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가 두 살 때 일이다.
어린이날에 둘로스 선교회 후배 전도사와 함께 공원에 놀러갔는데 잠시 차에 가서 짐을 챙겨올 일이 생겼다. 그때 아내는 둘째를 임신 중이어서 후배 전도사에게 아이를 잠시 맡기고 차에 다녀왔다.
그런데 그사이 큰일이 생겼다.
아이를 맡은 전도사가 급한 일로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하는 사이에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사라진 아이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아이는 너무 작아 찾기 힘들었다. 다행히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자 차 있는 곳을 기억하고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수많은 사람의 숲에서 0.00001퍼센트도 안 되는 작은 조약돌 같은 아이를 찾기 위해 온 힘을 쏟았고, 그 순간 내게 나의 아들은 0.00001퍼센트가 아니라 100퍼센트의 존재였다. 내 전부였다. 내가 지나친 수많은 사람은 내게 의미가 없고 어떤 가치도 없었다. 그들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한 점에 불과한 나의 아들만이 내게 100퍼센트의 가치가 있었다.
사람들은 인간의 존재 가치를 물질적 기준에 따라 평가한다. 연봉 얼마에 어떤 차를 타고 어떤 동네 몇 평짜리 고급 아파트에 사느냐 등으로 차등을 두어 그에 따라 가치를 매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가치를 생각할 때마다 아들을 찾아 뛰어다녔던 그때 그 심정을 떠올린다. 마치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나를 대우하시고 인정하시는 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우리의 가치를 평가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어쩌다가 우주에 생겨난 0.00001퍼센트의 물질적 가치의 존재가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 땅에 보내진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기에 우리에게는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행하신 모든 것 완전하시니…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찬양 후렴에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가사가 반복된다. 그렇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다. 이 찬양의 고백처럼 나는 내 인생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겪을 때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을 묵상했다. 물론 간혹 힘들어 지쳤을 때, 주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실수가 없으시다는 고백에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가사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하나님이 실수가 없으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상황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 속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것, 이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우리 삶의 방향까지 하나님의 정확한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신학교 재학 시절 조직신학 교수님께서 기적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지금까지 기억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기적이란, 지금의 현대 과학으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미래의 과학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 익숙한 비행기가 500년 전 그 당시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기적이었으며, 홍해 사건 역시 지금은 과학으로 설명이 안 되어 기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이다. 그래서 천국을 이렇게 표현하는 분도 있다. “최고의 초월적인 역사와 최고의 과학이 만난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연이란 인과관계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일, 사람의 상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는 절대 우연이란 없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서 우연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천국에 가면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정확한 섭리 안에서 살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임을 기록한 사건들이 많다. 룻기 2장에는 룻의 이삭줍기 장면이 나온다. 3절에서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내가 밭에 나가 이삭이라도 주워 오려고 합니다”라고 청한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룻 2:3-4
룻이 밭에 나가 추수하는 일꾼들의 뒤를 따라 이삭을 줍는데, 공교롭게도 그 밭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남편의 친족으로 유력한 보아스의 밭이었다는 것이다. 4절에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왔다고 기록한다. 이 ‘마침’이라는 단어가 ‘웨 힌네’라는 히브리어로, “그런데 보라!”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사건의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낼 때나 하나님이 드러내고 싶은 내용에 사용하는 감탄사이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우연히 어느 밭에 갔는지 몰라도 그 밭은 보아스에게 속한 밭이었다. 그 보아스가 하나님의 계획에 맞춰 마침 그 장소에 등장한 것이다. 더구나 보아스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시어머니 나오미의 남편의 친족으로 기업 무를 자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만일 이때 보아스가 나타나지 않고 1년 동안 세계 여행을 떠났다면 어땠을까? 룻은 여전히 기막힌 고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즉 룻은 우연히 갔지만 하나님은 보아스를 때에 맞춰 보내신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우연히 그럭저럭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손에 있는 인생은 결코 그럴 수 없다. 우연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도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연히 했는데 그렇게 됐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물이 하늘에서 내려서 어떤 줄기를 타고 흐르든지 결국 바다로 모이듯이 우리 인생도 각자 다른 다양한 줄기를 따라 흐르는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한국에서 태어난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런 것은 인간이 스스로 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권과 섭리로 이루어 가신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끌어가시는 것이다.
인간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그 안목에 다 담을 수 없고 느낄 수 없지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흘러가고 있다.
– 소명, 하나님의 시간을 잇는 싸움, 김남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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