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0102
#벨기에신앙고백서 10.그리스도의 신성(2)
And so it must follow that he who is called God, the Word, the Son, and Jesus Christ already existed when all things were created by him.
따라서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시는 그분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셨던 분이시라는 성경의 증거가 뒤따라야만 합니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때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셨기 때문에 그 신성에 따라 인성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라 불리신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셨으며, 성자와 연합하신채로 성부께로부터 태어나신 독생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신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 영원 전부터 한 분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더불어 존재하셨었다.
골로새書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形象이시요 모든 被造物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He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the firstborn of all creation.
qui est imago Dei invisibilis, primogenitus omnis creaturæ :
ὅς ἐστιν εἰκὼν τοῦ Θεοῦ τοῦ ἀοράτου, πρωτότοκος πάσης κτίσεως,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는 존재시라는 것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 즉,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시는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시며, 그 인성께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고 하므로 영원 전에 창세 전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태어나셨다고 보아야 한다.
히브리書 1:3, 이는 하나님의 榮光의 光彩시요 그 本體의 形象이시라 그의 能力의 말씀으로 萬物을 붙드시며 罪를 淨潔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至極히 크신 이의 右便에 앉으셨느니라
He is the radiance of the glory of God and the exact imprint of his nature, and he upholds the universe by the word of his power. After making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qui cum sit splendor gloriæ, et figura substantiæ ejus, portansque omnia verbo virtutis suæ, purgationem peccatorum faciens, sedet ad dexteram majestatis in excelsis :
ὃς ὢν ἀπαύγασμα τῆς δόξης καὶ χαρακτὴρ τῆς ὑποστάσεως αὐτοῦ, φέρων τε τὰ πάντα τῷ ῥήματι τῆς δυνάμεως αὐτοῦ, καθαρισμὸν τῶν ἁμαρτιῶν ποιησάμενος ἐκάθισεν ἐν δεξιᾷ τῆς Μεγαλωσύνης ἐν ὑψηλοῖς,
하나님의 영광은 천사를 비롯한 그 어떤 피조물도 직접 보거나 대할 수가 없고 단지 소멸시킬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은은한 광채로 피조물들에게 비춰주신다. 그리스도의 인성께서 내뿜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은은한 광채조차도 모세는 감당할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위틈에 숨어서 그리스도께서 손으로 가려주시고 당신의 등만 보여주셨었다. 재림과 부활과 모든 심판이 끝난 후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비추시는 등이 되어주셔서 성 전체를 밝게 비춰주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서는 하나님의 본체, 즉 한 본질 세 위격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형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서는 창세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성자와 연합하셔서 성부께로부터 권세를 받고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셔서 당신의 인성의 영에 완전충만히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써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는데, 이는 비단 성부의 오른편만이 아니라 세 위격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성부의 독생자로서, 성자와 연합하신 이로서, 성령을 당신의 영으로 삼으신 분으로서 그러하시다는 것을 말한다.
골로새書 1:16, 萬物이 그에게서 創造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王權들이나 主權들이나 統治者들이나 權勢들이나 萬物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爲하여 創造되었고
For by him all things were created, in heaven and on earth, visible and invisible, whether thrones or dominions or rulers or authorities—all things were created through him and for him.
quoniam in ipso condita sunt universa in cælis, et in terra, visibilia, et invisibilia, sive throni, sive dominationes, sive principatus, sive potestates : omnia per ipsum et in ipso creata sunt :
ὅτι ἐν αὐτῷ ἐκτίσθη τὰ πάντα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τὰ ὁρατὰ καὶ τὰ ἀόρατα, εἴτε θρόνοι εἴτε κυριότητες εἴτε ἀρχαὶ εἴτε ἐξουσίαι· τὰ πάντα δι’ αὐτοῦ καὶ εἰς αὐτὸν ἔκτισται·
천상계인 셋째 하늘은 물론이고 물질계인 우주만물 전체는 그리스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창조하심과 동시에 더불어 그리스도의 인성께서 인성에게서 인성 자신을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기도 하다.
Therefore the prophet Micah says that his origin is "from ancient times, from eternity." And the apostle says that he has "neither beginning of days nor end of life."
그러므로 선지자 미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시다” 라고 말씀합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族屬 中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者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根本은 上古에, 永遠에 있느니라
But you, O Bethlehem Ephrathah, who are too little to be among the clans of Judah, from you shall come forth for me one who is to be ruler in Israel, whose coming forth is from of old, from ancient days.
Et tu, Bethlehem Ephrata, parvulus es in millibus Juda ; ex te mihi egredietur qui sit dominator in Israël, et egressus ejus ab initio, a diebus æternitatis.
Καὶ σύ, Βηθλέεμ οἶκος Ἐφράθα, ὀλιγοστὸς εἶ τοῦ εἶναι ἐν χιλιάσιν Ἰούδα· ἐξ οὗ μοι ἐξελεύσεται τοῦ εἶναι εἰς ἄρχοντα τοῦ Ἰσραήλ, καὶ ἔξοδοι αὐτοῦ ἀπ᾽ ἀρχῆς ἐξ ἡμερῶν αἰῶνος.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분은 성자 하나님이 아니시라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이 상고에, 영원에 있으시다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은 비단 그리스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 또한 그러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書 7: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族譜도 없고 始作한 날도 없고 生命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恒常 祭司長으로 있느니라
He is without father or mother or genealogy, having neither beginning of days nor end of life, but resembling the Son of God he continues a priest forever.
sine patre, sine matre, sine genealogia, neque initium dierum, neque finem vitæ habens, assimilatus autem Filio Dei, manet sacerdos in perpetuum.
ἀπάτωρ, ἀμήτωρ, ἀγενεαλόγητος, μήτε ἀρχὴν ἡμερῶν μήτε ζωῆς τέλος ἔχων, ἀφωμοιωμένος δὲ τῷ Υἱῷ τοῦ Θεοῦ, μένει ἱερεὺς εἰς τὸ διηνεκές.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가르치기 위해서 구약에 단 두 번 언급된 멜기세덱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멜기세덱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제한된 인식에 갇혀서 부모나 족보도, 태어난 날이나 죽은 날도 없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그저 단순히 구약의 이스라엘의 레위인 제사장 직분에 한정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시대의 인물이므로 아브라함보다 수백년 뒤에 제정된 레위인 제사장 직분과는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다. 또한 멜기세덱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보는 학자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기록을 가지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구약시대의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유대인 성도들의 인식의 한계를 고려한 표현임을 간과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하고 많은 예시들 중에서 굳이 창세기에 단 한 번, 시편에 단 한 번 언급된 살렘 왕 멜기세덱이란 인물을 가장 대표적인 증거로 꼽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멜기세덱과 동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이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 시대에 잠시 살렘 왕 멜기세덱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장차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온전히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시기 위해 미리 그 기틀을 닦아 놓으신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론의 반차와 서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와 서열을 따르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시라고 하는 것이다.
So then, he is the true eternal God, the Almighty, whom we invoke, worship, and serve.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그분께 간구하고 예배하며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시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제쳐두거나 배제하고서 오로지 그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께만 경배와 찬양을 드리거나 영광을 돌릴수 없다. 즉,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우리의 참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만 그분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실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인데,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성을 마리아의 육신의 형질을 취해서 조성된 피조물로 여긴다는 것은 성경의 이치에 맞지 않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인성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와 함께 더불어 계신 존재로 보아야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기는 하되 그분의 인성은 섬기지 않고 다만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만 섬긴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 교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상숭배, 성자숭배, 성모숭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210102
#아브라함 #사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90세에 드디어 귀한 아들 이삭을 낳고서도 단지 37년 밖에 함께하지 못했는데,이는 그녀가 하갈을 남편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준 것과 그것으로 인해 야기된 모든 안좋은 결과들에 대한 책임을 남편에게 전가시킨것과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강요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마음을 괴롭게 한것에 대한 징벌이었다고도 볼수있다.
#민수기 #Numbers 21:21-35
요단 동쪽을 점령하다(신 2:26-3:11)
21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22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리이다 하나
이스라엘은 전에 에돔 족속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모리 왕 시혼에게도 사신을 보내어 백성이 지나갈 수 있도록 정중하게 요청을 한다. 이스라엘이 사신을 보낸 것은 그들과 전쟁을 벌이기 위한 빌미로서가 아니라 진실되게 그저 지나가기만을 바란 이유였다. 그래서 아모리 왕에게 오로지 왕의 대로로만 지나가며 그 어떤 물질적 손해도 끼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은 복음 사역에는 그 어떤 불법적이거나 불의하거나 속이는 권모술수를 이용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바르고 참된 방법만을 추구해야 함을 가르친다. 사람에게는 과정보다 결과가 소중하더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는 과정의 올바름이 더욱 중요하시다.
23 시혼이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그의 백성을 다 모아 이스라엘을 치러 광야로 나와서 야하스에 이르러 이스라엘을 치므로
아마도 아모리 왕 시혼은 에돔이 이스라엘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을 듣고서는 자기도 그렇게 하면 될 줄로 알고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시혼은 에돔은 이스라엘과 혈육으로 맺어진 형제 족속인 것과 여호와께서 에서가 이삭에게 받은 축복대로 이 땅의 소산을 누릴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에돔 족속을 잠시 보존하신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표면적인 것만 따라서 모방했던 것 같다.
24 이스라엘이 칼날로 그들을 쳐서 무찌르고 그 땅을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 점령하여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니 암몬 자손의 경계는 견고하더라
이스라엘은 이전에 에돔이 거절했을 때는 여호와께서도 에돔을 건들지 말라 하셨기 때문에 험지로 우회해야 했었지만, 아모리가 거절했을 때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건들지 말라고 하시지 않고 도리어 공격하라 하셨기 때문에 망설이거나 우회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에돔은 단지 위혐만 했을 뿐이나 아모리는 더 나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전쟁을 벌이는 것이 마땅했으므로 이스라엘은 아모리와 전쟁을 벌여 그 땅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얍복은 먼 옛날에 자기들의 조상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에 여호와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밤새 씨름을 했던 곳이었다. 야곱은 바로 그 얍복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로이 받고 형 에서와 만나 극적으로 화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야곱의 후예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족속을 쳐서 무찌르고 얍복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성취를 얼마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암몬 자손의 조상인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천사들의 손에 이끌리어 빈털털이로 두 딸과 함께 간신히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여 망연자실 하고 있을 때, 그의 딸들이 아비 롯에게 술을 먹이고 간음을 행하여서 낳은 아들 중 하나이다. 그의 태생부터가 매우 비윤리적이고 음란한 것이었기 때문에 암몬 자손은 형제인 모압 자손과 더불어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된다. 그나마 모압 자손 중에는 여인 룻이 나오미의 며느리가 되어 끝까지 따르면서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어 왕가의 혈통을 잇는데 선택되는 은혜를 받기도 했지만, 암몬 족속 중에는 그런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 훗날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을 때,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이 차지한 아모리 족속의 땅을 자기들의 것이라 우기며 빼앗으려 하였으나 입다가 이끄는 이스라엘에게 크게 패하여 도리어 몇몇 성읍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고 항복하고 만다.
25 이스라엘이 이같이 그 모든 성읍을 빼앗고 그 아모리인의 모든 성읍 헤스본과 그 모든 촌락에 거주하였으니
26 헤스본은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도성이라 시혼이 그 전 모압 왕을 치고 그의 모든 땅을 아르논까지 그의 손에서 빼앗았더라
아모리인의 성읍은 본래 자기들 것이 아니라 모압 족속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모압 족속의 조상 모압은 암몬의 사촌 형으로서, 그 또한 자기 어미가 어미의 아비인 롯과 음행하여 낳은, 태생부터 저주받은 자였다. 이런 모압 족속이 아모리인들에게 침략을 당해 땅을 빼앗기고 나서 어디로 쫓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더러는 형제 족속인 암몬 족속에게 편입되지 않았을까 싶다.
27 그러므로 시인이 읊어 이르되 너희는 헤스본으로 올지어다 시혼의 성을 세워 견고히 할지어다
28 헤스본에서 불이 나오며 시혼의 성에서 화염이 나와서 모압의 아르를 삼키며 아르논 높은 곳의 주인을 멸하였도다
29 모압아 네가 화를 당하였도다 그모스의 백성아 네가 멸망하였도다 그가 그의 아들들을 도망하게 하였고 그의 딸들을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포로가 되게 하였도다
30 우리가 그들을 쏘아서 헤스본을 디본까지 멸하였고 메드바에 가까운 노바까지 황폐하게 하였도다 하였더라
이 시인은 아마도 고대에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역사를 시로 지어 읊고 다녔던 유랑 시인이었던 것 같다. 이 시인의 노래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성경이 단지 특정 종교의 신화적인 경전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한 것임을 나타내고자 함일 것이다. 이 시인이 누구인지, 이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에 의해서 밝혀진 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자들이 밝혀내건 아니건간에 우리는 이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추호도 의심해서는 안된다. 시인이 지칭한 '너희'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시인이 당대 이스라엘 민족이었다면 아마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타 민족이거나 오래전 시인일 가능성이 더 커보인다. 아마도 이 시인은 어떤 신령한 계시를 여호와께로부터 받아서 이를 예언하고자 이 시를 지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너희'를 이스라엘이라고 봤을 때, 이 시인은 시혼이 모압을 멸망시켰으니 이스라엘더러 시혼을 차지하고 성을 세워 견고히 하라는 예언을 시로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시인은 모압이 화를 당하여 남자들은 도망치고 여자들은 시혼의 포로가 되게 했다고 하였다. 이는 모압의 남자들이 시혼의 침략을 당했을 때 저 혼자 살기 위해서 여자들도 아이들도 내팽개치고 도망치는 등 얼마나 치졸하고 비겁하게 굴었는지를 암시한다. 모압의 여인들은 남자들에게서 버림을 받아 적국의 포로가 되어 성노예로서 얼마나 치욕스럽고 비참하게 살았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모압을 그모스의 백성이라 칭하였는데, 그모스는 모압이 국가적으로 섬기던 그들의 우상 신이었다. 시인이 모압의 신 그모스를 굳이 언금한 이유는, 모압의 멸망이 바로 그들의 신 그모스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모압 족속은 그모스에게 사람을 바치는 인신제사를 지낼 정도로 패역했기 때문이다. 유다 왕국의 어떤 왕이 모압을 쳐서 이기자 모압 왕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 자기들의 신 그모스에게 왕위를 이을 장자를 죽여 제물로 바치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유다 왕은 그 처참함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 군대를 거두어들이기도 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모압의 패역함을 아모리 족속으로 징벌하셨고, 아모리 족속의 패역함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멸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31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의 땅에 거주하였더니
32 모세가 또 사람을 보내어 야셀을 정탐하게 하고 그 촌락들을 빼앗고 그 곳에 있던 아모리인을 몰아 내었더라
33 그들이 돌이켜 바산 길로 올라가매 바산 왕 옥이 그의 백성을 다 거느리고 나와서 그들을 맞아 에드레이에서 싸우려 하는지라
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
35 이에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백성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의 땅을 점령하였더라
이제 이스라엘에게 남은 것은 이방 족속들과의 연이은 전쟁 뿐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따라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반드시 수행해야 했다. 여호와께서 언약하신 것은 그저 이스라엘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얻거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가나안 족속들과 치열하게 지속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그렇다고 하기 싫은데 억지로 싸우는 것도 안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전쟁에 임할 백성들 중에서 금방 집을 얻거나 소산을 거뒀거나 결혼한 남자들은 자기 소유와 아내를 누릴 수 있도록 배제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에 임할 백성들은 강하고 담대한 심령으로 용감하게 나섰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부름받은 신령한 군사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순간 평생 동안 끊임없이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영적 전투를 벌여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이나 피곤한 것을 전혀 봐주지 않고 도리어 악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피곤하고 지친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다. 그래봤자 자기 손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공중권세 잡은 자와 싸우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 각자의 영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일깨우시고 새롭게 하셔서 우리의 정신활동을 담당하는 혼에 전달되고, 혼의 정신활동 즉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우리 육신이 싸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성령의 의지이자 동시에 성도의 의지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지시대로 이방 족속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진멸한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우둔한 자들은 자기들만의 의로움과 연민에 빠져서 어떻게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죽일 수 있느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절대선이시고 절대의이신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이므로 감히 사람이 이를 두고 운운할 자격은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방식이 오늘날까지 통한다고 여기는 것도 어리석은 해석이다. 적지 않은 교인들이 구약의 전쟁들과 우상 파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오늘날에도 적용하려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여호와께서 이방 족속을 진멸하라 하신 것은 우리가 영적 전투를 할 때는 그 죄악의 잔재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해야 함을 상징하는 것이지,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드온이 바알 우상을 부순 것은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바알 우상을 불법적으로 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각 종교의 영역이 사회법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저들의 소유를 신앙이라는 빌미로 침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정결하게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 침범한 죄악된 요소를 제거하는 것과, 우리 각자의 삶을 지배하려는 죄악 된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다.
#20200102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6장.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여자가 남자의 자손을 임신하여 출산한다는 것은 너무나 강력한 권력이어서 종과 주인, 처와 첩, 자매, 비와 빈의 지위를 무너뜨릴 정도이다. 사라와 하갈, 라헬과 레아, 한나와 브닌나 등의 갈등이 그렇다. 뿐만 아니라 왕가에서는 왕위 계승을 위해 정실 왕비 외에도 수많은 여인들을 통해서 아들을 낳으려 하였으며 왕손을 낳은 여인은 설령 출신이 궁녀였어도 아들이 없는 정실 왕비보다 더 대접을 받고 으스대기도 하였다. 이런 경향은 불과 수십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에 만연했으며 아들을 낳지 못하는 본처는 쫓아내거나 푸대접을 하는 반면에 아들을 낳은 첩은 본처보다 더 아끼기도 했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는 임신과 출산을 해야 대우를 받을 수 있고 여자들끼리 암투에 가까운 갈등을 벌이는 그런 문화는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이다. 따라서 이는 비단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면서 합의한 것이라고도 보기 어렵고 그렇다고 생물학적으로는 더더욱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근본원인을 성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하와의 범죄와 그에 따른 저주와 형벌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와는 뱀의 유혹에 먼저 넘어갔고 하나님의 명령을 왜곡했으며 아담의 사랑을 시험한데다 재판장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위증하려 한 자기의 죄로 인해 그리스도로부터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고 남편을 바라게 되며 남편에게 복종할 것이라는 저주의 형벌을 받는다. 이로 인해 여자는 원래 남자와 동등한 가치와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본능처럼 남자를 의지하게 되고 자녀를, 특히 아들을 낳아야 겨우 안도할 수 있으며 남자의 관심과 애정이 다른 여자에게 향하게 되면 그 사랑을 독차지 하기 위해 표독스러운 갈등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임신한 애굽 여종 하갈이 모시던 주인 사라를 멸시한 것과, 그런 하갈을 학대하여 쫓아낸 사라의 행위는 결국 하와의 범죄에 기인한 것이다.
아내가 임신과 출산을 못한다 하여 무시하고 핍박하는 남편들의 악행은 아담의 원죄로부터 기인한다. 물론 남자는 기본적으로 자기 짝 된 여자를 사랑하게 마련이지만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에는 그 사랑이 지극히 정욕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그나마 자기 자녀를 낳게 되면 자녀들 때문에라도 여자를 사랑하겠지만서도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아내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고 후손을 잇는다는 미명하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인을 찾게 된다. 불임 아내를 버리지 못하는 경우에는 애도 못낳는 여자라며 끊임없이 무시하고 괴롭힌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자의적으로 왜곡한 남자들의 죄악이다. 자기 아내가 자녀를 낳을 수 있건 없건, 나이가 적건 많건, 장점이 많건 적건 간에 한결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명령을 참으로 알고 순종하는 것이고 신자가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심어놓으신 본성의 빛을 따라 은연중에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여러가지로 흠결이 있는 여인을 아내로 맞아 사랑한 모범적인 남편의 예시가 많이 나오는데,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기생 라합을 아내로 맞은 살몬, 모압 미망인 룻을 아내로 맞은 보아스,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은 호세아 등이 그러하다.
하갈이 애굽인이라는 것은 그녀가 비록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사라를 모시고 있었어도 여호와의 분깃과는 상관없는 자임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첩이기 전에 사라의 여종이었으므로 아브라함에게서 임신하였더라도 마땅히 더욱 겸손하여 사라를 섬겼어야 했다. 그러나 하갈은 마치 자기 스스로 그런 영광을 누리게 된 것마냥 북극 집회를 주관하는 여호와의 보좌를 노리는 천사처럼 교만하여서 주인인 사라를 멸시하고 말았다. 아마도 하갈은 그렇게 해도 아브라함이 사라가 아닌 자기를 편들어 줄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갈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뜻이 아니라 사라의 요청으로 그리 된 것과 아브라함이 사라를 아내로서 얼마나 사랑하는지와 하나님의 언약을 얼마나 굳게 믿고 있었는지를 간과하였다. 그리하여 도리어 사라에게 보복성 학대를 당하게 되고 결국 내쫓기는 처지를 자초하게 된다.
나로서는 임신한 하갈에게 멸시를 받은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 일은 사라가 먼저 아브라함에게 제안한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흔들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라는 자기를 멸시하는 하갈에 대응하기 위해 떳떳하지 않음을 알고서도 일부러 아브라함을 닥달하여 주도권을 인정받으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브라함은 비록 하갈이 임신했어도 자기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으므로 하갈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아내 사라의 권한에 맡기는데 이는 참으로 지혜로운 처사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통상적으로 높은 자보다는 낮은 자를 더 동정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여종 하갈을 학대한 사라는 지나치다고 하고 주인 사라를 멸시한 하갈에 대해서는 좀 더 관대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백성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명령하시면서 높은 자를 부당하게 우대해서는 안되지만 낮은 자라고 해서 지나치게 불쌍하게 여겨 부당하게 두둔해서도 안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사라가 하갈을 학대한 것은 하갈의 교만함에 대한 당연한 징계 수준이다. 그러나 하갈이 여종의 신분을 망각하고 약간의 영광을 얻었다 해서 주인 사라를 멸시한 것은 질서를 거스르는 악한 죄이다. 따라서 비록 학대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쓰이긴 했아도 사라가 하갈을 징치한 것은 하갈의 주인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유대인 대신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인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우리는 원래 애굽인 여종 하갈과 같은 존재였으므로 성령의 은혜로 교회에서 특출난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절대 하갈처럼 교만하여서 다른 지체들을 멸시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님 당신께 행한 것이라 하시므로, 우리가 조금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다른 낮고 작은 지체들을 멸시하는 것은 교회의 주인이시고 은혜와 은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과 같다. 하갈이 사라를 멸시했다가 학대를 받고 쫓겨난 것처럼, 작은 자를 멸시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학대를 당해 교회에서 쫓겨나더라도 할말이 없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남들을 멸시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그 접붙이신 가지를 꺾어 불살라 버리실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