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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언영색(巧言令色)
발라 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낯빛, 환심을 사기 위해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표정을 이르는 말이다.
巧 : 공교로울 교
言 : 말씀 언
令 : 하여금 영
色 : 빛 색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과 양화편(陽貨篇)에 똑같은 공자(孔子)의 말이 거듭 나온다.
巧言令色 鮮矣仁
교언영색 선의인
공교로운 말과 좋은 얼굴을 하는 삶은 착한 사람이 적다.
쉽게 말해서, 말을 그럴 듯하게 잘 꾸며대거나 남의 비위에 맞추어 잘하는 사람, 그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남의 눈에 잘 보이려는 그런 사람 쳐놓고 마음씨가 착하고 진실 된 사람이 적다는 말이다.
여기에 나오는 인(仁)에 대해서는 한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공자처럼 이 인(仁)에 대해 많은 말을 한 사람이 없지만 공자의 설명도 때에 따라 각각 다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말한 인(仁)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어질다는 뜻으로 알면 될것 같다. 어질다는 말은 거짓이 없고 참되며 남을 해칠 생각이 없는 고운 마음씨 정도로 풀이해도 무방할 것 같다.
말을 잘 한다는 것과 교묘하게 한다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교묘하다는 것은 꾸며서 그럴 듯하게 만든다는 뜻이 있으므로 자연 그의 말과 속에 있는 마음이 일치될 리 없다. 말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진실되지 않다는 것을 말하게 된다.
좋은 얼굴과 좋게 보이는 얼굴과는 비슷하면서도 거리가 멀다. 좋게 보이는 얼굴은 곧 좋게 보이려는 생각에서 오는 얼굴로, 겉에 나타난 표정이 자연 그대로일 수는 없다. 인격과 수양과 마음씨에서 오는 얼굴이 아닌 억지로 꾸민 얼굴이 좋은 얼굴일 수는 없다. 결국 교언(巧言)과 영색(令色)은 꾸민 말과 꾸민 얼굴을 말한 것이 된다.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 참되고 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적다고 한 말은 차마 박절하게 없다고 할 수가 없어서 한 말일 것이다. 우리 다같이 한번 반성해 보자.
우리가 매일같이 하고 듣고 하는 말이 교언(巧言)이 아닌 것이 과연 얼마나 될는지? 우리들이 매일 남을 대할 때 서로 짓는 얼굴이 영색(令色) 아닌 것이 있을지? 그리고 우리의 일거일동이 어느 정도로 참되고 어진가를 돌이켜 보는 것이 어떨까?
논어(論語) 자로편(子路篇)에는 이를 반대쪽에서 한 말이 있다. 역시 공자(孔子)의 말이다.
剛毅木訥近仁
강의목눌근인
강(剛)과 의(懿)와 목(木)과 눌(訥)은 인(仁)에 가깝다.
강(剛)은 강직(剛直),
의(毅)는 과감(過感),
목(木)은 순박(淳朴),
눌(訥)은 어둔(語遁)을 말한다.
강직하고 과감하고 순박하고 어둔한 사람은 자기 본심 그대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꾸미거나 다듬거나 하는 것이 비위에 맞지 않는 안팎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나를 속이거나 하는 일이 없다. 있어도 그것은 자기 본심에서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인(仁)일 수는 없지만 역시 인(仁)에 가까운 성질의 것이라 볼 수 있다.
논어의 공야장편(公冶長篇)에는 이러한 공자의 사상을 나타내 보이는 중요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공자의 제자중에 중궁(仲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노(魯)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29세나 아래였는데, 일찍이 공자 자신이 염옹(苒壅; 중궁의 이름)은 임금 노릇을 할 만하다라고 칭찬할 만큼 덕망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궁(仲弓)은 말주변이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염옹은 어질지만 말재주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공자는 중궁을 이렇게 감싸고 있다.‘약삭 빠른 구변으로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니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는 어디에다 쓰겠는가.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고 공손을 지나치게 함을 옛날 좌구명(左丘明)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기노라.’
좌구명은 공자와 같은 무렵에 살던 노(魯)나라의 대부였다. 공자의 선배로서 공자는 평소에 그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말년에 눈이 멀어 장님이 된 좌구명은 이로 인해 맹좌(盲左)라고도 불리었다.
좌구명이 말한 공손(恭遜)을 지나치게 한다는 주공(足恭)에는 두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그냥 추상적으로 지나치게 공손함을 말할 때는 주공(做恭)이라 발음하고, 다리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겸손하게 하는 모습을 가르킬 때에는 족공(足恭)이라고 발음한다. 이 두가지 다 겸손이란 미덕을 넘어선 허위인 것이다.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도 변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타인이나 사실에 변명을 찾지 말고 모든 사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문제로 환원하여 사물의 궁극적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슈바이처의 말처럼 변명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본질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거짓인 것이다.
우리는 남을 평가하고 평가 받으면서 살아간다. 다만 솔직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이다. 사실 어떤 형태로든 평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공자 시절에도 평가 기준이 있었다. 당시의 인재상으로는 인자(仁者)가 되는 것이다.
인자는 어진 사람으로서 요즘 말로 하면 능력이 뛰어나고 태도도 좋은 사람을 말한다. 공자는 인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교언(巧言)과 영색(令色)을 제시한다.
巧言令色 鮮矣仁
교언영색 선의인
교묘한 말만 하고 보기 좋은 낯빛만 꾸미는 사람 치고 어진 경우가 드물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교묘한 말을 하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말의 어원은 마음의 알갱이에서 나왔다고 한다. 말이란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나온다. 그래서 말을 들어보면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라서 그렇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에 진실성을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면 교언(巧言)은 어떤 말일까? 과장된 말, 허황된 말, 거짓된 말들이 여기에 속한다. 진실성이 결여된 말은 교언이라고 할 수 있다. 과장된 말은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허황된 말은 진실성이 의심되는 말이다.
허풍을 떠는 사람들도 자주 보게 된다. 무언가 불안해 보인다.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본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말들은 쉽게 분간이 된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말이 교묘한 말 또는 그럴 듯한 말이다. 아마 사기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면 교묘한 말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대화를 나누고 나서 무언가 아쉽고 찝찝한 마음이 들면 교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솔한 말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만 교묘한 말은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유쾌하지가 않다.
다음으로 영색(令色)이란 무엇일까? 얼굴과 몸짓에 나타난 표정을 말한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고 무언가 지나치거나 불안한 마음을 심어주면 영색(令色)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말이 중요하다. 그러나 말 못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얼굴빛과 제스처를 비롯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화장의 경우를 예로 들면 쉬울 것 같다. 현란한 모습으로 화장을 하고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을 한다면 영색이 아닐까.
인사를 할 때도 백화점에서 안내원들이 90도 각도로 인사하면 뭔가 어색하고 민망한 느낌이 들기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한 화장을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짙은 화장은 본래의 모습을 숨기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의미는 오늘날 지식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시됨에 따라 어느 정도의 수정이 불가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분명한 것이 있다.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평가 기준의 핵심은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이다.
요즘 정직, 친절, 섬김, 배려 등이 강조되는 이유 역시 마음이 중요한데 기인한다.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는 있으나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는 사람을 지속적으로 감동시킬 수 없지 않을까? 감동이란 순수한 마음이 통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교언영색은 예나 지금이나 순수한 마음에서 거리가 있기 때문에 기피의 대상임을 잊지 말자.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
듣기 좋은 말과 고운 얼굴빛으로 남을 대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을 취한다. 그 속마음에는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 정직하고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은 좋은 것은 좋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줄 알며 아무 때나 낯빛을 곱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본 마음을 억지로 숨기는 사람은 필시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자에게는 인(仁)이 없다고 하였다. 인(仁)이 없는 자는 사이비(似而非)이거나 사기꾼일 수 있다.
1. 사기꾼이 넘치는 세상
부여군에서 군의원을 하는 사람의 아내가 금은방을 운영하면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골드바 등에 투자하면 수익금을 챙겨주겠다고 속여 돈을 받아 챙겼다며 38건의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그 아내는 열흘 이상 연락을 끊고 잠적한 상태다. 그런데 그 금액이 72억 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그 남편인 군의원은 지난 2023년 8월 18일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군의원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는데 23일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하고 있다. 그 부인은 얼마나 감언이설로 지인들을 설득하고 속였기에 72억이란 돈이 투자되었을까? 아마도 장밋빛 가능성을 역설하면서 지인들에게 접근하여 온갖 교언영색을 일삼았을 것이다.
정말 오래전의 일이다. 내가 가진 농지의 주변에 신도시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부동산이라며 전화가 왔다. 도시개발이 되면 농토가 수용될 것이고 그러면 세금을 많이 내야 하니 대토(代土)를 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황을 잘 몰라 이것저것 물으니 만나자고 하였다.
몇 번 만나보았다. 그 부동산 업자는 만날 때마다 새로운 땅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땅 하나를 소개하면서 그 땅을 사면 분명 나중에 큰 이익이 될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사라고 권했다. 내가 돈이 없다고 하니 부동산 업자는 우선 계약금을 주고 잔금은 2~3년 후 보상이 나오면 그때 지금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좋은 조건인가? 그때 나는 부동산 업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좋은 조건을 왜 내게 권하시오. 사장님이 가지시지. 나는 살 돈도 없고 그렇게 까지 해서 사기 싫으니 그만둡시다. 그리고 앞으로 연락하지 마시오” 그 후로 그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당시 내 농토 주변의 토지주 두어 명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유는 도시개발이 되니 대토한다고 대출받아 땅을 샀는데 도시개발은 되지 않고 잔금을 지불 하지 못해 모든 재산을 날릴 지경이 되어 자살했다는 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근 20년이 지났는데 아직 도시개발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땅을 사라고 접근한 그 부동산 업자를 부동산 사기업 자라고 여기고 있다. 그 자살한 분들도 분명 그런 부동산 사기업 자에게 넘어간 것이라 여긴다.
연일 보도되는 것을 보면 사기꾼이 넘친다. 전세 사기도 넘치고 부동산 사기도 넘치고 온갖 사기가 넘친다. 사기꾼은 교묘한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의 환심을 사서 자기의 욕망과 이익을 채우고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린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계속하여 사람들은 사기꾼들에게 속아 넘어간다는 점이다. 모든 사기꾼은 교언영색(巧言令色) 한다는 점이다.
정치인들도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자들이 많다.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해대는 사람도 있다. 부정부패, 뇌물 수수 등에 연류되어서도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당당하게 기자회견도 하고 자기의 청렴을 내세운다. 그러다가 수사가 진행되고 밝혀져 실형을 선고받는다. 그래도 당당한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을 보면 불감증 환자들이 아닌가 혹은 철면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세상은 복잡해지고 인간관계망은 넓어졌다. 그런데 그 넓어진 인간관계망만큼 진실성은 희석되었다. 인간관계망이 좁고 촘촘할 때는 깊은 정이 들고 상대의 내면을 잘 알기 때문에 사기를 치기 어려우나 넓은 인간관계망에서는 불특정다수와의 관계가 가능해져 특정 사기꾼은 불특정다수를 향해 사기를 치기 쉽다. 그 사기꾼들은 항상 교언영색(巧言令色) 하거나 긴박감을 주며 자기가 요구하는 행동을 하도록 독려해 온다. 따라서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사기꾼을 주의해야 한다.
2. 공자가 논어에서 말하는 교언영색(巧言令色)
공자가 논어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자에게는 인(仁)이 적다(子曰 巧言令色이 鮮矣仁-논어 학이편)”고 하였다. 여기서 ‘巧(교)’는 아름다움이요, ‘令(영)’은 잘함(좋게 함)이다. 그래서 교언영색(巧言令色)은 말을 아름답게 하고 얼굴빛을 좋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말과 얼굴빛 즉 외면을 보기 좋게 잘 꾸며서 남의 환심을 사고 남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거기에 왜 인(仁-어짐, 덕)이 적은가? 그런 말과 얼굴빛에는 사람의 욕심이 멋대로 퍼져서 인(仁-어짐, 덕)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본심에는 인(仁-어짐, 덕)이 없고 욕심만 가득하기에 그 욕심을 숨기기 위해 좋은 말과 얼굴빛을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이 말에서 주목할 말이 있다. 바로 鮮矣仁(선의인)이다. 이를테면 인이 적다는 것이다. 왜 공자는 인이 없다(無矣仁)고 하지 않고 적다(鮮矣仁)고 했을까? 여기에 공자의 화법이 드러난다. 공자는 평생 극단적인 말이나 강퍅한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 공자에게 있어서 鮮矣仁(선의인)이라 하면 無矣仁(무의인)과 같은 뜻이다. 여기에 성인의 화법과 일반인의 화법과의 차이가 느껴진다.
듣기 좋은 말과 고운 얼굴빛으로만 대하므로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는 자들은 이른바 사이비인자(似而非仁者)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의 탈을 쓴 자이다. 이런 사람이 넘치는 세상은 눈뜨고 코 베어 가는 세상이 된다.
공자의 이런 사이비인자(似而非仁者) 배척의 말은 논어 공야장(公冶長)에도 나온다.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고 공손을 지나치게 하는 것을 옛날 좌구명(左丘明)이 부끄러워하였는데 나 또한 이것을 부끄러워한다(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논어 공야장 24절)고 하였다. 위에서 좌구명(左丘明)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작자로 알려져 있는데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인지 이전 사람인지 불분명하다. 어쨌든 당시에 인품으로 상당히 알려진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丘亦恥之(구역치지)에서 丘(구)는 공자를 일컫는다. 공자의 이름이 공구(孔丘)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기피한다는 것이며 타인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보아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공자는 좌구명이 교언영색(巧言令色)자를 기피한다는 것을 예로 들어 자신이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부끄럽게 여김을 크게 강조한 것이다.
공자가 사이비인자(似而非仁者)로 싫어한 자가 또 있다 바로 향원(鄕原)이다. 공자는 향원(鄕原)은 덕(德)의 도적이다(鄕原德之賊也-논어 양화편 13장)고 하였다. 德(덕)의 盜賊(도적)이나 덕을 훔친 자이다. 그러니 사이비이다.
그러한 향원(鄕原)은 어떤 사람일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늘 교언영색(巧言令色)하며 사람을 대하고 과잉 친절을 베푸는 자이다. 그런 자는 속마음을 속이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향원은 선한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공자는 ‘아니다’고 답하였다. 이에 대한 공자와 자공의 대화를 보자
”자공이 질문하였다. “향인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하지 않다.” “향인이 모두 미워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하지 않다. 향인의 선한 자가 좋아하고 불선한 자가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子貢이問曰鄕人이皆好之면 何如니잇고子曰未可也니라 鄕人이皆惡(오)之면 何如니잇고子曰未可也니라 不如鄕人之善者好之요 其不善者惡(오)之니라 자로24)” 이 대화를 다시 풀어서 보면 다음과 같다.
자공: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공자 : “그것만으로는 아직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자공: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면 어떻습니까?”
공자 : “그것만으로는 아직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고을 사람 중에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이 미워하여야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공자는 선한 사람이 좋아해야 선한 사람이 될 수 있기에 향원은 선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기로 말하자면 조폭 두목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테면 향원(鄕原)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준이 모호하고,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으로 흔히 사람들이 한없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다. 어찌 보면 그것이 덕이 있는 사람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바른 덕이 아니어서 도리어 덕을 혼란시키기 때문에 덕을 해치는 적이라고 한 것이다. 향원은 덕에 있어서 사이비(似而非)이므로 특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람은 누구나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공자가 말한 향원(鄕原)을 좋은 사람이라 칭하기가 쉽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 대로 그런 사람의 마음엔 인(仁)이 적다. 이를테면 정직성과 진실함과 정의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런 사람은 겉으로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국 풍속을 해치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데 협력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모두 사이비인자(似而非仁者)들이니 경계하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친절은 최대의 무기다. 그러나 친절한 자와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사이비인자(似而非仁者)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기꾼이 판치는 세상이다. 직접적인 사기꾼도 많지만 정치적 사기꾼도 많다. 온갖 억설과 괴담, 감언이설로 국민의 마음을 혼란속으로 몰고가는 것도 일종의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사이비인자(似而非仁者) 들이다. 가짜 뉴스도 판을 친다. 그 가짜 뉴스 또한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사이비인자(似而非仁者) 들이 만들어 내는 것들이다. SNS를 통해 가짜 뉴스와 사이비인자(似而非仁者)들이 판치는 세상, 눈 바로 뜨고 올곧은 마음으로 살아갈 일이다.
욕심과 편견을 이겨내면 진실이 보이리라. 욕심과 편견을 버리면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자에게 빠지지 않는다. 욕심과 편견을 버리면 사이비인자(似而非仁者)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사기꾼은 늘 당신의 욕심과 편견의 뒷마당을 노리고 있다.
▶️ 巧(교)는 형성문자로 丂(교)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장인공(工; 만들다)部와 음(音)을 나타는 글자 丂(교)로 이루어졌다. 巧(교)는 솜씨의 공교함을 뜻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묘할 묘(妙),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옹졸할 졸(拙)이다. 용례로는 솜씨나 꾀가 재치 있고 약삭바름을 교묘(巧妙), 정밀하고 교묘함을 정교(精巧), 솜씨가 아주 묘함을 기교(技巧), 뜻밖에 맞거나 틀림을 공교(工巧), 재치 있는 말을 교변(巧辯), 영리한 슬기와 기묘한 기교를 혜교(慧巧), 간사하고 교사스러움을 간교(奸巧), 여러 모로 빈틈없이 생각하여 낸 꾀를 계교(計巧),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묘히 꾸며서 하는 말과 아첨하는 얼굴빛이라는 교언영색(巧言令色), 교언은 시비를 어지럽게 하고 인덕을 잃게 함을 이르는 교언난덕(巧言亂德), 훌륭한 기교는 도리어 졸렬한 듯하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 잘 만들려고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만든다는 욕교반졸(欲巧反拙), 지나치게 솜씨를 부리다가 도리어 서툴게 됨을 이르는 농교성졸(弄巧成拙), 사람의 타고난 성품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선하고 공교롭게 쓰는 수단이나 방법을 선교방편(善巧方便), 그때 그때에 따라 교묘한 수단을 쓴다는 기변지교(機變之巧), 교묘한 수단으로 빼앗아 취한다는 교취호탈(巧取豪奪), 교묘하게 훔치고 무리하게 빼앗는다는 교투호탈(巧偸豪奪), 교지는 졸속만 못하다는 뜻으로 뛰어나지만 늦는 사람보다 미흡해도 빠른 사람이 더 낫다는 교지졸속(巧遲拙速) 등에 쓰인다.
▶️ 言(언)은 회의문자로 辛(신)과 口(구)의 합자(合字)이다. 辛(신)은 쥘손이 있는 날붙이의 상형(象形)이고, 口(구)는 맹세의 문서의 뜻이다. 불신이 있을 때에는 죄를 받을 것을 전제로 한 맹세에서, 삼가 말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말씀 화(話), 말씀 설(設), 말씀 어(語), 말씀 담(談), 말씀 사(辭), 말씀 변(辯)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글월 문(文), 호반 무(武),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어떤 일과 관련하여 말함을 언급(言及), 말과 행동을 언동(言動), 말과 글을 언문(言文), 말로써 옥신각신 함을 언쟁(言爭), 말하는 소리를 언성(言聲), 말로 한 약속을 언약(言約), 여러 말을 서로 주고 받음을 언거언래(言去言來), 말하고 웃는 것이 태연하다는 언소자약(言笑自若), 서로 변론하여 말로 옥신각신함을 언왕설래(言往說來), 들은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는 언유재이(言猶在耳), 말 속에 뼈가 있다는 언중유골(言中有骨), 말 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는 언즉시야(言則是也), 말을 하여 보아야 소용(所用)이 없음 언지무익(言之無益), 말은 알아듣기 쉬우나 내용은 깊고 오묘함을 언근지원(言近旨遠), 말이 몹시 빠르고도 멀리 전하여 퍼짐을 언비천리(言飛千里), 말할 길이 끊어졌다는 언어도단(言語道斷), 남의 인격이나 계책을 깊이 믿어서 그를 따라 하자는 대로 함 언청계용(言聽計用), 하는 말과 하는 짓이 서로 반대됨을 언행상반(言行相反), 말과 행동이 같다는 언행일치(言行一致) 등에 쓰인다.
▶️ 令(영)은 회의문자로 일을 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을 모아놓고(亼; 집) 분부하며 그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卩; 절) 복종한다는 뜻이 합(合)하여 명령하다를 뜻한다. 분부(分付)는 입으로 하므로 나중에 命(명)이라 쓰고 합(合)하여 명령이라는 말이 생겼다. 令(령)은 또 명령하는 사람에서 전(轉)하여 장관(長官)이라는 뜻이나‘…시키다’의 뜻으로도 쓰고, 더 나아가서 깨끗하다, 훌륭함을 나타낼 때도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하여금 사(使)이다. 용례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하도록 시킴을 명령(命令), 남의 딸의 높임말인 영애(令愛), 어떠한 일을 가정하고 말할 때 쓰는 말을 가령(假令), 지휘하여 명령함을 호령(號令), 금지하는 명령이나 법령을 금지령(禁止令),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묘히 꾸며서 하는 말과 아첨하는 얼굴빛을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을 높여 그의 아내를 이르는 말을 영부인(令夫人),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 저녁에 다시 바꾼다는 조령석개(朝令夕改), 세 번 호령하고 다섯 번 거듭 일러준다는 삼령오신(三令五申), 명령하면 행하고 금하면 그침을 영행금지(令行禁止), 셋줄 있는 집에 드나들며 이끗을 바라는 사람을 조롱하여 일컫는 말을 장립대령(將立待令), 아내가 시키는 말에 거역할 줄 모르는 사람을 농으로 일컫는 말을 판관사령(判官使令), 요긴한 일을 등한히 함을 이르는 말을 만경타령(萬頃打令), 한번 내린 명령은 다시 취소하기 어려움을 호령여한(號令如汗), 처음 뿐만 아니라 끝맺음도 좋아야 함을 신종의령(愼終宜令), 절대로 복종해야 할 명령이라는 지상명령(至上命令) 등에 쓰인다.
▶️ 色(색)은 회의문자로 사람(人)과 병부절(卩=㔾; 무릎마디, 무릎을 꿇은 모양)部의 뜻을 합(合)한 글자로 사람의 마음과 안색은 병부절(卩=㔾)部 처럼 일치한다는 데서 안색, 빛깔을 뜻한다. 절(㔾)은 무릎 꿇은 사람의 상형(象形)입니다. 무릎 꿇은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모양에서, 남녀의 정애(情愛)의 뜻을 나타냅니다. 파생하여 아름다운 낯빛, 채색의 뜻을 나타냅니다. 음형상(音形上)으로는 색(嗇), 측(畟)과 통하여, 이성(異性)을 구슬리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절(㔾)은 절(節)의 본자(本字)입니다. 사람의 심정이 얼굴빛에 나타남이 부절(符節)을 맞춤과 같이 맞으므로, 인(人)과 절(㔾)을 합하여 안색이라는 뜻을 나타내며, 나아가서는 널리 빛깔, 모양, 색정(色情)의 뜻을 나타냅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빛 광(光), 빛 휘(暉), 빛 경(耿)이다. 용례로는 놀라거나 성이 나서 얼굴빛이 변함을 색동(色動), 남녀 간의 욕정을 색사(色事), 남녀 간의 성욕을 색욕(色慾), 빛깔을 색채(色彩), 빛깔에서 받는 느낌을 색감(色感), 여자의 곱고 아리따운 자태를 색태(色態), 글을 읽을 때 글자 그대로 의미를 해석하고 문장의 원 뜻은 돌보지 않고 읽음을 색독(色讀), 겉으로는 엄격하나 내심으로는 부드러움을 색려내임(色厲內荏), 안색이 꺼진 잿빛과 같다는 색여사회(色如死灰), 안색이 깎은 오이와 같이 창백함을 이르는 색여삭과(色如削瓜), 형체는 헛것이라는 색즉시공(色卽是空)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