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판’은 음반 판권 소유자와 라이선스(사용권) 계약 없이 불법으로 제작해 유통시킨 해적 음반을 지칭한다. 원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국외 음악 중에서 국내 음반사와 계약해 들어오는 라이선스 음반이 한정되어 있었기에 음반 수입이 전혀 없었던 1960년대엔 지상파 라디오에서도 빽판을 이용했다.
동네 음반가게들은 대부분 신보로 나온 최신 팝송 빽판들을 팔았다. 한 음반 가게 주인이 “청계천에 가면 금지곡까지 수록된 빽판을 살 수 있다”는 솔깃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때부터 주말이 되면 버스를 타고 청계천으로 향했다. 빽판은 유통과 제작의 중심지였던 청계천 세운상가를 상징하는 여러 키워드 중 핵심이었다.
1970년대 당시 청계천 4가에는 빽판을 판매하는 도매상과 소매상들이 밀집해 있었다. 가격이 저렴한 만큼 빽판의 음질과 상태는 라이선스에 비해 열악했다. 70~80년대에 제작된 빽판의 재킷은 조악한 종이로 인쇄해 쉽게 훼손되어 너덜너덜거렸다. 물자가 넉넉지 못했던 당시에 귀했던 청색, 녹색 테이프로 테두리를 테이핑한 빽판은 자랑거리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빽판들.
엘비스가 출연한 영화 OST, 1973년 하와이 공연 실황 등 다양한 음반들이 빽판으로 제작, 유통되었다.
원판을 카피한 유성기음반(SP)과 더불어 국내에서 LP 제작이 시작된 1958년부터 빽판의 시대가 열렸다. 음반은 고급 기호품이었기에 이 시기의 빽판 커버는 양질의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다.
국내 개봉한 외국영화 주제가나 엘비스 프레슬리, 폴 앵카 등 해외 인기 팝가수들의 노래가 유성기와 LP빽판을 통해 소개되면서 국내에도 팝송 애호층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빽판은 방송의 음악 프로그램과 음악감상실, 다방에서 각광받으며 규모를 키워 나갔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는 한국에서도 독보적이었다. 그는 가장 많은 빽판이 제작된 해외 솔로가수로 확인되었다. 그의 빽판은 출연했던 영화의 OST와 정규앨범, 재킷 모델로 등장하거나 히트곡들이 수록된 편집음반까지 광범위하다.
이는 다재다능했던 활동영역과 작품성, 대중성을 모두 성취한 아티스트임을 증명한다. 특히 1956년 빌보드 싱글 차트 5주 1위곡인 ‘Love Me Tender’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에 선정된 엘비스의 노래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1961년 차트 2위곡인 영화 <블루하와이>의 주제가 ‘Can't Help Faling InLove’도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에 뽑혔다.
국내가수들에게 엘비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1956년 차트 1위곡 ‘Hound Dog’은 정원의 ‘사냥개’, 아리랑 브라더스의 ‘웃으며 사세요’로 번안했다.
Elvis Presley 모음곡
폴 앵카의 빽판들
폴 앵카는 1957년 데뷔곡 ‘Diana’부터 ‘Put Your Head On My Shoulder’ 등 애절한 곡들로 사랑을 받았다. 그의 히트곡들은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무수한 빽판으로 제작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에 뽑힌 빌보드 싱글 차트 1위곡 ‘Diana’는 임용재가 ‘복실이’로 번안했고, 혼성 듀엣 물레방아 출신 이춘근도 커버했다.
‘Crazy Love’는 혼성듀엣 블루진의 ‘서글픈 사랑’과 개그맨 김국진이 출연했던 핸드폰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Paul Anka 모음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