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시절 친구
칠십평생 살다보니 여러 종류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가 있고, 군대와 직장 친구, 문우가 있다. 신문사 시절 김헌수란 친구가 있었다. 내가 근무한 일간 내외 경제는 박대통령이 일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처럼 만들라고 무역협회 박충훈 회장에게 지시해서 월급을 동아, 중앙 정도 수준으로 지급했다. 나는 불교신문에 계속 있어 불교학자로 갔어야 하는데, 거기가 주간지라고 일간지로 옮겼으니, 지금 생각하면 실수였다. 수백 대 일 경쟁을 뚫고 입사했는데 수습기간 지나자, K대 선배들이 전직하라고 충고했다. 당시는 기자가 더 이상 '사회의 목탁'이 아니었다. 평범한 월급쟁이로 전락하여 이젠 사회 정의 외치는 자도 없고, 기자 정신도 사라져 갔다. 지조도 없어 데스크에 아첨해 좋은 출입처 나가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당시 박통은 유신 반대하는 기자들 콧대를 꺽기 위해서 기자증도 바꿔버렸다. 처음 문공부 장관이 발행하던 기자증은 뒷면에 붉은 횡선 두 줄 쭉 그여있고, 거기에 '이 증 소지한 사람에게 취재 협조를 부탁드립니다'란 장관 멘트가 달려있었다. 그걸 이때 신문사 사장이 발행하는 신분증으로 바꾼 것이다. 장관이 발행한 신분증과 신문사 사장이 만들어준 신분증은 차이가 많다.
'박통이 장기 집권 하는데, 너희 제1기 수습기자 네 명 중에서 편집국장 나오겠지만, 편집국장 하면 뭐하느냐? 일찌감치 기업체 가서 처자식 밥이나 굶기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선배들이 충고했다. 나라는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던 때다. 그렇찮아도 마음 흔들리는데, 마침 선배 한 분이 타계해서 길음동 초상집에 가보고, 그때 대학원 진학해서 교수가 되자고 진로 변경을 결심했다. 그 선배는 서울대 출신이다. 기자 경력 15년 결말이 저런 거구나 싶었다. 초라한 단칸 방에 유난히 미인이던 부인이 혼자 눈물짓고 있었다. 그래 대학원 등록금 마련하려고 사내 해외홍보부란 곳으로 자릴 옮겼다. 국내 상품을 해외 공관과 기업에 소개하던 영문잡지다.
거기서 김헌수를 만났는데, 헌수는 단국대 학생회장 출신이다. 늘씬한 키에 시원시원한 말솜씨가 좋았다. 그는 한번 광고 낼 회사 찍으면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매처럼 날아가서 반드시 계약서를 움켜쥐고 나왔다. 당시 기자 월급 5만원 하던 때다. 백만 원짜리 광고 한 껀 물어오면 리베이트가 10프로 10만 원이고, 한 달에 5건 물어오면 50 만원 수입이다. 승용차 배정도 당시 100명 넘던 편집국은 편집국장 차 포함해서 취재 차량 5대 배정되는데, 헌수는 운전수 딸린 차 매일 배정되었다. 광고가 신문사 주 수입원이다. 전무도 복도에서 헌수 만나면 아는 척 했다.
나는 그 헌수와 항상 같이 다녔다. 내겐 기자증이 있기 때문이다. 헌수는 기자 시험엔 낙방해서 자기를 '아랫도리 기자'라 불렀다. '아랫도리 기자'란 신문 하단 메꾸는 광고부 직원을 말한다. 헌수가 머리는 비상했다. 한 번은 '창현아 오늘 삼양팔프 가보자' 면서 따라와 취재만 하란다. 그래 가보니 그 회사 기획실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사장님이 인터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다. 사장 만나니, 회사 사진과 타이핑한 회사 연혁, 사장 이력서 주고, 종업원 수, 주 생산제품, 업계 동향 등을 소개한다. 내가 취재해서 적고, 헌수는 이 인터뷰는 전 페이지 특집으로 나간다고 설명했다. 사장은 인터뷰 끝난 후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며, 기획실장 더러는 저녂 모시라고 지시 내렸다.
그 내용이 며칠 뒤 신문 전면 한 페이지 특집 기사로 나갔다. 헌수는 윤전실에서 막 찍은 아직 잉크 냄새 가시지 않은 신문을 들고 와서 보여주었다. 막상 기사를 쓴 내가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은 뉴스 밸류로 기사 크기와 위치를 조정한다. 가장 중요한 뉴스가 톱기사 되고, 그다음 뉴스는 중 톱으로 싣는다. 올챙이 기자는 1단짜리 기사도 하나 싣기 힘든다. 데스크는 무자비하게 가위질 하고, 잘못 쓴 기사는 본인 앞에서 구겨지고 휴지통에 버려진다. 그런 무정한 곳이 신문사다. 독자들은 무심히 읽지만, 적어도 전 페이지 특집은 12.6 궁정동 박 대통령 피살 사건 정도 되는 큰 사건 아니면 불가능한다. 그런데 내가 쓴 삼양 펄프 특집이 전면기사로 나간 것이다.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수에게 까닭을 물어보니, '창현아! 이거 봐라' 헌수가 손가락으로 신문지 위를 가리키는데, 거기 '전면 광고'란 자그만 글씨가 박혀있다. 원래 이 '전면 광고' 수법은 정부 기관지 서울신문 작품인데, 헌수는 서울신문 출신이다. 기사 나간 후 신문 들고 삼양 펄프 찾아가 수금 끝나자, 헌수가 내 몫 50만 원을 노놔주었다. 덕택에 열 달치 월급 생겼다.
한 번은 헌수와 '한신공영'에 들렀다. 그 회사 창업 때다. 남산 1호 터널 앞에 책상 서너 개 전화 한 대가 전부였다. 반포에 무슨 수영장 만든다고 했다. 사무실엔 사장을 포함한 직원 서너 명 밖에 없다. 이야길 나누다가 점심을 같이 하자, 사장은 홍보 맡을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에게 와서 총무 맡아달라고 했다. 그때 내가 실수했다. 건설업은 막일이라 불량배도 있던 시절이라 그 회사 창업주 제의를 거절했다. 후에 한신은 반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 세웠고, 고대 나온 사위는 요지에 백화점 세웠다. 헌수는 한신아파트 입주권을 여나믄개 들고와서 사라고 했고, 내가 돈이 없다고 하자, 은행 대출 주선해주겠다고 했다. 지금 한신 아파트 한 채 몇 십억 하는가. 그걸 미심쩍어 거절했으니, 나는 역시 현실엔 먹통이다.
당시 무교동에 '월드컵'이니 '초원의 집'이니 하는 술집이 유명했다. 날더러 술 한번 산다며 헌수가 가보자 했다. 가서 웨이터더러 '오늘 저녁 매상 최고로 올릴 테니 가장 비싼 술과 안주 챙겨 오라. 그리고 사장도 불러오라'라고 지시했다. 그 집 사장은 무교동과 명동에 술집이 두 개나 있는 캐디락 타고 다니던 암흑가의 보스다. 기자가 부른다니, 보디가드 두 명 대동하고 왔다. '이 분이 김 00 기잔데 인사나 하세요!' 헌수가 날 소개하고, 내가 문공부 장관 직인이 찍힌 기자증 보여주자, 사장은 당장 정중해졌다. 기자는 경찰, 세무공무원, 술집, 탈세자가 꺼려하는 존재다. 헌수는 우물쭈물 않는다. '언론 피하면 곤란하다', '내가 사장에게 전화 연락 몇 번 했는데 소식이 없다'라고 말한 뒤, 며칠 전에 신문에 실린 '뎃포' 광고와 요금청구서를 내밀었다. 그들은 언론에 약하다. 결제 요청하자, 사정사정하면서 값을 반으로 깎자고 한다. 그래 그 자리서 요금 일부는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신문사 회식 때 와서 먹기로 했다. 그날 술과 여자 팁은 물론 무료였다.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을 것이다. 헌수가 후암동엘 가자고 했다. '인마! 니 뿅 갈 거다. 화보 편집장인데 미인이다'. 당시 후암동은 부자 동네다. 집은 일본식 목조주택이었다. 현관 문이 열리자 붉은 카펫 위에 나이트가운 슬리퍼 차림 여인이 나타났다. '이 친구가 내가 말한 철학한 그 친구' 헌수가 나를 소개하자, 30대 미인이 안다는 듯 눈웃음을 친다. 인사 끝나자 외국 영화에 나올법한 응접실로 안내하여 오디오 틀자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나온다. 여인이 양담배 꺼내 손톱에 톡톡 두드리고 입에 문채 신호하니, 일하는 아줌마가 조니워커 한 병, 글라스 세 개를 테이블에 놓고 간다. '반갑습니다' 건배할 때, 나는 그 여인의 새카만 눈썹과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보았다. 'I'm dreaming of white X-mas' 헌수와 그녀가 험잉할 때, 나는 그들 둘의 화음이 수준급인걸 알았다.
그 시절 집에 오디오 있는 집 드물다. 치즈 안주로 조니워커 마시는 여인도 드물다. 서울 끝 창동 남의 집 전셋집 살던 내 처지엔 주눅 들만 했다. 이때 헌수가 '이 친구는 기자로 입사 후, 돈 벌어 대학원 간다고 우리 부로 온 친구야' 그러곤 '창현아 니도 한 곡 뽑아봐라' 그러는 바람에 나는 낫 킹 콜의 '모나리자'를 불렀다. Mona Lisa, Mosa Lisa men have named you(모나리자, 모나리자, 사내들이 그대를 그렇게 부른다오) You’re so like the lady with the mystic smile(그대는 그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닮았구려). 내 노래 시작되자 그녀가 반색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K대 미식축구 선수 시절 종로 2가 '디세네' 음악실에서 배운 좀 족보있는 솜씨다. 자기도 그 노래 아는 모양이다. 곁에 오더니 같이 노랠 부르는데, 함께 노래 불러보면, 상대의 박자, 감정, 호흡처리가 생생히 느껴진다. 영어 발음 들으면 수준도 안다. 내가 미식축구 선수 출신으로 체격 좋았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노래 끝나자 여인이 손을 잡더니 춤추자고 한다. 년상의 여인이다. 따뜻한 그녀 입김이 귓불을 간지럽혔다. 꺾어질 듯 가는 그녀 몸에선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크리스마스이브라서 간혹 남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중앙청 국-과장 전화라고 했다. 당시 서울엔 화보가 대한 화보 **화보 등 세 개 있었다. 그 여잔 그중 하나 편집장이다. 관리들은 화보 인터뷰하면 고과가 유리하다. 그런데 여긴 미인 화보 편집장에다, 술자리 사양 않고, 술값도 자기가 내는 여자다. 관리들에게 광화문 최고의 매력 있는 커리어우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공동 연인이던 그 여자도 아는 재부무 상공부 중앙청 국-과장이 필요했다. 그녀가 광고 유치하는 기업체 사장에게는 재무부가 어딘가? 은행 할아비 아닌가? 상공부가 어딘가? 재계 간판스타 정주영도 주사 서기부터 굽실대고 살랑거린 데 아닌가? 그들에겐 관료란 황공무지한 존재다. 사장에게 관료가 전화 한 통 해주면 그녀 만나기 싫다는 먹통은 없다. 셋 다 공생 관계다. 그런데 우리 셋은 언론 쪽 동업자다. 꺼릴 게 없는 처지다. 노래와 춤으로 열이 오르자 그녀 제의로 무교동으로 나갔다. 통행금지 임박해서 후암동에서 돌아와 마타하리처럼 요염한 그녀와 밤새 놀고 이튿날 헤어졌다. 그녀는 나중에 **화보 사장이 되었다. 1970년대 초 광고계의 전설적인 샛별이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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