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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박사.안과의사.
(1906.12.30~1995. 3.7)
본관은 김포(金浦). 평안북도 벽동 출신.
1926년 평양의학강습소를 수료하고 같은 해 조선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36년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8년 대한민국 최초로 개인 안과 전문의원인 공안과의원을 개원하였다.
세벌식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고(故) 공병우 한글문화원 원장 등
4명을 과학기술유공자로 신규 지정한다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5일 밝혔다.
과학기술유공자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과학기술인을 지정하고
예우·지원하는 제도로, 과학기술인이 존중받는 사회문화를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공 원장은 '초성·중성·종성'이라는
한글 창제 원리에 맞는 세벌식 한글타자기를 개발한 발명가다.
그는 한글타자기와 한글 문서편집기를 개발하고 한글문화원을 설립해
한글의 기계화에 앞장섰다.
또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전문의로, 최초의 국산 콘택트렌즈를 개발했으며
맹인용 점자타자기와 맹인용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했다.
세벌식 타자기를 사용하는 공병우 선생
공병우 선생이 자신이 개발한 세벌식 타자기를 이용해 타자를 하고 있다.2015.10.7 << 공영태 공안과 원장 제공 >>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로서 안과 전문 병원을 개원한 의사.
그러나 한글 자판 연구가이자 전 한글문화원장으로서 한글 기계화,
한글 전산화에 앞장선 인물로도 유명하다.
안과의사이면서 언어 관련 활동으로도 유명하다는 점은
인공어 에스페란토를 만든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와 유사한 점이다.
오른쪽에 초성·가운데에 중성·왼쪽에 종성을 배치하여
입력하는 체계인 '세벌식 자판'*을 1949년부터 개발하고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6.25 전쟁 때 이미 한글을 타자기로 빠르게 입력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연구에 힘입어 한때 세벌식 점유율은 월등하게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세벌식 타자기 특유의 빨랫줄 글꼴(아래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 문단 참고)이 '이' 자를 '일' 자로 위조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에 따라 정부는 세벌식 타자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세벌식보다 타속이 느린 네벌식 타자기를 표준으로 지정했다.
또한 1983년, 빨랫줄 글꼴의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공 정부는 네벌식을 마개조한 두벌식을 표준으로 지정하고
세벌식의 사용을 계속 제한했다.
이러한 탄압들에 대응하여 공병우는 정부에 반발하다가
2.2. 한글 전용화
대한민국은 1948년 한글 전용화 정책을 편 북한에 비해
한자 사용률이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공병우 타자기의 편리함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글씨를 쓰는 대신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는 순한글은 입력할 수 있지만
당시에 많이 쓰이던 한자는 입력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한자의 사용을 포기하고 순한글을 사용했다.
1990년대 이후 컴퓨터의 발달로 한자를 타자로 입력할 수 있게 되었지만,
1950년대 당시만큼 한자를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은 공병우 타자기의 영향도 일부 존재한다.
2.3.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
빨랫줄 글꼴은 공병우가 타자기를 빠른 속도로 치기 알맞게 글꼴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이 글꼴의 특징은 초성, 중성이 빨랫줄처럼 되어 종성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네모꼴을 벗어난 것으로,
정부에서 세벌식 타자기를 기피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글씨를 칠 때 글씨의 모양이 중간중간에 바뀌는 것이 없다보니
익숙해지면 편리한데다가,
2000년대 들어서 그 디자인을 어느 정도 인정받아 비슷한 글꼴들이 개발되기도 했다.
공병우는 한국어 입력기가 없는 컴퓨터에서도 한글을 입력할 수 있게
이 글꼴을 사용하여 새로운 로마자 대응 글꼴을 만들었는데,
이를 직결식 글꼴이라고 부른다.
이 글꼴을 그대로 영자 워드프로세서에 대입시킨 공병우 박사는 프로그램의 변경 없이 한글 문서를 만들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를 선보였다.
2.4. 세벌식 컴퓨터 자판 개발
컴퓨터의 등장 이후 컴퓨터 용으로 자판을 개발할 필요가 생기자,
공병우는 여든이 넘은 몸으로 세벌식 공병우 최종 자판을 개발하였다.
이 자판은 공병우가 직접 개발한 마지막 자판이기 때문에 '세벌식 (공병우) 최종'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렇다고 '최종 자판'이 세벌식의 마지막 자판인 것은 아니다.
1995년 공병우 박사 사후, 공병우 박사의 뒤를 이은 자판 개발자들이 계속해서
세벌식 자판 개선에 힘써왔고, 이는 2021년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공병우 세벌식(공세벌식)은 두벌식보다 손가락 연타 수가 적어서 피로도가 적다는 특징이 있고, 개량 자판에 따라 한 글자를 한 타에 칠 수도 있다.
신광조 세벌식(신세벌식)도 공병우 세벌식에서 비롯되었을 만큼
공병우 박사는 세벌식 자판 계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벌식 타자기 개발과 한글 연구로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
개요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안과의사, 그것도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로 안과 병원을 개원하였다.
공병우가 개원한 공안과는 광화문(서린동)에 아직도 그대로 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하드렌즈를 만든 한국 콘택트렌즈 연구소에서
하드렌즈 연구의 주축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하기도 했고,
그 전까지 일본 가나로 만들어져 있던 시력 검사표를 한글로 제작하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안과계의 "선구자"이자,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서 한때 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를 쌓기도 했다고 하나, 정작 본인은 돈 버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4. 기타
공병우의 좌우명은 '시간은 생명이다.'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빠른 자판 개발에 힘써 온 것이다.
이를 통해 세벌식 자판은 두벌식 자판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한글 타자기 개발에 대한 공로로 특허청은 1999년도에 공병우가 대한민국 7대 발명가 중 하나라고 발표했다.
공병우의 생각을 잘 나타낸 저서로는 자서전인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요구받자 자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는 일화가 있고,
시간 절약을 위해 1950년대 당시에 집 구조를
미국식으로 바꾸어서 이웃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에는 화장실이 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공병우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화장실을 집 안에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화변기가 조금씩 들어왔고, 당시의 글이나 신문을 보면 1920년대에는 웬만큼 사는 집안에선 이미 화변기를 꽤나 설치해 놨었다.
이런 점을 종합해봤을때 공병우 박사가 사는 집 정도면 푸세식은 좀 터무니없고,
최소 화변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1980년대 민청련 초기자금이 없어서 허덕이던 시절 문제 소지가 될까 현찰을 대주지는
못하고 공병우 타자기를 수십 개 기증하는 것으로 자금마련에 도움을 주었다.
1995년 8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 뉴스가 나오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공병우 박사에 대한 조의글로 넘쳐났는데,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한 사람에 대한 조의글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었다.
한 기자는 이를 네티즌들의 사회장이 열리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타계 당시 유언으로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라는 유언을 남겨서
카데바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되었다.
생전에 소설가 황석영과 안면이 있었다.
장길산 연재 당시 황석영이 술집에서 지인들과 술 마시다가 본인의 주특기인
약장수의 재담을 늘어놓고 있는데 마침 그 옆자리에서 공병우도 지인들과 함께 있었다. 한참 재담을 재미있게 듣고 나서 공병우는 황석영을 불러 "자네는 무슨 일을 하나? 그리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 그 와중에도 장난기가 그치지 않던 황석영은 자신의 직업이 약장수이고, 이름이 황석영이라고 밝혔다.
공병우는 "자네 같은 건달이 약이나 팔 일이지, 어찌 황석영 같은 작가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가?"라고 호통을 쳤다. 잘못하면 오히려 자신을 욕되게 할 것 같아서 황석영은 그냥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부친이 신의주시에서 상점을 운영했는데,
그 곳에서 일한 사람들 중 한 명이 손기정이다.
공병우는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서 피고인의 눈이 고문에 의해 손상됐는지를 감정했으며 백인제는 피고인의 요통과 팔다리 상처가 고문에 의한 것인지를 감정했다. 피고인 신체의 이상이 고문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진단했다.
원래 고문 흔적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고문 기술이며,
정판사 사건에서 자행된 건 물고문이라 상처를 남기는 고문이 아니며,
고문이 가해진지 5개월이나 지났다는 점에서 고문 흔적은 진짜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PTSD나 고문 후유증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당대로서는 이것이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백인제나 공병우의 검진과 그 결과는 어쨌든 시대적 한계이지만 문제는 이들에 대한 각종 평전이나 자서전 등이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와 노동자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서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피고인은 20년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며 2020년재 현재도 각종 독립운동사 개론서에 등장하는 중요한 독립운동가이다.
각종 평전이나 자서전은 아예 사건 관련 순수 사실관계도 틀려서 검진을 받은 적도 없는 피고인을 검사했다고 쓴다.
가장 유명한 피고인 둘은 검진받지 않았는데 가장 유명한 피고인이 검진받았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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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공병우(公炳禹) 박사의
삶은 '최초'라는 수식어로 가득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의사!
최초의 안과 병원 개원!
최초의 쌍꺼풀 수술!
최초로 콘택트렌즈 도입!
이같이 화려한 경력으로 한때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를 쌓기도 했다.
하지만 공병우 박사는 애초에 돈 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자신의 지식을 세상에
어떻게 사용할까였다.
그런 그의 삶에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눈병 치료를 받으러 왔던 한글학자 이극로(李克魯)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과학적이고 우수한 우리의 한글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관심을 쏟게 된 것이다.
이후 공병우 박사는 한글 타자기 개발을 시작한다.
병원도 그만두고 얼마나 온 정신을 기울였던지 사람들은
'공병우 박사가 미쳤다'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한 열정 덕에 공병우 박사의 한글 타자기는 미국 특허를 받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병우 박사의 도전은 멈춤이 없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한글 타자기도 개발해 내었다.
누구보다 한글을 아꼈던 공병우 박사는 그의 나이 82세가 되던 해에도
그 열정을 잃지 않고 한글문화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곳에서 좀 더 편리하게 한글 자판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연구하였으며
실력 있는 젊은 인재들과 정보를 나누며 프로그램 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열정을 쏟은 결과 지금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문서 입력 프로그램인 '아래아 한글'을 만들어 내게 된다.
한글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지만, 의사로서도 본분을 잊지 않았던 그는
미국에 갔을 때 보았던 구급차를 수입해 전국을 돌며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주었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학교도 세웠다.
그렇게 한없이 베풀고 사회에 환원하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한평생
자신에게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 공병우 박사의 성품은 그의 유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마라. 장례식도 치르지 마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시신은 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하라.
유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위해서 써라."
그의 유언대로 공병우 박사의 각막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었고,
시신은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되었다.
또한, 그의 죽음은 이틀 후에서야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1995년 8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 뉴스가 나오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공병우 박사에 대한 조의글로 넘쳐났는데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한 사람에 대한 조의글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었다.
한 신문기자는 이를 "네티즌들의 사회장이 열리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빈소도 없고, 장례식도 없고, 묘지도 없었다.
살면서 그리고 죽는 순간에도 또 죽어서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되길 바랐던 공병우 박사님!
세상 모두가 그 같은 삶을 살 순 없다.
그러나 지식이 될 수도 있고, 능력이 될 수도 있고, 웃음이 될 수도 있고,
경제력이 될 수도 있고, 나눌 수 있다면 나누세요
인생을 충분히 잘 살다 간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명언
- 공병우 박사 -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겐 남을 돕는 일 중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큰 일이
한글의 과학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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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초반에 서울역에 도착하는 윤계상이 바로 베를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극로이다.
이극로는 눈병으로 고생하다 조선어학회 건물 옆에 조선 최초로 생긴 안과 전문 병원 공안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이때 이극로의 한글 열정에 감동받은 의사 공병우는 한글기계화에 인생을 걸게 된다.
공병우는 이극로의 조언으로 한글타자기를 완성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6.25 전쟁이다.
이극로와 초기 한글 연구를 주도한 주시경의 수제자 김두봉은 월북한 상태.
김두봉은 휴전 협정 당시 북한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
공병우타자기로 작성된 문서에 김일성이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공병우의 타자기를 도입한 손원일 제독의 아버지는 손정도 목사이다.
독실한 크리스토교인이었던 김일성의 부모와 둘도 없는 친구였던 손 목사는
부모를 잃고 방황하던 어린 김일성을 거두어 키우게 된다.
여기서 김일성은 3살 위 손원일을 만나고,
같은 또래인 손원일의 동생 손원태, 손인실과 친하게 지냈다.
손원일의 아들 손명원이 쌍용 사장이다.
한편 공병일이 이찬진을 후원하여 아래아한글이 나온다.
공병우타자기
민태기
70년 전 오늘(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비극적인 전쟁은 휴전에 들어갔다.
사진에 보듯 한글판 정전협정문은 당시로는 드물게 타자기로 인쇄되었다.
이 한글 타자기는 공병우 타자기로, 여기에도 좌우대립의 아픈 역사가 있다.
1921년 레닌의 지원금을 둘러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분으로 독립군이 전멸한다(자유시 참변).
이 사태에 항의하러 이동휘는 언어천재 이극로를 데리고 레닌을 만난다.
레닌은 진상규명을 추진하지만
1922년 김구는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암살한다.
식민지 상태에서 이미 '대한민국'의 이념대립이 시작되었다.
이극로는 돌아오는 길에 베를린대학에 남아 경제학 박사를 받는다.
언어학을 부전공했던 그는 스스로 베를린대학에 조선어학과를 창설하여 강의하고,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만든다.
가로쓰기 등 현대 한국어의 거의 모든 틀을 마련한 그는 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중 해방을 맞이한다.
이극로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말모이(2019).’
영화 초반에 서울역에 도착하는 윤계상이
바로 베를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극로이다.
이극로는 눈병으로 고생하다
조선어학회 건물 옆에 조선 최초로 생긴 안과 전문 병원 공안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이때 이극로의 한글 열정에 감동받은 의사 공병우는 한글기계화에 인생을 걷게 되었다.
공병우는 이극로의 조언으로 한글타자기를 완성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6.25 전쟁이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해군제독 손원일 장군은
문서 작성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공병우를 불러 타자기를 한국군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한글 가로쓰기가 일반화되고,
공문서의 국한문 혼용은 한글 전용으로 급속히 바뀐다.
1953년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UN, 북한, 중국이었기에
협정문은 영문, 한국문, 중국문 세 가지 언어로 작성했다.
그런데 북한은 당시 한글 타자기가 없었다.
때문에 UN군은 한국군의 공병우 타자기로
북한을 위해 한국어 정전협정문을 인쇄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공병우를 한글 타자기로 이끌었던 이극로,
그리고 초기 한글 연구를 주도한 주시경의 수제자 김두봉 두 사람은 이미 월북한 상태.
1953년 휴전 협정 당시 북한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이었던 한글 학자 김두봉은
공병우가 만든 한글타자기로 작성된 이 문서에
김일성이 서명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휴전 협정문에 서명하는 김일성과 지켜보는 김두봉.옆에는 박정애
한편, 공병우의 타자기를 도입한 손원일 제독의 아버지는 손정도 목사이다.
독실한 크리스토교인이었던 김일성의 부모와 둘도 없는 친구였던
손 목사는 부모를 잃고 방황하던 어린 김일성을 거두어 키우게 된다.
여기서 김일성은 3살 위 손원일을 만나고,
같은 또래인 손원일의 동생 손원태, 손인실과 친하게 지냈다.
이화 메이퀸이었던 손인실은 1930년대에는 빙상 선수로 유명했다.
70년대 적십자 회담에서 남한대표단에게 김일성은 손인실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 후에도 두 사람의 소식을 찾다가 마침내
1991년 미국에서 의사로 있던 손원태와 연락이 되자,
평양으로 초청했고, 그 후 둘은 매년 평양에서 만났다.
1953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열린 타자 경연 대회 모습이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한다.
김정일은 상 중임에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8월 손원태의 80회 생일잔치를 평양에서 열었고,
그해 손원일의 아들 손명원 쌍용 사장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0년 사망한 손원일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1999년 사망한 손인실은 뉴욕에,
2004년 사망한 손원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손정도 목사의 세 남매는 모두 다른 나라에 묻혔다.
참고로, 평생 한글기계화에 앞장 섰던 안과 의사 공병우는 말년에 서울대 기계과 학생이던 이찬진을 지원하여 '아래아한글'이 탄생하게 된다.
댓글
-어렸을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다던 병원에서 눈수술을 받았었는데 그곳이 공안과였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정말 재미있고도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한글판 정전 협정문을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했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항상 이런 좋은 이야기 많이 남겨 주시고 또 그만큼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김일성이 손원태와 친하게 지냈고 또 한 명이 있는데 최덕신입니다.
최덕신은 천도교 교령과 박정희 대통령 때 외무부 장관을 했고 서독 대사까지 했지 ,
나중에 박정희와 틀어지며 북으로 넘어 갔지요.
대한민국 현대사는 단순하게 흑과 백으로 나누기엔 너무도 복잡 합니다.
-저도 지금 공병우 박사님의 세벌식 자판을 씁니다. 근대사가 참 흥미진진 합니다.
-손원일 제독이 김일성하고 인연이 있었다니 놀랍네요. 공병우 박사가 이찬진을 지원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알았는데 이찬진씨 여동생이 제 고교 동기더라구요 ㅎㅎ
-자판 표준화를 둘러싼 논쟁끝에 세벌식 자판이 밀려나면서 공병우 타자기가 (매우 부당하게) 퇴장당한 사연도......도무지 이애할 수 없는 흑역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