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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나중이 하나 되어야 참나(眞我)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말하라.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냐. 열국을 그의 앞에 넘겨주며 그가 왕들을 다스리게 하되 그들이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같게 하매 그가 그들을 좇아가서 그의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하게 지났나니 이 일을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1-4)
남은 자가 돌아오는 때에 섬들은 잠잠해야 한다. 바다는 인간 본성의 세계다. 그 본성의 세계에 직접 접해 있거나 그 가운데 있는 것이 섬이다. 이제 겨우 남아서 돌아왔는데 본성의 세계가 먼저 활동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이루어왔던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일을 도처에서 목도하고 있다. 기복신앙이 그 한 예이다. 모든 것이 육신의 축복과 연결된 그 믿음은 더러움을 솟구쳐내는 거친 바다와 같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되 섬들아 잠잠하라 하시는데 전도자들은 말하기를 섬들은 부르짖어라 한다.
새 언약 시대의 복음은 육에 속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믿는 자 안에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래서 기록되기를 “그(예수)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히 7:16-17) 하였다.
하나님은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고 가까이 나아오라’ 하신다. 돌아온 자는 야곱처럼 하나님께 속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 하나님의 국민들이 힘을 새롭게 하고 심판에 대하여 서로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 무엇이 심판되어 떠나가야 하는지 서로 말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본문 2~4절의 말씀은 누구에 대한 예언인가? 첫 사람의 눈으로 읽으면 고레스에 대한 예언이 되고, 둘째 사람의 눈으로 읽으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며 예수의 이야기다. ‘처음’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나중’에 예수를 메시아로 보내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도 예수도 말씀의 칼과 언약의 무지개로 세상을 이기셨다. 처음부터 만대를 정하신 것은 ‘영(靈)의 계보’를 이루고자 함이다. 고레스는 영의 계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는 하나의 삯꾼일 뿐이다. ‘동방에서’는 ‘일출’로서 ‘해오름으로’이다. 아브라함이 동방의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불러냄을 받은 것은 ‘여호와의 빛’을 징조하기 위해서다. 그 징조를 따라서 예수는 ‘사람들의 빛’으로 오셨다. ‘사람들의 빛’은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걸어가지 아니한 새 길을 걸으셨다. 아브라함도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던 가운데서 유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사람이다. 고레스는 세상의 영웅호걸들이 걸었던 옛 길을 걸었다. ‘해오름’은 예수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형제 되는 자마다 의의 태양이 그 마음 가운데 떠오르게 되고 아무도 가보지 못한 새 길을 가게 된다. 첫 창조의 넷째 날 해와 달과 별들이 떠올랐다. 해와 달과 별들이 없었다면 먹거리도 없다. 첫 창조의 셋째 날 등장한 식물들도 넷째 날 태양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생육하고 번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식물에게는 햇빛과 햇볕이 먹거리다. 의의 태양은 의를 구하는 자에게 먹거리를 제공해 준다. 영의 계보는 의의 먹거리로 생육하고 번성한다.
의의 태양이 떠올라서 의의 양식을 먹는 자가 있는 반면 섬들과 땅 끝(생존의 세계)은 그 일이 무서워 떨며 함께 모여 와서 불의의 떡을 만들어 먹으며 담대히 대적한다. 바리새인, 제사장, 유다 군중들은 그 마음 가운데 죽은 여호와(이름만 여호와일 뿐 실은 우상)를 못으로 단단히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 마음에서 일어난 일이 밖으로 드러났는데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다.
‘나중’은 무엇인가? 종말론 신봉자들이 말하는 그 세상의 종말인가? ‘나중’은 종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즉 도착, 도래, 임재, 현현(顯現), 임마누엘, 기름부음, 인자(人子) 됨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부활과 생명으로 임재하심이며, 거룩한 성령의 강림하심이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양이 우리에게서 온전하게 성취되어 감이다. ‘나중’이란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창조, 완성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역동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오늘의 부활과 생명의 천국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미혹된 마음에 이끌려 신기루 같은 천국과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린 ‘오늘날’의 나중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안에 임하여 오지 아니하면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 또한 있지 아니함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나중’은 종말론 자들이 말하는 그 종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성경에는 물론 심판도 있고, 마감도 있고, 대전환도 있고, 나중도 있고, 완성도 있고, 안식도 있으나 종말론 자들이 말하는 그 종말은 허구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내 안에서의 일이다. 처음도 내 안에서의 일이며, 마지막도 내 안의 일이다. 밖에서 찾는 그 어떤 종말도 신기루일 뿐이다.
오늘날 숨죽여 ‘나중’을 종말이 왔다고 광포를 부리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원한 대전환의 ‘나중’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자. 가령 우리 앞에서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고 있다 하자. 그것은 알로서의 옛 존재태를 마감하고 병아리의 새로운 존재태를 시작함이다. 처음 시대가 지나가고 나중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약과 환희와 영광으로의 대전환이다. 이 나중의 영광은 깨어짐의 아픔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인생들에게는 이 영광의 나중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깨어짐의 아픔만 보인다. 성경에 세상 끝이나 말세나 심판이란 말씀만 보이면 즉각 세상 종말에다 꿰어 맞추는 종말론 자들의 어리석고 일그러진 종교적 자화상을 마감할 길은 없는가?
육신의 그림자(어둠) 시대를 마감(심판)하는 것도 내 안에의 일이요, 또한 실상(빛)의 시대를 맞이하는 것도 내 안에서의 일이다. ‘처음’과 ‘나중’의 믿음 안에서 우리의 존재태가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고 빛에서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오심의 처음과 나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다.
하나님은 스스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 하셨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은 무슨 의미일까?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말씀하셔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 이렇게 삼중으로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 어느 누가 그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있으랴만 그 말씀 가운데 ‘나중’이란 말씀이 종말론의 근원이 되고 있으니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진술이 될지라도 그 의미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인생들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신학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수군거리고(각종 이론) 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요 6:43) 하신다.
‘알파’와 ‘오메가’가 무엇인가? ‘알파’란 헬라어 알파벳 첫 글자요, ‘오메가’란 마지막 글자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는 스물두 글자가 있으며 이 글자들로서 헬라인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생각과 삶과 우주를 표현했다. ‘알파’란 첫 글자이니 이것은 시작인 동시에 전체의 머리 부분이다.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이니 이것은 끝인 동시에 전체의 완성 부분이다. 하나님은 이것으로서 무엇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신 것인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은 그의 계시를 우리의 언어로 말씀하신다. 이는 보이지 아니하는 영(靈)의 일을 우리에게 알게 하고자 하심이다. 그의 계시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풍성해지고 또 전체의 통일성을 이룬다. 이와 같이 알파와 오메가란 하나로 시작된 것이 풍성하게 전개되고 또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 계시의 영적 전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파로부터 오메가로 나아가면서 언어로 시작된 것이 언어를 초월하는 풍성함에 이른다.
‘시작’과 ‘끝’은 무엇인가? ‘시작’이란 헬라어 ‘근원’이며 ‘끝’이란 ‘완성’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비롯한 모든 일을 하나님의 근원 안에서 시작하고 그 일을 성취하시면서 전체의 온전함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태초에(근원 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하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날 칠일 간에 흑암에 빛을, 혼돈에 질서를, 공허에 충만을 주셨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시작’으로부터 ‘완성’으로 진행된다. 그의 일하심에는 단절이 없는 역동성 가운데서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그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역동의 파노라마이다. 인자(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도 이와 같았다. 그는 그의 십자가의 도(道)로써 그가 시작하신 일을 온전히 이루셨다. 기록된바 ‘다 이루었다’ 함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다 이루신 것인가? 그는 육신의 처음 시대를 마감하고 영의 나중 시대를 열어 놓으셨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 곧 그의 역동적 임재는 인간의 모든 종교, 도덕, 윤리, 수양, 사회정의, 기복, 권세, 명예, 돈 등등의 모든 육적 가치를 마감하였다. 육신의 첫 사람의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에 의해 완전히 그 끝을 보았다.
이 끝을 성경은 세상 끝(처음 시대 끝)이라 하고 있다. 이 끝에서 부활의 나중 시대는 시작되고 있다. 이 나중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의 시대이다. 그의 임재만이 우리로 첫 사람의 움켜쥠의 존재태를 마감하고 비움과 용납의 둘째 사람의 사랑의 존재태로 나아가게 한다.
‘처음’과 ‘나중’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그 처음과 나중의 존재태는 너무나 판이하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그 처음에 비하여 빛이 비취어온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이루어진 그 나중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이와 같이 하나님은 처음을 지나가게 하시면서 풍성하고 온전하며 영원한 ‘나중’이 오도록 경륜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영광의 ‘나중’을 무엇이라 불러야 좋은가? 그것을 ‘종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나중’은 전혀 ‘종말(파멸)’이 아니며 사실 존재의 종말이란 어디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가령 나무가 불타서 그 형체가 없어질지라도 그것도 종말이 아니다. 그 나무는 재와 가스로 변해서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즉 존재의 형태만 변화되는 것이다. 물질세계가 이러하거든 하물며 영광의 영의 세계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나중’은 있으되 ‘종말’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부활은 ‘성령 임재’의 실상을 가지지 못했던 옛 사람의 처음 시대를 마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그의 부활에 참여하는 성령 임재의 나중 시대를 산다. 이 마감(고난)과 부활은 오늘 여기에서의 일이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 시대가 나중 시대이다. 육적 형상을 마감함은 첫 것의 지나감이요, 영적 형상을 본받음은 둘째 것(나중)의 도래함이다. 그리스도의 임재란 이것을 일컬음이다. 처음은 나중을 위하여 있고 처음은 변화되고 자나가는 것이다. 이 지나감은 충만함과 온전함과 영원함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처럼 종말이 온다고 두려워할 것도 없고 또는 종말에 ‘우리 종말클럽만 구원을 받는다’는 광기를 부릴 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아 처음 것은 지나가고 나중 것은 벌써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런즉 이미 옛 것은 나중의 새 것에 수렴되었다. 그러니 무슨 종말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 부활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믿어서 내게 들어오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 하셨다.
세상 종말을 사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임재 밖에 있으므로 오늘의 부활에도 마지막 날의 부활에도 아무런 분깃이 없다. 다만 그들이 맞이하는 부활은 심판의 부활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의 기준으로 선을 행한 자와 악을 행한 자가 맞는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이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일이며, 악한 일이란 아담처럼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믿음으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일이다. 우리가 인자(人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자(人子)가 되는 일 외에는 선한 일이란 없다. 우리의 움켜쥠의 존재태가 오늘 여기서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아 비움과 용납의 존재태로 변화되는 그 나중이 되지 아니하면 심판의 부활 밖에는 맞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심판의 부활도 종말이 아니다. ‘오늘날이라고 하는 자기의 때’에 자기 첫 사람을 마감하고 나중 사람으로서 인자(人子)의 형상을 본받음이 우리의 일이며,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중 시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그 나중은 급속히 지나가버린다.
기록된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하였다. 우리의 때가 날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속히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내가 속히 오리라.”(계 3:11, 11:14, 22:7, 12, 20) 하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창세기 1장에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오늘날 나중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롬 9:12; 창 25:23) 함에 있다 하였다.
‘큰 자’란 육신이며, ‘어린 자’란 영이다. 우리의 처음은 종말(파멸)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처음이 나중을 섬기게 함에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육신은 인자(人子)의 형상을 본받는 나중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처음이 없으면 나중도 없다. 처음은 지나갈 것이로되 그 처음 것은 나중을 있게 하는 은혜의 근원이다. 처음 것은 풍성함과 온전함과 영원함의 나중 것을 지향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창조와 피조물의 관계성 속에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계시되었다. 그러나 창세기 2장 이후로는 빚는 자(토기장이)와 빚어지는 자(진흙), 씨 뿌리는 자와 씨 뿌림을 받는 자, 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 속에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은 하나로 시작하여 풍성함을 이루며, 부분적으로 시작하여 온전함을 이루며, 죽을 자로 시작하여 영원히 사는 자가 되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는 일이다. 종말론 자들은 구약의 종말론, 개별적 종말론, 보편적 종말론 등으로 복잡하고 어렵게 말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공허한 주의, 주장만이 난무하고 있다. 이것을 일컬어 ‘수군거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온에 두신 반석이다. 그를 두고 수군거리는 자는 누구든지 걸려 넘어질 것이며,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이 믿는 자는 그의 임재 안에서 온전한 나중 사람으로 지어져 가고 있다. 즉 하나님의 온전한 모양이 그에게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입혀지는 하나님의 모양 그 자체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모든 인간적 욕망과 가치를 무효화시킨 심판이다. 첫 사람의 욕망과 가치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 즉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심판되었다. 이 심판은 인간이 정당화해온 모든 육신적 전쟁과 그 의를 마감하였다.
다니엘서에 이 심판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기록된바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 2:32-35) 하였다.
사람은 금과 같은 그 머리의 지식과 은과 같은 마음의 욕심과 팔의 움켜쥠과 놋과 같은 생존의 본능과 철과 같은 발의 정복욕으로 첫 사람의 욕망의 역사, 곧 세상 임금의 역사를 써 왔으며 또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철저히 심판된 것이다. 다니엘에게 보여준 우상의 멸망은 역사적으로는 바벨론이며, 메대 파사며, 헬라며, 로마지만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되어진 옛 사람의 형상, 곧 인간의 지식과 욕심과 움켜쥠과 본능과 피 흘림의 속성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심판을 느부갓네살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육신의 모든 역사(歷史)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권세이건, 종교이건, 사회정의건, 철학이건, 그 무엇이건 상관없이 여름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되어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이 심판은 돌비(石碑)나 두루마리나 그 어떤 것에나 쓰인 역사, 곧 과거․현재․미래를 막론하고 첫 사람(세상 임금)의 역사는 그 무엇이 되었든지 헛것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오직 심비(心碑)에 쓰이는 생명의 기록만이 둘째 사람의 참된 역사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중 시대란 세상에 속한 우리의 첫 사람의 육(肉)의 속성이 심판 받아 마감되고 둘째 사람의 영(靈)의 속성이 심비에 새겨지는 영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은혜의 때로서 이천 년 전의 사람에게나 이천 년 후의 우리에게나 또는 지금부터 이천 년 후의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오늘날’이라고 하는 ‘그 때’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의 때이다.
믿는 자 모두에게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초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즉 영원부터 있는 말씀이 크로노스의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인생에게 생명으로 다가와 있는 때이다. 과거에도 그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있었고, 지금도 그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그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수평의 크로노스에서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지만, 수직의 카이로스에서는 동일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을 함께 하는 초월의 때를 공유하고 있다. 세상의 전쟁은 그 무엇이 되었든 겉 사람이 속사람을 종으로 움켜쥐고 있는 그들의 전쟁이다. 이 육신의 전쟁에서 천하를 다 얻었다 해도 그는 패배자다. 어리석게도 종교의 삶을 생명으로 알고 사는 이들은 나중 시대에서 인생이 싸워야 하는 그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심판된 그 천하를 얻고자 하는 욕심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육신의 첫 사람이 영의 둘째 사람을 섬기게 하려 함이다. 내 안에서 나의 첫 시대가 마감되고 나중 시대가 열리에 하려 함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 밖에서 찾는 것이 종말론이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었건, 애굽의 역사가 되었건, 바벨론의 역사가 되었건, 어느 개인의 역사가 되었건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리켜 보이고자 함인 것이다.
종말론 자들이 고민하고 있는 ‘이미’(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왔다는 말씀)와 ‘아직 아니’(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올 것이라는 말씀)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의 처음과 나중일 뿐이다. 처음이 있는 자에게는 나중도 있을 것이며 처음이 없는 자에게는 나중도 없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기록된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였다. 우리는 진정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고 있으니 종말론에 휘둘릴 아무 이유가 없다. 종말이 왔느냐, 오지 않았느냐, 언제 올 것이냐 하는 따위의 수군거림도, 종말에 우리만 살아남으리라는 광신도 모두 헛된 것이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나중의 부활의 삶을 사는 인자(人子)이어야 한다. 지금은 우리 안에서 신(神) 됨의 복음이 충만히, 온전히, 영원히 이루어져가는 때이다. 우리 안에서도 ‘다 이루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려져야 한다. 수확기가 이르면 농부는 알곡과 쭉정이와 가라지를 갈라내실 것이다. 알곡으로 갈라냄을 받으려면 알곡이 되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갈라냄을 연구하고 소리칠지라도 오늘 여기서 자신이 알곡이 되어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 아닌가?
성경은 이 갈라냄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1-12)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만이 우리로 알곡이 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나중 시대의 부활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온전하게 하시는 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돌비에 새기던 옛 시대에서 심비에 새기는 신기원이 되셨다. 이를 일컬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 하였다. 기록되었으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2-33) 하였다.
예수의 심비에 새겨졌던 그 말씀이 나의 심비에 새겨졌으면 처음이 지나가고 나중이 왔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나중의 신기원이 되어 계시며 우리를 그의 안으로 인도하신지 크로노스의 날 수로는 이천 년이 지나가고 있으나 이러한 수평의 시간과는 상관없이 믿는 자는 언제 어디서나 그의 임재 안에서 오늘의 카이로스를 산다.
그리스도께서 이천 년 전에 나중 시대를 열어 놓으셨을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그 나중 시대에서 육신으로만 번창하고 있다. 그런즉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기까지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인 것이다. 여기에..성령의 인도하심과...역사하심이 있다 !
그리스도의 임재가 없는 수평적 시간의 삶은 육신은 살았으나 그 영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것이니 그것이 혼돈이며, 공허이며, 흑암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적인 수직의 시간만이 우리가 살아 있는 알곡이 시간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참 생명을 산다. 사람마다 크로노스의 처음 생존이 베풀어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카이로스의 나중의 생명을 살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기록된바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4:7) 하였다. 이 ‘오늘날’은 수직의 시간, 곧 카이로스이다. 자나간 이천 년이건, 다가올 이천 년이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날이 수직의 시간이요 오늘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이며 전능한 자이시다(계 1:4, 8, 17).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시기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오신다. 그는 처음과 나중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이미 영접한 자에게는 그 안에 임하여 계신 분이며 그를 영접할 자에게는 그 안에 장차 임하여 오실 분이며, 또한 전에도 그의 영접을 기다리시며 와 계셨던 분이시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우리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면서 때를 따라 새롭게 계시되시며 우리로 온전함에 이르게 하시는 이시다. 그는 처음부터 나중까지 항상 새롭게 임하여 오시면서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새롭게 오시는 그분과 함께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으며, 내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처음 사람의 삶을 마감하고 새 사람의 삶으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이는 우리가 성령의 책망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바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믿어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7-11) 하였다.
우리가 나중의 삶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첫째,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첫 사람의 ‘자기 믿음’으로 살면서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는 자 곧 ‘그들’이 되어 있음이다. 우리가 우리의 나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하나 된 ‘그리스도의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과 정과 욕심을 따라서 ‘자기 믿음’으로 사는 ‘그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첫 사람이 전혀 마감되지 않은 것이다. 첫 사람이 마감되고 둘째 사람이 사는 그 부활의 믿음 안에서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나신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그의 임재 속에서)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그의 임재 속에서)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참 나의 깊은 곳에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시니 나는 내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만나 뵈올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은 이것을 첫 번째로 책망하시어 나로 하여금 ‘나 안으로’ 들어가라 하신다. 이 ‘나’는 그리스도의 나요, 나 자신의 나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임재하신 인자(人子) 된 나다.
‘나’ 안으로 들어왔으면 인자 된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세상에 보이지 아니한다. 우리는 세상에 보이는 몸뚱이를 ‘참 나’인 줄 알고 서로 다투며 속이며 속고 있지만 그것은 참 나가 아닌 옛 사람, 곧 마감할 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하는 영적 존재태, 즉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력(義力)이 나와 함께 한다. 성령은 이것을 두 번째로 책망하시어 ‘나’ 안으로 들어왔으면 거기 계신 아버지와 함께 하며 생명을 버릴 권세와 다시 받을 권세를 가진 부활과 생명의 권세자로 살게 하신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그의 의력으로 살지만 나의 육신은 보이는 왼편 세상에 있기 때문에 나의 육신은 언제나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이 육신의 나는 그 육신의 소욕으로 말미암아 세상 임금의 역사(歷史)를 쓰게 된다. 이 세상 임금(첫 사람)은 기회가 되면 오른편의 나를 순식간에 종으로 삼아버린다. 처음 사람과 나중 사람의 전쟁은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치열하게 계속 된다. 그러므로 처음의 나를 나중의 나에게 복종시킴이 세상을 이김이다.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이것을 말함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알지 못하고 저 멀리 어디엔가 있는 사탄이 심판을 받았다는 교리에 빠져들면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할 구원의 심판은 도리어 밖으로 전이(轉移)되어 사람 죽이는 세상의 무력 전쟁이 되고 만다. 성경에 무슨 전쟁이 기록되었건 그것은 내 안의 영적 전쟁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무슨 전쟁을 치루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우리가 처음 시대에 살고 있는지 나중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기독교가 있어온 이래로 그 구성원들은 사람 죽이는 무력전쟁을 하나님 섬김인 줄 알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 왔으며 또 흘려야 할 것인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사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된 그 세상 임금들의 역사이다. 거기에는 잔혹한 피 흘림으로 넘쳐나고 있다. 이것을 책망하시어 너 자신의 육신의 세상을 이기라 하신다. 너 자신의 욕망을 이김이 세상 임금을 심판함이라 하신다.
종말론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된 그 세상 임금들이 자기가 심판되었음을 모르는 데서 일어나는 자기 멸망의 교리이다. 우리는 앞에서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고 나중이 있으며,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19세기에 등장한 종말론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진정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원죄론이다. 원죄론은 종말론의 처음이며 종말론은 원죄론의 나중이다. 종말론은 원죄론이 말하는 저주된 세상의 끝 날을 말하고 있다. 종말론은 매우 다양하며 사람마다 그 주장(수군거림)이 다르긴 하지만 종말론이란 말 자체가 성경의 계시를 거스르며 사람들을 두려움과 미혹과 광신의 길로 끌어가고 있다. 원죄론이 허구이듯이 종말론 또한 허구이다. 원죄론도 종말론도 종말을 고할 때가 왔으니 곧 이 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처음 임재 안에서 나중 임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이르며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에 이르며 임재로 말미암아 임재에 이른다. 그의 생명 안에서, 사랑 안에서, 거룩 안에서, 영 안에서, 모든 것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됨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대망의 임재요 하나님의 나라다.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바라고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은 열리게 된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서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1-7) 아멘. 이기는 자는 내 아들이 되리라 !
보라 ! 들으라 ! 때가 가까이 왔음이라 ! 우리가..죽기전에...잠깐은... 한번쯤...생각해보고...가자 ! 2000년이 넘고넘어....그리도...기다리는 사랑이...있는지를....! 창조주앞에...까불지말라 ! 너희가...영원히...죽을까하노라 ! 너희가...별을...따랴 ! 너희가...달을...만들것이냐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개나 소,돼지에게 성경책을 주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짐승들에게 먹을것을 주면 짐승들은 주인을 좋아라한다 ! 너희가....짐승이냐 ? 이제...너희와 약속된...용서의... 기다림의 시간이 다가왔음이라 !
창조주앞에.... 바짝...업드려... 두려움을...생각하고...참회하라 ! 그리고..지금도 기다리시는... 주님꼐...돌아오라 !
어찌하여 말벌의 침과 전갈의 독침은 두려워하면서 너의 영혼을 잡아 먹는 사탄은 두려워하지 않느냐 ! 너의 눈은 멀었으며 너의 귀는 어두워졌으며 너의 마음의 빛은 꺼져 사탄의 어둠에 갖혀있음이라 ! 인간의 썪어질...육체는... 인간의 삶의 ...목표도...목적도...전부...아니다 인간이 어찌하여... 개나...돼지나...닭이나..소처럼.... 저차원의 동물로 남아...사단과 악마의 자식으로..살려하는가! 숨어 살아있는....영원한...다음세상이 있음을...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빛의길로 가라 ! 죽은후에는...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사후에는 잠든 너의 영을 깨울수도 없으며 너의 영은 거듭날수도 없다 !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빛의길로 가라 ! 그길로 가는 법은...오직한길... 창조주 하나님이...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게 주신... 생명의 성경 말씀...뿐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너희가 영원히 죽을까 하노라 !
창조주... 하나님은 반드시 계신다 ! 어리석은 자들아....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혜어보라 ! 그...끝도없이...많은 별들을... 만드신이는 석가도...마호메트도...교황도...목사도...신부도 성황당 고목나무도...돌부처도...돌아가신...내부모도... 하느님도..하늘님도 아니며...하날님도 아니라 ! 모두 ..아니다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창조주는..오직...한분! 하나님 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그들도...모두..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며, 죄인이다 ! 못 알아 듣는자는....짐승이다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신은
오직 한분...창조주...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의 무한하신 참사랑으로 돌아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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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