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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황진이의 표지로 사용된 신윤복의 '미인도' © | 황진이의 이름이 잘못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리고 어우동이 바람이 나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 논개와 얽힌 일화가 과장된 것이라는 진단도 내려졌다.
한규무 광주대 교수(한국사)는 가톨릭대 인간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인간연구’ 제9호에 ‘조선시대 여인상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名妓(황진이), 姦婦(어우동), 烈女(논개)를 통해 조선시대 여인들을 선악, 미추로 과도하게 구분하고 그 이미지를 추종하는 태도를 꼬집었다.
한 교수는 허균의 ‘성옹지소록’,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 11종의 문헌을 검토해 황진이의 이름이 ‘眞’, ‘眞伊’, ‘眞娘’ 세 가지로 기록돼 있음을 확인한다.
‘진낭’을 애칭으로 볼 때 그녀가 ‘진’ 혹은 ‘진이’로 불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진과 진이의 구별은 큰 의미가 없으니 ‘진이’로 보자는 한 교수는 이것이 본명이 아니라 妓名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현재 알려진 대로는 황진이의 기명은 ‘明月’이다. 하지만 한 교수는 명월은 황진이의 호이며, 기명이 아니라는 점을 문헌을 통해 입증한다. 그렇다면 姓인 ‘황’과 기명인 ‘진이’를 합쳐서 부르는 현재의 관행은 잘못됐다는 것.
어우동은 종과 바람이 나서 남편에게 쫓겨나 사형에 처해진 음행의 대명사다. 한 교수는 여기서도 ‘딴지’를 건다. 어우동이 바람이 났다는 건 좌승지 김계창이 부풀려진 소문을 임금에게 고해 그것이 성종실록에 씌어지는 바람에 사실과는 달리 알려졌다는 주장.
그렇다면 그녀는 왜 추방되었는가. 어우동의 친정어머니가 바람이 나서 남편에게 쫓겨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을 어우동이 종가댁에 시집을 간 종실이라는 점과 연결시켜보면 실마리가 풀린다.
즉, 어우동이 결혼을 할 때에는 친정어머니가 바람나기 전인지라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고 어우동의 아버지가 부인을 내쫓고, 어우동마저 “내 딸이 아니다”라고 선언을 하고 나서니, 종갓집 입장에서는 난처하게 된 것. 종택이 음행을 저지른 어미의 딸을 며느리로 둘 수 없다는 점은 당시의 분위기로 봐서는 추정 가능한 사실. 따라서 어우동은 ‘간통’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났으며, 이런저런 소문에 행실이 부풀려져서 사형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 한 교수의 주장이다.
논개 일화는 한자 ‘將’을 잘못 해석한 결과로 사실과 다르다고 한 교수는 계속 논의를 이어나간다. 즉, ‘倭將誘而引之’에서 ‘장’은 통솔자인 ‘將帥’가 아니라 ‘장차 ~하려 하니’로 해석해야 문맥이 맞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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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영정 © | 따라서 논개가 왜장과 살림을 차리자고 약속을 해 유혹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런 잘못된 해독을 기반으로 해서 윤색된 것이라는 사실. 촉석루 축하연에 논개가 참석했다는 것, 투신할 때 열손가락에 반지를 꼈다는 것, 논개가 신안주씨였으며 진주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의 소실이라는 내용 등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한 교수는 말한다. 이 모든 윤색의 과정은 뼈대 있는 가문의 뛰어난 자색이 양반의 소실이 되어 극적인 최후로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게 된다는 ‘열녀 이야기’의 한 전형을 형성한다는 것은 지적하기도 머쓱할 정도다.
그는 논문의 말미에서 “황진이는 풍류의 명기로, 어우동은 음행의 간부로 쉽게 평가한다. 이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명기는 명기대로 인간적으로 잘못된 모습이, 간부는 간부대로 인간적으로 억울한 모습이 자료에서 찾아지지만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라고 연구자들의 태도를 비판한다. 그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부친이 생존해있어 홀어머니라는 설정이 허구라는 점이 드러나는 ‘맹모삼천지교’도 한국인들은 그대로 따른다고 질타한다. “아무리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현대인들의 평가는 당대의 평가와 달라야 한다”는 것이 한 교수의 전언이다. 강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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