한 것입니다.
나의 일들을 이루기 위한 바쁨으로 예배가 밀려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라는 의문점을 가져봅니다.
둘째는 여가를 가지려는 것들에 의하여 예배가 밀려나기 시작을 합니다.
여가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그 부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참으로 완악 하여져 갑니다. 때문에 여가를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제는 주5일제 근무를 표방하며 모든 사람들이 이 부분에 상당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는 학교도 주5일제 수업을 권장을 하고 시험적으로 운영을 하여 본다는 발표까지 하는 상황들입니다. 이제는 이런 일들이 익숙하여 질 때가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애굽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무런 죄의식이 없이 이런 것들을 받아드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바쁜 것으로 예배가 소홀하여져도 그런 것으로 인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으니 아무런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꼭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되는가?
자연에서 가족끼리 그리고 영상매체를 통하여 드릴 수 있는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익숙함입니다. 그로 인하여 이제는 점점 공동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의식들이 사라져 가는, 애굽문화에 젖어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T.V 방송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보조 역활을 하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더 신실히 섬기려는 자세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보조수단이 아닌 본질적인 수단으로 전락이 되어지면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의 예배는 허물어져가기를 시작을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의 공동체는 늘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예배는 자기들의 입맛이나 문화적인 것들에 의하여 그 본질이 희석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것들에 의하여 무너질 것 같은 압력이 다가와도 무던히도 견디어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고백을 합니다.
진정한 신앙과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희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갖힘과 돌로 치는것과 톱으로 켜는것과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때로는 들키지 않기 위하여 양과 염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먹을 것을 찾아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의 믿음을 위하여 가장 소중한것들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예배를 소중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절기를 빼앗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요구와 그들의 문화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야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견디어 날수 있었고 편안히 살아 갈 수 있는 방편이었습니다.
리처드 니이버라는 신학자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내용 중에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라는 한 영역이 있는데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단호히 인정 하는것과 문화에 대한 충성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영역에서는 [문화속에서 찾는 행복과 그리스도안에서 찾는 행복이 있는데 진정한 행복은 문화위에 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알려주고 있다.
애굽의 문화에 익숙하여 문화의 지배를 받고있는 이스라엘백성에게 어느날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내 백성은 나에게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침묵 할 수 없으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요청을 하신 것입니다. 애굽의 문화에 깊숙히 익숙하여 있는 그들에게 주님은 요구하신 것입니다.
나에게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모세는 애굽의 바로에게 말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시는 요청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로에게는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만 보았습니다. 일하는 사람으로만 비취어졌습니다. 먹고 일하고 일하다가 죽는 것으로 그들의 일생을 마감을 하면 되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바로는 듣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애굽의 태양신에게 예배하는 것으로 만족히 여겼습니다. 애굽의 여러 신들을 섬기면 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오늘날의 경제적인 것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경제적인 것들만이 우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혹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돈이 있어야 예수를 믿는 것이지 돈 없으면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력이 있어야하는 존재로 여기기에 오직 모든 일들이 돈으로 만들어집니다.
때문에 예배도 경제가 우선이기에 예배가 소홀하게 여겨지는 시대요, 그런 문화 속에 아주 익숙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하나님은 제정해 놓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육체적인 쉼과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날로 여기며 소중히 여겨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주일에 대한 개념은 상당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편의대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사소한 일들을 이유로 하나님 앞에 행하여야 할 예배를 소홀히 여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힘쓰고 애를 쓸지라도 영혼이 핍절하고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선지자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는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개1:5-6)
예배에 대한 경박하고도 의무감 없는 예배행위에 대하여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를 요청하실 때에 [사흘길의 광야]를 요청을 하십니다.
이것은
예배의 구별을 말합니다.
애굽에 있는 자리에서 드리면 안되나요? 애굽의 문화적인 것들을 동원하여서 드리면 안되나요? 애굽의 스타일로 드리면 안되나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광야로 나아가기를 소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광야는 시내산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에게는 광야는 하나님께서 하께 하셨던 하나님의 현현하심의 증거된 자리입니다. 무서운 불과 구름가운데 그들에게 임하셨던 장소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임재하심의 장소에는 거룩함과 신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기쁨의 충만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인정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위하여 나의 것들을 내어놓음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광야를 간다고 생각을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비생산적이요 비신앙적 일수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광야의 사흘 길을 간다고 생각을 하여 보십시오. 이것은 여행이 아닙니다. 단지 예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물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예배를 위하여 나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아니 예배의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진정한 예배는 준비함입니다. 적어도 그 예배를 위하여 내 것을 포기하고 내 것을 기꺼이 내어놓으며 드려지는 것입니다. 내 것은 포기 할 수 없고 내 것은 내려놓을 수 없기에 드려지는 예배라면 그것은 허공을 치는 예배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진정한 예배를 위한 요청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까?
(6)절 이후의 말씀을 보면 "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백성들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 또 예배를 드리는 것 때문에 소홀해지기 쉬운 벽돌의 숫자를 조금도 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니 "이스라엘 패장을 때리며" 그들은 예배를 드리겠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을 당하게 됩니다.
이래도 예배를 드리겠냐는 바로의 시위입니다
. 오늘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손해나 직장에서의 따돌림들을 경험을 하면서 이런 말씀에 우리는 무슨 해답을 얻을 수 있는가?
준비된 볏짚을 이겨서 벽돌을 하루에 구워내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볏짚을 주워가면서 벽돌을 굽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되 결과가 좋으면 계속 믿으려고 할 것이지만 결과가 좋지 않고 오히려 고통이 가중이 된다면 노예 생활에 익숙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사흘 길을 가는 모험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세력들은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결정하는 순간에 그들은 모든 세력을 총 집합시켜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를 무산을 시키고 그들의 방법대로 우리들을 세상의 그 무기력한 노예로 전락을 시키거나 잡아 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하나님은 그들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의 백성을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절망가운데 이제는 아무런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통하여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전 것에 익숙하여 있습니다. 오늘도 과감히 우리들의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것들이 있다면 사흘 길을 띄는 욕심으로 신앙의 자리에 들어서야 합니다.
믿음은 지금의 비신앙적인 자리에서 떠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옮겨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이제는 실패하지 말고 승리를 하여야 할 때입니다. 신령한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회복하여 승리하시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명 감당하다 실패했을 때
출 5: 1-9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면서 갖은 학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보다 강하고 숫자가 많아지니까 이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 외세와 연합해서 애굽을 망하게 하지 않을 않을까 하는 불안이 애굽 통치자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더 강해지기 전에 고역을 시키고 고통을 주어서 애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중노동을 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이 가중 될 수록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이런 환경과 고통 가운데서 해방시켜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 백성을 구원코자 하신 내용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라고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겠느냐" 바로는 보낼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다시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3일쯤 광야길을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려고 하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렵습니다."
처음보다 강한 메시지로 전달했습니다.
그 결과 바로는 거절하면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일하기 싫어서 3일길 광야로 나가서 제사 드리려고 한다고 생각하여 과거보다 더 중노동, 즉 짚을 주지 않고 예전과 같은 수량의 벽돌을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 바로와 같이 한마디로 거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유익케 하기 위해서, 즉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건강을 주시기 위해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보다 높은 수준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바쁜 세상에 좀 어려움이 있으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육체적, 정신적, 신앙적으로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주일은 복된 날입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보냈더라면 열가지 재앙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유월절 재앙으로 짐승의 첫 새끼 장자들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불안의 요소였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연스럽게 해결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시련은 시련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당하고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게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보낼 수밖에 입장에서 보내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창세기3장) 하나님께 부끄러워 뵐 수 없게 되고 에덴 동산에
서 쫓겨나게 되었고, 서로 변명하는 불신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고 여자는 해산의 수고와 평생을 남편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일시적인 안일한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엄청난 시련이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7:1.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이 사람들이 전쟁을 했는데, 패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통곡하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원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탐욕 때문에 물건을 감추었던 아간을 그가 훔친 물건과 아들과 딸들과 소와 나귀와 양들과 장막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아간은 자신의 소유와 함께 돌무더기 속에 들어가는 비극을 당했던 것입니다.(여호수아7장)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행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세계적인 복을 명하고 있습니다. 좀 이해가 더디 되고, 환경 조건이 여의치 못하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순종하는 자에 따르는 고통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역을 더 중하게 하니 도리어 큰 화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전했을 뿐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재료를 주지 않고 예전과 똑같은 양의 벽돌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땅에 흩어져 곡초와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벽돌을 만들려고 하니 예전보다 일은 두 배, 세 배 늘어나는 반면 양은 적어진 것입니다.
바로의 간역자들이 이스라엘의 패장들을 때리면서 전과 같이 양을 채우라고 독촉합니다. "이것이 바로와 애굽의 수치라고 해도 너희가 게으르기 때문에 여호와께 희생 드리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여러 소리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패장들은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바로에게서 나올 때 모세와 아론을 만났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 신하들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로 죽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하는 지탄과 공격을 받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자기들의 안일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야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명령 따라 한 것뿐인데,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저주와 지탄과 공격을 받을 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모세는 하나님께 여러 가지 변명을 하면서 자기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억지로 자기를 뽑아 세우고 일하게 하셨는데,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했는데, 백성은 백성들대로 고통을 당하고 사명자는 사명자대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순종하고 사는 자에게 전혀 고통이 오지 않고 괴로움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오늘 본문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다가 고통 당하고 시련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폴리캅 교부가 화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한번만 예수 모른다고 하면 살려준다고 형관이 말합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지금까지 한번도 예수님이 날 모른다고 하신 일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하면서 화형장으로 끌려가 사라졌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믿음 지키다가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시련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니엘도 믿음 지키다가 사자굴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죄 없으신 분인데, 사명 감당키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쇠못위로 걸어갔습니다. 믿음을 지키다가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계획 따라 행하다가 일시적으로 당하는 고통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사명 감당하는 과정에서 오는 고통은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참았습니다. 믿음을 지키다 오는 고통은 영광으로 바뀌게 됩니다. 승리의 시간이 오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케 됩니다.
사명 감당하다 당하는 고통은 영광의 고통이요, 소망 있는 고통이요, 축복을 예비하는 고통입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자기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은 수치의 고통이요, 영원히 부끄러운 고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미래가 보이는 고통이고, 축복을 예비하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원망과 시비 그치고 참아야 합니다.
3. 사명자는 고통을 극복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원망이 심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조석으로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고통이 좀더 중해졌다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해하려고 합니다. 언제는 애굽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눈물로 부르짖으며 기도해 놓고 하나님이 그 기도로 들으시고 민족 해방을 시키기 위해 오는 잠시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해 하나님의 종들을 모해하려고 하는 것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를 당할 때가 많습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쓴 약을 먹어야 하고 아픈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수술도 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건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 사람들의 박해 멸시 속에 살아오던 백성들이 민족적 해방을 위해 일시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참지 못해 지도자 원망하는 것은 장래를 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앞의 일만 보고 사는 사람이요, 이런 사람들은 항상 남의 밑에서 멸시나 받고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주의 종들이 사명 감당하다 시험 당하고 원망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하지 말고 감당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방해하는 사람도 있고 핍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위적인 방해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지장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참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경건을 다할 때입니다.
이사야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모세가 중차대한 사명을 수행하려다 진퇴양난에 놓일 때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는 것처럼 모든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시 바랍니다.
거절과 도전
출 5: 1-9
이어령 교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 문화 공보부장관을 지냈고 이대 교수로 계신 분입니다. 그분의 "어제와 오늘사이"란ㄴ 책에 보면 "킬지만자르의 눈"이란 헤밍웨이의 작품가운데 손꼽히는 명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남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동사한 한 마리의 표범"이 기억나게 된다고 합니다. 해발 수천 미터의 높은 산정에 얼어죽은 표범이 왜 거기까지 올라왔는지 무엇 때문인지를 알 수 없는 표범이라고 합니다.
이 표범은 인간의 허무를 잘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높은 산정에 오르기 위해 실패와 좌절에 도전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무슨 결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결말이 허무하다 할 지라도 응전과 도전은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사한 죽은 표범처럼 빙벽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오르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좌절하여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지금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 도전하고 응전하는 일이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지속될 것입니다.
출애급기서 5장- 10장 까지는 바로와 모세와의 싸움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전과 응전이란 내용을 담고 있다. 싸움의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과 해방을 위한 싸움이며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속박하려는 흑암의 세력 즉, 사단과 그 백성을 구원하여 언약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과의 소유권 싸움임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싸움이 어떻게 진전되어 가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와 바로와의 싸움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로부터 시작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5:1)고 전하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내 주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5:2)고 거절합니다.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 9번 반복되어 집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응전하는 모습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10번 찍어 안넘어 가는 나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세는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응전하는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이 본을 받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의 소유인가 하는 싸움이기도 합니다. 바로는 결코 그들을 놓아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혹독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까지도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기 위해 모세가 ㅂㄹ원천리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들까지도 모세를 비난하고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 같은 일은 애급에서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모세가 동종에게 돌 맞을 어려운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에 오늘날 전도자들이 고난 당하는 것이나 다를바가 없다.
모세는 바로 왕에게 10번 씩이나 거절당하는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첫번째 재앙이 내려졌습니다. 바로가 나일강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모세는 나일강 뿐만 아니라 모든 운하와 하수의 물을 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7일이 계속되었습니다. 나일강을 피로 만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적만을 표시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애굽은 나일강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서 나일강을 신으로 받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하나님과 애굽의 신들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바로는 그래도 마음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재앙은 개구리가 하수에서 무수히 올라와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정한 시간에 개구리를 없앴지만 역시 바로는 듣지 않았습니다.
세번째 재앙이 내렸습니다. 땅의 티끌을 지팡이로 치자 온통 이가 되어 사람과 생축을 괴롭혔습니다. 물론 이상의 세 가지 이적은 애굽의 술객들도 모두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애굽 사람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도 겪어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첫째 그들이 애굽에 결코 미련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며, 둘째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그들이 몸소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은 구별된 백성인 것을 하나님은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네번째 재앙이 내렸습니다. 애굽 사람의 집집에는 파리떼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의 집에는 파리가 없었습니다. 애굽의 술객들도 이제는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역시 마음이 돌아선듯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한 항복을 받으실 것이었습니다.
다섯번째 재앙은 악질이 나서 애굽의 모든 생축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생축은 한 마리도 죽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여섯번째 재앙이 또 내렸습니다. 모세가 풀무재 두 웅큼을 허공에 뿌리자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독종이 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온 애굽 땅과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우주의 창조자요 지배자이시며 온 우주의 왕이심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일곱번째로 날이 새자 하나님은 전국 각지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불이 섞인 우박을 내렸습니다. 하늘의 재앙이 내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은 애굽 사람들은 그들의 가축을 집으로 들여 놓았기 때문에 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센 땅에는 빗방울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바로가 백기를 들었습니다.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9:27) 그러나 그것은 잠시 하나님을 기만하는 술책일 뿐이었습니다. 바로의 신하들은 이제 그만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간청했으나 바로는 여전히 강퍅했습니다.
여덟번째 재앙이 그러한 바로의 마음을 강타했습니다. 우박으로 각종 채소가 꺾였으나 이제 메뚜기가 온 지면에 가득하여 그 남은 채소와 나무를 온통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이번에도 바로는 화급히 모세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10:16-17).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아홉번째 재앙이 또 다시 바로를 강타했습니다. 3일 동안 흑암이 온 애굽을 덮었습니다. 고센 땅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바로는 모든 소유는 놓 아두고 사람들만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왕의 재물까지도 가져가 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승리자의 전리품입니다. 바로는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10:28)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를 떠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바로에게 내려진 은총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의지하는 신들도 더 이상 그에게는 아무런 힘도 지혜도 되어주질 못했습니다. 그는 태양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도 무기력한 미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는 도무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주관자이시고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그처럼 가깝게 보았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열 재앙의 의미(출 7:8-12:36) 10번째 장자의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신앙의 자유를 받아 이제는 보냄을 받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바로왕 앞에서 모세는 어떻게 거절앞에 도전했는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가늠하고자 합니다.
Ⅰ.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의식하였습니다.
출 3:7-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 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의식으로 애급왕을 도전하였고 급기야는 최후에 승리를 거두는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한 증거
⑴ 모세 손에 들려준 지팡이
⑵ 말 못하는 대신 아론이 함께함
⑶ 갖가지의 기적을 보게하였다.
Ⅱ.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출 3:13-15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모세가 근심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가 당신을 보내어 왔느냐하면 무어라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 이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하기를 여호와 이름하는 분이 ㅂ내어 왔다고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말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구원하게 하시는 여호와라 하는이름을 가지고 왔다고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 대답할 말을 주었다. 그것이 읽어 드린 이 말씀입니다.
신앙인들은 내 이름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기도, 구제하는 것, 치병하는 일, 선행하는 일, 구원에 이르는 은혜, 일생 전반에 걸쳐서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신앙인은 주님의 이름과는 불과 불리의 것이다.
주님의 이름은 만사 형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을 알아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아가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겁낼 것 없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에 승리하기도 하였습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이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 한 나라의 왕이하 신하들 유명한 장수들이 바람에 나붓끼는 가랑잎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이름의 가치를 들어냈다고 하는 일은 참으로 이름에 위력이 얼마나 대단인가를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매일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로왕 앞에 나갔습니다.
Ⅲ.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나갔습니다.
출 3:16-18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17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18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약속을이행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ㅁ세가행하는일은 자신의 명예도 아니고 자랑하기 이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연약을 이행하고자 하는 신적인 일임을 모세는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가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주심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중을 믿은 모세는 10번에 거절에서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비라고 하는 사람은 녹스 대학으로부터 학위를받았다. 금광사업에 경험 때문에 이익을 ㅂ았다고 생각하였다. 금가 사업은 그에게 노(no)가 반드시 (no)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증명한 행운을 잡은 사업가이다.
어느 오후 그는 구식 방앗간에서 밀가루를제분하는 아저씨를 도고 있었다. 아저시는 많은 흙인 소작농들이 살고 있는 커다란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 때 조용히 문이 열리고 소작농의 딸인 한 흑인 아이가 들어와 문 가까이에 섰다. 그아이를쳐답고 아저씨는 무뚝뚝하게 왜 왔지 하고 소리 질렀다.
아이는 온순하게 저 어머니가 50센트를 좀 주셨으면해요 라고 대답하였다. 줄수 없어 그러니 빨리 집에 가봐 라고 아저씨는 대꾸하였다.
네 하고 아이는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곧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아이가 가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바쁘게 일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여전히 서 있는 아이를 보았을 때 그는 빨리 돌아가라고 말했잖아 ! 빨리 가 ! 말 안 들으면 회초리로 떼릴테다. 하고 야단을 쳤다.
아이는 네 주인님하고 말하면서도 그 아이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곡식을 엎지르면서 방앗간 호피에 열심히 퍼붓고 있었다.
몽둥이를 집어 들고 화가 난 표정으로 그 아이를 쳐다 보았다. 다비는 숨을 죽였다. 그는 아저씨가 격노하였다고 느꼈다. 아저씨가 그 소녀가 서 있던 자리로 왔을 때 그 소녀는 주인으 두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재빨리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우리 엄마는 50센트를 받을 만해요 라고 와락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는 잠시 ㄱ 소녀를 쳐다보며 우뚝 멈처섰다. 그리고 천첞 마루에다 몽둥이를 놓더니 포켓에서 손을 넣어 50센트를 꺼내 그 소녀에게 주었다.
아저씨는 상자 위에 걸터 않아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고 한다. 이 말은 적은 소녀이지만 큰아저씨를 거절하는 일에 도전함으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마치 아저씨와 저은 노예소녀와 비교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말씀을 기억하여 울 앞에 거절가 도전하는 시대 속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모세는 거절하는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였습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함을 의식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을 나아갔습니다.
3)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출 5: 1-9
무식한 것과 어리석은 것은 다릅니다. 무식한 것은 배우지 못해서 지식이 모자란 것을 말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못해서 낫을 옆에 두고도 기역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살면서 불편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것은 미련해서 지혜가 모자란 것을 말합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별력과 판단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살면서 실수도 많이 하고 큰 낭패를 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남보다 배우지 못했어도 얼마든지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 남보다 좀 모자라도 사리를 제대로 분별해 내고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 남보다 많이 배웠어도 얼마든지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학식이 많지만 사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해서 못된 짓을 하고 여러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여러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자치통감이란 책을 쓴 사마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새끼줄로 만든 공을 깊은 구멍에 빠뜨렸습니다. 아이들이 꺼내보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도와준다고 모두들 땀을 뻘뻘 흘렸지만 허사였습니다. 그 때 어린 사마광이 집에서 물통을 들고 나와서 구멍에다 물을 부었습니다. 물을 따라서 공이 떠올랐습니다.
한번은 아이들끼리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큰 물독에 빠졌습니다. 아이들이 달려들어 힘을 써보지만 그 아이를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대로 뒀다가는 큰 일이 날 상황입니다. 그 때 어린 사마광이 돌로 그 큰 독을 깨버렸습니다. 깨진 틈으로 물은 다 쏟아져 나왔고 아이도 독을 다 깨고 무사히 구출됐습니다.
사마광은 아직 어린 아이였습니다. 지식이 부족했고, 배운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해서 문제의 처방을 내릴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지혜입니다.
무식한 것을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 문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면 많이 배우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혜로우려고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혜를 보다 깊은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잠 9:10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지혜의 근본 즉 지혜의 뿌리요 지혜의 원천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 세상 만물을 섭리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그분에 의해서 계획되고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사를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려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이 세상사를 더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 그 자체가 지혜의 원천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면 할수록 더욱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지혜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나은 것 뿐 입니다. 상대적입니다. 그리고 일시적이고 한시적입니다. 언제나 매사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나옵니다. 애굽 왕 바로입니다. 그는 상황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사태를 잘못 판단해서 자신도 망하고 백성들에게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0번의 재앙과 마지막 홍해 사건으로 수많은 군사와 백성을 죽였습니다. 엄청난 재산상의 손실을 입혔습니다. 정말 지혜롭지 못한 왕이었습니다.
바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많이 배우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제왕 수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당대의 최고의 석학들로부터 특별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 누구와 견줘도 부족함이 없는 학식을 가졌습니다.
세상적으로 지혜롭지 못했을까요? 그는 지혜롭게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애굽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그 위상을 드높이게 했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고 통치했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본문 2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바로 자신의 고백입니다. 그가 지혜의 근본인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가 높은 학식을 가지고 있고, 세상 지혜로도 뛰어나다 할 지라도 지혜의 근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세상 지혜가 번득여도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면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정말 중요할 때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본문은 어리석은 바로 왕의 잘못을 자세하게 밝혀줍니다. 그가 지혜롭지 못해서 저지른 실수입니다.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대적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자기들 스스로 바로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3:10을 보면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온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했습니다.
바로가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제의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의 일생일대의 실수였습니다.
창 11장을 보면 소위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이 시날 평야에 모여서 엄청난 일을 모의했습니다. 하나님과 대적하겠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과 대적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하늘에 닿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하늘은 신성불가침의 지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요 그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을 침범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것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잘못하다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 대신 자기들의 이름을 드높여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게 되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게 됩니다.
스스로 유명해 지려는 것 자기 이름을 인위적으로 드러내려는 것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대단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잘못하다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돌 대신에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 진흙 대신에 역청을 사용했다는 것은 과학 기술의 발전을 말합니다. 이들이 과학 기술이 발전하자 교만해졌습니다. 과거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 되자 자기들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교만이 문제입니다. 좀 잘되면 교만해 지고, 좀 잘살게 되면 교만해 지고, 좀 배우게 되면 교만해 지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잘못하다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까지 나갈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나님과 대적하려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만 했다면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교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는 어리석었습니다. 감히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 어리석음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근본이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워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면 안됩니다. 동조해서도 안되고 참여해서도 안됩니다.
둘째,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바로는 모세의 제안을 오해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노역을 쉬려고 꾸민 속셈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또 가로되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를 쉬게 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왜 바로가 이렇게 오해를 했을까요? 일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지금 바로 왕은 국고성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일을 끝낼 생각밖에 없습니다. 이 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정말 큰 몫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만에 하나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져나간다면 보통 차질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모든 계획을 취소해야 될 지도 모를 상황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 고대 문헌 허당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못 보고, 돈을 잡은 자는 사람을 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익과 욕심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도리를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 이야기입니다. 어떤 젊은 여 집사가 있었습니다. 차분하고 성실하고 교회봉사도 잘하던 사람입니다. 동창들과 어울려 멋모르고 카바레에 끌려갔습니다. 얼떨결에 젊은 남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 남자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남자에게 집착하게 됐습니다. 그 남자 없이는 못살게 됐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버리게 됐습니다. 남편과도 갈라섰고, 아이들도 버렸고, 물론 신앙도 버렸습니다.
남편이 애원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울며불며 말렸습니다. 가까운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권면했습니다. 친정 오빠가 나서서 야단을 쳤습니다.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집착이 무서운 것입니다. 세상 것에 빠지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분별력을 잃게 되고 판단착오를 범하게 됩니다. 자신도 망하고 가정도 깨지고 공동체 모두가 고통스럽습니다. 정말 집착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 이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리석게도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실수를 하게 돼고,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셋째, 이성을 잃었습니다
바로는 생각할수록 괘씸했을 것입니다. 노예인 주제에 감히 왕인 내 앞에 와서 자기들을 보내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협박까지 하는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간역자들과 패장들 즉 노역 책임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은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 또 그들의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백성들에게 과거보다 더 무거운 일을 시키게 된 것입니다. 물론 감정에 복 받혀서 내린 명령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자칫 일꾼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일의 능률이 떨어지고 오히려 일의 진척이 늦어질 것이 뻔한데도 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이성을 잃은 것입니다. 그 결과 분별력을 잃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서 실수할 때가 참 많습니다. 부부 싸움할 때 감정을 자제하지 못해서 손을 씁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해서는 않될 말을 내 뱉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만 이미 일을 그르치고만 뒤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이성을 흰말로 인간의 감정을 검은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성의 흰말이 수레를 끌어야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경 잠언에는 이와 관련된 교훈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골라보면 우선 잠 4:23에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말씀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잘 지켜서 쉽게 노하고 쉽게 흥분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잠 16:23을 보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잠 25:28을 보면 "자기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우리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면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수하게 되고 그래서 낭패를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