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미사펙 암장···중·상급 클라이머에게 적합
천국 같은 암장에서보낸 나날들 글 김동현 크림프 대표·사진 엄기현 사진가·협찬 에델바이스아웃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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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싱 링크(Missing link 8b+)를 등반하고 있는 채민우 군. 미싱 링크의 가장 큰 홀드를 잡고 있지만 오버행의 각도는 등반자를 쉴 수 없게 만든다. |
미사펙은 스포츠 클라이밍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우리에게 오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 천국이 아니겠냐마는…. 하지만 지중해의 맑은 태양을 한껏 누리기도 전에 이 여정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며칠간의 쾌청했던 날씨와는 달리 비가 한번 흩뿌리자 기온이 급강하했다.
어느덧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말엔 주차장이 각지에서 온 차들로 빼곡하다.
내린 비로 나무들은 생기가 있고 날씨마저 화창하지만 쌀쌀함에 손이 곱는다.
미사펙은 마치 채석장처럼 산 한쪽을 인위적으로 깎아놓은 듯한 말굽 형상이다.
가이드북에는 미사펙 암장을 왼쪽의 A1·A2·A3·A4, 중앙의 B1·B2·B3, 그리고 오른쪽의 C1·C2로 구분하고 있다.
왼쪽의 A1·A2에는 쉽고 짧은 루트들이 제법 있어서 초보자들은 물론 오전의 몸풀이로 좋을 법한 루트가 모여 있다.
근처에서 상당히 고전하고 있는 듯한 엄기현·문유진씨를 두고, 당초 계획대로 7c급 루트들이 많은 A3지역으로 이동한다.
루트를 살펴보니 입맛이 무척 당겼지만 전날 내린 비로 종유석 모양의 홀드가 젖어 등반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대신 그 왼쪽으로 중앙벽이 꺾여지는 부분에 매우 인상적인 루프가 있었다.
여기엔 2001년 손상원·김희조 등이 시도했던 토크 이즈 칩(Talk is Cheap·8c)과 차 스타로 콜로 인 마네가 사(Za Staro Kolo in Majhnega Psa·8c+) 루트가 있다.
충분히 살펴본 후 중앙의 B지역으로 이동한다.
중앙벽에는 여러 개의 크랙 루트가 있고 남향이라 정오 무렵엔 좀 더운 편이다.
키 큰 서양 클라이머 부러워
마리오네타(Marioneta·8b/b+)를 오르기로 했다.
미사펙의 첫날, 적응도 충분히 되지 않았을 텐데 민우의 들끓는 의욕 앞에 마리오네타는 너무도 순순히 무릎을 꿇는다.
이 루트를 오르려면 쉬운 고드름 형태인 출발 지점을 지나고 크럭스의 시작을 알리는 언더 홀드를 잡는 순간 마음의 준비를 확실히 해야 한다.
바로 이곳 3번째와 4번째 클립지점에서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곳을 넘어서려면 오른팔을 쭉 뻗어 상체를 최대한 편 다음 어설픈 홀드에 발을 살짝 올린 뒤 커다란 손 홀드를 향해 뛰면, 그때까지 버티던 왼손이 떨어지는 재미있는 동작이다.
난생 처음 해보는 동작이었다.
키 180cm이 넘는 서양 클라이머들이 쉽게 오르는 것을 보니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단의 고빗사위를 지났다고 해서 윗부분이 쉽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곳을 넘어서면 몇 개의 수평홀드를 지나 포켓구간이 나오는데 발과 손 홀드의 크기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데드포인트의 연속이다.
이 구간에서는 아래의 고빗사위보다 힘 있는 동작은 없지만 손가락의 연속적인 지구력과 정확성이 필요해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초반과 중단 부분에 있는 드릴로 구멍을 낸 포켓홀드가 찝찝하기는 하지만 하여간 재미있는 루트다.
야영장으로 내려온 후 트렁크에 있던 여러 재료를 섞어 특제(?)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생존을 위해 EU(유럽연합)의 깃발 아래 모이면서 그들의 바람대로 유로화는 달러보다 강세가 되었다.
식료품 같은 생필품의 가격이 유럽 전역으로 평준화되면서 가난한 우리 생활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우리나라 슈퍼마켓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1500원의 가스 1통이 8천원을 웃돈다.
처음에는 가스등을 켜고 책도 읽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생활이 달라졌다.
가스를 아끼기 위해 결국 뜸을 들이지 않고 밥을 한다거나 음식을 조금씩 덜 익혀 먹는 촌극까지 벌여야 했다.
연일 비가 내려 야영장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텐트가 비에 젖어 눅눅한 날이 많아질 즈음, 유진씨의 미인계(?)로 야영장 주인 할아버지로부터 캠핑카를 빌렸다.
텐트보다는 넓었지만 3명이 사용하기에는 불편할 것 같아 동료의 만류에도 홀로 텐트에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침낭 속에 들어가 텐트 안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좋아 그전보다 훨씬 낫다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겨울을 향하는 지중해에는 오후가 되면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은 밤마다 야영장 안의 텐트를 집어삼킬 듯 때리고 또 때렸다.
눈을 감아도 그대로 느껴지는 거센 바람이 텐트를 때릴 때마다 고스란히 내 침낭까지 전달됐다.
며칠을 시달리다 결국 나는 고집을 꺾고 침낭을 품에 안은 채 캠핑카 안으로 도망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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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미사펙 암장의 오후. |
크란 월드컵 참가 못한 채민우
비도 내리는 데다 며칠 새 많이 추워져 웬만하면 캠핑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동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보통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기쁘기 그지없는데 이번 등반 여행에서는 뭔가 숨통을 조여 오는 듯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전화를 걸기 위해서는 차로 약 15분 걸리는 코지나(Kozina) 마을까지 다녔는데 오습 마을 바로 위 도로에 있는 햄버거 가게에서 공중전화를 발견했다.
집으로 전화를 거니 민우 아버님에게서 민우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연락이 왔었단다.
내용은 다음주에 열리는 슬로베니아 크란 월드컵에 참가 신청이 되어 있지 않고 이틀 정도 남은 체코 프라하 월드컵에 등록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기운 빠지는 이야기였다.
막상 준비하고 있던 대회는 등록되어 있지 않고 엉뚱한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니…. 그 동안 집에 전화 한 통 하지 않은 민우의 무심함을 책망하며 야영장으로 돌아왔다.
등록 후 참가하지 않으면 패널티가 있기 때문에 민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프라하 월드컵에 출전해야 한다.
우리는 부랴부랴 코파까지 가서 지도, 가스, 식료품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시 암장에서 등반하고 있던 엄기현·문유진씨에게 이야기한 후 출발 준비를 했다.
우리가 갖고 있던 작은 지도로는 매우 가깝게 느껴지는 체코까지의 거리가 새로 산 지도로 보니 상당한 거리다.
이곳에서 수도 루블리아나까지 2시간 반, 국경 너머 오스트리아의 그라츠까지 7시간 정도, 목적지인 프라하까지는 14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대회 당일에나 겨우 도착 할 수 있겠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가봐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하기로 했다.
결국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부산히 돌아다니다 포기하고만 셈이었다.
언제나 작은 실패들을 딛고 일어나는 게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번과 같은 경우는 한참 동안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난도 루트가 밀집된 C지역
다음날, 가이드북을 들고 등반할 루트를 살피다 로데오(Rodeo·7a)를 보고 ‘아! 저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등반해보기로 한다.
루트는 석회암 특유의 커다란 종유석을 따라 오르면서 나타나는 공룡의 등뼈 같은 부분을 지나 좌측으로 넘어가야 한다.
6번째 볼트 위로 고빗사위를 지나 2개의 뾰족한 종유석 사이의 종료지점에 줄을 걸면서 마무리했다.
상당히 인상적인 루트지만 중간지점의 테라스가 조금은 맥 빠지게 한다.
문유진씨에게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한다며 추천 해주었는데, 비록 완등은 못했지만 보람차게 등반한 것 같다며 밝은 표정이다.
마리오네타의 왼쪽에 위치한 삼사라(Samsara·8a)는 민우가 시도하고 나서 그것을 보고 플래싱(한번에 오르기. 다른 사람이 오르는 것을 보는 등 사전정보가 허용된다는 점에서 온사이트와 다르다)할 뻔했던 루트이다.
애석하게도 크럭스를 지난 후 집중력 부족으로 마지막 클립 전에 추락했다.
볼트 간격이 조금 먼 편이라 공포감을 이겨내야 한다.
미사펙의 바위는 전체적으로 하단이 울퉁불퉁하고 경사가 심해 크럭스가 아랫부분에 있는 곳이 꽤 많은 듯하다.
비가 그친 틈을 노려 젖지 않은 오른편 C지역으로 향한다.
이곳은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고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이라 무더운 여름에는 알맞지만 늦가을과 이른 봄에는 권하고 싶지 않은 곳이다.
이곳도 선운산 투구바위의 오른편처럼 고난도 루트가 밀집되어 있다.
우리가 등반할 미싱 링크(Missing link 8b+)는 C지역의 오버행이 가장 심한 부분에 있다.
이 루트도 마리오네타처럼 초반의 어려운 몇 동작에서 힘을 아껴야 상단을 돌파 할 수 있다.
성패는 하단의 클립부분. 클립을 하지 않고 넘어가자니 바닥에 떨어질 것 같고, 하고 가려니 극단적인 바디 텐션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등반을 포기하는 외국 클라이머들도 보였다.
전반적으로 홀드구성은 좋은 편이지만, 토마스 무라잭(Tomas Mrajek) 등 이 곳을 등반했던 톱 클라이머들도 온 사이트 하지 못하고 두 번 만에 끝냈을 만큼 까다로운 곳이기도 하다.
종일 그늘지고 시간이 갈수록 바람이 거세지면서 우리가 등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모스크바에서는 기상이변으로 인한 폭풍을 동반한 한파가 몰아쳤다던데 그 영향 때문인지 매섭고 차가운 바람은 물론 눈까지 내린다.
내리는 눈을 비디오카메라에 담고 있으려니 마음 울컥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그 끝을 알 수 없는 길 위에 서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또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울기도 웃기도 한다.
가끔은 길을 걸으면서 옳은 길인지 의심을 해보지만 어떤 일이 있을지는 가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이번여행도 그랬다.
눈에 보이는 성과도, 기대만큼의 등반도 하지 못했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걸로 그만이다.
함께한 사람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서로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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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민우 군의 확보를 보는 김동현씨. 한낮의 햇살이 눈부셔 셔츠로 썬 캡을 만들어 쓰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
INFORMATION
슬로베니아 미사펙 암장
암장정보
1980년대 후반, 오습암장의 왕성한 등반활동에 이어 클라이머들은 그 여세를 몰아 500여 m 떨어져 있는 미사펙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버행 각도의 높은 난이도로 인해 클라이머들의 발길이 뜸했던 미사펙은 서서히 클라이머들의 발길이 잦아들면서 높은 난이도의 루트가 차츰 등반된다.
1988년 콜로바사(Klobasa·8a+), 1990년 미싱 링크(Missing link·8b+), 또 1992년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루트중 하나였던 차 스타로 콜로 인 마네가 사(Za Staro Kolo in Majhnega Psa·8c+)가 등반되었다.
국내에서는 2001년 손상원·김희조 등이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지역 클라이머들의 진보적인 등반 능력은 뛰어난 여성 클라이머들을 탄생시켰다.
1997년에는 마르티나 쿠파(Martina Cufar)가 당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치키타(Chiquita·8a)와 카티에 데리카(Kajtije deklica·8b+)를 등반했다.
또 슬로베니아의 대표적인 여성 스포츠클라이머인 나탈리아 그로스(Natalija Gros)가 길로티나(Giljotina·8a)를 온 사이트로 등반했으며, 몇 차례의 시도로 바이퍼 레이디(Viper lady·8b+)를 완등했다.
1998년은 외국인의 해였다.
스페인의 페드로 폰즈(Pedro pons)가 차 스타로 콜로 인 마네가 사(Za Staro Kolo in Majhnega Psa·8c+)를 등반했으며, 같은 해 일본의 유지히라야마는 3주 동안 미사펙의 거의 모든 8a~8b급 루트들을 온사이트 했다.
미사펙에는 현재 132개의 루트가 있다.
40개의 6a~7a+급 루트와 95개의 7b~8b+급 루트가 있어 중·상급 클라이머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또한 8c,8c+급 루트는 모두 7개, 9a급 루트가 2개가 있다.
여행정보
환전 및 전화
전화카드는 은행·주유소·전화국·우체국에서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이웃 마을 코지나에 있는 주유소에서 구입하는 편이 가장 편하다.
가까운 공중전화는 오습 마을에서 코지나로 가는 도로가에 위치한 작은 햄버거 가게에 있다.
슬로베니아에서도 유로화가 통용되지만 슬로베니아 돈인 돌라를 더 많이 사용한다.
환전을 위해서는 코지나의 은행이 가장 가깝다.
인공암벽
실내 인공암벽에서 트레이닝이 필요하다면 크란의 인공암벽을 이용하길 바란다.
야영장에도 인공암벽이 있지만 매우 좁고 불편하다.
크란은 야영장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어 먼 편이지만 시설 좋은 두 개의 인공암벽이 있어 클라이머들이 자주 찾는다.
크란 대학의 인공암벽은 실내에 설치되어있지만 높이 14m로 국제경기 규격을 갖추고 있으며, 실내수영장 건물 맨 윗층의 실내암장은 작지만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두 곳 모두 이용요금은 없지만 원칙적으로는 클럽 맴버들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현지 클라이머들의 협조를 받는 편이 좋다.
기타
야영장은 땅이 진흙이라 비가 잘 스며들지 않는다.
때문에 텐트를 친 후에는 반드시 배수로를 파놓아야 한다.
샤워장에서 전기를 이용 할 수 있으며 전압은 220V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