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기대는 했지만 이루어질 줄은 몰랐던 16강에 내노라하는 강호들을 제치고 올라갔기에, 그래서 나라 전체가 뜨겁게 들끓었기에 저도 덩달아 그 밤을 꼬박 새우며 'ET 일기'를 정말 즉흥적으로 썼었습니다.
아뿔싸~
철벽수비 이탈리아까지 제치고 8강에 올라갈 줄이야...
바람은 컸지만 이길 거라고 누구 하나 쉽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먼저 말했다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사라질까 봐...
이를 어째...
글은 시작했고 경기는 16강을 넘어 8강까지 올라가 버렸으니...
할 수 없다. 딱 한 편만 더 쓰고 끝내자.
그런 마음으로 쓴 'ET 일기 2'입니다.
그 후 4강까지 올라가 4위로 월드컵은 끝났지만 글은 2편에서 끝냈습니다.
밑천 얕은 상상이 금방 고갈되고 말았거든요.
서두가 길었습니다. ㅎ
2편 시작합니다.
<ET 일기 2>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질계를 넘어 정신계의 비밀까지 일부 밝혀내어 이미 수명이 500년으로 늘어난 우리 은하종족으로서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문, 아니... 처음 보는 경우였다.
외부로부터의 침입 흔적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온 녹색 선혈 이외에는 아무런 외상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독극물에 의한 자살?
정신계의 비밀을 일부 밝혀내어 삶을 관조하게 된 우리 종족에게 있어서 자살이란 용어는 이미 사라진 단어인데...
원격건강감지기를 사망자의 싸늘하게 굳어버린 몸에 대자, 곧바로 홀로그램에 건강국 담당자가 나타나 건조한 음성으로 사망자의 신상과 사인을 설명해 준다.
"이름은 뽀프, 나이 253세, 직업은 지구감시원, 사인은 과다 쇼크로 인한 급성 심장 파열. 너무 급속하게 진행되어 자동건강보호 프로그램이 가동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 고인은 잠시 후 영구 냉동보관 예정."
"제기랄~ 좀 예쁜 목소리로 상냥하게 말하면 안 되나~"
홀로그램은 건조한 보고를 끝내고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뽀프...
냉동 전 다시 한번 뽀프의 상태를 살펴보다가 아주 기이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녹색 선혈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심장파열로 인한 극심한 고통보다는 우는 듯 웃는 듯 감정의 극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감정이 기복이 극도로 줄어든 우리 종족에게 있어서 저런 표정은 아주 특이한 표정이 아닐 수 없다.
"제기랄~"
우리 종족 아무도 쓰지 않는 나만의 용어.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써보면 의외로 기분이 좀 좋아진다. 우연히 우주용어사전을 뒤지다가 찾아낸 말.
<지구 종족들이 하는 일이 안 풀리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 쓰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고조사국 경력 150년의 사망사고전문가. 전문가라고 하기엔 좀 부끄럽다. 고작해야 내가 처리해 본 사건이라곤 이번 경우를 포함해서 세 번밖에 없었으니까...
한 번은 외계현지탐사팀 운항요원이 몰래 숨겨 들어온 지구종족들의 술이란 이상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한 경우였고...
맞아~ 그때도 자살이라고 결론은 내렸지만 그 황홀한듯한 표정의 비밀은 밝혀내질 못했었지...
또 한 번은 연구목적으로 지구에서 모셔온(아니지.. 히히.. 납치지.) 지구종족 암컷을 연구하던 연구원의 자살. 그건 정말 자살이었다.
자동건강보호 프로그램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동맥을 끊고 자살한 그 연구원은 머릿결이 하얗게 변색된 채 사망한 지구종족 암컷의 손을 꼭 잡은 채 죽어있었다. 그 옆에는 유언인 듯,
"이 여인을 사랑하였다. 수명이 우리와 같지 않음이 너무나 아쉽다. 더 이상 삶을 살아낼 의미가 없어졌다. 그녀를 만난 내 행운에 감사한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때도 고인의 뜻에 따라 단순 자살로 보고했었지만 그 연구원의 얼굴에 남겨져 있던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던 표정의 비밀을 밝혀내진 못했다. 필요한 수만큼만 종족을 배양해 내는 우리 종족들 중에 사랑이란 말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우주용어사전을 뒤져보니 <너무 많은 의미가 있어서 정의할 수 없음. 그중에 죽음에 이르러서도 후회하지 않는 길이란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극히 위험한 감정인 것 같음. 우리 종족의 이 용어 사용을 금함>이라고 되어 있었다. 역시 우주용어사전은 정확하다. 결국 그 연구원은 죽음에 이르러 사랑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제기랄~ 빌어먹을 지구. 매번 지구야 지구~"
시간회귀추적영상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시각은 고인의 사망 추정시간 40분 전으로 맞췄다. 곧 그 화면이 파장계를 통해 눈앞에 펼쳐졌다.
"읔!!! 도대체 이게 뭐야???"
갑자기 엄청난 노이즈가 발생했다. 파장계에 나타난 부하수치가 최대수치에 근접해 있었다.
고장인가...?
귀를 막았지만 그 노이즈는 귓속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지구 영상인 듯한데 온통 빨간색이었고 지구생물들이 한데 모여 모두 한 가지 동작을 반복하며 무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영상을 바라보며,
"때~한민국 쿵쾅쾅 쿵쾅! 때~한민국 쿵쾅쾅 쿵쾅!"
뽀프가 팔을 쭉쭉 펼치다가 손바닥을 마주치고 껑충껑충 뛰며 지구종족들의 그 엄청난 노이즈를 따라 하고 있었다.
가끔은 두 손을 모으기도 하는 그의 표정은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던 그 노이즈가 갑자기 멈추었고 그에 따라 뽀프의 동작 또한 갑자기 멈추었다. 영상에는 동그란 공 하나가 거미줄로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우와 아아아아아~~~~~~~~"
붉은 물결이 공중으로 풀쩍 튀어 올랐고, 뽀프도 함께 튀어 올랐고, 뒤이어 엄청난,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노이즈가 발생했다. 이미 파장계의 소리부하수치는 한계를 넘어있었다.
눈물을 보이다니... 이럴 수가?
뽀프가 울고 있었다. 우리 종족 중에 아직도 우는 사람이 있다니...
분노와 슬픔은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는데...
"때~한민국 쿵쾅쾅 쿵쾅! 때~한민국 쿵쾅쾅 쿵쾅!"
다시 그 노이즈가 시작되었고 뽀프도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 결연한 표정으로 다시 그들을 따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영상에는 지구종족 전사들이 서로 공을 뺏고 뺏기고 하는 지루한 동작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흰 전사들이 공을 뺏을 때마다 뽀프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고, 빼앗기면 또 그 구호, 때~한민국을 목놓아 소리쳤다.
그때까진 자동건강보호 프로그램에 나타난 수치가 많이 높긴 했지만 우려할만한 경보음을 울려대며 자동으로 가동되지는 않았다.
'사고자의 마지막 순간을 따라 해봐. 그럼 느낌이 올 거야'
사고조사를 교육하던 옛 교관의 말이 떠오르자마자, 뽀프의 동작에 맞춰 나도 팔을 쭉쭉 펴고 박수도 치고 소리도 함께 질러보았다.
"때~한민국 쿵쾅쾅 쿵쾅! 때~한민국 쿵쾅쾅 쿵쾅!"
단순하게 반복되는 리듬이라 어렵지 않았다. 팔을 쭉쭉 펼치고 박수를 치고...
근데 가슴속에서 이상한 에너지가 발생함을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듯한 생소한 느낌. 버럭 두려움이 생겼지만, 이상하게도 그만둘 수가 없다.
그 에너지는 그 동작과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커져갔고, 가슴속에 고인 그 에너지들을 뿜어내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일순! 다시 한번 모든 노이즈가 사라졌고, 영상에는 흰 전사의 머리를 맞은 공이 거미줄 속으로 데굴데굴 굴러들어가는 게 보였다.
다시 한번 붉은 물결이 공중으로 불끈 튀어 올랐고...
모든 노이즈에 버금가는 뽀프의 미친듯한 웃음소리. 이어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고함 소리...
"우하하하하~~~~~~~~~~~~~~야~~~~~~~~~~~~~~~"
나도 모르게 뽀프의 고함을 따라 지르고 있었다. 가슴에 고인 모든 에너지가 고함소리를 타고 바깥으로 분출되었고 그 순간 심장에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건 폭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미친 듯 웃어대는 뽀프의 입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던 그 녹색의 선혈. 행복의 정점에서 그는 웃으며... 녹색 피를 뿜으며...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아니, 뽀프는 폭발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자동건강보호 프로그램이 삑삑~ 경보음을 울리기 시작하면서 시간회귀추적영상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종료되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다.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탈진한 듯 꼼짝할 수가 없다.
한참 후 다시 몸에 에너지가 차기 시작하자, 슬그머니 시간회귀추적영상 프로그램을 다시 가동하고 시각을 사망추정 두 시간 전으로 맞추었다.
영상에는 다시 한번 붉은 물결이 가득 차고 그 노이즈,
"때~한민국 쿵쾅쾅 쿵쾅! 때~한민국 쿵쾅쾅 쿵쾅!"
"제기랄~ 지금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요즘 축구협회가 시끌시끌하던데
잘 정리되고 조용해지면 양궁처럼
세계도 제패할 겁니다. ㅎㅎ
16강에 들어선 것 만도 숨이 멎었을 것 같은데
4강에 들어섰으니, ET도 놀랐겠지요.
나이 253세나 된 지구감시원 뽀프,
과다 쇼크로 급성 심장 파열 !
제목; ET 일기 2,
저자; 마음자리,
잘 읽고 갑니다.^^
계속 계속 이기니, 나중에는 거의
열광의 도가니였지요.
그때가 한국의 또 하나의 기적이 시작되었던 때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는 현실을 앞서 간다는데
아마 우주인도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잘 읽고 가요.
아... 그렇게 해주면 정말 좋겠습니다. ㅎ
ET 일기2.
완전 몰입해서 읽게 되네요.
지구 감시원 뽀프의 나이가 253세.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지구인한테는 엄청난 나이.ㅎ
다시 한번 아파트가 덜썩이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천상 이야기꾼 마음자리 님
재미난 글 잘 읽었습니다.
여러 인연 덕분에 먼지 덮여있던
옛 이야기가 빛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이베리아님의 격려도 큰 몫을 했습니다. ㅎㅎ
영광입니더~ㅎ
공상과학영화같은 ET일기. 정말 상상력 풍부한 마음자리이십니다.
요즘은 AI에게 맡기면 이런 공상과학 영화도 잘 만들어준다고하더군요.
우리 인간은 이제 무엇을 해야할지?
머리로 하는 일은 AI가 다할 수 있고 더 잘 할 수도 있겠지만,
가슴으로 하는 일은 하나도 못 할겁니다. ㅎㅎ
'우주의 제왕' 한 편 써 보시지요 ^^
반지의 제왕 만큼 재미있고 멋질 것 같습니다.
제목 좋네요. ㅎㅎ
염두에 두겠습니다.
요즘은 상상력이 가뭄을 겪는
중인지 빈약합니다. 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도 그 영화 보며 낯설지만
큰 감동을 받았지요. ㅎ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시간
그 곳은
저녁시간이겠군요.
아주 잘 읽었습니다.
앵커리지님의
말씀처럼
'우주의 제왕'
한 편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드라마,영화도
가능할 것 같구요.
가을 바람이
선선합니다.
감기조심 하시고,
늘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네. 이곳은 저녁입니다.
LA 북쪽 Bakersfield란 도시
외곽에 지금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입니다. ㅎ
*지축을 흔들었다* 라는 그때의 신문 타이틀이 기억납니다.
어디 스크랩 해두었던것 같은데 몇 번의 이사로 잃어버리 듯. 해서 어렵게 폰 사진첩을 뒤지니 저장되어있네요.
지구인을 연구하던 진화된 종족에게도 이 감동은 심장마비 일으킬만한 사건 이었던가 봅니다.
지구에 또 다시, 어느 단일민족이 이런 감동적인 일을 해 낼 수있을까요.
감사히. 아주 감사히 읽었습니다.
다시 그런 순간이 올까 싶은
대단한 감동과 합심의 이벤트였어요.
그 저력이 어느날 또 다른 기적들을
만들어낼 겁니다. ㅎ
과학적이고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어린시절을
지루할 새 없이 보내셨을 것 같아요.
아까비~
심히 아까울 때 쓰는 말 아시죠?
글 읽는 동안 드는 생각은
마음님 글을 우리만 보기 정말로 아까비~~~
ㅎㅎ 읽고 같이 공감해주는
여기 5060 글방이 제일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