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19
11월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연중 제3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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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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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kQam0VvSNM (이주형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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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의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이 세상, 마치 한순간 가슴 설레던 소풍 같던 이 세상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떠나시는 분들의 마지막 모습이 참으로 천차만별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아직 준비되지 못한 분들의 죽음입니다. 살아생전 그저 죽음은 아직 내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려니, 아직 멀었으려니, 생각했던 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을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전혀 준비되지 못하다 보니 끝까지 죽음을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마지못해 맞이하는 죽음, 떠나기 싫어 죽기 살기로 발버둥 치다 맞이하는 죽음은 너무나도 불행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죽음을 바라보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한없이 스산하고 찹찹합니다. 그들에게 역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요, 극심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완벽하게 준비된 죽음을 바라봅니다. 그런 분들에게 죽음은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선물이요 기쁨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더 큰 빛을 보기 위한 작은 빛의 소멸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매일 죽을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면서 저녁때까지 살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저녁에 잘 때면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생명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성 안토니오)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모릅니다.
당신이 저를 어디로 이끌어 가실지를,
저의 다음 날이
저의 다음 주가
저의 다음 해가
어떻게 될지 정말 모릅니다.
손을 펴려 할 때,
당신이 제 손을 잡고
당신 집으로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사랑에 감사합니다.”(헨리 나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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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육체를 위한 스트레칭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위한 스트레칭도 가끔 해줘야겠습니다!>
직장생활을 할때 담당하던 업무가 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도면을 보거나 그리던 일이었습니다. 그 탓인지 구부정한 자세가 습관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 주변 사람들이 틈만 나면 제게 그랬습니다. “허리를 좀 쭉 펴세요! 고개도 꼿꼿이 쳐들고!”
요즘 와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허리를 쭉 펴는 것, 고개를 위로 쳐드는 것이 육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에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허리는 육체의 중심이요 삶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허리를 쭉 펴줘야 신진대사도 원활해지고, 마음 자세도 당당해집니다.
고개를 위로 자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 역시, 육체적인 건강 정신적인 건강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당신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21장 28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하란 말씀입니다. 그날이 다가오면 육체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라는 당부입니다.
그날이 가까이 오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는 온종일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지나칠 정도로 엉뚱한 것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TV화면이나 컴퓨터 모니터에, 단 한치 눈앞의 이익이나 재미에 온 신경이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스트레칭을 해줘야겠습니다. 육체를 위한 스트레칭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위한 스트레칭도 가끔 해줘야겠습니다.
주일미사만으로는 부족한 듯합니다. 가끔 평일 미사에도 참석해줘야겠습니다. 가끔 하루 피정도 가줘야겠습니다. 가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영성서적을 손에 들어야겠습니다. 가끔 봉사 활동도 나가줘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의 키가 쑥쑥 자라나고, 주님 오시는 날에 합당한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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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CvAttF8_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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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에게 둘러싸인 예루살렘엔 들어가지 마라>
오늘 복음도 역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산으로 달아나고 시골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과 산이나 시골은 오늘 복음에서 반대 의미로 사용됩니다. 마지막 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땅에서는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망하기 직전 세상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것입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망하기 직전 예루살렘과 같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같이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을 알아보는 길은 그 사람의 감정입니다. 망하려고 하는 사람은 까무러칠 정도로 절망하고 두려워할 것인데 그것이 절망적이고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할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만약 내가 그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공유하는 감정이 두려움과 절망의 감정이라면 나는 적들에게 둘러싸인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어리석은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평화 속에 계셔야만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흔들리시기 때문입니다. 일단 내 마음의 평화를 깨는 사람이라면 만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저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상대의 감정에 휩쓸려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하게 되고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도 그렇게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적들에게 둘러싸인 사람 안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도의 한 부부는 작은 발단, 곧 남편이 차를 마시려고 넣어둔 돈 20원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상대의 나쁜 감정 안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단 누군가 만나서 내 감정이 요동친다면 그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상대도 변해야 하고 나도 변할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집 놔두고 12년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산 여인’이 올라와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다 떨어진 비닐하우스에서 12년 동안 노숙자처럼 사셨습니다. 그런데 30m 옆에는 새로 지어진 깨끗한 자기 집이 있고 남편이 마련해 준 별채도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그 집에 들어가시기를 거부하시고 고생하고 계신 것입니다.
원인은 이렇습니다. 할머니가 지내시는 비닐하우스는 새집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는 동안 임시로 가족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런데 새집이 지어졌는데도 그곳에 계속 머물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설득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남편도 설득하다 지쳐서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말도 안 하고 담을 쌓고 12년 동안 살았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마음이 토라진 것은 남편이 시어머니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2년 뒤에 새집을 짓자고 했는데 남편이 어머니의 뜻대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남편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해서 할머니가 더 난처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아기를 낳느라고 몸이 안 좋아졌는데 그것에 대해 뭐라 하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남편까지 그러니 모두 싫어진 것입니다.
제작진은 남편과 이야기하여 아내가 좋아하는 것이 붉은 꽃임을 알아내고 별채를 붉은 핑크빛으로 새로 개조해서 시어머니의 기억이 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음식을 해서 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렇게 별채에 들어와 본 아내는 깜짝 놀랍니다. 남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년 만에 별채에서 잠을 자 보기로 합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저는 남편이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12년 동안 집에 안 들어오시고 뭐가 불만인지 말도 안 하는 아내를 지척에 두고 계속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내와 말다툼해봐야 자신의 감정만 더 상할 뿐입니다. 그때는 아직 아내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내는 미움과 원망이라는 적들에 의해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들어가면 남편도 죽습니다. 그러니 떨어져 있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제 제작진들에 의해 상담받고 아내의 적들도 조금은 약해졌고 남편도 아내의 불만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아내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만나니 아내는 이제 남편의 집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사람을 어디까지 만나야 하고 어디에서 헤어져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항상 감정을 보아야 합니다. 나의 감정이 상대의 감정 때문에 흐트러지고 상대의 감정을 따라간다면 당장 그 관계에서 나와야 합니다.
산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시골은 원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머물며 내가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사람으로 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도우심으로 힘이 생기고 상대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다시 시도하면 됩니다. 내가 상대를 바꿀 수 있다고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나도 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먹혀서 나의 감정, 곧 성령의 열매를 소진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성령의 불을 끄는 일입니다. 가라앉는 배에 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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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기타를 처음 배울 때 부르던 노래 중에는 양희은 씨의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멜로디가 감미롭고, 가사도 아름다웠습니다. 오늘은 노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 할까.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음 고요만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꽃잎 끝의 이슬방울,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새, 텅 빈 숲에 남은 나무들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꽃잎의 이슬방울은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곧 말라 없어지게 됩니다. 엄마도 없고, 다리도 없는 작은 새는 꽃잎 끝의 이슬방울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진 사람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들, 갑자기 찾아온 병 때문에 놀란 사람들,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텅 빈 숲속의 외로운 나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바람아, 비야 알고 있니, 무엇이 이 숲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겸손으로,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아버지의 자비로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이성, 감성, 오성을 지닌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불안과 긴장을 평화와 일치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비록 멀고, 앞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지만 힘과 힘의 충돌만으로는 평화와 일치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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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20-28: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을 더 분명히 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때를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그런 다음 다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창조계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하고 땅의 주민들이 견디기 힘든 공포에 휩싸일 때부터 무서운 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장차 올 것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파멸에 이를 것이다. 임신한 여인들이 불행한 것은 몸이 무거워 위험을 피해 달아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24절)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태 24,19-21)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여도 이런 환난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종말이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온다고 하여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예언의 참된 결말이요 새로운 신비가 일어나는 계기이다.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포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에 의해 성령의 쌍날칼(히브 4,12) 아래 놓일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요엘 2,10; 3,3-4; 4,15)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자기 믿음에 따라 거룩한 태양(말라 3,20)이 밝아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라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도 믿는 이의 경건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면 온 세상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을 볼”(즈카 14,5; 마태 24,30)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어울리는 영광을 떨치며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실 것이다. 창조계를 새롭게 하시고 사람의 본성을 본래 상태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8절)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당신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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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루카 복음서에서 예루살렘 멸망 예고는 세 차례 등장하는데(19,43-44; 21,20-24; 23,28-31 참조),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두 번째 예고입니다.
마태오 복음(24,15-21 참조)과 마르코 복음(13,14-19 참조)의 병행 구절에서는 묵시 문학적 문체를 사용하며 종말의 대환난을 집중적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 파괴를 역사적 사건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신학에 따르면, 이는 메시아 임금,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최종 심판의 예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루살렘에만 한정되어 있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시작점으로 모든 민족에게 뻗어 나간다는 ‘보편적 구원’의 주제를 다룹니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라는 내용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이제 유다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만백성에게 선포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집중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는 종말론적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보편적 구원’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널리 선포되고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복음화의 탁월한 도구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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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루살렘의 성전은 두 번 파괴됩니다.>
기원전 8세기 바빌론에 의해서, 그리고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서입니다. 성전이 파괴된 사건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기에, 이를 계기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자신들의 죄를 성찰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 두 사건을 마치 하나의 사건처럼 연결합니다.
시대적으로 요한 묵시록에서는 로마가 성전을 파괴한 사건을 나타내려고 ‘바빌론’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묵시록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마치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전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사람에게 종말을 떠올리게 할 만큼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며 포로가 되고 삶의 터전은 무너집니다. 전쟁을 피하기 힘든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더 큰 고통을 받습니다.
성경은 이런 재난의 상황을 말하면서 백성들의 행동을 신앙 안에서 성찰합니다. 여기에는 하느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재난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 안에서 멸망의 이유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말에 관한 말씀이 우리의 잘못이나 죄를 탓하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큰 사건들이 생기면 사람들은 ‘왜?’라고 질문합니다. 그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종말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재난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속량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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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징벌의 날>
바빌론에 관한 예언은 이사야 예언자의 시대에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예레미아 예언자 시절에도 거듭 선포된 일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나라들 가운데 보배요 칼데아인들의 자랑스러운 영광인 바빌론은 하느님께서 뒤엎으신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리라,”(이사 13,19)고 말하였고 예레미아 예언자는 “너희는 바빌론 한복판에서 도망쳐 저마다 제 목숨을 구하여라. 바빌론의 죄 때문에 함께 죽지 마라.”(예레 51.9)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에게 똑같은 주님의 예언이 내렸습니다. 이는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멸망할 악한 바빌론이 지금 이 세대에도 존재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
노아 시대의 물 심판 이후, 하느님의 심판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이 죄악이 너무나 무거울” 때 (창세 18,20 참조) 그 고장과 나라를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그 고장에서 의인 열 명을 찾을 수 있을 때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바빌론과 폼페이에서도 지금 이 시대에서조차 하느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온갖 재난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르시는 멸망의 징조는 성경의 표현처럼 모든 자연계가 붕괴되는 바로 그 모습과 그 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타락한 바빌론의 생각에 젖어 살고 있다면 어두운 바빌론의 행위를 버리지 못한 채 어영부영하고 있다면 곧 멸망할 바빌론이라는 뜻으로 듣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맹렬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악을 애곡하고 세상의 죄에 통곡하며 세상의 상처를 끌어안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는 당부라 짚어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 나타날 징조가 있는 바로 그때 돌아서 회개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지러진 민족들의 공포에 휩싸일 그 시간에 홀로 깨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는 사람은 매일 매 순간 그분의 자애에 의지하여 그분의 사랑을 품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의 굳은 바빌론성곽을 부수어낸 사람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그 사악함 때문에 벌하고 죄인들을 그 죄악 때문에 벌하리라.” 하셨으며 “오만한 자들의 교만을 끝장내고 포악한 자들의 거만을 꺽으리라.”(이사 13,11 참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시자.’”(이사 22,13) 하고 있습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바빌론인 채로 주저앉아 삶을 회개하지 못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바빌론 같은 세상을 향해 회개를 외치지 않고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으로 녹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소리가 되어야 하며 그분의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증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바빌론을 역행하는 복음을 살아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그 ‘의인’에게는 징벌의 날도 결코 두렵지 않은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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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처럼>
루카 21,20-28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칼날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울타리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억압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해방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두려움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평화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아픔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위로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어둠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빛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절망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희망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죽임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살림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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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혹은 달콤합니다. 현혹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나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했는가?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가 되면 지나갑니다. 인생의 여정에 아쉬움이 있든 그렇지 않든 어느 날 마지막에 직면하게 되고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에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준비한 사람은 알곡으로 하늘 곳간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쭉정이로 불에 태워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 21,21)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 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유혹은 항상 달콤합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환경파괴로 말미암아 자연의 고마움도 사라지고 재앙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종말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이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환희와 희망입니다. 마지막 매달릴 곳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이 땅 위에서 산다 하여도 이 땅 위에서 산다 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가톨릭성가 445)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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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심리학자 베르가드는 남성 7,0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끝에 좋은 남편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찾았습니다.
첫째, 침착하다. 다툴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갈등을 대강 끝내지 않는다.
둘째, 성실하다. 자기 관리를 잘하고 약속을 꼭 지킨다.
셋째, 안정적인 삶을 중요시한다.
어떻습니까? 이 글을 보신 남편은 자기 자신이 ‘좋은 남편’인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이 좋은 남편의 기준으로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자기는 다르다면서 거부하겠습니까? 혹시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남편’이라면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이에게는 엄격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위의 세 가지 좋은 남편의 공통점은 결국 아무렇게나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는 자신의 진정한 성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나의 불행이 아닌, 나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도 계속 우리에게 좋은 사람,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말고 ‘남’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 순간에는 손해 보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엄청난 선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복음 말씀은 계속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환난에 대해 계시해주십니다. 하느님 분노의 날은 곧 닥쳐올 것이고, 그날에 예루살렘은 짓밟힐 것이며,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거나 포로가 되어 다른 나라에 잡혀갈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러나 이렇게 끔찍한 종말의 메시지가 여기서 멈추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희망을 동시에 이야기해주십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또다시 ‘사람의 아들’ 모습으로 와서 선택된 자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의해 우리는 구원될 수 있습니다. 단, 주님을 거부하고 악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될 때만 끔찍한 종말의 세계에서도 주님을 통해 구원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 특히 주님께서 간절하게 원하시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선물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새는 궁하면 아무거나 쪼아 먹게 되며, 짐승은 궁하면 사람을 헤치게 되며, 사람은 궁하면 거짓말을 하게 된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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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 정신>
오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이 황폐해질 때가 올 텐데 그날은 징벌의 날이면서 속량의 날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어제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황폐해지는 것이, 징벌이 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속량이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황폐해지는 것이 징벌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 황폐해지는 것이 속량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던 사람, 이 세상을 자기의 영원한 거처로 삼던 사람, 하느님이 이승과 저승의 영원한 주인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이 세상 멸망이 하느님의 징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는 이 세상 멸망이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되지 않고 그저 세상이 황폐해졌다고 생각될 겁니다.
실은 그래서 이 사람들이 징벌을 받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 곧 이 세상이 황폐하게 된 것이 자기들의 잘못 때문이고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라도 정신을 차릴 것이고, 하느님을 향하여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속량을 받습니다. 속량은 거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죽음으로써 속죄한다고 우리는 흔히 말하는데 죽음으로 속죄하려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오히려 살려주십니다. 이것이 속량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징벌이나 하러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처음 육화하신 분이 징벌이나 하러 다시 오실 리가 없습니다.
육화를 완성하려고 재림하실 것이고, 그것이 속량입니다.
이런 주님께 우리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기만 하면 됩니다. 뱀처럼 교만하게 머리를 쳐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허리가 꺾여 땅만 쳐다보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라는 말입니다.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기가 꺾일 대로 꺾인 사람이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이 세상이 망할 때 이제 더 이상 세상은 향하지 않고 오히려 하늘을 향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탈출하고 산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예루살렘은 성전의 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진 세상이고, 산은 늘 하느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세상이 망했다고 허리가 꺾여 옴짝달싹 못하고 꿩처럼 머리 처박고 있지 말고, 얼른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하느님 계신 산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망해도 정신 차려야 합니다. 아니 그럴수록 정신 차려야 합니다. 하늘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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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끝은 새로운 시작, 절망은 없다”>
- 희망하라, 찬미하라, 인내하라 -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으라.”(루카21,18-19)
어제 복음 마지막 말씀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막연히 꾹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선善안에서, 기도안에서, 섬김안에서 항구히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11월 아침 산책때 마다 즐겨 부르는 기도이자 노래입니다.
“성인들이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가요.”
연중 마지막 34주간이 참 고맙고 좋습니다. 수도원 연피정 주간으로 그대로 오아시스 주간입니다. 피정 강의는 ‘천국의 사다리’ 동방영성고전을 바탕한 내용들입니다. 저의 독서 스타일은 식사와 같습니다. 좋은 책만 보면 행복해 집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듯이, 게걸린듯이 책을 읽습니다. 피정기간 독파를 목표로 하고 맹렬히 읽는 책은 ‘천국의 사다리’, ‘울림’, ‘백석白石 평전’ 세권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제 연중 34주간이 끝나면 다음주 부터는 기다림의 기쁨이 넘치는 대림의 시작입니다. 배밭농사 역시 끝이자 새로 구덩이가 파지고 거름을 넣게 되니 또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삼 새로운 의욕이 샘솟는 듯 합니다.
오늘은 베트남 성인들 축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와 흡사한 점이 그렇게 많은 베트남인지요! 민족적 자존심이, 자부감이 참 대단한 나라입니다. 여러 제국을 물리친 흔치 않은 나라입니다. 중국을, 프랑스를, 그리고 미국을 물리쳤습니다. 미국을 물리친 나라는 베트남이 유일합니다. 18-19세기 우리 보단 적지만 무려 1만여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나라입니다.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가톨릭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우리는 오늘 18-19세기 양세기에 걸쳐 순교한 117명 베트남 성인들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들 순교성인들중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포함한 96명은 베트남인들이고 나머지 21명은 유럽 출신들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만이 아실 무명의 순교자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극단의 온갖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견디어 냈고, 영웅적으로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당시 베트남 현실은 민중들눈에는 재앙과 불행의 시기로 흡사 종말같은 암흑같은 예측 불허의 분위기였습니다. 바로 이런 칠흑같은 어둠을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이 환히 밝힌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전조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당시의 우리 조선과도 흡사했습니다. 18-19세기 박해시대 2만여명의 순교자를 낸 조선땅 역시 칠흑같은 암흑에 종말의 지옥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조선 500년 역사를 기록한 20여권의 실록을 읽은 후의 느낌은 한권이면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잔인한 보복으로 점철된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였기에 한권만 읽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홍명희의 10권의 임꺽정 역사소설을 읽으면서도 역시 한권이면 족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악순환의 반복이요, 인권이 무참히 유린된 역사였습니다. 완전히 칠흑같은 어둠속에 반복된 악순환의 역사요,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이 어둠을 밝힌 것입니다. 인권 증진과 신장에 그리스도교의 역할을 결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전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과 같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 인류의 빛입니다. 어둠중에 방황하던 베트남과 조선땅의 사람들이 마침내 빛인 그리스도를 만난것입니다. 이어 들불같이 번진 순교자들의 대열입니다. 이미 빛을 보았기에, 하늘을 보았기에, 미친 듯이 열광한 민중들이요, 그 누구도 빛의 대열, 빛의 순교자들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조선실록을, 임꺽정 소설을 읽으면서 캄캄하고 답답했던 것은 빛의 부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빛만이 무지의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절망해선 결코 안 됩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끝까지 인내로이 견뎌낼 때 생명을 얻습니다. 문이 닫혀 있으면 그 옆에는 희망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절망의 벽은 희망의 문으로 변하니 이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도 이를 증거합니다. 복음은 예수살렘의 종말과 더불어 세상의 종말인 듯했지만 새로운 구원 도래의 시작입니다. 종말의 심판과 더불어 구원의 도래를 복음은 장엄하게 묘사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자 희망입니다.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궁극의 희망을, 믿음을, 사랑을 둘 때, 항구한 인내도 가능합니다. 저절로 ‘희망하라, 인내하라’는 권고를 하게 됩니다. 오늘 묵시록에서 바빌론의 패망은 장차 있을 로마제국의 멸망을 상징합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 바빌론이!”
사실 로마제국의 멸망을 목격하면서 눈감을 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세상의 종말인 듯 생각했다 합니다. 그러나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게르만족의 개종으로 새로운 그리스도화된 유럽이 시작됩니다. 새삼 끝은 새로운 시작이요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바빌론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멸망은 바로 하느님의 승리를 나타내며 이어 천상에서 들려오는 승리의 찬미가입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과연 그분의 심판을 참되고 의로우시다.”
에 이어지는 오늘 독서에는 생략됐지만 승리의 찬미가(묵시19,1-7)를 우리 가톨릭 교회는 매주 주일 제2저녁 기도때 마다 바칩니다. 새삼 천상전례의 반영이 교회가 바치는 지상전례임을 깨닫습니다. 천상의 행복을 앞당겨 살게하는 지상전례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이런 천상에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저절로 하느님의 승리를 앞당겨 찬미하게 되고 저절로 인내할 힘도 생깁니다.
“어린양의 혼이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묵시19,9ㄴ)
제1독서 묵시록의 후반부 말씀인 화답송 후렴이 참 은혜롭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통해 어린양의 천상 혼인잔치를 앞당겨 체험하는 우리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힘, 찬미의 힘, 인내의 힘을 북돋아 주시어 힘차게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2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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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루카21,28)
<회개의 순교!'>
오늘은 '베트남 교회의 큰 날'입니다. '베트남 교회의 순교 성인들인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117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는 우리나라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같이 베트남 순교 성인들을 대표하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루카21,20-28)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마지막 종말의 때인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 일어나게 될 파멸의 모습들을 언급하시면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때가 '우리를 구원(속량)으로 이끄는 회개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내가 예수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있 있는가 하면, 나라와 나라가 맞서 싸우고 있고, 민족과 민족이 갈라서고, 보수와 진보가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재해와 기근과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들이 함께 잘 사는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 건설'인데, 우리 안에는 죽음의 법과 죽음의 문화가 널리 펴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종말이 곧 올 것만 같은 분위기입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의 때가 '회개의 때'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 때문에 목숨을 내어놓는 '순교의 또 다른 의미'는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회개'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순교하기에 딱 좋은 때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회개의 순교'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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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RDd2lCdxcQ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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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1.24.목.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지는 해가 있기에
떠오르는 해가
있습니다.
삶의 시간이란
잠깐 피었다
사그라지는 꽃들처럼
빠르고 빠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끝은 속량을 위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삶의 끝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끝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십니다.
우리의 모두의 끝은
하느님을 향합니다.
종말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삶의
귀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이와같이 종말은
우리를 위한
사랑과 구원의
가장 알맞은
때입니다.
종말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로
몰고가는 우리들을
만나게됩니다.
종말은 우리를
결박하고 있던
집착과 욕망이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는
때입니다.
하느님께로
가져가야 할 것은
하느님 말씀과
사랑뿐입니다.
안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량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심을
믿으십시오.
무너짐이
속량을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진실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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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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