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643~1715)로서 ‘대왕’ 또는 ‘태양왕’이라고 불렀으며, 부르봉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대표한다.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생제르맹앙레에서 태어났다. 5세 때인 1643년 5월 14일 즉위하였으므로,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고, J.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보필을 받았다. 이때는 30년전쟁과 관련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하였으므로 국민들은 점차 반항의 기미를 보였고, 파리고등법원은 국민의 입장을 대표하여 왕권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일어났다. 여기에 대귀족과 불평분자의 책모가 작용,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왕은 파리를 떠나 모후와 함께 각지로 유랑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 난은 오랫동안 왕에게 불쾌한 기억으로 남게 되고, 파리가 싫어져 나중에는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겼다(1682).
프롱드의 난이 진압된 뒤에도 재상 마자랭이 정치를 독단하다가 1661년 3월 9일에 죽자, 왕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왕은 재상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직접 고문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대신들에게 명하여 자기의 결정사항을 집행하게 하였다. 정부의 임시적인 특사의 성격을 띤 앵탕당(지사)의 직무를 확대하여 각지에 상주시킴으로써 명령에 따라 손발처럼 움직이는 관료의 조직망을 전국에 폈다. 또 파리고등법원의 칙령심사권을 박탈하여 법원을 단순한 최고재판소로 격하시켰다. 그리하여 왕은 흡사 ‘살아 있는 법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스스로 “짐은 곧 국가이다”라고 할 만큼 절대주의시대의 대표적 전제군주가 되었다. 왕은 마자랭 재상 때의 재무총감을 독직과 관련하여 단죄하고 J.B.콜베르를 재무총감으로 기용한 것이 그의 치정을 빛나게 하였는데, 콜베르는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보호관세에 의한 무역의 균형을 꾀하는 외에 산업을 육성하고 식민지의 개발을 추진하였다.
콜베르 외에도 많은 명장과 현신이 배출되었는데, 왕은 이들의 재능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유럽의 열강을 상대로 플랑드르전쟁(1667∼1668) ·네덜란드전쟁 ·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팔츠계승전쟁) ·에스파냐계승전쟁을 강행하였다. 왕은 이 전쟁으로 유럽의 지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파리 교외에 지은 베르사유궁전은 유럽 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며, 왕의 치세 중에 P.코르네유, J.B.라신, 몰리에르 등의 거장이 나와 고전주의 문학을 꽃피웠고, 이때 프랑스어가 우아하게 세련되었다. 중앙집권체체를 완성한 후 자신을 지상에서의 신의 대행자라 하여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였고,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종교’를 표방, 1685년에는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으며, 장세니스트를 탄압하였다.
즉, 루이는 프로테스탄트 세계 전체를 자신의 적으로 여겼다. 어머니가 그에게 편협하고도 지나치게 단순한 종교관을 심어 준 탓에 그는 종교개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이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그들을 무력으로 개종시키려 애쓴 다음 프로테스탄트에게 예배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낭트 칙령을 1685년에 철회했다. 칙령이 철회되고 무자비한 박해가 뒤따르자 수많은 수공업자들이 프랑스를 등지고 떠나야 했으며 역경이 끝없이 닥쳐왔다. 이리하여 루이 14세 치세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상공업에 종사하던 신교도들이 국외로 이주함으로써 프랑스 산업은 타격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대외 전쟁과 화려한 궁정생활로 프랑스 재정의 결핍을 초래하고 절대왕정의 모순이 증대하였다.
그리고 그의 만년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피해로 프랑스는 그전에 얻었던 모든 이득을 대부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1709). 게다가 루이는 개인적인 슬픈 일들을 잇따라 당했다. 그는 아들인 왕세자, 손자인 부르고뉴 공과 베리 공, 증손자인 브르타뉴 공, 부르고뉴 공작부인을 잃었다. 궁정 안에서는 아첨이 넘쳐흐르고 밖에서는 악담이 빗발쳐 왕의 모습은 불운이 닥쳐오면 무너져버릴 우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승승장구하는 나라의 화신이던 루이는 그 자신의 아픔과 자기 백성의 아픔을 끊임없는 결단으로 견뎌냄으로써 평소의 자기가 해내는 것 이상으로 성과를 이루어냈다.
런던에서는 궁정혁명이 일어나 화평을 주장하는 토리당이 권력을 잡았고, 게다가 프랑스가 드냉 전투에서 신성 로마 황제의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전쟁이 끝을 맺게 되었다. 1713~14년에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와 바덴 조약으로,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내놓긴 했지만 영토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 프랑스는 플랑드르와 라인 지방에서 최근에 정복했던 영토를 그대로 지니게 되었는데 프랑스는 뒷날 어떠한 패배나 혁명으로도 그 지역을 잃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171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대중의 비웃음을 받는 가운데 생드니 바실리카에 묻혔다. 부르고뉴 공의 막내 아들이 그의 뒤를 이었으나 5세의 어린아이였으며 몹시 병약했다. 조카인 오를레앙 공을 못미더워한 루이는 실권을 몽테스팡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멘 공에게 넘겨주고 싶어했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그 유언장은 결과적으로 왕정이 몰락하도록 재촉한 셈이었다. 즉 그가 죽고 난 뒤 유언장을 무효화하기 위해 소집된 파리 고등법원은 권력을 되찾아 모든 개혁을 저지하는 데 이용했고,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대혁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 출처: <두산대백과사전> 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참고
* 루이 14세의 모습
* 두번째 공식애인 마담 드 몽테스팡- 발리에르부인의 친구이자 시녀였지만 타고난 화려한 미모와 술수로 발리에르의 자리를 가로챈 여인
*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 -> 청순함, 지고지순함.
루이14세 초기 메트레 상티트르(공식정부)였던 여인. 자기의 본분을 지킨왕의정부
* 절대주의 지배자들의 관한 만화
* 아버지 루이 13세(좌)와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안
* 어린시절의 루이14세.
* 춤추는 루이 14세.
* 루이 14세의 궁정을 묘사한 그림
*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루이 14세
* 베르사이유
* 마담 드 몽테스팡을 도와 흑미사와 이물질을 만들어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라 부아쟁.
몽테스팡 이전에도 여러 귀족들의 유산상속, 애정문제와 얽혀 있던 그녀는 결국 1671년 체포되어 화형당한다.
* 디카프리오 출연의 영화 아이언 마스크.
루이 14세와 철가면 전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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